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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야설천하⑩ | 맨땅에서 플라톤의 정수 깨달은 황광우 - 일리아스에서 마르크시즘까지… 플라톤으로 서양철학사를 꿰뚫다 

도피생활 동안 몸으로 깨달은 강호학(江湖學)… 3천 년의 서양정신사 일목요연하게 정리 

사진 오상민 월간중앙 기자
‘강호학’이란 자득지미(自得之味)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바람을 반찬으로 먹고, 이슬을 이불로 덮고 자면서 세계를 유랑해봐야 한다. 그 진수는 유랑에서 겪는 처절한 고독과 먹물이 배합될 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황광우는 12년의 도피생활 동안 어떻게 강호학을 깨쳤는가?




인문학자 황광우는 “호메로스는 서양정신의 출발점이자 모태”라고 말했다.
유교 선비들 사이에서 하는 말이 있다.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위인지학’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를 가리킨다. ‘위기지학’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 공부이다. 인(人)은 타인을 가리키고, 기(己)는 자기를 가리킨다.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는 위인지학에 속한다고 하겠다. 위인지학은 벼슬과 자리에는 도움이 되지만,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 공부가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수록 허무하다.

그렇다면 위기지학은 무엇인가? 시험 합격용 공부가 아니라면 어떤 공부가 위기지학이란 말인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세상과 떨어져 있어도 근심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공부’가 바로 위기지학이 아닐까. 위인지학은 쉽지만 위기지학은 어렵다. 위기지학은 자득지미(自得之味)가 있어야 가능하다. ‘스스로 느끼는 재미’ 말이다. 공부를 하면서 ‘아하! 이게 이런 이치구나, 옛날 사람들도 이런 고민을 했구나, 나는 애매하게 생각했던 부분을 어쩌면 이렇게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하는 깨달음이 내가 생각하는 ‘자득지미’이다. 자득지미를 느끼지 못하고 하는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이걸 좀 더 거칠게 정의하자면 위인지학은 강단학(講壇學)이요, 위기지학은 강호학(江湖學)이다. 강단학은 강의를 들어줄 학생과 칠판 그리고 월급이 보장된 학문이다. 그 대신 강단 밖으로 나가면 생존이 어렵다. 강단이 밥그릇이다. 강호학은 글자 그대로 학교와 강단을 떠나 강호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이다.



존재의 궁극적인 거점, 어머니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은 그리스의 여러 섬들을 방황하며 사상의 은사가 될 만한 사람을 물색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 사진·중앙포토

강호학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코스가 풍찬노숙(風餐露宿)이요, 유랑(流浪)생활이다. 바람을 반찬으로 먹고, 이슬을 이불로 덮고 자면서 세계를 유랑해봐야 한다. 머리도 좋고 감수성이 풍부한 인간이 이러한 유랑생활을 거칠 때 작품이 나온다. 색깔이 바래면서 원색에서 파스텔 색조로 변한다. 유랑에서 처절한 고독을 겪기 때문이다.

고독! 이것이 있어야 지하 3층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성찰이 진행된다. 먹물과 유랑이 배합될 때 강호학의 진수가 숙성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당사자는 비록 ‘팔자 쎈’ 인생을 원망하고 한탄할 때도 있겠지만, 본인의 쎈 팔자가 주변 독자들과 구경꾼들에게는 볼만한 구경거리와 서물(書物)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먹물의 본질이 뭔가? 결코 꺾이지 않는 호기심이 아닐까. 밥줄 떨어졌다고 끊기는 호기심은 호기심이 아니다. 돈이 되든 안 되든 지속적인 세계와 인간에 대한 호기심. 이 호기심을 일생 동안 놓지 않는 인간이 바로 먹물이 아닐까?

