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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정권이 안고 있는 8개의 폭탄 - 덜컹거리는 아베노믹스, 총리 건강문제도 심상찮다! 

불안한 원전 재가동 문제, 주변 4국(남·북한, 중·러)과의 관계도 난항… 최근 개각은 7년 전 ‘친구 내각’의 복사판으로 비난 여론 일어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집권 후 최대 위기를 맞은 아베 총리의 유일한 탈출구는 납치자 문제의 해결을 통한 북·일관계 개선이다. 하지만 올가을 북한이 제출 예정인 조사보고서에는 새로운 납치피해자 생존자 소식은 없을 것 같다는 비관론이 대두된다. 길흉생사의 기로에 직면한 아베는 과연 출구를 찾을 것인가?

9월 3일 아베 총리(맨 앞줄 가운데)는 각료 12명을 교체하는 대폭 개각을 단행했다. 새로 출범한 내각의 대신들과 기념촬영을 하며 심기일전을 다짐했지만 아베 총리의 전도는 험난해 보인다.

“이번 개각은 ‘실행, 실천’ 내각이다. 이제부터가, 강한 일본을 되찾는 싸움의 제2장이다!”

9월 3일 오후 6시 반, 도쿄(東京) 나가타초(永田町)의 총리관저에서 기자회견에 참석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이렇게 소리 높여 주장했다. 2012년 12월 26일에 발족한 아베(安倍) 정권은 국내정치도, 외교도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단 한가지에서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것은 정권 발족일부터 9월 3일까지 617일 동안 18명의 각료 중 단 한 사람도 사임하지 않았다는 기록이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각료로 취임하면 주변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때문에 소위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 자칫 조심성 없이 거만해지기 쉽고 스캔들이 터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고액의 뇌물을 받는 금권스캔들이 터지거나, 여성스캔들이 터지면서 상대 여성이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만천하에 폭로하거나, 역사문제에서 우익적인 발언을 해서 한국이나 중국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당하거나 해서, 한 사람 또 한 사람씩 각료직에서 해고를 당하는 것이다.

9·3 개각으로 자민당 내 원로급 불만 증폭

일본정치사에서 최단 기록은 1988년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내각에 입각한 하세가와 다카시(長谷川峻) 법무대신(장관)이 리크루트사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것이 발각돼 사직한 것인데, 그의 재임기간은 불과 4일에 그쳤다. 최근년의 사례를 꼽자면 2011년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에서 하치로 요시오(鉢呂吉雄) 경제산업각료가 9일 만에 물러난 것이 가장 짧다. 후쿠시마(福島) 원전에 시찰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둘러싼 기자단을 뿌리치기 위해 “나는 지금 죽음의 도시에 다녀왔다. 당신들에게 오염물질을 묻혀버리겠다”며 위협한 것이 빌미가 됐다. 이 부적절한 발언에 후쿠시마현의 난민들이 거세게 반발했고, 그는 어이없이 사임하게됐다.

아베 정권도, 2007년의 제1차 집권 시절엔 해프닝이 속출했다. 예를 들면, 마쓰오카 도시카츠(松岡利勝) 농림수산상이 신축한 지 얼마 안된 아카사카(赤坂)의 국회의원 공관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야쿠자에게 살해됐다는 소문이 일기도 했지만, 진상은 오리무중이다. 후임인 아카기 노리히코(赤城德彦) 농림수산상도 취임 2개월 후에, 얼굴에 온통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났다. 그는 기자단이 그 이유를 묻자 대답 대신 사임해버렸다.

