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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2014 브라질월드컵 - 홍명보 감독의 월드컵 출사표 

“ 온 힘 다하여 국민의 희망되겠다” 

이해준 일간스포츠 기자
세월호 비극 에너지로 승화… 사상 최초 ‘원정 8강’ 위업 이룬다

▎5월 13일 애도의 리본을 단 채 파주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NFC)에 입소하는 홍명보 감독. 그는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대표팀 감독으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희생자를 가슴에 품고 뛴다.” 2014 브라질월드컵을 준비하는 한국 축구 대표팀의 마음가짐은 다른 대회 때와는 많이 다르다.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로 희생된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과 교사들을 추모하기 위한 임시분향소가 4월 24일 경기도 안산시 안산 올림픽 기념관에 마련됐다. 홍명보(45) 감독은 이날 김태영(44) 코치와 함께 분향소를 찾아와 조문했다. 월드컵을 준비하느라 정신 없이 바쁘던 시기였지만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 감독은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왔다.

5월 8일 파주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NFC)에서는 월드컵에 출전할 23명의 최종 엔트리 발표가 진행됐다. 무대에는 “온 힘을 다하여 국민들의 희망이 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써 있었다. 세월호 사고가 없었다면, 팬 투표로 몇 달 전에 결정된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공식 슬로건 ‘즐겨라 대한민국(Enjoy it, Reds)’이라는 문구가 그 자리에 붙었을 것이다.

이날 최종 엔트리 발표 행사는 묵념과 함께 시작됐다. 명단 발표에 앞서 홍 감독은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안타까운 사고로 가족의 품을 떠난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뜻을 전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서 “많은 사람이 대표팀을 두고 ‘홍명보 호’라 부르는데 이번 참사를 통해서 무한한 책임감을 다시 느끼게 됐다”는 말도 덧붙였다.

리더의 마음은 선수들에게도 그대로 옮겨진 것일까. 대표 선수는 5월 12일부터 속속 파주 트레이닝에 입소해 훈련을 시작했는데, 육군 정복을 입고 온 상무 소속의 이근호를 빼고는 모두 검정색, 짙은 감색 등 차분한 정장에 노란 리본를 옷깃에 달고 왔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선수들이 너무 큰 정신적 압박 속에서 대회를 치르는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홍 감독은 “부담이 더 커진 것은 사실이다. 부담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부담감이 선수들에게 나쁘게만 작용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선수들과 함께 대표팀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어려운 대한민국을 위해서, 우리 국민에게 희망을 전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소집 훈련 첫날, 홍 감독은 기자들과 만나 “최근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부담을 갖지 않는 일은 불가능하며, 그런 부담이 반드시 나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란 소회를 밝혔다.
“부담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

한국은 안방에서 열린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이라는 기적 같은 성과를 거뒀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는 토고에 2대 1로 승리하며, 원정지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사상 첫 승리를 거뒀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는 그리스를 꺾은 뒤, 아르헨티나에는 패했지만, 나이지리아와 비기며 1승1무1패로 아르헨티나에 이어 조2위로 16강에 올랐다. 역시 원정지에서 이룬 사상 첫 16강 등정이었다. 이렇게 한국 축구는 한 발 한 발 성장을 거듭했다. 홍 감독은 “일단 조별리그 통과만을 생각한다”고 하지만, 한국 대표팀의 이번 대회 목표는 당연히 원정 월드컵 사상 첫 8강 진출이다.

축구 국가대표 감독 자리를 두고 ‘독이 든 성배’라고 부르곤 한다. 영광스러운 자리지만, 아주 작은 실수만으로도 잘리기 일쑤다. 그 때문일까. 2014 브라질월드컵 한국 대표팀의 지휘봉은 우여곡절 끝에 홍명보 감독의 손에 쥐어졌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이 끝난 후 축구협회는 16강이라는 성과를 거둔 허정무(59) 감독에게 계속 대표팀을 지휘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허 감독은 이를 거절했고, 잠시 후 인천유나이티드의 사령탑에 올랐다. 정해성(56) 대표팀 수석코치도 감독 제의를 고사했다. 결국 당시 축구협회장을 맡았던 조중연(68) 전 회장은 조광래(60) 감독을 중용했다. 조 감독은 축구협회와는 대립각을 세우던 이른바 ‘축구계 야권’이었다.

