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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야설천하⑧ 정치학자 황태연의 ‘주역’ 편력기 

초월적 지식, 영험한 지혜에 탐닉하다 

글 조용헌 원광대 불교학 박사, 사진 지미연 월간중앙 기자
2002년 재야의 젊은 주역학자 만나 본격 개안…삶에 대한 통찰이 깊어질수록 천착하게 되는 ‘진인사대천명’의 철학

▎2012년 <실증주역>이란 해설서를 쓴 황태연 교수는 학문적 스펙트럼이 넓어 마르크시즘에서 신비주의까지를 모두 포괄한다.



동국대학교 외교학과의 황태연(黃台淵, 1955∼) 교수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점(占)을 칠 줄 알기 때문이다. 점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재미있고 필자로서는 반갑다. 현대인은 점(占)을 모른다. 현대교육이 탈주술화(脫呪術化)의 방향으로 왔기 때문이다. 현대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곧 주술적 사고에서 탈피하는 것을 의미했다. 주술(占)에서 멀어질수록 지성적인 인간으로 여겨졌다. 점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비지성적인 인간인가?

황 교수는 서울대 외교학과 3학년 재학 중에 외무고시도 합격한 인물이다. 독일에 10년 동안 유학 가서 괴테대학교에서 마르크시즘으로 박사학위(‘최근 기술변동 속에서의 지배와 노동’)를 받았다. 유학생활도 아르바이트 하면서 접시만 닦은 게 아니다. 3년 6개월 간 〈한겨레〉 통신원으로 있으면서 당대의 독일 정치인들과 주류사회의 지성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말이 통신원이지 사실은 특파원 급이었다.

독일 통일 과정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당시 콜 총리를 비롯한 당대의 인물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유학생의 경험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접시만 닦고 지내면 식견이 좁다. 돈 있고, 권력도 있고, 학문도 있는 주요 인사들과 밥도 먹어보고, 차도 마셔보고, 토론해 보아야만 내공이 생긴다.

‘그 사람의 풍채가 이렇구나’, ‘말을 이런 식으로 하는구나’, ‘이런 카리스마가 있구나’,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하는구나’, ‘상대를 이렇게 배려하는구나’, ‘음식 취향과 옷 입는 스타일은 이렇구나’, ‘이런 집에서 사는구나’ 등을 배우는 게 내공이 된다. 일급 인물들을 만나봐야만 자신감도 생기고 배짱도 생긴다. 쫄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사람이나 나나 크게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내공이고 공력 아니겠는가.

외국 유학생활을 하더라도 학교와 지도교수만 만나고 다니는 것하고, 신문사 통신원으로 활발하게 현지의 주류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것하고는 경험의 폭과 넓이에서 차원이 다르다. 외국 유학을 제대로 하려면 현지의 중심인물들을 만나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다 인연이고 팔자다.

좌파에서 신비주의까지 포괄하는 스펙트럼

황 교수하고 대화를 나눠보니 학문세계의 폭과 깊이가 남다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외국어 실력이다. 독일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 러시아어, 거기에다가 희랍어 실력도 있다. 이들 국가의 고전을 자유롭게 해독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희랍어 문헌도 읽는다고 해서 놀랐다. 그 변화가 심하고 까다롭다고 정평이 난 희랍어는 어려운 언어라고 소문 나 있다. 로마에서 사용된 라틴어는 주로 법률용어에 집중되어 있지만, 철학용어는 대부분 희랍어로 되어 있다고 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희랍어로 쓰여 있다. 희랍이 망한 뒤에도 약 800년 동안이나 희랍어가 로마문명에서 유통되었다. 유럽에서는 라틴어가 고급스런 언어였지만, 따지고 보면 라틴어보다 희랍어가 더 무게 있는 언어였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학문적인 저작들도 희랍어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이 직접 쓴 신약성서는 희랍어였던 것이다. 성경에 보면 “부자가 천당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낙타는 원래 밧줄이었다고 한다. 히브리어로 밧줄과 낙타는 발음이 같다고 한다. 이걸 희랍어로 번역하면서 희랍어 번역자가 밧줄을 낙타로 번역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밧줄이 낙타로 변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낙타는 희랍어 번역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희랍어의 영향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라틴어로 되어 있는 고전을 꼽는다면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투스의 저술들이다. 이들을 읽기 위해서는 라틴어도 알아야 하지만, 서양문명의 원조에 해당하는 그리스 고전을 읽기 위해서는 당연히 희랍어를 알아야 한다. 황 교수의 희랍고전에 대한 섭렵은 〈주역〉을 연구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어떤 도움이 될까? 서양에서 신탁(神託)이 유행했던 시대는 희랍이다. 기독교가 전 서양을 석권하기 이전의 원형문명이 희랍문명이고, 희랍에서는 신탁이 유행했다. 희랍의 그 많은 신전이 다 무엇인가? 신에게 앞일을 물어보는 신탁소(神託所)가 아닌가. 신탁은 점(占)이다. 점은 주역(周易) 아닌가!

