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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⑪ - 루카치에게 소설의 영혼을, 에토 준에게 치열한 글쓰기를 배우다 

문학비평가 김윤식 

글·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 사진·지미연 기자
일본의 근·현대 사상 통해 평생의 주제인 한국문학사의 ‘근대’ 탐구…일본 ‘우익 논객’의 정치논리 속에서 ‘연약한 인간’을 발견

▎학문연구에 임하는 김윤식 교수의 준엄한 자세는 잡스러운 일상에 휩쓸려 텍스트 읽기를 게을리하는 연구자와 비평가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은 그 자체가 작품이었다. 이론인 동시에 시였고, 소설임과 동시에 이론이었다. 자신이 쓰는 모든 것이 그대로 작품이기를 욕망하는 김윤식의 태도는 루카치에서 비롯됐다. 머리에 서리가 얹힌 채, 다리를 절름거리며 아직도 그 길을 찾고 있다.

서울 서빙고동 13층 아파트 꼭대기층의 베란다에서는 한강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기막힌 전망이다. 거실을 지나 오른쪽 방이 김윤식(서울대 명예교수·78) 교수의 서재다. 이곳은 책의 바다다. 일어판 <루카치 전집>과 독어판 <헤겔 미학> 등이 눈에 들어온다. 두 겹으로 꽂힌 책장이 벽 하나를 가득 채웠다. 창가 옆 작은 책꽂이에는 누렇게 빛이 바랜 책들이 가지런하다. 그중 하나가 겉표지가 뜯겨 나간 임화의 <문학의 논리>(1940)다. 그가 가장 자주 들춰보는 책 중의 하나다.

그는 여전히 원고지를 고집한다. 작품 일부를 인용할 경우에는 책의 해당 부분을 오려서 원고지에 그대로 붙인다. 그렇게 일부를 오려낸 책은 미련 없이 폐기처분하고, 필요하면 다시 산다고 했다. 복사기나 팩시밀리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컴퓨터, 휴대전화도 쓰지 않는다. 아날로그 광장의 한복판에 그가 서 있다.

김 교수는 우리 지성사에서 전무후무한 다산성의 문학비평가로 꼽힌다. 총 180권의 저술을 남긴 그는 지난 수십 년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유명한 ‘200자 원고지 20장의 글쓰기’에 몰입했다. 비평가로 입신한 이래 200자 원고지 10만 장을 웃도는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생산했다. 하루 20장씩이라는 글쓰기의 리듬이 정식화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하루 20매란 말하자면 내 건강의 리듬 감각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나에게는 부적합했어요. 그러니까 하루 70매를 쓸 때는 사흘을 앓고, 또 하루 3매밖에 쓰지 못할 때도 또 사흘을 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20매의 분량이 나의 리듬 감각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지금은 암만해도 그렇게 할 수 없지만 그때는 그렇게 해서 몇 달씩이라도 지속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하루에 10장씩을 쓰지요.”

한국문학의 ‘근대’에 주목하다

그의 방대한 저술이 더욱 놀라운 이유는 그 대부분이 치밀한 고증과 분석이 필요한 학문적 저작이기 때문이다. 78세의 나이임에도 불구, 아직도 각종 문예지에 소설 월평을 쓴다. 평론을 쓰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번에 걸친 꼼꼼한 작품 정독이 필요한데, 여전히 그는 시계와 같은 치밀한 작업 스케줄을 준수하며 근면한 읽기와 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비평가로서의 감각 유지를 위해 그가 들이는 노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월평’은 비평의 가장 현장다움을 담보하는 형식인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월평’ 쓰기에 쏟아붓는다. 대가와 신인작가의 작품을 가리지 않고 각종 공식 지면에 실리는 숱한 작품을 찾아 읽고, 의미를 길어 올리며, 이를 문학사 안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첫 저술은 <한국근대문예비평사 연구>다.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줄곧 이 원고에 매달렸는데, 집필을 마무리한 것은 1967년 가을이다. 196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까지 모두 마치고, 1968년 서울대학교 교양과정 전임강사에 임명되기 직전까지 그는 국립도서관, 한국연구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서 자료수집에 전념했다. 바로 이 시기에 수집한 자료가 이 책의 밑거름이 된다.

