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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書齋 | 일요일은 침묵과 멈춤으로 짠 피륙이다 

<언제나 일요일처럼> 노동보다 신성한 <게으름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면! 

장석주 전업작가




언제나 일요일처럼 톰 호지킨슨 지음| 남문희 옮김 필로소픽 | 1만3800원
일요일은 이미 토요일 저녁 무렵에 시작한다.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의 날들을 우리는 노동과 수고로 짜인 시간들로 채운다. 휴식과 놀이를 유예한 채 파고(波高)가 높은 삶의 고단한 시간들을 헤쳐나가는 까닭에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위험들과 싸우는 대항해의 시간이다. 수요일이나 목요일쯤 일에 지쳐 아직 도래하기엔 먼 일요일 쪽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어둠에 감싸인 채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저 너머에서 빛나는 등대처럼 보일 것이다.


게으름의 즐거움 피에르 쌍소 외 지음 | 함유선 옮김 호미 | 7000원
마침내 돌아오는 일요일은 주중과는 다른, 차라리 월화수목금토로 이어지는 질서와 리듬에서 뚝 떨어져 나온 시간이다. 일요일 아침에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늦잠을 잘 수도 있는데, 그 늦잠은 일요일이 다른 요일과는 다른 리듬을 품고 있는 날이며, 모든 이 에게 게으름이 합법화되는 치외법권 지대임을 뜻한다.

크고 느리게 커브를 도는 시간 저 너머로 무뚝뚝한 도시가 서 있다. 발가락 한두 개가 없는 비둘기가 많은 도시에서 일요일에는 바깥나들이를 하는 대신에 파자마를 걸치고 어슬렁거리며 집에 머무는게 좋다. 집에 머물며 육체적 수고를 줄이고 ‘무위(無爲)’라는 사치를 만끽하려면 전화기의 코드를 아예 빼놓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은둔을 예찬하는 사람들은 집이 가장 편안한 자유를 위한 공간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집안은 최대한 장식성을 배제하고 단출하고 소박한게 좋다. 1889년 시인 에드워드 카펜터(Edward Carpenter)는 소박한 거처를 꿈꾸었다. “기다란 창문과 책꽂이 말고는 벽에 아무 장식이 없고, 소파에는 파랑과 노랑 줄무늬의 손으로 짠 린넨 커버가 씌워져 있으며, 참나무 의자에는 골풀깔개가 덮여 있다. 집안일을 별로 할 필요가 없는 정도로 단출한 공간이다.”

게으름이 합법화된 치외법권의 시간

주말 밤에 과음한 탓에 지끈지끈 머리가 아픈 숙취라든가,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든가, 멀쩡하던 발톱이 살을 파고드는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일요일은 대체로 평화롭다. 국도에서 자동차 접촉 사고가 있었고, 로드킬 몇 건이 보고되었지만, 어느 날이나 늘있는 일이다. 하늘에서 비행기가 떨어지지도 않고, 배가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8월의 날씨는 화창하고, 벌들은 꽃들 위에서 붕붕거리며, 울울창창한 숲은 바람에 한가롭게 흔들리고 있다.

산·사막·바위·바다·별들은 제자리에 있다. 무엇보다도 돌들이 함부로 날아다니거나 움직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돌들은 인생보다도 나이가 많고 삶이 끝난 후에도 차갑게 식은 행성에서 살아남았다가 운이 좋다면 그곳에서 다시 깨어날 것이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돌들은 죽음도 기다릴 필요 없고 표면 위로 모래나 폭우 또는 되밀려오는 파도, 태풍, 시간이 스쳐 지나가도록 하는 일밖에는 아무 할 일도 없는 것들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인간―“약간의 충격, 약간의 타격에도 터질 수 있는 혈관… 자연 그대로의 상황에서는 무방비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고, 운명의 여신이 내리는 온갖 모욕에 고스란히 노출된, 허약하고 부서지기 쉽고 발가벗은 육체.”―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빌리 조엘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평화롭고 고요한 일요일의 금쪽같은 순간들을 느긋하게 음미할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일요일은 침묵과 멈춤을 날실과 씨실로 짠 피륙이다. 일요일은 ‘정직’과 ‘단순성’을 계명으로 삼는 종교로 개종하기에 좋다. 그 일요일에 우리는 별식을 즐긴다. 별식을 먹는다는 것은 배고픔이라는 가벼운 욕구를 해결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먹는 것에서 관능적인 기쁨이 솟구쳐 오르고,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즐거움의 원천을 발견하는 일이다. 일요일에는 먹고 마시고 즐겨라! 왜냐하면 일요일의 나는 수난과 질곡을 짊어지고 골짜기를 건너는 노동의 희생양이 아니고, 풍요와 게으름의 왕족(王族)이기 때문이다.

