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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추억 | 在美 태권도인 이준구 - “1976년 알리 방한은 중앙정보부 요청으로 이뤄졌다”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당시 中情 요원이던 김영광 전 국회의원 제안에 무함마드 알리 즉석에서 ‘OK’…태권도 올림픽 종목 잔류하려면 외국 심판 육성하고 안전장치 단 주먹 사용도 허용해야

▎이준구 씨는 알리의 1976년 방한 당시 한국인들이 광적으로 환영했다고 기억한다.



1대 1 승부형 스포츠가 사라지고 있다. 레슬링·권투·펜싱·태권도 같은, 소위 ‘맞짱’ 경기 말이다. 올림픽이나 전국체전과 같은 종합체육대회를 통해 가끔씩 볼 수 있을 뿐이다. 피가 흐르거나 땀으로 얼룩진, 맨살이 맞부딪치는 맞짱은 비인기종목으로 추락한지 오래다. 숨가쁜 신음이나, 비명소리가 들리는 스포츠는 뭔가 한물간 스포츠처럼 느껴진다. 레슬링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 시대에 한참 뒤처진 퇴물 취급을 받게 될는지도 모른다. 대신 등장한 것이 1인 스포츠다.

골프나 피겨스케이트, 최근에는 리듬체조·승마 같은 운동으로 큰 경기장을 독차지한 단 한 명의 선수에 집중하면서 즐기는 스포츠다. 피가 튈 염려도 없고, 상대에게 무릎을 꿇어 중간에 끝날 가능성도 극히 희박하다. 신문은 아예 골프나 피겨스케이트 선수를 셀러브리티로 다루면서 고정란을 할애하고 있다.

스포츠 전문 케이블방송은 푸른 잔디밭이나 새하얀 실내링크 내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비춰준다. 스테레오 음악과 함께 신비한 3D 조명이 시범 중인 스포츠 선수에게 비쳐진다. 스포츠 선수가 아니라, 마치 예술가를 대하는 자세다. 경기장에 들리는 사람은 스포츠 팬이 아니라, 공연무대의 관객에 해당된다.

필자는 1인 스포츠는 텔레비전이나 사진, 나아가 뉴스로 접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경기장에까지 가서 직접 보는 것도 좋지만, 텔레비전 하나로 해결해도 충분하다. 현장과 중계방송 사이의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심사위원들의 결정에 의해 점수로 표시되는 피겨스케이팅, 리듬체조 같은 것은 텔레비전만으로도 충분하다. 수많은 카메라를 통해 360도 전방위로 중계되는 텔레비전 경기가 직접 보는 것보다 한층 더 실감이 난다.

1대 1 운동은 다르다. 레슬링·권투·유도 같은 운동은 현장에서 보는 것이 한층 더 흥미롭다. 텔레비전에서 못 잡는 부분과 상황이 현장에서는 느껴진다. 검붉은 피나, 온몸에 배인 땀은 논외로 하자.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선수들간의 신경전, 거친 숨결과 고통을 삼키려는 낮은 비명, 선수들에게 온갖 주문을 다하는 코치와, 싸움을 독려하는 열성 팬들.

1인 스포츠는 사실 소리를 찾아내기 어렵다. 우아한 예술 앞에서 ‘감히’ 소리를 지를 수 없다. 조용히 눈앞의 미를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1대 1 운동은 다르다. 피에 굶주린 인간의 본능이 소리로 표현돼 경기장에 울려퍼진다. 승자와 패자 사이의 선이 분명하다. 선수와 팬이 하나가 된 열기의 현장이 바로 경기장 안이다. 고대 로마로 치자면 검투사가 가득 찬 원형경기장이다. 텔레비전이 결코 담을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다.