그에 반해 현재의 아베정권은 617일간에 걸쳐, 18명의 각료 중 단 한 사람도 사임하지 않은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한국의 박근혜 정권이 이미 수차례에 걸쳐 여러 명의 각료를 교체한 것을 비춰봐도 아베정권은 대단히 안정된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베 총리는 개각을 단행하여 12명이나 되는 각료를 대폭으로 교체한 걸까? 거기에는 ‘적극적이유’와 ‘소극적 이유’가 있다. 우선 ‘소극적 이유’를 말하자면,자민당 내의 소위 ‘가스 제거’를 위해서다. 그동안 오랫동안 자민당 내에서는 ‘중의원 5선, 참의원 3선이면 각료취임’이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런데 2009년에서 2012년까지 민주당 정권이 3년 3개월 동안 계속되고, 2012년 말의 중의원선거로 자민당이 대승한 덕분에, 이 ‘자격조건’을 만족시키는 자민당내의 각료 미경험자가 59명이나 쌓이는 결과를 낳게 됐다. 환갑을 맞은 아이사와 이치로(逢澤一郎) 중의원 운영위원장 등 은 9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각료가 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자민당 내에서 59명의 불만이 ‘아베 끌어내리기’의 마그마(magma)가 돼서 언제든 분출될지 모르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59명 중에서 9월 3일에 운 좋게 각료 자리를 꿰찬 사람은 8명에 불과했다. 9선 의원인 아이사와 이치로 의원을 필두로, 51명이나 되는 베테랑 의원은 여전히 눈물을 머금은 것이다. 이 ‘탈락조’에 포함된 한 의원은 입술을 깨물며 다음과 같은 원망을 토로했다.

“8월에 아베 총리의 모친으로 ‘대모’라는 별명을 가진 요코(洋子) 씨가 몽골여행을 했다. 그 정보를 우연히 전해들은 A 의원은 일부러 몽골까지 급히 달려가 85세인 요코 씨의 자잘한 심부름을 부지런히 돌봐드린 것이다. 완전히 감동한 ‘대모’의 조언에 힘입어 A의원은 결국 이번 개각으로 각료자리를 꿰차게 됐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언제나 어떻게 하면 일본을 더욱 좋게 만들 것인가 라고 하는 정론을 아베 총리에게 직언해왔다. 그러나 나 같은 ‘정론파’는 이번 개각에서 몽땅 각료 인선에서 떨어지고 ‘아부파’만이 햇빛을 보았다. 그 때문에 모두 ‘이제 아베를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입을 모아 원망하고 있다.”

결국 아베 총리는 이번 개각을 통해 여당·자민당 내의 ‘가스 제거’를 시도했지만, 도리어 가스에 불을 붙인 꼴이 됐다. 이 ‘탈락조’ 의원들이 아베정권의 ‘제1의 폭탄’이다.

한편, 아베 총리가 이번 개각을 단행한 ‘적극적 이유’는 여성각료를 늘리기 위함이다. 총리관저에서 아베 총리를 보좌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은 그 배경에 대해 이렇게 귀띔해주었다.

“아베 총리가 아무리 ‘아베노믹스’를 외치고 선도해도 경기가 조금도 나아지고 있지 않다. 이는 국민의 소비가 늘어나지 않기 때문인데, 소비가 늘어나지 않는 것은 수입이 늘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남편이 밖에서 일하고 아내는 전업주부인 가정이 많은데, 아내도 나가서 일하기 시작하면 수입은 늘어날 것이다. 수입이 늘어나면 소비도 늘어난다. 소비가 늘어나면 경기는 좋아지기 시작하고 아베노믹스는 성공할 것이다. 아베 총리는 이러한 단순한 도식을 마음속에 그리고 여성들이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하는 여성의 상징인 여성각료를 늘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여성각료 대거 기용이 아베노믹스 살리기용?


2000년 5월 24일 급서한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의 장례식 날 영정을 들고 있는 차녀 오부치 유코. 그녀는 아버지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당선된 후 승승장구, 여성 총리 물망에까지 오르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번 개각에서 단숨에 5명이나 되는 여성각료를 탄생시켰다. 전체 18명의 각료 중 5명이므로 여성각료의 비율은 27%이다. 덧붙이자면 일본 국회의원 가운데 여성의원의 비율은 8%에 지나지 않고, 의회제도를 가지고 있는 189개국 중 127위다. 그런 의미에서 아베 총리의 이번 개각은 ‘혁명적 조치’를 단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무조건 많은 여성 각료를 인선한다’는 목적에 충실한 나머지 개개인의 자질을 검증하는 데는 소홀했다. 자격 미달의 여성들까지 각료에 취임한 것이다. 5명의 여성각료 중 각료로서의 자질이 가장 돋보이는 이는 경제산업상에 취임한 오부치 유코(小渕優子)다.