황광우(黃光祐·57). 광주 변두리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6층 연구실 겸 서재에서 그를 만나보니 강호학의 한 경지를 개척했다. 희랍고전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 플라톤 철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스스로 맨땅에서 일파를 이룬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다니면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980년 5·18부터 지하생활을 시작했다. 현상수배범이 된 것이다. 1992년까지 도피생활을 했으니 그 기간이 12년이다. 12년이나 도망 다니면서 살았다. 이것도 기록이다. 23세부터 35세까지 청춘시대를 현상수배범으로 살면서 처절한 고독을 겪었을 것이다.

그는 80년대 후반 주대환, 노회찬과 함께 ‘인민노련’3인방으로 유명하다. 90년대 중반부터는 광주에서 학원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었다. 초등학생도 가르치고, 중·고교 학생들에게 논술도 가르쳤다. 그런가 하면 엄마들, 교사들과 함께 동서양 고전을 읽고 공부하는 모임도 운영해왔다.

그 사이에 틈틈이 책도 펴냈다.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한국 경제 소개, 1985),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근현대 100년 역사 정리, 1986),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예수·석가·공자·마르크스의 사상적 편린을 추적, 1990), <다시 생각하는 사회주의>(소련 공산당 몰락의 역사적 배경 추적, 1994), <레즈를 위하여>(공산당선언해설서, 2003), <철학콘서트1>(동서양 철인들 사상기행, 2006),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1987년 6월 항쟁의 전사, 2007), <철학콘서트2>(2009), <철학콘서트3>(2012), <철학하라>(2011), <사랑하라>(소크라테스의 삶과 사상, 2013) 등의 저서를 낸 저술가이기도 하였다.



12년이나 도피생활을 하면서 붙잡히지 않았단 말인가? 도피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이 어느 때인가?

“돈이 떨어졌을 때다. 이때 불안해진다. 더 이상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장치가 이 세상에서 전부 사라져 버렸다는 절망감이 엄습한다. 마지막으로 공중전화를 할 수 있는 100원짜리 동전 한 개가 남았을 때 그 불안감은 극도에 다다른다. 지상의 마지막 거점인 이 동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때 본능적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수배 받던 깡패들은 이 순간이 되면 거의 틀림없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게 돼 있다. 깡패나 운동권이나 모두 어머니는 존재의 궁극적인 거점이다. 물론 어머니 전화는 수사기관에서 감청을 하고 있기 마련이고 전화를 걸면 바로 체포된다. 나는 이 절박한 순간에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도피 중인 깡패는 1년을 넘지 못하고 잡힌다.”



도피생활 동안에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전남도청 맞은편 건물인 광주일보사 빌딩 3층의 백제학원에는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가 있었다. 광주일고 2년 선배였던 지병주였다. 이 선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선배의 사무실에서 오전 9시에 보자는 약속을 했었다. 약속한 그날 9시가 되어서 백제학원 맞은편, 나는 YMCA 앞에 서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선배에게 곧 건너간다고 말을 해놓고선 그냥 발길을 돌려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 정범도(지병주의 친구)라는 분이 지병주를 만나러 백제학원에 들어가다가 잠복 중인 형사들에게 붙잡혔다. 다짜고짜 정범도를 붙잡은 형사들은 인근의 동부경찰서로 데려갔다. ‘너 이름 뭐여? 황광우지?’ ‘아니요, 저는 정범도인데요’ ‘이 자식 거짓말하지 마. 너 주민등록증 내놔봐’ ‘여기 있어요. 저는 황광우가 아니잖아요’ ‘이 자식 이거 가짜구만. 너 또 주민증 위조했지. 바른대로 대’하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발로 무릎을 가격했다. 이빨 서너 개가 우수수 나갔다.