황태연은 2012년에 〈실증주역〉(개정판)이라는 주역 해설서를 썼다. 독일에서 좌파철학의 오야붕인 마르크시즘을 전공한 학자가 주역을 썼다. 그 스펙트럼이 좌파에서 신비주의까지 모두 포괄한다.

우리같이 희랍어도 모르고 독일어도 모른 채로 계룡산과 지리산만 왔다 갔다 하면서 공부한 동양학 전공자는 잘못하면 밥 굶게 생겼다. 황태연은 동서고금 통반장 다 하는 교수다.

구한말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선생 집안의 후손들이 머리 좋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 집안의 황 교수를 보니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주역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신비와 합리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가? 대립적인 것인가, 아니면 보완적인 관계인가?

“인간 삶이 합리만 가지고 다 설명될 수 있다고 보는가? 자기 계산대로 인생이 전개되던가? 아니다. 인간은 합리적 지식도 필요하지만, 초월적 지식도 필요하다.

인간의 유전자(DNA) 속에는 오랜 진화 과정에서 습득된 정보들이 축적되어 있다. 후천적으로 체득한 지식도 있지만, 선천적으로 이미 습득되어 있는 정보들이 우리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고 전제해야 한다. 이처럼 무의식에 쌓여 있는 정보들은 초지성주의적 정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주역은 인류가 진화 이래로 자기 무의식에 쌓아온 유전적 정보들을 끄집어내다 쓰는 도구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64괘다.”

“나이 오십에 주역 배운다면 큰 과오 없을 것”

이걸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전생에 자기가 습득한 정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생도 어디 한두 번인가. 수천 번, 수만 번의 전생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러한 수많은 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터득하고 축적한 정보의 양은 방대할 것이다. 이 방대한 정보의 양이 소멸되지 않고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인과론(因果論)이요, 환생론(還生論)이다. 금생에 얻은 정보를 여기에다 비유하면 그야말로 태평양 바다의 한 바가지 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이미 자기 내면에 전해 내려오는 엄청난 정보의 바다를 가지고 있다. 이걸 묻어두지 않고 어떻게 꺼내 쓰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꺼내 쓴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미래의 일을 미리 아는 일이다. 우리 인생에 미리 알기만 해도 엄청난 도움이 된다. 이 부분을 독일의 칸트식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되는가?


“경험지식도 아니고 합리적 지식도 아닌 이 초월적 지식에 기초한 이념과 도덕, 자유와 예지(豫知), 종교와 신앙을 실천이성이라고 했다. 순수이성의 영역과는 구분하였다. 말하자면 전생에 습득해놓은 정보와 지성은 실천이성인 것이다.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구분이 칸트 비판철학의 핵심 요지다.”

동양에서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한다. 인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과 분석, 이성의 영역이다. 대천명은 이것을 넘어서는 하늘의 영역이다. 하늘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였다. 주역은 이 ‘대천명’의 영역인가?

“보통의 유교 경전들은 ‘사람의 지모(智謀)’와 ‘인모(人謀)’를 논한다. 주역은 이러한 보통의 유교 경전들과 차원이 다르다. 초월적 지식, 정보체계인 것이다. 주역은 ‘귀모(鬼謀)’를 논한다. ‘귀신의 지모’와 관련된 일종의 초월적 ‘유교신학’이라고 해야 맞다. 주역은 문자로 전해진 세계 유일, 세계 최고(最古)의 신탁서(神託書)이다. 주역은 4천 년 전 동양의 태고대(太古代)에 창안되어 오늘날까지 거의 원형 그대로 전래된 ‘초월적 지식과 영험한 지혜’의 운영체계다.

