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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 필리핀 발렌카깅 마을을 가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새마을에서 배웠죠” 

글·사진 김슬기 월간중앙 기자
필리핀 시골마을에 부는 새마을운동 바람…마을 공동사업으로 가계소득 늘고 협동심

▎새마을운동은 필리핀 발렌카깅 마을의 교육을 바꿔놓았다. 학생들은 봉사단이 수리해준 학교에서 한국 문화체험과 다양한 예체능 교육을 하며 꿈을 키워간다.



“필리핀은 과연 대한민국보다 잘살았던 적이 있기나 한 걸까?” 한반도가 전란에 휩쓸린 1950년대 초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나라였다. 8천만 인구에 풍부한 천연·광물자원, 1인당 국민소득 256 달러, 경제규모 세계 19위…. 한국이 국민소득이 200달러에 턱걸이한 때가 1969년인 걸 보면 필리핀은 적어도 한국보다 20년 이상 앞서나가던 때가 있었다.

6·25 전쟁의 폐허 위에서 망연자실하던 한국의 재건사업에도 참여했다. 서울 태평로에 자리한 주한미국대사관, 장충단공원 안의 장충체육관을 필리핀 건설업체가 지었다. 1966년 설립된 아시아개발은행(ADB)의 본부를 수도인 마닐라에 유치할 정도로 아시아권에서 입김도 셌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오늘날 필리핀과 한국은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가난한 나라’ 한국을 도와주던 필리핀은 한국의 도움을 받는 수혜국 신세다. 국민소득도 역전된 지 오래됐고 격차는 점점 더 커진다. 201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6천 달러가 넘어섰지만 필리핀은 2792달러로 거의 10분의 1 수준을 맴돈다.

기자가 찾아간 필리핀은 옛 위상이나 영광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부정부패와 극심한 빈부격차로 온 나라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토착 지주세력에 의해 장악된 정치와 정당은 다수 서민보다는 소수 기득권층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과거 식민지 종주국으로부터 물려받은 농장을 기반으로 자본을 축적한 지주 계급이 국부의 절반을 차지한 나라가 필리핀이다.

필리핀 중앙정부도 이런 빈곤과 불균형을 바로잡고자 애쓴다. 2010년 취임한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은 ‘필리핀 개발전략(Philippines Development Plan)’을 발표했다. ‘지속가능한 고도의 경제성장’, ‘균등한 발전기회’, ‘효과적인 사회 안전망 구축’을 3대 지표로 제시하고 고용 창출과 빈곤 퇴치에 앞장설 것임을 다짐했다.

희망 잃은 주민들 “함께 해보자”

하지만 아직까지도 농촌 지역은 무풍지대에 가까운 듯하다. 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5%에 지나지 않는다. 필리핀 국가통계조정위원회(NSCB)에 따르면 농업 부문의 GDP 기여 수준은 지난 60년 동안 계속 하락해왔다. 1946년 GDP 내 농업비중은 29.7%에 달했으나, 2012년에는 11.1%까지 떨어졌다. 농업의 생산성은 하락해가고 있는데 대다수의 국민은 여전히 농업에 기대고 있는 상황이다. 이 나라에서 농민은 빈곤층과 동의어로 통할 정도다.