호메로스는 서양 정신의 출발점이자 모태


호메로스의 신들은 인간과 대등하게 관계를 맺는 존재다. 이들은 인간과 함께 먹고, 마시고, 사랑한다.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보이는 아크로폴리스의 전경과 중앙에 위치한 파르테논 신전. / 사진·중앙포토

당시 주민등록증 위조는 공문서 위조였다. 공문서 위조는 징역 2년형을 받았다. 무려 3일간을 경찰서 취조실에서 시달렸다. ‘내 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 대질신문하게 해줘라. 그러면 알 것 아니냐’는 정범도의 요청에, 마침내 형사들은 어머니를 호출했다. ‘아이고, 범도야.’ 어머니의 탄식을 듣고서야 형사들은 비로소 정범도를 풀어주었다. 내가 그 상황에서 약속대로 백제학원으로 들어갔다면 곧바로 붙잡혔을 것이다. 그때 어떤 예감이 작동했던가. 지나고 생각해 보니까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황광우의 경험에 의하면 대중적 저변이 넓어야 오랫동안 은신할 수 있다. 깡패는 저변이 좁아서 오랫동안 은신할 수 없다. 1989년에 한국사회주의 노동자당 준비위원회(지하 전위정당)를 결성했을 때 주대환과 황광우는 잡히면 사형을 선고받게 돼 있었다. 조직을 지키기 위해 끝없는 경찰의 체포망을 뚫고 다닌 거다. 위의 일화는 대략 이 시기의 일이다.



왜 지금 이 시점에 희랍 고전인가? 희랍 고전은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희랍 고전은 읽고 이해하는 데에도 골치 아픈 분야 아닌가?

“50대 초반부터 희랍어 공부를 시작했다. 5년 정도 걸리니까 희랍어로 된 성경은 그럭저럭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됐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는 서양문명의 근원이다. 근원이라는 의미는 기독교 이전의 오리지널 사상이란 말이다. 호메로스는 서양정신의 출발점이자 모태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하고는 어떻게 되는가? 흔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결합이 서양정신이라고 하지 않는가?

“기독교는 플라톤의 프레임 위에 예수라는 신성을 얹어놓은 거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인간 예수로 대치시키면 기독교가 된다. 사도 바울도 희랍철학에 정통한 희랍철학자였다. 신약성경은 모두 희랍어다. 신약성경이 희랍어로 쓰여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독교의 바탕은 희랍사상이라는 말이다. 기독교의 사상적 바탕은 플라톤 사상이다. 플라톤에의해 희랍사상은 완성되었고, 그 이후로 전개되는 기독교, 중세신학, 칸트, 헤겔, 마르크스, 니체는 모두 플라톤의 변주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광우는 호메로스에 나타난 희랍고전의 특징이 낙관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트로이 전쟁에서도 나타나듯이 인생은 하루살이다. 내일 모래밭에 코 박고 죽어 있을 전사들이 오늘 고함치고 분노하고 싸우고 웃고 시시덕거리는 것이 인생이다. 호메로스는 이 삶의 부조리를 냉정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인생의 비극적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삶에 대한 쾌활함을 잃지 않는다. 비극을 넘어서는 쾌활함에 호메로스의 세계관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삶은 3천 년 전의 트로이 전쟁과 동일하게 질곡과 고통 속에 있다. 우리는 호메로스적 낙관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면 카잔차키스의 소설 <희랍인 조르바>가 호메로스의 전통을 20세기에 계승한 작품이기도 하다.



플라톤과 호메로스는 어떤 관계인가?

“맹자를 읽어보면 <논어>가 인용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시경>이 인용된다. 맹자에게는 <시경>이 훨씬 중요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플라톤의 저작들을 읽다 보면 끊임없이 호메로스가 인용된다. 플라톤은 끊임없이 호메로스를 인용하면서도 또한 비판한다.