기억이란 차원에서 볼 때, 1인 스포츠보다 1대 1운동이 오래가지 않을까 싶다. 승부를 가리기 어려운 사람들이 1대 1경기의 주인공이라면 그 기억도 오래간다. 사실, 1인 스포츠도 세계 1위, 세계 2위 선수라는 식으로, 서로를 경쟁시켜 1대 1 운동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려 한다. 서로간의 근육이 엉겨붙는, 몸으로 대적하는 1대 1 운동이 한층 선명하게 남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알리의 숙소인 조선호텔 주변의 환영 인파. 알리는 한국인 모두가 자신의 팬이라고 믿었다.
서울시민 200만 명이 거리에 쏟아지던 날

권투는 1대 1 스포츠의 선두주자에 해당된다. 혼자서 갈고 닦는 예술이 아니다. 상대방을 꺾고 올라서는 승패가 분명한 운동이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을 봐도 가장 인기 높은 스포츠의 꽃은 바로 권투다. 글러브도 없이 맨손으로 싸운다. 주먹으로 싸운다는 점 외에 특별한 룰도 없고, 경기시간도 무한대다. 상대가 쓰러져 포기하는 최후 순간까지 계속된다. 얼굴 전체가 피범벅이 되고, 코나 갈비뼈가 부러지는 것은 당연하다. 도구도 잔꾀가 통하지 않는 벌거벗은 맨몸으로 이뤄지는 경기다.

무함마드 알리가 세계 스포츠의 황제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무함마드 알리라고 하면 어떤 기억이 떠오를까? 상대를 주먹으로 쓰러뜨린 뒤 포효하는 승자의 함성이 떠오르지 않을까? 알리의 발 아래에는 패자로 전락한 상대방의 허약한 모습만이 부각된다. 무슨 이유나 핑계가 필요 없다. 좁은 사각 링이지만, 승자와 패자가 확실히 구분된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명언을 남긴 링의 마술사. 18세 때 올림픽 금메달에 이어, 곧이어 헤비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뒤 무려 두 번이나 탈환하는 데 성공한 불굴의 복서. 무력에 의한 흑인 민권운동을 주장한 말콤 X의 지지자로 활약한 무슬림운동가. 그 외에도 수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챔피언이란 말이야말로 알리가 한마디에 압축된 단어다. 알리는 항상 이긴다. 1대 1 맞짱에서 상대를 쓰러뜨린 뒤 전 세계를 향해 떠벌리는 알리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퍼진다.

흥미롭게도 50대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알리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하나쯤 갖고 있을 듯하다. 사실 권투에서 헤비급 챔피언은 한국과 무관하다. 가벼운 체중의 외국선수들이야 한국선수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귀에 익게 되지만, 헤비급은 영역 밖이다. 알리를 제외할 경우, 한국인의 머릿속에 선명히 남는 헤비급 세계챔피언이 극히 드물다. 왜일까? 1976년 6월 27일 이뤄진 한국 초유의 스포츠 이벤트 때문이다.

서울시민 200만을 상대로 무려 3시간 이상 계속된 알리의 카퍼레이드다. 1976년 서울인구는 725만이었다. 7명 중 2명이 거리로 나왔다는 얘기다. 믿어지지 않지만, 알리는 김포공항에 내리는 즉시 환영 인파에 둘러싸인 채 숙소인 조선호텔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인다. 주변 모든 도로의 차량운행이 한순간에 중단된다. 당시 영등포에 있던 해태제과 본사 입구를 거쳐, 신촌로터리를 돈 뒤 서울 시청에 들러 환영식을 갖는다. 도중에 사인과 악수를 원하는 시민들이 알리에게 달려들어 카퍼레이드가 중단되기도 한다.

당시 상황은 현장에 간 서울시민 200만 명이 아니라, 4천 만 명에 육박한 당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경험한 역사의 현장이다. MBC가 당시로서는 고가인 중계차와 이동형 카메라를 동원해 카퍼레이드를 생방송으로 방영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학생이던 필자 역시 그 중계를 텔레비전 앞에서 시청했다. 난생 처음으로 서울에 태어나지 않았던 것을 불평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직접 서울 거리에 나가 알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희한한 사건이 1976년에 벌어졌다. 대한민국 국민 4천 만을 한순간에 홀린 신기루, 아니 블랙홀같은 것이 알리의 한국 방문이다.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먹고 입는 문제가 사라지던 시기에 알리 열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알리가 왜 서울까지 왔는지, 200만 서울시민은 어떻게 해서 태극기를 흔들며 광적으로 알리를 환영했는지, 3박 4일간 머문 알리에게 국민 전체가 왜 혼이 팔린 듯 빠져 들어갔는지.