따라서 동아시아인의 삶과 국가를 지배하는 근본정신은 태극음양과 건곤감리(乾坤坎離)의 사괘(四卦)가 그려진 우리나라 태극기가 웅변한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정신의 원형은 주역에서 비롯되었고, 이 역리(易理) 속에 응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동아시아에서 주역을 모르는 자는 진정한 동양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에 무지한 자를 진정한 서구인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이 젊었을 때는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이 다 풀릴 줄 안다. 그러다가 중년이 넘어서면서 인간이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구나,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이 한계를 느끼는 시점에 주역이 들어오는 것 아닌가 싶다. 주역을 공부하려면 어느 정도 나이와 세월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과거 유학자들도 나이가 들어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통찰이 깊어질수록 주역에 천착했다. 사람들은 혈기왕성한 청년기를 넘으면 ‘인모’를 감당할 수 없는 숱한 일을 겪고 ‘귀모’의 작용을 감지한다. 이때부터 겸손해진다. ‘진인사대천명’이 시작된다. 대개 50세쯤이면 ‘대천명(待天命)’을 지나 ‘지천명(知天命)’의 욕구가 생긴다. 자기 운명에 대해 ‘기다리는 것’보다는 ‘알고 싶은 것’의 단계로 진입한다. 공자도 ‘내게 수년이 더 있어 나이 오십에 주역을 배운다면 가히 큰 과오가 없을 것이다(加我數年, 五十而學易, 可以無大過矣)’라고 기원했다. 마침내 ‘50이 되어 천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고 말했다.”


▎황태연 교수는 1994년 주역 공부에 입문했고, 2002년 우연히 재야의 주역학자를 만나 공부에 탄력이 붙었다.



공자는 신학의 세계를 버리지 않았다

공자가 주역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는 몇 세쯤 인가?

“대략 40대 중반부터 주역 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이 각고의 주역 공부를 통해 50세가 되어 천명을 깨달았다. 공자는 이 시기에 나름대로 어떤 영적인 깨달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공자는 앎(知)의 단계를 세 가지로 보았다. 지물(知物), 지인(知人), 지천(知天)이다. 지물, 지인은 사람이 노력하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지천은 다르다. 하늘에 물어보아야 안다. 곧 점을 쳐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는 현세적 사고를 하였지만 마지막 신학의 세계를 버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공자가 50세에 자기의 운명, 즉 천명을 과연 알았을까? 이건 그냥 하는 말이지 진정으로는 몰랐을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공자는 50대 중반부터 고생이 시작된다. 이른바 풍찬노숙의 주유천하, 즉 집도 절도 없는 14년의 낭인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공자는 50세에 자신이 앞으로 십 몇 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끼니거리와 그날 잠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상갓집의 개’ 같은 팔자라는 것을 미리 알았을까? 혹시 모르지 않았을까?

“공자가 주역공부를 어느 정도 해서 40대 후반쯤에 뽑은 괘가 ‘화산려(火山旅)’ 괘다. 56번째 괘다. 려(旅)는 나그네라는 뜻이다. ‘나그네’라는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공자가 직접 이 괘를 뽑고 나서 그 해석을 제자에게 부탁했다. 자기 괘는 자기가 해석하는 것보다는 옆에 있는 사람이 해석하는 것이 비교적 잘 맞는 수가 있다. 자기 괘는 아무래도 자기감정이 투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가 ‘려괘’를 공자에게 해석했다. ‘선생님이 덕은 많이 갖추었으나 등용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이다. 이후로 50대 중반부터 공자는 천하를 떠돌아 다녔다. 나그네 생활을 한 것이다. ‘화산려’는 산 위에 불이 붙는 형상이다. 이 산 저 산에 불이 붙는다. 공자가 여러 제후를 만나면서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은 이 산 저 산에 불을 붙인 형상과 같다. 불만 붙였지 실속은 없었다. 결국 등용은 못되었다. 공자는 자신이 등용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고 보여진다. 그게 50세에 지천명이다. 벼슬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공자는 이후의 행적에서 등용되려고 발버둥치지 않았다.