기자가 방문한 발렌카깅 마을은 경북도가 파견한 새마을리더해외봉사단(이하 새마을봉사단)이 2년째 활동 중인 새마을시범마을이다. 이 마을은 수도 마닐라에서 자동차로 6시간 거리에 있는 산 펠리페(San Felipe) 시에 속한 작은 농촌이다. 220여 가구에 1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은 1991년의 큰 화산 폭발로 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20세기의 화산폭발 중 둘째로 큰 폭발로 꼽히는 1991년 피나투보 화산폭발은 마을을 기근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산 펠리페 시의 주민 25만 명이 보금자리를 잃었고 9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발렌카깅 마을의 비옥했던 농토도 순식간에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시름에 빠졌던 마을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이곳에 새마을운동이 들어오고 나서부터다. 새마을봉사단은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발렌카깅 마을에 양돈·양계사업을 들여왔다. 낡은 주민회관을 새로 짓고, 빗물이 뚝뚝 흘러 수업을 할 수 없었던 초등학교의 지붕도 보수해줬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의 얼굴은 생기가 넘쳐 보였다. 도로를 빗자루로 쓸고, 돼지에 먹이를 주는 등 주민들 하나하나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 주민은 “새마을운동이 마을을 활기차게 바꿔놓았다”며 “새마을의 자주·근면·협동 정신이 주민들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2012년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산 펠리페 시와 협약을 맺고 마을 재건을 도울 것을 약속했다. 캐롤린 파리나스 산 펠리페 시장은 “경북도에서 새마을운동을 제안했을 때, 발렌카깅 마을에 반드시 필요한 운동이라고 보았다”며 “시혜적 차원의 지원이 아닌 마을 주민들의 자세와 마인드를 바꿔놓는 운동이기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경북도와 산 펠리페 시의 협약을 통해 시작됐지만, 새마을운동의 주인공은 역시 마을 주민이다. 주민들이 새마을운동을 거부한다면 새마을운동 사업의 취지 자체가 무색해질 게 뻔했다. 발렌카깅 마을의 나폴레옹 도밍고(48) 대표는 주민들을 1년여에 걸쳐 설득했다고 한다.


▎봉사단이 제공한 건축 자재로 지은 가정집의 신식 화장실.

▎주민들이 공동으로 정비한 시멘트 도로에서 한 주민이 부지런히 도로를 청소하고 있다.
그는 경북도의 초청으로 한국을 직접 방문해 새마을운동의 역사와 정신에 대해 배워 온 뒤, 마을 리더들을 불러 그 내용을 전달했다. 도밍고 씨는 “처음에는 새마을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갖던 주민도 있었으나,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달라진 한국의 성공 사례를 듣고 난 주민들 사이에서 ‘우리도 한번 해볼까’ 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설명했다.

주민 900명 참여해 마을도로도 정비

새마을봉사단이 들어오고 나서 마을의 환경에서부터 변화가 일었다. 비포장도로가 시멘트 도로로 바뀌고, 화장실이 없던 집에 새로운 화장실이 만들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을은 위생환경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마을전체 250가구 중 40가구가 집에 화장실이 없어 흙을 파서 배변을 해결했다.

건조한 날씨 속에 가축들이 흙길 위에 분뇨를 배설해놓아 동네 주민들의 건강을 위협하기도 했다. 깨끗하고 청결한 마을 조성을 위해 새마을봉사단은 건축 자재를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도로정비와 화장실 건립 지원사업을 펼쳤다. 재료는 무료로 제공하지만 주민들이 반드시 이 사업에 참여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발렌카깅 마을에서 활동하는 새마을봉사단원 손태균(64) 씨는 “‘깨진 유리창의 법칙’처럼 마을이 먼저 깨끗해져야 주민들의 의식도 바뀔 것으로 보았다”며 “도로정비와 화장실 건립이 마을의 오랜 숙원사업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700m에 이르는 마을의 흙길을 정비하는 사업에는 3개월간 9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했다. 마을 청년과 남자들이 중심이 되어 팀을 나눠 공사를 벌였다. 일부 주민은 공사에 필요한 장비와 기계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새로 닦는 시멘트 도로가 불가피하게 개인의 토지를 지나야 할 경우 도로 건설을 위해 흔쾌히 땅을 양보해준 주민도 있다.