오부치 유코 경제산업상은 1973년 오부치 게이조(小渕惠三) 전 총리의 차녀로 태어났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와 다케시다 노보루라고 하는 일본 정치계의 거물이 이끄는 양대 파벌의 후계자로서 1998년 총리직에 취임한 오부치 게이조에게, 2000년 4월 3일 주말에 비극이 일어났다. 총리관저에서 그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 곧 도쿄 분쿄구(文京區)에 있는 준텐도(順天堂) 대학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부치 총리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음달 타계했다.

이 일본 최고권력자의 급서로 인해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된 인물이 당시, 아버지의 비서를 맡고 있던 26세의 오부치 유코였다. 오부치는 현재, 41세의 나이에 이미 5선에 성공한 ‘거물급 의원’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부친과 같은 와세다 대학의 대학원을 나와 TV방송국인 TBS에 입사했다. 당시 그녀의 맞선 상대였던 필자의 친구는 그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거물 정치인의 딸이라고 해서 오만한 여성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극히 평범한 생각을 가진 서민적인 여성이었다. 유행하는 드라마를 즐겨보고, 사케와 노래방을 아주 좋아하는 유쾌한 여성이었다. 그러면서도 심지는 올곧고 밝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만일 그녀가 정치가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면 결혼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부치 유코는, 1998년 아버지가 총리로 취임하자 방송국을 퇴사한 뒤 총리 비서가 됐다. 그 후 방송국 시절의 동료와 결혼해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오부치 유코는 2008년 아소 타로(麻生太郎) 내각에서 일본 정계사상 최연소인 34세로, 소자화(출생률 감소) 담당상에 취임했다. 당시 그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임산부대신’이라는 타이틀이 역사상 처음 붙여졌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한번‘큰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오부치 유코는 가까운 미래에 또다시 ‘두 개의 신기록’을 갱신할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최초의 여성 총리다. 이것은 거의 확실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다른 하나는 역사상 최연소 총리 기록이다. 현재까지는 1885년에 초대 총리를 맡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의 44세가 최연소 기록이었다.


1999년 5월24일 임동원 당시 통일부장관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 윌리엄 페리 미국 대북정책조정관(왼쪽부터)이 일본 총리공관에서 대북문제에 대한 3국의 공조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현재 오부치 유코 경제산업상은 자민당 내 최대 파벌 중 하나인 ‘헤이세이(平成) 연구회’소속으로 파벌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헤이세이 연구회는 그녀의 부친 오부치 게이조뿐만 아니라 다나카 가쿠에이, 다케시타 노보루,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등 총리를 다수 배출한 명문 파벌이다. 현재 그녀가 장래 유일한 여성 총리 후보란 점에서 정가와 국민 여론에 이견이 없다. 다나카 아이지(田中愛治) 와세다대 정치학과 교수는 최근 블룸버그 인터넷판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첫 여성 총리가 탄생한다면 그건 오부치가될 것”으로 확언했다.

오부치 유코의 특징은, ‘인품의 오부치’라고 칭송받던 아버지의 장점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생전에 아버지는 딸에게, ‘정치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제왕학을 철저히 가르쳤다고 한다. 그 보람이 있어서인지 ‘질투와 시기의 소굴’로 불리는 일본 정계에서 예외적이라 할 만큼 그에 대해서는 나쁜 소문이 들려오지 않는다.

아베의 개각은 7년 전 ‘친구내각’의 부활

아소 내각에서 소자화 담당상을 맡았던 시절 딱 한 번 스캔들이 난 적이 있다. 그것은 신성한 각료실에 술을 가져와 저녁 때 연회를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회는 정치가의 금권스캔들과 섹스스캔들에는 엄격하지만, 술에 관해선 관대하다. 이때도 오히려 ‘서민적인 대신’이란 평가가 회자됐을정도다.

그러나 이번에 임명된 5명의 여성각료 중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은 오부치뿐이다. 소자화담당상에 취임한 아리무라 하루코(有村治子) 의원은 2008년 중국인 영화감독이 찍은 반전영화 <야스쿠니(靖國)>의 일본상영을 반대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납치문제 담당상에 취임한 야마야 에리코(山谷えり子) 의원은 ‘일본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의원연맹’의 회장으로 “일본군이나 경찰이 종군위안부를 강제 연행한 적은 없었다”라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총무상에 취임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의원은 국회의원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선봉에서 외친다. 지난해 6월에는 “후쿠시마원전에서 사망자는 없었다”라는 발언을 해 큰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70년 전의 전쟁책임은 물론이고 3년 전의 사고책임마저 은폐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고 했다.