호메로스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다. 예를 들면 호메로스의 신들은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신과 인간이 서로 협상도 하고 흥정도 한다. 인간들이 신에게 투정을 부리면 신이 들어주기도 하고, 반대로 신이 질투를 해서 인간에게 불행이 닥치기도 한다. 신과 인간이 대등하게 주고받는 관계이기도 하다. 신이 절대적으로 위에서 군림하면서 일방적으로 인간에게 지침만 내려주는 관계가 아닌 것이다. 이걸 상대주의적 세계관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윤회론은 ‘주유천하’의 결과물

상대주의의 장점은 ‘절대 신(神)’을 상정하지 않으므로 도그마에 붙잡히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겠지만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플라톤이 생각했던 호메로스의 단점은 어떤 것이었는가?

“좋은 질문이다. 상대론적 사유의 약점은 도덕의 부재에 있다. 호메로스의 부도덕한 신을 질타한 이가 소크라테스다. 인간의 삶을 이끌어주는 도덕이 서려면 절대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문제를 모른다고 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모른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공자의 태도와 비슷하다. 공자는 ‘미지생(未知生)인데 언지사(焉知死)’라고 했다. 생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소크라테스도 이러한 태도를 견지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해결하지 못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윤회(輪回)한다고 설파했다. 육신이 죽어도 정신은 윤회한다. 이 윤회에 대한 부분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차이점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닌가?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어떤 계기가 있었는가? 통상 제자는 스승 이야기를 술이부작(述而不作) 하기 쉬운데 말이다.

“플라톤은 28세까지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운다. 플라톤이 28세 때 소크라테스가 70세 나이로 죽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스승이 죽자 플라톤은 방황한다. 희랍은 방황하기에 좋은 지형 아닌가. 섬이 많다. 이 섬들은 오랜 역사와 문화적 전통의 뿌리가 깊은 섬들이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않은 오지 섬이 아니다. 희랍은 육지보다도 오히려 주변에 널린 섬들이 더 풍부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었다.

희랍의 섬들은 지정학적 위치도 좋다.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 터키 쪽의 소아시아, 그리고 지금의 이탈리아와 스페인 쪽까지 바다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 아닌가. 플라톤은 이러한 섬들을 방황한다. 혹시 이러한 섬에 사상의 은사가 될 만한 사람이 있는가를 물색하고, 다양한 풍물도 접하는 주유천하의 과정이었다고 생각된다.”



플라톤이 인간이 죽은 후 정신이 남아서 윤회한다는 생각은 이러한 주유천하 과정에서 섭취한 것인가?

“그렇다. 피타고라스학파와 연결되면서 윤회의 아이템을 받아들인 것 같다. 피타고라스가 요주의 인물이다. 도사 중의 도사요, 학자 중의 학자가 바로 피타고라스였다. 단순한 수학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피타고라스에 대해서 좀 자세히 설명해달라. 우리는 단순히 수학자로만 알고 있다. 플라톤에게 실질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니까 매우 흥미롭다.

피타고라스를 가르치던 탈레스가 ‘너는 이집트로 가거라. 거기 가서 공부해라!’는 당부를 했다. 당시에 이집트의 고대도시는 이집트 3천 년의 영적인 경험과 학문이 축적돼 있는 도시였다. 당시 이집트의 테베는 3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오래된 도시였으므로 당연히 문명의 깊은 온축(蘊蓄)이 저장된 도시였다.

피타고라스는 테베에 유학을 갔다. 이집트의 신관(神官)과 학자들로부터 수천 년간 내려온 천문학·의학·수학·건축학 등을 배웠다. 그런데 마침 그 무렵에 바빌론이 이집트를 공격해 들어왔다. 테베에 침입하여 이집트의 엑기스인 신관·학자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피타고라스도 같이 포로 신세가 되어 바빌론으로 잡혀갔다고 한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피타고라스는 명상·음악·수학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는 아카데미를 열었다. 피타고라스의 초상화. / 사진·중앙포토
피타고라스의 수행법은 명상과 음악, 수학

당시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도 장난이 아니다. 당시에 이미 4천~5천 년의 전통을 축적한 최고의 문명 아닌가. 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 근처가 바빌론의 중심지였다고 전해진다. 이집트 테베에서 포로로 잡혀 온 학자들과 바빌론의 학자들이 서로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교류가 이뤄졌다. 이집트와 바빌론의 노하우가 융합된 것으로 보인다.