주민 다수가 참여해 완성한 시멘트 길은 주민들에게 깨끗한 환경과 함께 자신감과 소속감을 선물해준 듯하다. 새로 도로가 포장된 이후 주민들은 시간 날 때마다 도로를 쓸고 닦는다. 루즈비민다 아나케(43) 씨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도로를 쓸고 닦을 정도로 공동으로 참여해서 만든 도로에 애정이 녹아 있다”며 “새로 닦은 도로 위에 벼를 말릴 수도 있고,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아나케 씨는 새마을봉사단으로부터 화장실 설치 지원을 받아 집 뒤뜰에 신식 화장실도 갖추었다고 한다. 아나케 씨는 “내 손으로 지은 화장실이다 보니 더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다”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던 일을 새마을봉사단의 도움을 받아 해결한 뒤로는 오히려 ‘다음 번엔 스스로도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필리핀에서 수요가 많은 돼지 키우기는 주민들의 새로운 소득 증대사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농가 소득 늘려준 양돈·양계 프로젝트

더 나은 삶을 만들고자 하는 주민들의 바람은 소득증대 사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 마을 주민 대부분이 농사를 짓지만 최근 들어서는 기후 변화로 인해 3모작이 2모작으로 줄어들어 가계 소득이 줄었다. 필리핀의 농촌에서는 값싼 외국산 쌀이 수입되면서 농가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중앙정부도 농가들의 새로운 소득원 찾기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 정부의 ‘필리핀 개발 전략’에 따라 ‘경쟁력 있고 지속가능한 농업·수산업’을 목표로 농업부문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2013년 필리핀 농림부에 할당된 예산은 73.6억 페소로 2년 전의 61.4억 페소에 비해 19.9% 증가했다.

새마을봉사단은 필리핀 정부의 농촌 살리기 사업에 발맞춰 발렌카깅 마을의 소득을 늘릴 사업을 모색했다. 그 결과 필리핀에서 수요가 높은 닭과 돼지 사업을 주민들의 소득 증대 방안으로 선택했다. 닭과 돼지는 필리핀 가정의 식탁에서 빠지지 않을 만큼 소비량이 많은 가축이다.

새마을봉사단은 높은 투자비용으로 인해 양돈·양계 사업에 뛰어들지 못했던 주민들에게 초기 투자비용을 지원해주었다. 주민들은 봉사단의 재정 지원 속에 새끼돼지와 병아리를 분양받았다.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양돈·양계 사업에 주민들이 관심을 보였고 새마을봉사단원이 나서 기초적인 사육 방식을 가르쳤다.

주민들은 팀을 나눠 ‘공동 사육·수익 공동 분배’의 협업 시스템을 구축했다. 각자가 정한 업무 분담표에 따라 일을 나눠서 하고, 판매 수익을 동등하게 나누는 새로운 수익모델을 만든 것이다.

마을 안에서는 축사 주변에서 동물들에게 사료를 주는 부녀자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돼지 축사 주변을 청소하던 이블린 파랄라(43) 씨는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돼지를 돌보기 때문에 한 사람당 일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며 “축산 경험은 부족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일하는 가운데 최적의 방법을 고민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새마을봉사단원의 조언을 구하면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득증대 사업에는 특히 주부들의 참여율이 높았다. 가장이 논에 나가 쌀농사를 짓는 동안 부녀자들은 집안일을 하면서 가축을 돌보는 것이다. 양계 사업의 경우 서른 명으로 시작했던 인원이 6개월 만에 50명으로 늘어났다. 새끼 병아리는 기른 지 40일 만에 인근 시장에 파는데 현금 순환율이 좋다고 한다. 주민들은 그들이 선출한 회계와 리더를 통해 닭을 판매하고 수익을 분배한다.


▎마을 곳곳에는 새마을정신을 상징하는 푸른색 새마을 로고가 그려져 있다.
1kg당 100페소(한화 약 2500원)에 판매되는 양계 수익은 사업에 참여한 주민들의 계좌에 그때그때 송금된다. 주민들은 이윤의 60%는 나누고 나머지 40%는 공동 계좌에 저축해 관리한다. 나중에 생길 수 있는 축사 확장이나 사료비 구입 등을 위한 자금이다. 올해 초부터 시작해 지난 5개월간 주민들은 공동계좌에 5000페소(한화 약 13만원)를 저축했다.