1 이준구(오른쪽) 씨는 쿵후 스타 이소룡과도 꽤 각별한 사이였다. 대련을 갖거나 방송에도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2 알리와 대적하는 이준구씨. 두 사람은 힘보다 속도가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1976년 <중앙일보>에 실린 알리의 방한 관련 기사. 알리가 익살로 장병들을 위문했다는 대목이 이채롭다.
유신헌법-중앙정보부-태권도 대부-알리 연결고리

살아있는 세계 최고의 현역 스포츠 스타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을 들라면, 골프의 타이거 우즈 정도가 아닐까 싶다. 2014년 6월 서울에 온다고 할 때, 과연 200만이 몰려나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할 수 있을까? 아니 서울 광역권 인구의 100분의 1에 해당되는 20만 명이라도 타이거 우즈 얼굴을 보러 거리로 나갈 생각을 할까?

모든 것이 그러하듯 엄청난 현상 뒤에는 아주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이유가 드리워져 있다. 음모론적 시각이 아니라, 모두가 인정하는 원인과 결과로서의 경위다. 1976년 6월 벌어진 200만 열기의 현장도 마찬가지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리의 서울방문을 실현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은 미국 태권도의 대부(代父)인 이준구(82세, 미국명 Grand Master Rhee) 씨다.

이씨가 없었더라면 알리가 한국에 올 이유도, 200만 서울시민이 거리로 나갈 이유도, 필자가 서울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준구 씨는 당시 알리와 함께 한국에 왔다. 3박 4일간 서울에 머무는 동안, 알리에게 한국을 알리는 친구이자 조언자 역할을 한다.

이준구 씨는 현재 워싱턴 근교에 거주하고 있다. 가끔씩 자신이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에 나가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대화를 갖는 게 큰 즐거움이라고 한다. 6년 전 가벼운 뇌경색이 오면서 심한 운동은 자제하고 있다. 워싱턴에서 만난 이준구 씨는 특유의 모습인 환한 얼굴로 필자를 맞이했다. 햇빛이 좋다면서 초여름의 아침 날씨를 즐기고 있다고 말한다. 그를 만난 것은 38년 전 한국 서울에 나타난 기묘한 역사를 더듬어 보기 위해서다. 먼저 알리가 어떻게 서울을 방문하게 됐는지 물어봤다.

“설명하자면 길지만, 당시 제 고향 친구가 중앙정보부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국회의원을 하고 최근에 세상을 뜬 김영광이란 친구입니다. 제가 알리와 가깝다는 것을 알고 서울 방문을 추진해달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별로 깊은 생각 없이, 알리에게 서울에 갈 생각 없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사실 알리는 서울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제가 부탁하는데 어떻게 안 들어줄 수 있느냐면서 즉석에서 오케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게 된 겁니다.”

태권도 대부, 중앙정보부, 무함마드 알리, 서울 등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미스터리 영화의 소재로 사용될 만한 부분이다. 1976년은 한국 역사상 가장 평화로우면서도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로 기록될 듯하다. 경제적으로 안정기에 들었다고 하지만, 유신헌법이 제정된 지 4년째로 접어들었다. 국회의원과 법관의 3분의 1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엄청난 독재 헌법이다. 대통령 임기는 6년에다 연임할 수도 있다. 1974년 8월 15일은 문세광(文世光) 저격사건으로 인해 육영수 여사가 살해된다.

북한의 위협이 가속화되면서 전쟁 발발 가능성이 점쳐진다. 야당, 언론이 안보를 핑계로 독재에 나선다고 맹비난한다. 1975년 2월, 58세의 박정희는 국민투표를 통해 유신헌법의 당위성을 재확인한다. 국민 73%가 찬성하고 25%가 반대한다. 유신헌법의 위법성에 대한 토론 자체가 금지된 상태에서 이뤄진, 껍데기에 불과한 국민투표였다.