황광우의 피타고라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피타고라스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운 좋게도 세계 최고문명의 엑기스를 접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그런 다음 피타고라스는 다시 고향 사모스섬으로 돌아오게 된다. 32년 만의 귀향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고향인 사모스 섬에서 서당을 열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반응이 신통치않았다.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지금의 이탈리아 남부인 크로톤에서 아카데미를 창설한다.

“그런데 그 아카데미가 좀 독특하다. 요즘의 불교승단(僧團)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할까.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사유재산을 전부 아카데미에 헌납해야만 입학이 이뤄졌다. 그리고 육식을 멀리하고 채식을 해야만 했다. 흥미롭게도 채식중에 콩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왜 콩을 먹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주된 수행방법은 명상·음악·수학이었다. 영혼을 맑게 정화하는 방법은 이 세 가지를 익히고 반복하는 것이었다. 영혼을 정화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수학의 연마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수학은 우주의 질서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방법이었고, 우주적 질서를 보다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신비로운 학문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수학은 도 닦는 방법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피타고라스 학파는 비밀교단이었다. 그 교의를 밖으로 유출하는 것을 금지했고, 비밀이 아주 엄격하게 지켜졌다. 그런데 그 아카데미의 회원가운데 하나인 필로라우스라는 인물이 생활고 문제 때문에 학파의 교리를 기록한 책을 외부로 유출시켰다. 돈을 받고 팔아먹은 것이다. 이 책을 산 사람이 바로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출신 성분이 좋았다. 돈이 많은 귀족이었으므로 아무리 비싼 값을 부르더라도 지식욕에 불타던 플라톤은 책값을 지불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사후 12년을 방황하다가 드디어 이 피타고라스 학파의 비밀문서를 입수한 뒤로 비약적인 사상적 발전을 이룬다. 여기에서 성립된 사상체계가 ‘이데아’ 설이다. 사람이 죽어도 이데아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그 어떤 불멸의 절대정신이라고나 할까. 사람이 죽어도 윤회를 하고 반복된 윤회를 하며 영혼을 정화시키면 이 이데아로 다가간다. 결국 윤회에서 벗어나 이데아에 합치되는 것이 삶의 목표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제시함으로써 스승의 사상으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간다. 호메로스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혁파하고 절대주의적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이다.”




황광우는 “플라톤의 사상은 뉴턴·칸트·헤겔 ·니체 등 근대 철학자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이데아(Idea)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달라. 매우 복잡한 개념 같다.

“플라톤은 현실세계(This world)를 생성, 소멸이 반복되는 환상이라고 본다. 불교의 ‘기신론’(起信論)으로 설명하면 생멸문(生滅門)에 해당한다. 반복되지 않는 절대세계(That world)가 있고 이것이 이데아이다. 진여문(眞如門)에 해당한다.

이데아에는 아름다움의 이데아, 올바름의 이데아고 있고, 좋음(goodness)의 이데아가 있다. 이 세가지 이데아의 배후에는 신(神)이 깔려 있다. 이때의 신은 인격적인 신이 아니다. 진리로서의 신이다. 불교로 치면 법신(法身) 개념과 같다. 플라톤이 말한 신은 이신론(理神論)이다.”



기독교가 플라톤 사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연결고리가 뭔가?

“우주적 진리로서의 이신(理神)을 예수로 환치시킨 것이다. 예수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다. 예수를 이신자리에다 집어넣음으로써 이데아를 인격신으로, 그리고 역사적 실존 인물로 대치시킨 셈이다.”