말년에 고국에 돌아가서도 계강자 세력에게 결코 아부하지 않았다고 본다. 공자가 뽑은 또 하나의 괘가 ‘산화비(山火賁)’다. 다른 사람이 공자에게 뽑아준 괘다. 이 괘의 뜻도 좋지 않다. 내면적 구상은 무궁무진 화려하나 장애물에 막혀 밖으로는 실현하지 못하는 괘다. 50세 이전의 공자 인생을 설명해주는 괘라고 여겨진다. 공자는 말년에 자신을 알아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오직 하늘만이 알아준다고 생각했다.”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 대통령의 전략적 배경에는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이 있었고, 그 전략은 황태연 교수가 제시했다. 왼쪽부터 김종필·김대중·박태준.
괘가 들어맞아야 주역이 살아 움직인다

황 교수의 설명을 듣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공자 같은 성인도 매사가 풀리는 일이 없었으니, 우리같은 범부야 일이 좀 안 풀린다고 해서 그렇게 코 빠뜨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앞일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은가도 생각해볼 일이다. 그 앞일이 좋은 쪽보다는 안 좋은 쪽으로 정해져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을 때보다는 안 좋을 때가 항상 문제 아닌가.

괘를 뽑아서 미리 안 좋은 상황이 온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모르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달라진다. ‘올 것이 왔구나’를 미리 알고 있다가 불행을 당하면 그래도 담담해지지 않겠는가. 모르고 받으면 억울함과 당혹감이 더 클 것이다.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차이가 있다. 불행이라도 마음속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마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못 받아들이는 데서 인간의 고통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공자도 ‘화산려’ 괘와 ‘산화비’ 괘를 뽑아서 미리 알았으니까 좀 더 담백하게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괘를 뽑아 미리 안다고 해서 앞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달라지는 셈이다.

황태연이 주역에 입문한 시기는 1994년이라고 한다. 40세 무렵이다. 대학에서 동양정치사상의 과목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주역 공부를 시작했다. 여러가지 역학 연구 서적을 섭렵했다. 그러나 헤매기만 했다. 주역이 영험한 책이고, 주역을 공부하면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런 기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책은 책이고 나는 나였다. 책과 내가 따로 놀면 재미가 없다. 책에서 나온 내용이 나의 실존적 삶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이론과 실천이 서로 맞물려 돌아갈 때에 공부하는 보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동양경전 공부의 경지는 자득지미(自得之味)이다. 스스로 얻어가는 재미가 있어야 공부가 신난다. 책과 실생활이 아무 관련이 없으면 공허하다. 주역의 영험한 세계에 들어가는 문을 찾지 못하다가 2002년에 우연히 재야의 주역학자를 만나게 되었다. 시서(蓍筮)에 밝은 원주의 젊은 역학자였다. 당면 과제에 대한 괘를 뽑아서 이게 들어맞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현실 문제에 주역 괘가 들어맞아야 주역이 살아 움직인다. 아무리 주역 내용을 달달 왼다고 해도 적중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1994년부터 시작한 주역연구의 가속도가 이때부터 붙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직접 괘를 뽑아보았다. 상당히 적중하는 체험을 했다.

황 교수는 책상물림이 아니다. 총탄이 난무하는 정권의 한 복판에서 장자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바로 김대중 정권 때다. 김대중 정권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던 중요한 프레임이 바로 ‘DJT 연합’이었다. 김종필, 박태준까지 같이 연합해야만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전략이다. 김대중이 선거에서 이겨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전략적 배경에는 이 ‘DJT’가 있었다. 이 전략을 황태연이 제시한 것이다.

처음에 DJ는 김종필, 박태준과 연합을 하지 않으려 했다. 소극적이었다. 이를 황태연이 설득해 바꿨다고 한다. 자기 이론이 강한 DJ가 다른 사람 말을 별로 안 듣는 편인데, 젊은 사람 황태연의 ‘지역연합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부터 황태연은 김대중 정권의 비중 있는 책사로 활동했다. 독일의 마르크시즘도 잘 알고 동양의 주역도 잘 아는 인재라고 김대중은 여겼던 것이다.