집필을 마친 뒤 그는 원고 뭉치를 들고 여기저기 출판사를 기웃거렸지만 선뜻 책으로 내겠다는 곳이 나서지 않았다. 몇몇 출판사를 떠돌던 이 원고 뭉치가 우여곡절 끝에 한 신생 출판사에 의해 책으로 나온 것은 1973년의 일이다. 첫 저술의 간행은 6년이나 걸렸지만 이 공백을 통해 김 교수의 학문적 토대는 더욱 탄탄해졌다. 한국근대문학 자료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일본 유학을 통해서다. 그는 일본에서 엄청난 자료를 섭렵했고, 시론(試論) 차원에 머물렀던 원래의 <한국근대문예비평사 연구>는 수정과 증보를 거쳐 결정판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 책의 출판이 더 극심한 산고를 겪은 이유는 원고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임화·김남천·한설야·이기영·안함광·송영·이북만·조벽암 등을 중심으로 하는 ‘카프(KAFF) 연구’를 담고 있어서, 반공 이데올로기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출판사들은 그런 내용을 책으로 엮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학계와 문단 내에서 김 교수는 ‘거대한 산맥’으로 통한다. 그를 읽는다는 것은 거대한 산맥과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그 만남은 또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과의 조우이기도 하다. 방대한 분량의 학문적 성과를 ‘산맥’으로 표현한다면 그가 성취한 학문의 깊이는 ‘심연’이라는 말에 걸맞다. 그의 저서를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후학들은 헉헉 숨이 차오른다.

“돈 버는 거 그렇게 중요한 일 아니다”

그는 평생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하루에 10시간 이상 서재에 틀어박혀 연구하는 열정과 인내력을 보여줬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를 키운 것의 8할은 도서관과 책이다. 잡스러운 일상에 휩쓸려 텍스트 읽기를 게을리 하는 연구자와 비평가 모두를 채찍질하는 귀감이다. 책은 그러나 그의 자존심이면서 또한 콤플렉스다.

“몇몇 사람이 저를 비판하죠. ‘당신은 현실과 부딪쳐 살지 않았다. 그래서 2류다’라고요. 저는 그 비판을 방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맞다’고 인정합니다. 책 속에서만 현실을 보려 했죠. 그게 나니까, 그리고 그들 말처럼 2류일지 모르지만 책 읽기에 모든 것을 걸었고, 실제로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는 1936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서 태어났다. 진영은 당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가 두 개 있을 정도로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했다. 이미 그때부터 단감이 유명했다. “어릴 때부터 맛있는 단감을 먹고 자랐다”는 것이 김 교수의 회고다. 실태조사를 했던 일본인 식물학자들은 진영의 토질과 산세 기후 등을 단감재배의 최적지로 보았다고 한다. 1910년 진영읍에 약 100그루의 단감나무를 시험적으로 재배한 것이 진영단감의 효시다.

두 개의 초등학교는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이 따로 다녔던 학교다. 해방 전까지는 몰랐는데 해방 후 일본인 학교를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시설과 규모 면에서 두 학교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일본인 학교에는 과학실, 음악실, 강당은 물론이고 수영장까지 있었으니 어린 김윤식의 입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왕복 20리 길을 걸어 다녔고, 중학교 때부터는 기차로 왕복 4시간이 걸리는 마산으로 통학했다. 모두 그런 고생을 했으니까 그게 고생인지도 몰랐던 시절이다.

그의 독서 편력은 어릴 적 둘째 누나의 책을 훔쳐보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 편력은 마산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계속된다. 책 읽기를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문학에의 열정, 특히 글쓰기의 욕망을 키우게 된다.

“마산상고에 다닐 때는 복식부기와 주산을 잘했습니다. 당시 마산상고는 조선 사람들이 굉장히 들어가기 어려웠어요. 졸업 후에 은행 등에 취직이 거의 보장되는 학교였으니까요. 졸업할 때 아버님이 제게 ‘돈 버는 거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너는 사범학교에 들어가서 교장선생이 돼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휴전 직후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하게 된 것도 아버님의 뜻이었습니다.”

휴전 직후 무자비한 폭격을 맞은 서울은 폐허였다. “모든 건물이 폭삭 주저앉아 남대문에서도 청계천이 훤하게 보였다”는 회고다.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과에 입학했지만 학업에 뜻을 두기 어려웠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있었지만 수업은 문학보다 어학에 치중됐다.