인간 예수는 플라톤 이데아의 대치물

이신을 예수로 환치시킴으로써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

“대중화라고 볼 수 있다. 이신과 그 작용인 이데아는 감을 잡기가 어렵다. ‘우주적 진리 그 자체’는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으로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다. 이걸 인간 예수로 바꿔 놓으면 엄청난 실감이 온다. 육신을 가지고 있고 감정도 가지고 있는 예수가 말하는 것과 추상적 원리가 말하는 것은 대중들이 느끼기에 그 체감온도가 현격하게 다르다. 이데아를 예수로 바꾼 것은 대성공이었다.”

플라톤의 신은 호메로스의 신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렇다. 호메로스의 신은 인간의 동반자 개념이지만, 플라톤의 신 즉 이신과 이데아는 절대적 신이다. 단 플라톤의 신은 인격적 개념이 아니지만, 기독교의 예수는 인격적 신이다. 이데아의 배후에 있는 신의 이름을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라고 불렀다. 플라톤은 이 데미우르고스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언어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다.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뮈토스(Mythos)이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를 ‘좋음’의 제작자라 했다. 이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세계는 좋음의 세계일 것이다. 저 질서정연하게 우주가 운행할 수 있도록 데미우르고스는 ‘세계영혼’을 제작했다. 이 ‘세계영혼이 생명체에 깃들고 인간에게 깃든다.”



플라톤의 이러한 사상체계가 근대 계몽주의 시대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과학자인 뉴턴은 플라톤의 프레임 위에 있었다. 뉴턴은 우주를 시계에 비유한다. 시계 제작공이 있듯이 창조주가 있다. 그런데 시계 제작공이 시계를 만든 다음엔 시계가 태엽의 상호작용으로 움직이듯 우주가 창조된 다음엔 우주 안의 여러 행성과 항성의 상호작용으로 굴러간다. 이게 뉴턴의 세계관이었다. 종교와 과학을 짬뽕시킨 거다.”



플라톤과 마르크스도 관계가 있는가?

“관계 있다. 플라톤의 철인왕 개념이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세계의 보편적 입장을 이해한 인물이 철인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혁명이론과 노동자 계급의 힘을 결합하면 천하무적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 이론이 전위정당 개념이다. 플라톤 개념으로 보면 왕세자에 해당한다. 전위정당이 철인왕의 전 단계인 왕세자인 것이다. 전위정당 개념은 철인왕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본다. 철인왕은 엘리트주의를 깔고 있다. 전위정당도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엘리트주의를 깔고 있다.”



뉴턴하고 칸트도 연관이 있다고 하는데, 양자는 서로 어떻게 연결고리를 갖나?

“뉴턴은 수학으로 세계를 설명한 사람이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전파하다 고초를 겪지만 뉴턴은 교회와 타협한다. 뉴턴에 의하면 시계는 하느님이 만들었다. 그 이후의 작동원리는 태엽과 톱니바퀴의 원리에 의하여 작동된다. 그 원리가 만유인력이다. 뉴턴은 창조주의 존재를 전제했기 때문에 탄압을 피해갈 수 있었다. 뉴턴의 과학혁명을 칸트가 철학적으로 계승했다.

‘순수이성비판’은 이성의 한계를 네 가지 지적한다. 인간의 이성이 다루어서는 안 되는 네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철학이 이 문제를 다룸으로써 난해한 형이상학으로 전락하게 됐다는 것이다. 첫째, 인간의 자유의지. 둘째, 인간의 영혼. 셋째가 사후세계, 넷째는 신이다. 이 네 가지는 이성적 사유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이니까 다루지 말자는 게 칸트의 요지이다. 이성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은 종교에 맡기는 거다. 결과적으로 철학과 종교의 영역을 분리한 셈이고, 바꿔 말하면 철학을 종교로부터 해방시켰다.”