정권의 한복판에서 직접 국가의 의사결정 과정을 지켜보고, 그 결정과정에서 치열하게 난타전을 벌이는 주요 인사들의 행태를 관찰한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눈앞에서 봐야만 확신이 생긴다. 확신이 생겨야 차분해진다. 주역만 연구한다고 해서 경륜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피를 튀기면서 치고 받는 긴박한 권력 현장에서 인간 군상들을 접해보아야만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식견이 생기는 것이다.


1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발의를 주도했던 조순형 당시 민주당 대표. 황 교수가 뽑은 조 대표의 주역 운세는 ‘왕이 출정하니 적장을 벤다’는 것으로 나왔다. 2 2004년 3월 탄핵소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노무현 대통령. 당시 황태연 교수는 노 대통령의 탄핵 가능성을 점치는 주역 괘사를 언론에 발표해 뉴스의 초점 인물로 떠올랐다.



주역으로 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황태연은 2004년 역사의 피가 튀기는 난타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이 그것이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 신문지상에는 ‘적장의 목을 벨 운세다’라는 주역의 괘사가 보도된 적이 있었다. 이는 노무현 탄핵을 주도하던 입장에서는 매우 바람직한 점괘였다. 당시에 ‘적장의 목을 벨 운세’라는 괘를 뽑은 인물이 바로 황태연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임기 중에 대통령이 탄핵되는 매우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언론의 조명을 받은 최초의 점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괘가 단순히 미아리 골목의 역술가가 내린 점괘라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겠지만, 이 점괘를 내놓은 인물이 김대중 정권의 장자방으로 알려진 전략가 황태연이 내놓은 점괘였다는 점에서 뉴스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조선왕조도 아니고 한국 현대사에서 주역의 점괘가 대통령의 진퇴문제에 이처럼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개입되는 상황은 이색적인 사건이었다.

이 괘의 내용으로 보아서 2004년 당시 탄핵 직전에 30번째 괘인 중화리(重火離) 괘를 뽑았던 것 같다. 리괘의 6번째 효인 상구(上九)에 보면 ‘王用出征 有嘉 折首獲匪 其醜無咎’라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상황을 말해달라.

“2004년 조순형 민주당 대표의 연운은 리괘의 초효와 상효였다. 그는 2004년 3월 13일 헌법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발의했고, 국회는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이 괘는 조순형 대표의 운세를 보기 위하여 내가 뽑았던 것이다. 상구의 구절에 대한 해석은 해석자마다 각기 다른데,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왕이 출정을 하니(王用出征) 가상한 일이 있으리라(有嘉)’. ‘절수획비 기추무구’는 ‘적장을 베고(折首) 그 추종하는 비적들을 붙잡고(獲匪) 그 나머지 무리는 봐준다(其醜無咎)’는 뜻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에 2개월간 유폐되었다(折首). 청와대의 수석과 비서관들도 2개월간 꼼짝할 수 없었다(獲匪). 그러나 노무현을 따라 민주당을 배신하고 탈당해 나간 열린우리당 철새들과 각부 장관은 무사했다(其醜無咎).”

그러나 노 대통령은 2개월 후에 다시 복귀하지 않았나? 결과적으로 이 괘는 틀린 것인가?

“아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되었더라면 근신했을 것이다.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에 자살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30번째 괘인 중화리 괘에 대한 해석은 너무나도 미묘하고 복잡한 정치적인 맥락과 얽혀 있다. 그 얽힌 맥락은 지금까지도 풀어지지 않고 지하에서 진행 중이기 때문에 황 교수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괘를 풀이하는 사람의 입장은 항상 제 3자적인 입장이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감정의 투사 없이 객관적인 풀이가 가능하다.

당사자가 되어 버리면 감정이 들어간다. 감정이 들어가면 효사의 해석에 있어서 과불급(過不及)이 생긴다. 황 교수는 노 대통령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민주당의 장자방 입장에서 볼 때, 자기를 대통령이 되도록 밀어준 민주당을 배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무현 탄핵을 추진한 괘인 중화리괘는 어떤 괘인가? 〈실증주역〉에 보면 황태연이 이 괘를 뽑아서 점을 쳐본 실제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꽤 긴 내용이지만 인용해보면 이렇다.