법무상에 취임한 마쓰시마 미도리(松島みどり) 의원은 전신을 빨간색으로 치장하는 등 항상 화려한 복장으로 국회에 등원하는 의원이라는 인상밖에 없다. 필자는 국회 안에서 이 새빨간 옷의 마쓰시마 미도리 의원을 볼 때마다 ‘자기현시욕의 화신’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본 기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소방차’라는 닉네임으로 불린다. 이렇게 보면 앞으로 오부치 경제산업상을 제외한 다른 여성각료들의 스캔들이나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이것이 ‘제2의 폭탄’이다.

그런데 각료들 중에는 문제가 될 만한 소지가 여성각료에게만 국한돼 있는 건 아니다. 2006년 제1차 아베정권이 출범할 당시, 아베 총리는 자신의 내각을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 내각’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여론은 ‘친구 내각’이라고 야유했다. 이것은 ‘능력도 없고 인격적인 흠이 있어도 아베 총리와 사이만은 좋은’ 국회의원들이 대거 입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여론은 장기화된 불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기를 기대했지만, 아베 총리는 그 뒤로 ‘헌법개정’에 집착했다. 여론조사에서 헌법개정은 국민이 ‘13번째로 관심 있다’고 한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에 ‘친구각료’들은 헌법개정에 매진했다. 그 결과 지지율이 급락하고 ‘관저(官邸)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이 교훈으로부터 7년이 지난 이번에 재차 ‘제2차 친구내각’이 탄생한 것이다. 이번 개각 이전에는 실력위주로 각료를 인선했기 때문에 617일이나 되는 긴 시간에 걸쳐 결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부터는 다시 ‘경량급’의 ‘친구내각’이 부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3의 폭탄’이다.

‘넷째부터 여섯째 폭탄’에 대해서는 아베 총리의 친구이기도 한 저명한 정치평론가 아사카와 히로타다(淺川博忠)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오키나와 본섬 기노완 시 심장부에 자리 잡은 후텐마 미군기지. 이 기지의 이전 문제가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그 실현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정권붕괴의 원인은 세 가지 경우다. 하나는 위기관리의 실패, 둘째는 일·미관계의 악화, 셋째는 증세다. 제2차 아베 정권은 올가을 이 세 개가 동시에 엄습할 위험이 있다. 즉 원전재가동, 후텐마(普天間) 기지, 소비세 증세다.”

자 그럼 이 ‘세 개의 폭탄’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먼저 원전의 재가동 문제다. 9월 1일 후쿠시마현의 사토 유헤이(佐藤雄平) 지사가 불쾌한 듯 찌푸린 얼굴로 기자회견을 열어 “고뇌의 결단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즉 후쿠시마현이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폐기물 중간저장시설의 수용에 합의한 것이다. ‘중간저장시설’은 ‘어디까지나 30년간 임시로 저장하는 시설’이라는 것이 일본정부의 설명이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후쿠시마 주민은 한 명도 없다. 이 설명의 책임자였던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伸晃) 환경상은 “어차피 (반대하는 사람들의) 최종 목적은 돈일 것이다”라는 폭언을 해서 일본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결국 9월 3일 개각에서 그는 내각에서 물러났다.