뉴턴의 과학혁명을 칸트가 철학적으로 계승했다. ‘순수이성비판’은 이성의 한계를 네 가지 지적한다. 인간의 이성이 다루어서는 안 되는 네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철학이 이 문제를 다룸으로써 난해한 형이상학으로 전락하게 됐다는 것이다. 첫째, 인간의 자유의지. 둘째, 인간의 영혼. 셋째가 사후세계, 넷째는 신이다. 이 네 가지는 이성적 사유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이니까 다루지 말자는 게 칸트의 요지이다. 이성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은 종교에 맡기는 거다. 결과적으로 철학과 종교의 영역을 분리한 셈이고, 바꿔 말하면 철학을 종교로부터 해방시켰다.”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변주(變奏)일 뿐


황광우는 “기독교의 바탕이 희랍사상이며 예수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역사적 인물로 대치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앨프레드 헨델의 ‘선한 목자’ 초상을 담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 사진·중앙포토

서양철학사에서 칸트에서 헤겔로 가는 골목길은 복잡한 것인가?

“헤겔은 칸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갔다. 신을 필요로하지 않는 무신론자였다.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은 신의 대체 개념이었다. 세계사는 절대정신의 구현이다. 인간의 역사는 이 ‘정신의 자기전개 과정’이다. 소크라테스가 이성의 발견자였다면 헤겔은 이성의 완성자가 된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절대정신의 경제학적 표현이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손은 신의 대체 개념인 것이다.”

니체는 어떤가?

“신은 죽었다고 분명하게 규정해버렸다. 절대적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 니체의 가슴속엔 호메로스가 맥동치고 있었다. 니체가 보기엔 소크라테스주의와 기독교가 호메로스적 세계의 낙천과 힘, 건강성을 파괴했다. 니체는 유럽의 정신을 호메로스로 회귀시키지 못해 발광한 인물이다”

마르크스의 족보는 어떻게 되는가?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에 해당한다. 전투적 무신론자이다. 헤겔에게 절대정신이 본(本)이고 물질이 말(末)이라면 마르크스에겐 물질이 본이고 정신이 말이다. 헤겔의 본말을 완전히 뒤집었다. 유물론을 인간 역사에 적용시켜 세계사를 해석했다. 태초에 하느님이 있는 게 아니다. 태초에 절대정신이 있는 게 아니다. ‘태초에 먹고 살기 위해 사냥하고 채집하는 애비·어미가 있었다’는 게 마르크스의 관점이다. 마르크스는 태초에 생산활동이 있었고, 그 다음에 잉여물질을 가지고 다툼이 생겨났다. 그래서 분배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태초에 실천이 있었다’고 말한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의 제자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또 무엇인가?

“마르크스에다 니체를 짬뽕한 것이 사르트르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사르트르의 명제에서 실존은 인간의 삶이고 본질은 신이다. 신이나 절대정신과 같은 이념이 있기 전에 살며 사랑하고 투쟁하는 인간의 삶이 먼저 있다는 평범한 얘기다. 그런데 신이나 이데아와 같은 절대 기준이 없으면 유럽인들은 절벽에서 추락하는 공포에 빠진다. 어렸을 때 꿈속에서 그런 추락의 공포를 겪지 않는가? 깨어보면 식은땀이 난다. 허무주의에 사로잡히는 거다. 이 허무를 인정한 위에 인간의 행동원리를 설명하려 했던 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아닌가? 인생의 의미는 신 혹은 이념이 보증해주는 게 아니다. 나의 삶의 의미는 내가 선택하고, 실천하고, 내가 책임지는 거다.”

황광우는 강호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서양정신사 3천 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호메로스에서 소크라테스가 나온 이유. 플라톤에서 마르크스까지 그 인과관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선대의 묫자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넌지시 물어보니 증조부 묘가 해남읍 북일면 갈두리 바닷가의 언덕 밭에 있다고 한다. 그 묘 앞으로 문필봉이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묘 앞에 멀리 바다 건너 완도의 주봉(主峰)이 보인다. 그 주봉의 형상이 말안장처럼 생겼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후손의 문필력은 조상과 후손의 신인합발(神人合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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