“2005년의 일이다. 능력 있는 친척에게 큰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여 고민하던 사람이 이 효를 얻었다. 효를 받은 뒤 그는 고민 끝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소송준비를 다 끝내고 빚쟁이를 찾아가 상환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소송을 냈다. 법원은 원금과 이자를 다 상환하라는 판결을 내렸다(王用出征有嘉). 그러나 결국 빚의 70%만 받을 수 있었다.(折首獲匪). 나머지 30%는 받지 못했지만(其醜無咎), 그는 빚쟁이가 엄청난 수전노였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공권력을 써서 성공한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청과물도매업으로 돈을 잘 버는 남편을 둔 부인이 이렇게 번 돈을 노름으로 다 날려버리는 남편을 두고 이 효를 얻었다. 이 효를 얻은 뒤 그녀는 남편의 뒤를 밟아 도박하우스를 알아내 경찰에 신고를 했다. 노름판 참가자 전원은 붙들려 갔다(王用出征有嘉), 그러나 경찰은 주모자와 상습범만 구속하고(折首獲匪), 그 남편을 포함한 초범들에 대해서는 훈방조치를 했다(其醜無咎).

강력계 형사가 범죄 후 도주 중인 범인들을 잡을 수 있을지를 두고 원주(原州)의 역학자 백오(白烏) 선생이 괘를 뽑았더니 이 효가 나왔다. 이 효를 얻고 나서 그는 같이 도주한 자들 중 부하를 체포했다. 백오가 그 이후 상황을 추적하지 못했으나 범죄수사의 법칙상 그 형사는 붙잡힌 이 부하들을 풀어준다고 설득해서 이 자의 협조를 받아 주모자와 잔당을 일망타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은 어떤 38세 여성이 정식 수술 치료법과 대체의학 요법을 두고 고민하다가 수술하면 어떨지를 두고 백오 선생 점괘로 이 효를 얻었다. 백오는 반드시 병원에서 정식으로 수술을 하라고 권했다. 그녀는 대체의학을 포기하고 정식수술을 택했고, 병원은 수술 날짜를 잡아 수술을 집도했다(王用出征). 수술은 젖꼭지와 이것에 따른 유방 전체부위를 절개해 떼어내는 것이었다(折首獲匪). 수술은 대성공이었고(有嘉), 수술 후 암이 완치되어 나머지 몸은 건강했다(其醜無咎).

이 효를 얻은 측이 법적 소유권자에 맞서는 반대세력이면 아주 흉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우자동차 인수 문제가 오락가락 하던 차에 대우 근로자들이 이를 두고 점을 쳐서 이 효를 받았다. 대우는 결국 미국회사 GM에 인수되었고, 이에 따른 감원조치를 앞두고 극심한 노사갈등이 일어났다. 노조위원장과 간부들 및 적극 가담자들은 전원 해고되었고, 그 외의 나머지 근로자만 일부 살아남았다. 이 해고, 복직문제는 아직도 미결상태다.

비공식 조치나 사사로운 조치를 취하는 경우에는 아주 흉하게 끝난다. 2005년 어떤 부인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이 부인은 이 살림집을 쳐들어가려고 벼르다가 이를 두고 점을 쳐서 이 효를 얻었다. 이런 경우는 사적인 문제이므로 경찰을 부를 수는 없지만, 시댁 어른들의 권위를 정식으로 활용해야 하는 때였다. 그러나 그녀는 성급하게 친정동생을 데리고 쳐들어가 살림을 부수고 여자를 때렸다. 그러나 이것을 알게 된 남편으로부터 그 부인은 뺨을 얻어 맞고, 부부관계는 더 멀어졌다. 이 일로 인해 결국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실증주역〉 상권, 556∼557쪽)

황태연은 일상의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직접 점을 쳐보았다. 점을 쳐보아야만 영험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물론 점괘가 현실에서 안 맞으면 집어치워버리지만, 어느 정도 적중하기 때문에 계속 연구하면서 붙들고 있는 것이다. 점이 어느 정도 맞는다는 데에 묘미가 있다. 황태연은 주역 64괘마다 자신이 점을 쳐보아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 결과와 과정을 책에 모두 수록했다. 이것을 황태연은 서증(筮證)이라고 한다. 점을 쳐서 증명하는 방식이다.