노동을 내려놓은 시와 철학의 시간

배가 부르니 나른한 잠이 눈꺼풀 위에 쌓인다. 낮잠은 노동의 유예에서 비롯된 한가로운 휴식이다. 아울러 행복으로 성큼 다가서는 이완이며, 삶의 최고 정점에서 즐기는 사생활이다. 물론 낮잠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노동과 산업의 이윤을 우선시하는 독단적 이념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낮잠이란 무익하게 흘려 보내는 시간 낭비로 폄하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학적인 문화에서 살아가는 게으름꾼들은 한층 여유로운 지중해 연안 국가들과 그들의 낮잠 관습에 질투 어린 시선을 던질 때가 많다.” 일요일에 빛깔이 있다면, 그것은 ‘하양’이다.(장 프랑소와 뒤발) 일요일의 낮잠은 하얀 잠이다. 하얀 잠의 시간 속에서 세속의 일들, 세속의 관계들 속에서 입은 내상(內傷)들을 치유한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장 프랑소와 뒤발은 일요일을 “기항지며 피난처”라고 했을 것이다. 우리는 떠들썩하고 분주한 세속의 시간에서 일요일 안쪽에 서린 성스럽고 숭고한 평화의 시간 속으로 달려간다.

일요일은 ‘사교’와 ‘식사’와 ‘놀이’로 짜인 시간이다. 냉방장치가 잘 된 영화관에서의 영화관람, 찐 옥수수를 물어뜯고 얼음을 채운 홍차를 마시며 TV로 야구중계 시청하기, 반려견과 뜰에서 어슬렁거리기, 식구들과 풍성한 점심 식사하기, 갈대로 엮은 햇빛 가리개를 내려뜨린 실내에서 낮잠에 빠지기와 같이 일손을 놓고 자유롭게 보내도 좋은 시간들, 수고와 봉급으로 맞바꾸지 않으면서 오롯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 그것이 일요일이다.

일요일을 장식하는 세 가지의 중요한 국면들, ‘사교’와 ‘식사’와 ‘놀이’ 위로 위안과 휴식이 점점이 박힌다. 가장 긍정적인 일요일은 노동이라는 지루한 산문이 아니라 시와 철학의 시간으로 완성되는 시간이다.

일요일의 정오가 지나면 시간은 속도를 올린다. 햇빛으로 넘치던 환한 대낮이 물러서고 빠르게 땅거미가 내린다. 키 큰 나무들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길게 드리워지는 바로 그 시각 일요일이라는 등대가 밝혔던 불빛은 서서히 사라진다. 일요일 저녁에는 많은 것들에게 끝이 예고되면서 알 수 없는 근원에서 솟아난 멜랑콜리로 가득 찬다. 월요일의 날씨를 예고하는 저녁 뉴스가 나올 무렵 느림과 감속의 시간들은 서둘러 막을 내린다.

임박한 월요일의 전조(前兆)들로 수선스러워지고, 노동과 수고가 불러오는 짙은 불행이 속수무책으로 번진다. 내일 아침 일터로 나가야 한다는 초조함이 우리 뒷덜미를 움켜쥔다. 우리는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어쩌면 나는 일요일의 끝자락에서 서성거리며 영원회귀의 가장자리를 가만히 만져본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일요일의 평화, 일요일의 부활은 완전히 가망 없는 꿈이 되고 만다.

아아, ‘일요일’이라는 한 편의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한밤중이 캄캄한 것은 일요일이 끝날 때, 달콤한 밀회가 끝나고 낙원에서 등을 떠밀려 나올 수밖에 없는 자들의 비탄과 절망이 그토록 짙기 때문이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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