사실상 문학 수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국어학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1957년 입대해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해보니 학교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엉덩이 짓무르는’ 공부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친구가 없으니 딱히 할 일도 없었고, 도서관이 영혼의 안식처가 되었다. 염색한 군복을 걸치고 커다란 군화를 신은 복학생 김윤식은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자주 목격됐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도서관은 완전 개가식이었어요. 책의 천국이랄까, 그 공간 안에 저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아무런 갈등이 없는 세계죠. 많은 책을 읽었지만 특히 미국에서 나온 온갖 종류의 문예계간지를 탐독했습니다. 서툰 영어를 극복하기 위해 사전을 찾아가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죠. 그때 나의 길은 ‘학문’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스승 부재’의 시대를 살았다.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문학을 가르치는 스승이 없었다. 석·박사 학위논문 지도교수는 국어학계의 거두일석 이희승 선생. 평생을 국어학 연구에 바친 이희승 교수가 김윤식의 문학 연구에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 불행히도 “그분에게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는 것이 김 교수의 솔직한 토로다.

<자본론>이 금서로 된 풍토에서 학문은 가능한가


▎1970년 1차 일본 유학 중 도쿄대학 중앙도서관 앞 계단에 앉아 있는 김윤식. 그는 이 도서관에서 한국 근대문학의 기원에 천착하며 일본의 사상과 문예를 연구했다.
1970년부터 1년 동안 김 교수는 하버드 옌칭 뉴프로그램 장학금으로 일본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에서 유학했다. 이때 전공을 문예 비평사 쪽으로 굳히고 근대 문예 비평사 연구에 몰입했다. 1970년과 80년, 두 차례에 걸친 김윤식의 일본행은 평생의 주제인 ‘근대’를 탐구하는 여정이었다.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짐을 잠시 내려놓은 그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일본과 일본인을 관찰했다.

도쿄대학 캠퍼스를 거닐며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의 번역을 구상했고, 도쿄대 근처 헌 책방에서 말로만 듣던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만났다. ‘비평의 신’으로 불리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평론집을 탐독했고, 평론가 에토 준의 책을 읽으며 글쓰기의 윤리를 사색했다. 많은 일본인에게 이름조차 생소한 철학자 모리 아리마사의 책을 사이에 두고 수사학과 금욕적인 글쓰기를 탐구했다. 먼저 일본은 김 교수에게 거대한 ‘문화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회고는 그 실상을 이렇게 드러낸다.

“고도성장 중인 일본의 1970년대는 ‘사상의 천국’이었습니다. 도쿄대학 구내에는 붉은 깃발이 난무했죠. 건물 복도에는 ‘XX교수는 사퇴하라’는 구호가 즐비했고, 점심시간에는 직원들까지 구호를 외치며 캠프스 안을 메뚜기처럼 뛰어다녔습니다. 아침이면 도쿄대의 상징 중 하나인 아카몬(赤門) 앞에서 장사치들이 데모용 헬멧, 죽창 등 무기를 팔았습니다. 그 유명한 야스다(安田) 강당은 새까맣게 불타서 유령처럼 남아있었죠.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 교육공무원 신분(서울대 조교수)의 여권으로 간신히 이곳에 온 제가 이런 장면에 알몸으로 노출된 겁니다.”

도쿄대학 구내 학생운영 상점에서 북한산 벌꿀을 만났을 때의 당혹감, 서점마다 넘쳐나는 마르크스주의 책들과 그에 대한 혹독한 비판서를 대할 때의 정신적 아노미를 김 교수는 감내할 수 없었다. 북한 서적이 판매되는 ‘고려서적’에는 감히 들르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는 헝가리의 비평가 게오르그 루카치를 만난다.

“도쿄대학 정문 앞에는 꽤 기품 있는 서점이 여럿있었습니다. 신간과 중고서적을 함께 팔았는데 학생이나 교수들의 장서를 수집한 것이 대부분이었죠. 지적 갈증을 심하게 느꼈던 때라 그 책들 훑어보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어느 날 서점에서 루카치의 저작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한 책 <마르크스주의와 문학>를 발견했어요. 568쪽의 이 책을 두말없이 정가대로 지불하고 누가 볼세라 한걸음으로 내 방으로 달려왔습니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의 공무원 신분인 김 교수의 앞뒤를 가로막은 것은 ‘반공법’이었다. <자본론>을 비롯한 마르크스의 저작은 금서 중의 금서였음은 물론이다. 고전경제학의 핵심 저서 중 하나인 <자본론>이 금서로 된 지적 풍토에서 과연 어떤 학문이 가능했던가.

“루카치의 문학이론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속수무책이라고나 할까요. 반공법 아래의 학문이란 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학문은 가능한 것일까? 식민지사관 극복을 지상과제로 여겼던 저를 포함한 전후세대 연구진을 절망케 한 것이 바로 그런 질문이었죠. 동시에 바로 그것이 열정의 불쏘시개이자, 전진할 에너지를 얻는 근거이기도 했습니다.”