1975년 4월 월남이 공산화되면서 한반도 전체가 전시체제로 급변한다. 필자도 직접 경험한 총검훈련과 학도호국단이 조직된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1억 총결전 체제를 능가하는 갖가지 군사조직이 한국 사회에 등장한다. 중앙정보부는 그 같은 상황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대통령의 충복에 해당된다. 알리의 서울방문은 그런 상황에서 나온 대형 이벤트라 볼 수 있다.

알리 방한에 돈 거래 없어

“한국은 당시 미국 의회로부터 독재국으로 찍힌 상태였습니다. 평이 아주 안 좋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알리가 한국에 가는 게 한국민에게 좋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였겠지만, 고생하면서 세계챔피언에 오른 알리 같은 사람을 통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당시 상황이지만, 일상사를 통틀어 한국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만한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유신독재, 문세광 사건, 김대중 납치, 베트남 전쟁, 김일성 남침설…. 그런 무거운 단어가 한국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시대입니다.

중앙정보부 친구는 자신의 조직을 위해 일했겠지만, 제가 알리에게 가자고 한 것은 박정희 독재를 지지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알리를 소개하면서 돈 한푼 받은 적도 없습니다. 서울 가서 박정희를 만난 적도 없습니다. 알리도 돈 받고 서울에 간 게 아니에요. 비행기값과 호텔 체제비는 지원받았지만, 그 외는 요구한 것이 없습니다. 사실 알리는 당시 이미 백만장자로 돈방석에 앉은 사람이었습니다.”

필자는 당시 유신이나 독재를 느낄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거의 매일 학교에서 이뤄지는 세뇌식 교육을 통해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어린 가슴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지만, 한반도 지도를 배경으로 한 붉은 쥐를 그려 넣은 포스터가 학교 게시판과 화장실, 시내 곳곳에 붙어 있었다. 붉은 쥐의 머리 위는 반공(反共)·멸공(滅共)과 같은 글자가 새겨진 큰 망치가 드리워져 있었다.

척박한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알리의 방문은 한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변변한 오락시설이나, 흥미로운 엔터테인먼트 문화가 없던 시기였다. 스타라 불릴 만한 사람도 드물었고, 아이돌이나 언더그라운드 밴드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간에 ‘그 유명한’ 세계챔피언이 나타난 것이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태권도 대부 이준구 씨는 거기까지가 자기 몫이라 생각했다. 이씨와 알리와의 관계는 서울에 가기 1년 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지금도 만나는, 노먼(Norman)이라는 캘리포니아의 친구를 통해서다.

“제가 가르치던 태권도 수련생이 경기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머리와 몸을 보호하는 안전장치를 만들었지요. 현재 사용하는 태권도 안전장치로, 당시 한국 태권도 사범들은 제가 춤을 가르친다고 비난하더군요. 노먼은 제가 만든 안전장치를 생산·판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워낙 발이 넓어 알리와도 친한 사이였지요. 알리에게 제 소개를 하자,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알리는 일본에 가서 레슬링 선수인 안토니오 이노키(アントニオ 猪木)와 대적할 계획이었습니다.

일본 방송국이 엄청나게 후원한, 세계 최고 레슬링 선수와 무함마드 알리가 한판 붙는, 세기적 이벤트였습니다. 저를 만나자마자, 어떻게 하면 레슬링 선수를 이길 수 있는지 묻더군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된 겁니다. 운동하는 사람끼리는 상대를 만나면 한눈에 알아봅니다.

힘이 아닌, 속도를 키우면 파워가 배로 늘어난다고 가르쳤습니다. 태권도를 하는 사람은 기본으로 알고 있지만, 미국 선수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요. 힘으로 하는 게 권투니까요. 알리는 제가 가르쳐준 대로 힘의 권투에다 속도를 추가했습니다. 이른바 아큐펀치입니다. 알리는 이후 곳곳에서 제가 가르쳐준 아큐펀치로 상대를 쓰러뜨렸다고 자랑했습니다.”


▎MBC의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한 알리. 당시 인기 절정의 코미디언 이기동(맨 오른쪽) 씨가 사회를 봤다.