파격적인 인사였지만 조 감독은 2011년 11월 대표팀에서 경질됐다. 그해 8월 한일전에서 0대 3으로 참패하고, 레바논에도 1대 2로 패한 게 중도하차의 원인이 됐다. 그 뒤로 대타 물색도 쉽지 않았다.

조 회장이 직접 설득에 나서 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을 영입했다. 최 감독은 최종예선까지만 지휘한 뒤 K리그로 돌아가겠다는 조건을 달고 ‘시한부 사령탑’에 올랐다. 최 감독은 가까스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지만, 선수단 내부에 국내파와 해외파 사이의 분열 등 적지 않은 문제를 노출했다.

기성용(25)이 SNS에 최 감독을 조롱하는 글을 올린 게 공개돼 커다란 파장이 일기도 했다. 월드컵 8회 연속 진출이라는 대단한 성과를 거뒀지만, 지난해 7월 홍명보 감독이 부임했을 때 한국 대표팀의 분위기는 이처럼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홍 감독이 취임 일성으로 ‘원 팀, 원 스피리트, 원 골(One team, One sprit, One goal)’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배경이다.

홍 감독만큼 준비된 감독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는 1990년, 스물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이탈리아월드컵 대표팀에 전격 발탁됐다. 대표팀 경험이 별로 많지 않았지만 기죽지 않고 제 기량을 십분 발휘하며 본선 세 경기에서 모두 풀타임 출전했다. 이후 홍명보는 1994·1998년에 이어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무려 4차례에 걸쳐 선수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특히 2002년 대회 때는 대표팀 주장을 맡으며 4강을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 뒤로 그는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는 코치로 발탁돼 아드보카트 감독을 보좌했다. 지도자로 첫발을 월드컵이라는 무대에서 경험했으니 천운을 타고난 셈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는 박성화 감독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쌓았다.

2009년에는 이집트에서 열린 U-20(20세 이하) 월드컵으로 사령탑에 데뷔했다. 구자철(25)·홍정호(25)·김영권(24)·김승규(24)·김보경(25) 등 대표팀의 주축 선수는 이때부터 홍 감독과 인연을 쌓았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 태어난 젊은 선수들과 함께 홍 감독은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2012년 런던올림픽 등을 치르며 함께 성장해나갔다.


▎파주 NFC에서 브라질월드컵 축구 대표팀 소집훈련이 열린 첫날(5월 13일) 홍명보 감독이 선수들에게 대표팀 운영의 전반적인 원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명보, 경쟁심 자극보다 신뢰를 더 중시

선수단을 운영하는 방식은 2002년 거스 히딩크(68) 감독과 크게 다르다. 히딩크 감독은 2002년 1월까지만 해도 국내 축구인으로부터 “월드컵이 6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베스트 11을 정하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냐”고 비판받았다. “지금이라도 감독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직전까지도 선수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기며 팀 전력을 극대화했다. 홍 감독은 경쟁심을 자극하는 히딩크의 방식보다는 선수와 감독 사이의 신뢰를 더 중시한다.

최전방 공격수 박주영(29), 좌우 측면에 손흥민(22)과 이청용(26), 중앙 미드필드에 구자철, 수비형 미드필드에 기성용과 한국영(24), 포백 라인에 김진수(22)·홍정호·김영권·이용(28) 등 홍명보 호의 베스트 일레븐 윤곽은 이미 서너 달 전부터 뚜렷해졌다. 아직까지 경쟁이 펼쳐지는 곳은 정성룡(29)과 김승규(24)가 경합하는 골키퍼 포지션 정도다. 선수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히딩크와 달리 중용할 선수에겐 확실한 신뢰를 주는 스타일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주영이다.