위기에 봉착한 후텐마 기지 이전

마침 10월 26일에는 후쿠시마현의 지사선거가 실시된다. 여기서 원전반대파가 승리하면 원전반대운동이 다시 불붙게 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현재 일본 전역의 총 54기 원전이 올스톱된 상태다. 아베정권은 우선 가고시마현(鹿兒島縣)의 센다이(川內) 원전을 올겨울에 재가동하려 한다. 그러나 원전반대운동에 불이 붙게 되면 재가동은 불발에 그치게 될 것이다. 이를 예측해서 아베정권은 9월 들어 센다이 원전에서 만일의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를 대비한 피난계획을 만들도록 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조력 자체는 원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거꾸로 확인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 오키나와(沖繩)의 미군기지인 후텐마 문제도 심각하다. 미·일 양국은 후텐마 기지를 1997년 나고시(名護市) 헤노코(邊野古) 지구로이전하는 데 합의했지만 오키나와현의 나카이마 히로카즈(仲井眞弘多)지사가 기지 이전을 정식 승인한 것은 지난해 12월 25일이었다. 그 때문에 아베 총리는 “16년간에 걸친 미·일 간의 현안을 드디어 해결했다”며 당당히 가슴을 펴고, 정권출범 1주년이 되는 종전기념일 다음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그런데 올 1월 19일 실시된 나고 시장 선거에서 미군기지 이전을 단호히 반대한 이나미네 스스무(稻嶺進)가 압승을 거두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일본 정부는 올여름부터 이전공사를 시작했지만,이나미네 시장을 필두로 시 전체가 이전을 저지하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1월 16일 실시되는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 자민당의 공천을 받은 현직 나카이마 지사는 고전이 예상된다.

만약 나카이마 지사가 패배한다면, 주일미군의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 이전문제는 백지화에 가까운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올 연말까지 미국과 공동으로 ‘미·일 가이드라인’을 정리하려는 아베 정권으로서는 정말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제5의 폭탄’이다.

계속해서 아베 총리는 내년 10월부터 부가세를 10%로 인상하는 정책을 올 연말까지 확정해야만 하는데, 올 4월 부가세율을 5%에서 8%로 인상하자마자 일본의 GDP성장률은 마이너스 6.8%(!)로 떨어졌다. 그래서 현재 아베노믹스는 ‘아베노후쿄(아베의 불황)’라는 야유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3일 개각에서 유임된 아소 재무상은 “부가세 10% 인상은 이미 법률로 결정된 것”이라며 강행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연말에 억지로 ‘10% 업(up)’을 발표하게 되면, 아베 정권의지지율은 그날로 ‘10% 다운(down)’될 것이 확실시된다.

‘제7의 폭탄’은 아베외교의 좌절이다. 아베 총리는 9월 3일 개각발표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호언했다.

“취임 이래, ‘지구본 외교’를 추구해왔다. 이번 주말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를 방문하면 지금까지 총 49개국을 순방하게 된다.” 아베 총리는 지난 1년 8개월 동안 49개국이나 방문한 것을 자랑하지만, 가장 중요한 외교 상대인 한국·중국·러시아·북한 등 ‘이웃 4개국’과의 관계에는 난제가 산적해 있다.


지난 2월 8일 소치 정상회담 당시의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오른쪽). 이날 푸틴은 2012년 노다 전 일본 총리가 선물한 아키타현의 토종견을 데리고 나와 분위기를 돋웠지만 영토문제를 둘러싼 러·일 간의 갈등은 아직 첨예하다.
먼저 한국과의 관계를 살펴보자면,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위안부문제다. 위안부문제는 영토문제와 다르게 지혜를 쥐어짜면 해결이 무망한 난제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아베 총리의 측근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기 때문에 아예 (이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고 한다. 이래서는 몇 년이 지나도 해결될 수 없고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점점 더 나이를 먹어갈 것이기 때문에 한국과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는다.

게다가 중국과의 문제는 센카쿠 제도라고 하는 영토문제이므로 한층 더 성가시다. 11월 10일과 11일에 베이징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에서, 호스트 역할의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중·일 정상회담을 하는 것조차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아베 총리는 “약간이라도 중국에 타협하면 일본 내 우파 지지층이 이탈하고, 타협하지 않으면 시진핑 주석이 돌아봐주지 않는다”고 하는 햄릿적인 고민을 안고 있다.

바쁘기만 한 ‘지구본 외교’, 알맹이가 없다!