알리-안토니오 이노키 경기 생중계의 비밀

알리가 4천만 대한민국을 홀린 이유는 이미 전설로 남은 그의 권투 경력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76년 당시 한국에 알려진 알리라는 인물은 지금과 같은 살아있는 신화와 거리가 멀다. 잘 생기고 말 잘하는 흑인 세계챔피언 정도로 알려졌을 뿐이다. 알리가 한국인에게 ‘특별하게’ 와 닿은 것은 한국에 오기 전에 이뤄진 3일 동안의 행적에서 비롯된다. 도쿄(東京)에서 이뤄진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대전이다. 당시 MBC는 ‘친절하게도’ 이노키와 알리와의 경기를 생중계로 방송했다.

이준구 씨의 배경설명을 들으면 중앙정보부가 배경에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해진다. 왜 이노키와 알리 관련 뉴스에 국민 모두가 매달렸는지? 왜 당시 엄청난 가격을 지불했을 위성 생중계를 한국 텔레비전이 내보냈는지? 왜 신문지면 곳곳이 큰 글자와 함께 ‘미일 세기적 대결’을 지상 중계하듯 보도했는지…. 그 모든 배후에 중앙정보부의 보이지 않는 공작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해진다.

중학생이던 필자는 당시 내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알리가 한국에 오기 전부터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탐지했다. 학교에 가면 알리, 이노키 중 누가 이길지에 대한 내기도 이뤄졌다. 알리와 이노키가 대적한 저녁시간 모두가 텔레비전 앞에서 세기의 대결을 지켜봤다. 1977년 한국은 텔레비전 보급률은 400만 대에 달했다. 대략 텔레비전 한 대 당 10명이 보는 셈이다. 1년 전인 1976년은 대략 3가정에 텔레비전 한 대 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연색 텔레비전이 처음으로 선보인 것도 1976년이다.

알리와 이노키의 대결은 당시에는 극히 드물던 텔레비전 위성중계를 통한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생방송으로 전해졌다. 반일교육에 충실했던 필자는 이노키가 져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알리를 혼내줬으면 좋겠다라는 마음도 있었다. 이노키가 역도산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박치기왕 김일 때문이지만 한국인 모두는 당시 레슬링 마니아에 해당된다. 결국 필자는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텔레비전 중계를 지켜봐야만 했다.

예상과 달리, 경기는 시종일관 맥이 빠지는 싸움이었다. 이노키는 링에 벌렁 누운 채 발로 차기만 하고, 알리는 주변을 빙빙 돌면서 주먹다운 주먹 한번 내밀지도 못했다. 30㎝가 넘는다는 이노키의 발차기나, 호랑이를 한 손에 때려 눕힌다는 알리의 철권(鐵拳)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웃나라에서 열린 세기적 대결에 대한 관심 그 자체는 식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시시한 게임을 보여줬지만, 한국을 방문하면서 뭔가를 보여줄 것이란 묘한 심리가 일어났다.

당시 일본에 대한 반감은 현재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광복절과 3·1절이 되면 혈서를 쓰거나, 손가락을 자르는 식의 반일 데모가 일상적이었다. 일본인들이 알리를 데려와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상, 한국도 그 이상으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경쟁심리 같은 것이 있었다. 그 결과가 서울 거리에 쏟아져 나온 200만 환영 인파다.

남자의 본색 드러낸 알리

알리가 한국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물어봤다. “그 사람 하루에 무려 10개나 되는 일정을 전부 소화했습니다. 전방부대도 가고, 텔레비전에도 출연하고, 한국 공장에도 찾아가고…. 아무런 불평도 안하고, 한국이 원하는 대로 전부 들어줬습니다. 알리는 밖에서 보는 것과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기자가 나타나면 기상천외한 내용이나 표현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만, 혼자 있으면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말이 없습니다. 알리는 권투선수이긴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인 4성 장군이 알리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자, 본 척도 안 하더군요. 4성 장군이 흑인 권투선수에게 허리를 굽힌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김포공항에 내린 뒤 카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남자’로서 알리의 본색이 드러나더군요.

오픈카에서 알리의 오른쪽에서 서 있었습니다만, 제 팔을 툭 치더군요. 한국 여자들 너무 예쁘다는 겁니다. 소개를 해달라고 조르더군요. 아무런 대답도 안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제 팔을 치더군요. 다시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또 한 번 더 치더군요, 제발 한 명 소개해 달라고 하소연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군요. ‘그런 부탁할 것 같으면 앞으로 나와 만나지 말자’고 정색하면서 말했습니다. 알리 표정이 굳어지더니, 잘 알겠다고 하더군요.”