황금시대가 지난 후 인류가 얻은 문학형식


▎1. 헝가리의 마르크시스트 비평가 게오르그 루카치. 김윤식은 1970년 일본 유학 중 루카치의 대표작 <소설의 이론>을 접하고 문학적 사상의 폭을 확충했다. 2. 일본 근대 비평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고바야시 히데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사상도 믿지 않았다.
행여나 들킬세라 좌고우면하며 하숙집으로 달려온 김 교수는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거기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첫 장이 실려 있었다. 그 유명한 첫 문장은 한편의 시와 같았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을 훤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

“하늘의 별, 지상적인 것이 아닌 세계의 울림이 거기 있었어요. 인류의 황금시대가 끝났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신이 지상을 떠났음을 가리키는 것이죠. 세상은 어둠 속으로 기울 수밖에 없고, 바로 이 순간에 등장한 것이 장편소설이라는 거예요. 어둠 속에서 스스로 갈 길을 찾는, 나를 찾아나서는 인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루카치는 부르주아의 서사양식인 소설이 근대 자본주의를 설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소설은 단순한 문학 장르가 아니라 세계를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도구인 셈이지요. 그날 밤을 새워 <소설의 이론>을 읽다가 잠시 숨을 돌렸을 때, 고마고메 역에서 도쿄대 쪽으로 가는 첫 전철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이튿날 <소설의 이론> 일역판을 구한 김 교수는 독일어 원전과 일역판을 대조해가며 이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해금된 해가 1988년이었으니 1970년에 마르크시스트 비평가 루카치의 책을 번역한 김 교수의 죄의식은 일종의 공포나 다름없었다. 그가 이 책의 번역 원고를 깊이 감추었음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 김 교수의 문학관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저작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요컨대 <소설의 이론>은 그 자체가 작품이었어요. 이론이자 동시에 시였고, 소설임과 동시에 이론이었죠. 이 이원성이 실상은 일원론 속에서 더 휘황하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빛 속에 온몸을 노출하고 싶었어요. 문예비평가이자 연구자인 내가 한 몸인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쓰는 모든 것이 그대로 작품이기를 열망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내 운명이다’라고 외치면서 말이지요.”

김 교수의 학문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사상들은 게오르그 루카치와 함께 고바야시 히데오, 에토 준, 모리 아리마사, 루스 베네딕트, 리처드 미첼을 꼽을 수 있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미첼의 <일제 하의 사상통제>는 김 교수가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1902~1983)는 일본근대 비평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추앙받는다. 국내 문학계에도 그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평가이지만, 그는 사실 일제 말기 정신총동원을 호소하기 위해 내각정보부가 문학자를 동원해 만든 ‘문예총후운동’의 주역이었다. 1940년 8월 부산·대구를 거쳐 경성에 도착해 강연을 마친 뒤 열린 환영회에는 기생들이 동원됐고, 이광수·유진오 등 조선문인협회 회원도 다수 참석했다.

그런 그가 묵묵히 술만 마시면서 “반도 청년과 꼭 무릎을 맞대고 말해보고 싶다. 그들의 기분을 슬프도록 잘 알 것 같다”고 격정을 쏟았다고 한다. 1970년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며 할복자살이라는 극단적 죽음을 선택한 <금각사>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도 그를 사숙(私淑)했다. 공교롭게도 1970년 김 교수가 일본에 체류 중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 사건이 벌어진다. 김 교수의 회고다.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 뉴스에 접한 것은 제가 일본에 온 지 3일째 되던 날이었어요. 방을 구하려고 복덕방을 헤매고, 이불과 식기 밥솥 등 가재도구 장만에 정신이 없었을 때였죠. 자위대 총감실에서 그가 자살하는 장면을 도쿄대 근처 식당 TV를 통해 보았지만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어요. 그날부터 모든 뉴스의 중심이 이 사건으로 뒤덮였음을 보고 비로소 어렴풋하게나마 이 사건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아지 기르는 시간만 빼고 써라


▎1970년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며 할복 자살한 <금각사>의 작가 미키마 유시오. 김윤식이 주목했던 문예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는 미키마 유시오의 할복을 ‘고독’이 내재한 ‘문학적 죽음’이라 규정했다.
<금각사>(1956)는 미시마의 탐미주의가 다다른 한 정점이라 할 만하지만, 작가 자신은 작품 바깥에서 ‘미(美)’라는 것에 대해 늘 경멸적 제스처를 취했다.