▎홍 감독은 논란이 많았던 박주영을 다시 대표팀으로 불렀다. 경쟁 원리보다 신뢰를 중시하는 홍 감독의 스타일이 반영된 결과다.
2012년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박주영은 병역 논란에 휩싸였다. 홍 감독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박주영을 대동하고 나와 “주영이가 군대에 안 가면 내가 가겠다”며 논란을 정면돌파했다. 박주영은 일본과 3-4위전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며 홍 감독에게 보은했다. 이번에도 홍 감독은 아스널과 왓퍼드에서 벤치 신세를 지고 있고, 최근까지 부상으로 컨디션이 저조한 박주영을 대표로 발탁했다.

<더 선> 등 외국 언론에서는 “왜 소속 팀에서 뛰지도 못하는 박주영을 뽑았나”라고 의아해 했지만, 한국에서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이 밖에도 이번 월드컵 대표팀에는 K리그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이명주(24)가 빠지고 홍 감독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은 박종우가 미드필더로 뽑혔다. 이 때문에 일부 네티즌은 월드컵 엔트리를 ‘엔트으리’(의리)라고 비꼬고 있다. 이용수 2002 월드컵 기술위원장은 “선발은 오로지 감독의 권한이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지면 된다”고 말했다.

홍 감독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감독은 2006년의 딕 아드보카트(67) 감독이다. 홍 감독은 “언젠가 코칭스태프 회의를 하는데 나한테 ‘왜 아무 의견도 내지 않느냐’고 질책해서 깜짝 놀랐다. 난 팀의 막내코치였지만 내 의견도 아주 귀 기울여 들어줬다. 감독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자리라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스태프에게 아주 영리하게 책임과 권한을 나눠주며 팀을 운영한다.

“한국에서 코치는 감독을 모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난 그게 싫다. 날 모시는 코치는 필요 없다. 내가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고민을 나누는 게 코치”라고 강조했다. 수비는 김태영 코치, 공격은 박건하(43) 코치의 의견을 신뢰한다. 선수의 컨디션 조절은 이케다 세이고(54) 트레이너의 몫이다. 한국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일본인이지만,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교체 투입하고 싶은 선수가 있어도, 세이고 트레이너가 반대하면 포기한다”고 할 정도다. 선수들도 이런 걸 잘 알기 때문에 세이고 코치의 피지컬 트레이닝 때 잔꾀를 부리는 일이 없다.

비극적 사태 속에서 복귀하는 심정

2010년 남아공월드컵 때 허정무 감독은 노장을 중용했다. 이운재(41) 등 월드컵 출전 경험이 있는 선수가 10명이나 됐다. 이영표(37)·박지성(33)·김남일(37)·안정환(38)은 히딩크 감독에 앞서서 허 감독이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대표팀에 발탁했던 선수다. 이들은 자신을 믿어준 허 감독을 위해 죽도록 뛰었고 16강이라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 출전하는 한국 대표팀 23명의 평균 연령은 역대 월드컵 대표팀 중 가장 어리다. 서른이 넘는 노장 선수는 곽태휘 1명뿐이다. 그러나 이번 대표팀에도 박주영·기성용·구자철 등 홍 감독을 위해 온몸을 불사를 선수가 많다는 건 4년 전의 상황과 비슷하다. 홍 감독은 “우리 선수들이 나이는 어리지만 경험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고 신뢰를 나타냈다. 23명 중 해외파가 무려 17명에 이른다.