알리가 MBC에 출연한 뒤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출연한 여성 연예인들이 알리에게 안기거나 함께 춤추는 장면이 나왔기 때문이다. 알리는 한국식 갓과 한복을 입은 채 여성 연예인들과 진한 스킨십을 보여주기도 했다. 일부 여성 연예인의 풍기문란이 나라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교훈적인 글들이 다음날 신문에 실린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우습겠지만, 외국인이나 흑인을 대하는 한국 여성들의 모습이 당시 한국 지식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으리란 추측이 가능해진다.

알리 방문이 중앙정보부의 기획작품이라고 가정할 때,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과정 하나가 빠진 듯하다. 알리의 청와대 방문이다. 뭔가 어울리지 않지만, 박정희와 알리 기념사진이 들어가야 중앙정보부의 이벤트가 성공한 듯 느껴진다. 그러나 박정희가 알리를 만난 적은 없다.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라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들르라는 시간이 비행기 탈 시간대였습니다. 그냥 간단히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만날 시간이 없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만나지 못했어요. 저는 물론, 알리도 한국의 대통령을 만나야 한다는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그냥 그렇게 헤어진 겁니다.”

4천 만 국민이 알리 열풍에 휘말린 상태에서 박정희가 알리와 기념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1998년 서울에 들른 마이클 잭슨에서 보듯, 대통령과 세계적 스타와의 만남은 전혀 다른 차원의 정치적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당시 대통령 취임식에 국빈으로 초대된 마이클 잭슨은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관광지 투자와 자신의 콘서트 개최에 관해 논의했다. 청와대는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도자료로 제공한다. 비슷한 상황이 박정희 때 나타날 수 있었지만, 그냥 넘어간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크게 두 가지 배경이 있었을 듯하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고(故) 육영수 여사 묘역에서 분향하는 알리.



태권도 공정성 제고 않으면 올림픽 퇴출될 수도

먼저 알리 방문을 기획한 중앙정보부와 다른 부처와의 알력때문이 아닐까 싶다. 알리라는 대어(大魚)를 낚은 중앙정보부가 독주하자 청와대나 다른 기관이 브레이크를 걸면서 대통령 면담이 중지됐을 가능성이다. 뒤늦게 대통령이 관심을 표시하자, 부랴부랴 마지막 날 추진하면서 실패로 끝났을 가능성이다.

둘째는 박정희 자신이 별로 관심이 없었을 가능성이다. 당시 박정희는 부인을 잃은데다 북한의 전쟁위협으로 마음이 곤두서 있었다. 민주인사로부터 독재자라 불리던 험악한 시기에 알리가 찾아왔다. 아무리 알리지만, 상황을 고려할 때 대통령이 흑인 권투선수와 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꼈을 수 있다. 알리의 자존심도 채워주는 방식이지만, 일부러 떠나는 날 청와대로 초대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정보부를 통해, 알리가 초대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란 정보는 이미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알리는 40대부터 파킨슨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현재 72세임을 감안하면 30여 년 넘게 병마와 싸우고 있는 셈이다. 최근 대중의 눈에 나타난 것은 70세이던 2012년 4월이다.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 신축된 야구경기장 말린즈파크(Marlins Park) 오프닝에 나타났다. 골프 자동차에 탄 알리가 나타나는 순간, 관중들은 기립 박수로 환영했다.

그러나 곧이어 어색한 침묵이 관중석으로 퍼져나갔다. 알리가 오른손을 심하게 떠는 모습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검은 안경 속의 알리는 고개를 숙인 채 파킨슨병이 어떤 것인지 관중 모두에게 보여줬다. 경기장 오프닝 이벤트용으로 병중인 알리를 불러냈다는 것에 대한 반감이 즉시 퍼져나갔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무함마드 알리의 권위를 더럽히는 더러운 상혼(商魂)을 비난하는 목소리다. 필자도 당시 상황을 비디오로 지켜봤지만, 슬픔과 불쾌함이 교차되는 묘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당시 알리를 운동장에 세운 말린즈 파크의 경영주는 이후 추악한 장사꾼이란 오명과 함께 살해 위협에 놓이기까지 한다.