미시마는 <금각사>가 출간된 이듬해에 고바야시 히데오와 가진 대담에서, “고바야시 씨는 언젠가 미(美)라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게 결코 아니라고 쓰셨는데, 제가 여기서(소설 <금각사>에서)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글쓰기의 신’으로 추앙된 일본의 문예비평가 에토 준. 그는 김윤식에게 “강아지 키우는 시간을 빼고는 모든 역량을 글쓰기에 쏟아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1970년 일본 체류 당시 김 교수는 미시마의 죽음에 대한 고바야시의 해석을 주목했던 것 같다. 고바야시는 당시 일본 기자의 질문에 “저널리즘은 아무래도 다룰 수 없는 매우 고독한 것이 이 사건의 본질 속에 있다”고 답했다. 김 교수는 이렇게 해석한다.

“고바야시는 작품과 작가의 절대적 관계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미시마 사건도 철저하게 ‘문학적인 사건’으로 해석했죠. 그것을 ‘고독’으로 표현한 거예요. 미시마의 정신은 우익이라는 당파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신념을 죽을 때까지 견지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사상도 믿지 않았으니까요. 비평적 기질도 매우 특이해서 비평이란 ‘사람을 칭찬하는 매우 교묘한 기술”이란 관점을 견지했어요. 잘 쓰여진 비평문은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찬사라는 것입니다.”

김 교수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준 일본인 중엔 평전 <소세키와 그의 시대>(5부작)를 쓴 평론가 에토 준(江藤淳, 1933~1999)이 있다. 세 살 위인 에토 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그는 1999년 5월부터 자신의 처가 암으로 죽어가는 과정을 <문예춘추>지에 연재했던 처절한 글쓰기의 화신이었다. 에토 준은 살아날 가망이 없는 아내에게 병명을 알려 고통스럽게 하기보다는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아내의 병상을 지키며 고통을 함께 나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간병인의 절망적 심정을 토로하곤 했다. 부인이 죽고 에토 준 자신이 불치의 병에 걸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글쓰기란 무엇인가’라고 에토 준에게 물은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강아지를 키우라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했어요. 선문답 같은 이야기인데, 그게 강아지를 키우는 시간 외에는 모든 시간을 글쓰기에 전념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글쓰기가 전부라는 것, 나머지도 송두리째 글쓰기뿐이라는 것, 그 글의 내용이란 극우든 극좌든 또 무엇이든 조금도 중요치 않다는 것이었어요. 요컨대 강아지 기르는 시간만 빼면 숨쉬기조차도 글쓰기에 복무시켜야 한다고 하니, 진짜로 숨이 콱 막힙디다.”

김윤식의 일본 생활은 그 대부분이 읽고 생각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는 일본 평단에서 ‘글쓰기의 신’, ‘명인’으로 불리는 두세 명을 어두침침한 도서관 책상 위로 불러냈다. 김윤식 스스로가 “오만하기 짝이 없고, 그만큼 자신만만한 논리로 무장한 우익 논객의 두목이자 대문예비평가”로 형용했던 에토 준도 그 리스트에 들어 있었다.

모리 아리마사, “감각이 사상의 출발점이다”


▎‘감각이 사상의 출발점’이란 지론을 실천한 일본의 철학자 모리 아리마사. 그는 “지성이나 사상만으로 서구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 두 사람을 만나게 했는가? 왜 김윤식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상기하는 해군기(욱일승천기)에 휘말려 한 줌 재가 된 천황주의자 논객을 이토록 영접하는가? 김 교수는 에토 준의 밑바닥에서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음을 엿보았던 것이다. 그는 “어찌 그에게도 사람의 약점이 없을까 보냐. 다만 그는 이 약점을 은폐하기 위해 그토록 과잉반응의 논리로 중무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해석한다.

일본 ‘우익 논객’의 정치 논리의 틈새에서 ‘연약한 인간’을 엿보고, 글의 행간에서 ‘눈물’을 읽어내는 것이 김윤식의 도량과 감수성이다. 김윤식은 에토의 주장을 비판하면서도 그에 대한 신뢰와 지지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에토가 우익이든 강아지를 키우든, 순수한 정열을 불태우며 글만 쓰다 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영혼의 동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존경하는 또 한 사람의 일본인이 모리 아리마사(森有正, 1911~1976)다. 도쿄대 조교수이며 불문학과 데카르트 철학을 전공한 그가 프랑스 국비 장학생으로 파리에 간 것은 1953년. 장학금 지급이 끝난 뒤에도 그는 귀국하지 않고 파리에 머물렀다. 처도 자식도 버리고, 또 파리 여자와 재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부산한 삶을 살았다.