그 다음에는 고증(考證)과 논증(論證)의 방식이 있다. 고증은 주역의 내용에 나오는 여러 가지 한자와 쓰이는 용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의 한자에 대한 고고학적, 고문헌학적 해자(解字)와 고대의 한문용례·풍속과 의례·사건과 배경 등에 대한 역사적 고증이 필요하다. 고증의 방법은 갑골문과 고대유물에 새겨진 고대 한자의 고고학적 해명과 〈시경〉 〈서경〉 〈설문해자〉 〈이아(爾雅)〉 〈주례(周禮)〉 〈춘추좌전〉 등 고대 문헌의 용례에 대한 문헌학적 탐구도 필요하다. 주역의 경문 곳곳에는 하·은·주 3대의 역사·의례·풍속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가방끈’과 영험 능력을 겸비한 쌍권총

문왕·무왕·주왕(紂王)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알아야 경문을 제대로 해석해낸다. 이것이 고증의 방법이다. 그 다음에는 논증의 방법이 있다. 다른 사람의 주역 해석과 대조해서 허와 실을 가려내는 방법이다. 우리말 주역 해석서들을 비롯하여 한문, 중국어, 영어, 독일어로 쓰인 동서고금의 여러 역학서를 국제적으로 참고하여 각주를 달았다. 각주를 달면서 비교분석을 하는 것이다.

황태연의 또 다른 저작 가운데 2011년에 초판이 나온 〈공자와 세계〉 총 5권이 있다. 이 가운데 3권이 필자의 흥미를 끌었다. 3권에는 주역의 점괘와 델피신탁의 세계를 비교해 놓은 장이 있다. 황 교수가 희랍어를 공부한 보람은 이러한 주제를 요리할 수 있다는 데서 느꼈을 것이다.

희랍 원전을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델피는 고대 희랍에서 가장 영험한 신전이었다. 신전 뒷산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병풍을 친 이 신전의 터는 지금 보아도 영험함이 서려 있다. 델피신전에서 이루어진 신탁점이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있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선거와 투표에 의해서 국가대사가 결정된 것이 아니라, 델피의 신탁점 내용에 의존해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신탁점은 인간적 지혜로 답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답하는 데 쓰였고, 신탁점에서 나온 내용들은 백성의 권위를 해칠 하등의 도전적 요소도 없었다고 본다.

신탁점을 친다고 해서 그것이 백성의 이익과 상충되지 않는다고 고대 희랍인들은 생각했다는 말이다. 점괘도 결국 백성이 더 잘살자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 아닌가. 아테네의 민회(民會)와 델피신전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였다. 델피의 사제들은 점을 칠 수는 있었지만, 그 점괘에 따른 결정은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사제들은 점괘만 뽑아주었고, 그 점괘를 가지고 현실에서 실천하거나 결정을 내리는 측은 민회에 앉아 있는 인민들이었다고 한다.

델피신전은 메시지만 던지고, 이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는 민회의 몫이었다. 당시 아테네에는 장군들과 민회에 자문해줄 뿐만 아니라 시민 개인들에게도 자문해주는 ‘복관(卜官)’과 ‘신탁해석가(크레스몰로고이)’가 있었다. 이 신탁해석가는 아테네에서 대단한 영예를 누렸다고 한다. 델피신전이 아테네의 국정에 참여한 것이나, 주역이 고대 중국의 국가대사에 관여한 것이나 따지고 보면 같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황 교수는 이 챕터를 넣은 것 같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점은 국가대사에 관여했던 것이다.

그동안 관찰해 보니까 가방끈과 영험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먹물을 많이 먹으면 영험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반대로 영적인 자질이 발달된 사람들은 학문과 가방끈의 세계와는 거리가 있다. 이 두 차원을 모두 갖추기는 어렵다. 쌍권총을 차기가 어려운 것이 인생이다. 내가 보기에 황 교수는 이 두 개를 겸비하였다. 매천 황현을 낳은 황씨 집안의 DNA가 21세기에 이런 식으로 발현되는가 보다.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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