이준구 씨가 알리와 마지막으로 접한 것은 10여 년 전이다. 이미 파킨스병으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상태였다. 1976년 당시의 감회를 물어봤다.

“알리와 함께 갔을 때 어두운 한국에 뭔가 기여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서울에 내리는 즉시 한계를 느꼈습니다. 알리와 함께 간 이상 알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니라, 알리가 저를 원하는데도 곳곳에서 저를 떼어놓고 자신들의 얼굴을 전면에 내려는 사람들이 나타나더군요. 국기원에 들렀는데, 아예 제 자리는 뒷 구석에다 배치해두고 태권도협회 회장이나 국기원 고위관계자들이 알리 주변에 포진하더군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당시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가도 그 정도로 취급당했는데, 다른 사람은 어땠을까요? 조직개편, 국가개조란 말이 들립니다만, 인간개조가 돼야 합니다. 서로 도우면서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하는데, 전부 독식하려고만 하고 권위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퇴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만, 세계로 나가기 전에 내부의 정화가 필요합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 태권도를 미국에 보급할 때와 같은 정열이나 순수성이 절실합니다. 태권도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로, 심판의 공정성 문제가 있습니다. 외국 심판을 많이 키우고, 그들에게 역할을 넘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전장치를 단, 주먹사용을 허용하는 것도 태권도 혁신안 중 하나입니다. 시대에 맞춰 변해가야만 합니다. 1950년대 유도가 미국에서 유행했지만, 시대 흐름에 쳐지면서 한순간에 사라졌어요. 인간개조와 혁신 이 두 가지가 한국 태권도, 아니 한국 전체에 절실합니다.”


▎미국 워싱턴 인근에서 만나 인터뷰에 응한 이준구(왼쪽) 씨와 필자.
알리가 한국을 떠나고 3년 뒤 한국은 대혼란기에 들어간다. 박정희가 암살되면서 세상은 민주화 바람으로 들뜬다. 알리에 환호하던 200만 서울시민의 열기는 민주화를 향한 정열로 변해간다. 1976년 6월의 알리 열풍은 중앙정보부가 만든 독재 초상화 중 하나일지 모른다. 3S(스포츠·섹스·스크린)를 통한 정부의 우민화(愚民化)정책의 상징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주주의가 땅에 묻혀진, 유신독재가 12시 최고 정점을 지나던 바로 그 순간, 무함마드 알리가 한국인의 가슴속에 새겨진 것이다.

한국 최초의 이슬람 성전을 연 인물

그러나 그 같은 정치적 메시지는 당시 중학생이던 필자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다. 권투영웅 알리를 통해 한국 밖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어둡고 밋밋하게 살기보다, 알리를 통해 환한 세상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처음으로 찾아냈다. 그를 통해 미국이란 나라를, 흑인·권투·레슬링·태권도 그리고 일본이란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그 같은 심리는 도로에 뛰쳐나온 200만 서울시민의 공통분모였으리라 생각된다. 1980년대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요구는 바로 닫힌 창 밖의 세상에 시선을 둔, 알리 열풍의 재판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민주화도 다른 각도로 보면, 밖을 향한 호기심에 속한다.

건방진 얘기지만, 필자는 알리가 천국에 갈 것이라 믿는다. 이유는 한국에 들렀을 때 행한 거룩한 행적 때문이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중앙성원(中央聖院)이다. 알리가 서울에 왔을 때 개원한, 한국 최초의 이슬람 성전이다. 공교롭게도 알리가 왔을 때 성전 건축이 끝나면서 문을 연다. 한국 최초의 이슬람 성전을 연 인물이 바로 알리다. 신을 믿는 사람은 알 것이다. 신을 기쁘게 한 사람만이 신으로부터 사랑을 얻게 된다. 그 어떤 찬란한 업적들보다도, 한남동 중앙성원 개원식에 참가한 알리의 모습이 신의 축복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201406호 (201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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