한국은 1986년 멕시코 대회부터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올라갔다. 현재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한국이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모습을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 때문인지 월드컵을 바라보는 눈길은 과거에 비해 많이 무덤덤해졌다. 게다가 세월호 사고까지 겹치며 월드컵의 열기는 예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해졌다. 세월호 참사라는 아픔 속에서 월드컵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참사 이후에도 삶은 지속된다. 스포츠에는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나게 만드는 생동감 넘치는 힘이 있다. 2001년 9·11테러로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는 일주일 동안 중단됐다. 스타디움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수만 명의 인파가 모이면 또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리그를 다시 시작하며 밥 분 신시내티 레즈 감독은 “비극적 사태 속에서 복귀하는 심정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변호사·회계사·배관공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은 마음으로 일터로 복귀한다”고 말했다. 선수들은 성조기를 모자와 유니폼에 부착하고 경기에 임했다.

경기장을 정비하는 시간에는 팬들이 평소에 부르던 ‘야구장으로 날 데려가 줘’라는 노래 대신 미국에서 국가 이상으로 잘 알려진 ‘성조기여 영원하라’라는 노래를 불렀다. 스포츠를 통해 삶의 일상성을 회복하고,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함께 나눴다.

전 사회적인 슬픔과 고통은, 선수들을 한 발 더 뛰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도호쿠(東北)를 연고로 하는 만년 꼴찌팀 라쿠텐이 프로야구 정상에 올랐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물리쳤지만 많은 일본인이 라쿠텐의 우승에 함께 기뻐했다.

도코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을 강타한 대지진의 피해 지역이었다. 지진으로 집을 잃은 팬들은 임시주택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라쿠텐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지진으로 고생하는 여러분을 보면서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아픔을 달래드리겠다는 각오로 3년간 싸웠다”고 말했다. 라쿠텐은 역경을 딛고 재기를 다짐하는 도호쿠의 상징이 됐다.

거대한 분노를 발전 위한 에너지로 승화

4월 15일은 보스턴 마라톤 테러 1주년이었다. 2013년 압력솥 폭탄이 터져 3명이 숨지고 260여 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지난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후 테러 현장에서 우승 퍼레이드를 한 뒤, 폭탄이 터졌던 마라톤 결승선에 트로피를 세워놓고 희생자를 추모했다.

4월 22일 열린 올해 보스턴 마라톤 출전 선수는 3만5755명으로, 지난해(2만3336명)보다 무려 1만2419명(53%)이 늘었다. 삼엄한 경기 속에서 치러졌지만 관람객은 100만 명으로 예년보다 두 배로 껑충 뛰었다. ‘보스턴 스트롱’(Boston Strong·보스턴은 강하다)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적극적인 대회 참가와 응원으로 테러를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게 보스턴과 미국 시민의 뜻이었다.

마라톤에서는 미국인 멥 케플레지기(39)가 2시간8분37초로 남자부 정상에 올랐다. 미국인이 보스턴 마라톤에서 1위를 차지한 건 1983년 그레그 메이어 이후 31년 만이다. 아프리카 선수들이 독주하던 최근의 흐름을 뒤집는 이변이다. 최근 30년 동안 보스턴 마라톤에서는 에티오피아와 케냐 선수가 무려 24회나 챔피언에 올랐다. 이번 대회 2위도 케냐의 윌슨 체벳(29)이었다.

케플레지기에 불과 11초 뒤졌다. 케플레지기는 “내가 아니라 보스턴이 강했다. 지난해 참사는 정말 슬픈 일이지만 미국인, 보스턴 시민은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뭉쳤다. 지난 시즌 보스턴 레드삭스가 우승컵을 결승선에 바치는 모습을 보고 나도 꼭 우승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출전 번호표에 보스턴 테러 희생자의 이름을 새기고 42.195㎞를 달렸다.

세월호 참사는 앞으로 한국 사회를 크게 바꿔놓을 것이다. 국가 개조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참담한 심정, 거대한 분노를 발전을 위한 에너지로 승화해야 한다. 태극 전사들은 붉은 유니폼에 노란 리본을 달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꿈꾸며 4900만 국민과 함께 녹색 그라운드를 누빌 것이다.

201406호 (201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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