“그는 ‘감각’이 ‘사상’의 출발점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일본에는 없고 파리에만 있는 이 감각은 무엇일까. 파리는 회암석이라는 단단한 돌로 된 도시인데 이 돌멩이를 감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파리와 프랑스 이해의 시작이라고 본 겁니다. 그는 제게 노트르담 성당을 보라고 했어요. 모든 사색이 거기서 나오고 또 거기로 수렴된다는 것이었죠. 감각이란 원시적인 것인데 여기에서 하나하나 익혀 마침내 감정, 정서, 지성, 사상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지성이나 사상을 통해 유럽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파리를 떠날 수 없었던 겁니다.”

김 교수는 모리의 방대한 철학전집을 완전히 독파했다. 그가 정교한 수사학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것에는 지금도 감탄한다. 서양어 수용으로 특이한 표현을 획득한 일본어가 그를 통해 최고의 유연성을 갖추게 되었다고 본다. 김 교수가 카프(KAFF) 연구라는 전공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학자는 리처드 미첼이다. 미첼이 쓴 탁월한 저서가 바로 <일제 하의 사상통제>다. 김 교수는 이 책을 심혈을 기울여 번역했는데, 번역 자체가 공부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미첼은 미국 미주리대 교수로 부인이 일본인입니다. 일본 정치를 연구하면서 그가 느낀 것이 도대체 일본이라는 나라는 정보공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내무성은 그래도 나았지만 사법성의 태도는 지금까지도 철옹성이죠. 미첼은 놀라운 정력으로 그 담벽을 하나하나 허물었습니다. 한국 근대문학 속 카프 연구의 최대 걸림돌이 바로 전향 문제인데, 법체계와 전향의 관계를 국가 운영자(내무성과 사법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의 저작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학위논문이자 처녀작인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를 대폭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처음부터 김 교수의 끌림은 이광수를 향했다.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국학’을 설립하라는 사명이 주어진 1960년대의 젊은 연구자로서 그는 1970년 첫 도일 당시부터 일제강점기 유학생의 근대체험을 공부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이광수의 발견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본을 향한 1980년 그의 가방에는 10권짜리 이광수 전집이 들어 있었다.

샤를 보들레르여, 나는 얼마나 잘못 살았는가


▎김윤식은 춘원 이광수의 ‘고아의식’을 끈질기게 천착하며 그의 전 생애를 복원한 ‘불후의 명작’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완성했다.
“식민지 조선의 3대 천재가 벽초 홍명희,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인데 홍명희는 대지주에다 유명한 친일가문이었고 최남선의 집안 역시 황실보다 돈이 많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에 비해 가난한 40대 파락호가 삼취(세 번째 부인)인 무당 딸에게 얻은 아들인 이광수는 열한 살에 고아가 되었어요. 가진 것이라곤 달랑 붓 한 자루뿐이었던 그의 삶은 아비를 찾는 고아에서 스스로 아비가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1981년부터 월간 <문학사상>에 연재하기 시작한 ‘이광수와 그의 시대’는 5년에 걸쳐 원고지 4600장으로 마감된다. 이광수의 ‘고아의식’을 끈질기게 천착하면서 그의 전 생애를 복원한 불후의 명작 <이광수와 그의 시대> 3부작은 그렇게 탄생했다. 결국 미시마 유키오가 그랬듯 한 작가에게 글쓰기란 세계와의 관계 맺기다. 그런 점에서 글과 인간, 시대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고향인 경남 진영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까마귀와 붕어, 메뚜기, 솔개를 속이고 등에 몇 권의 책을 짊어지고 길을 떠난” 뒤 “머리에 서리가 얹힌 채 다리 절름거리며 그 의의를 찾아 헤매는” 현재에 이르렀다. 그는 2012년에 펴낸 단행본 <내가 읽고 만난 일본>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샤를 보들레르여, 나는 얼마나 잘못 살았는가.
내 청춘 캄캄한 뇌우 속에 잠겼으니
여기저기 때로 눈부신 햇발 구름을 뚫고,
천동(天動) 비바람 모질게도 휩쓸었도다
내 정원에 몇 남지 않은 새빨간 열매여!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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