“새마을봉사단 떠난 후 사후관리가 중요해”

양계사업으로 ‘성공’의 기쁨을 맛본 주민들이 중장기적으로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은 양돈사업이다. 돼지의 번식력이 좋은 데다 고기 소비량이 많아 판매선을 찾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마을에 있는 4개의 양돈 축사에는 이미 20마리의 돼지가 자라고 있다. 올해 초에는 축사를 확장했는데 ‘새끼돼지를 낳아 수익을 늘리자’는 마을 주민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다.

새마을봉사단 조준형 씨는 “‘(돼지가) 자라는 대로 팔자’던 주민들이 이제는 ‘수익이 더 날 수 있도록 기다린 뒤에 팔자’고 의견을 모으는 등 수익 증대를 위해 직접 고민하고 계획하는 쪽으로 바뀌었다”며 “쌀농사에만 기대고 있던 주민들이 이제는 마을의 공동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렌카깅 마을의 새마을운동은 아직 뿌리 내리기에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총 5년의 사업 기간 동안 앞으로 비중을 더욱 늘려가야 할 분야는 교육이다. 경제적 자립을 일군 주민들이 최종적으로 관심을 가질 분야는 자녀 교육이기 때문이다. 발렌카깅 마을에는 현재 유치원과 발레카깅 초등학교, 파이테-발렌카깅 초등학교, 파이테-발렌카깅 고등학교 등 4개의 교육기관이 있다. 새마을봉사단은 마을 청소년들의 문화 활동·예체능 분야에 초점을 맞춘 교육활동을 펼치고 있다.

올해 2월에 있었던 파이테-발렌카깅 초등학교의 영화 관람은 교사와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냈다. 학생들은 봉사단과 함께 인근 도시 ‘수빅’의 한 영화관에서 <트랜스포머 4>를 단체로 관람했다. 한국에서는 흔히 이뤄지는 체험학습 활동이지만, 이곳 청소년들에게는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이 밖에도 태권도 수업, 한국문화 체험교실 등으로 문화체험 기회를 넓혀간다. 파이테-발렌카깅 초등학교 교사 로웨나 아귀노아스(31) 씨는 “새마을봉사단의 도움으로 학교 시설이 좋아지고 교육활동 분야가 다양해지는 등 아이들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학생들 중에는 한국문화에 친숙해진 나머지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하는 아이들도 생겨났다”고 귀띔했다.

필리핀 농촌마을의 새마을운동 이식사업이 차근차근 성과를 내고 있지만 해결해야 할 걸림돌들도 나타난다. 당초 한국에서 구상한 새마을운동 사업을 현지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행착오들이다. 올해 10월까지 이곳에 머물게 될 2기 새마을봉사단이 마을을 떠나고 나면 새로운 봉사단원들이 1년여 동안 이곳에 머물며 새로운 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하지만 봉사단원들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사업의 연속성이 떨어지거나, 새로운 사업모델이 현지 사정과 맞지 않아 중단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 것이다. 봉사단원인 안국승(58) 씨는 “올해 봉사단원들도 마을 도착해서야 발렌카깅의 상황을 파악하고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경청할 수 있었다”며 “새마을운동을 현지화하는 데에 사업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주도면밀하게 연구해야 할 듯하다”고 말했다.

봉사단원들이 떠나고 난 뒤 사업의 사후관리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필리핀 국립대학교 사회복지·지역 개발 분야의 마우린 파가두안 교수는 “새마을운동이 이뤄지는 5년 동안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사업을 이끌어갈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라며 “한국인들이 떠나고 난 뒤로도 마을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래서부터’ 움직이는 새마을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국에서 성공을 거둔 새마을운동이 발렌카깅 마을에서도 ‘기적’을 낳기 위해서는 앞으로 남은 기간이 중요하다. 발렌카깅 마을에 새마을운동의 맹아를 싹 틔우는 것은 어떻게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느냐에 달렸다.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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