대러 관계는 2월의 소치올림픽 개막식에 아베 총리가 허겁지겁 참석했을 때에만 해도 “푸틴과 여러 잔의 보드카를 주고받으면서 북방영토문제를 서로 이해했다”고 만족해 했다. 당시 아베 총리의 측근은 필자에게 “지금부터라도 당신네 출판사에서 시판하는 지도를 다시 만들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네!”라고 기분 좋게 조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위기에 의해 북방영토 반환은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아베 총리는 조준경을 러시아에서 북한으로 이동했다. 아베 총리의 정치 선생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전 총리는 2002년 9월 17일에 전격적으로북한을 방문해 5명의 납치피해자를 일본으로 데리고 돌아간 것으로, 하루 만에 지지율을 15% 이상 끌어올린 전례가 있다. 그런 만큼 당시의 관방(官房)부장관으로서 고이즈미의 북한 방문에 동행했던 아베 총리는 “꿈이여 다시 한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9월 25일 전후에는 북한이 자국 내 생존해 있는 일본인에 대한 조사보고를 일본정부에 제출하게 된다. 그러나 수상관저의 한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 문제 역시 상당히 골치아픈 사안이 되어간다고 한다.

“일본 국민들은 납치피해자의 생존과 귀국을 기대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북한측이 9월 하순에 발표할 보고서에는 새로운 납치피해자 생존자에 대한 소식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때문에 북·일관계가 ‘톤다운(toning down)’해버리면, ‘북풍’에 의해 지지율을 끌어올리려 했던 우리들의 계산이 어긋나버린다. 지지율이 문제가 아니라 아베 총리가 그야말로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아베 총리에겐, 어떤 의미로 ‘최대 위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8의 폭탄’이 존재한다. 그것은 아베 총리의 건강문제다. 아베 총리 본인과 그 가족, 주변을 인터뷰해서 아베 총리의 평전을 두 권이나 쓴 전 교도통신(共同通信) 정치부장 노가미 다다오키(野上忠興) 씨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베 총리는 궤양성 대장염이라고 하는 난치병이 있다. 첫번째 총리직을 맡았던 2007년 가을에도 이 병이 악화되어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번은 상당히 강한 약을 사용해서 병을 억제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같다. 이는 아베 총리의 치과치료 기록을 보면 명백하다.”


2013년 8월 13일 고향 야마구치현으로 내려가 일본 우익의 정신적 영웅 요시다 쇼인 묘소를 참배하는 아베 총리.
아베 총리는 중남미 순방에서 귀국한 8월 4일, 하네다공항(羽田空港)에서 국회로 직행해서 국회 내의 ‘치과진료실’을 방문해 치과치료를 받았다. 이 갑작스러운 행동에서 아베 총리가 돌아오는 일본정부 전용기 안에서 얼마나 치통에 고통받고 있었는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후 같은 치과진료실에 8월 6일과 11일에도 다녀갔으니 치통이 상당히 오랫동안 멈추지 않은 것 같다. 8월 12일에는 그의 고향인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도 급작스럽게 치과를 방문해 치료받았다. 올해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 9번이나 치과 치료를 받은 것이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응급치료’다.

아베 총리의 운명, 길(吉)인가, 흉(凶)인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지인인 전문의에게 확인한 결과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궤양성 대장염의 악화로 인해 스테로이드계의 강한 약을 복용함으로써 체내의 뼈가 녹는 부작용이 오고 있는 것이다. 그 증상으로는 우선은 격심한 치통이 발생하고, 그 후는 신체의 각 부위에서도 부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일본에서 가장 격무라고 일컬어지는 총리의 업무는 도저히 맡을 수 없게 될것이다.”

앞서 언급한 아베 총리의 평전 작가 노가미 씨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9월 3일 제2차 내각을 발족시킨 아베 총리를 보고 있으면, 오부치 유코 경제산업상에게 묘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아베 총리와 오부치 유코 대신은 ‘최대의 정치적 라이벌’로 불릴 만하다.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의 애제자(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의 아들인 아베 총리와, 다나카 카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애제자(오부치 게이조 전총리)의 딸인 오부치 유코와는 ‘최대의 라이벌’ 관계일 텐데,‘최대의 라이벌’은커녕, ‘최고의 전우’와 같이 대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부 기자로서의 직관이지만, 아베 총리는 어쩌면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와 같은 식의 ‘죽음’이 이상적이라고 보는 것 아닐까? 자신의 몸에 생긴 ‘병마’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것이다. 그렇다면 최고권력자인 현재, 장수하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오히려 액셀을 밟으면서 ‘순직의 각오’로 힘차게 앞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올가을, 이 ‘8개의 폭탄’ 가운데 어떤 것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 행보를 가속화하는 아베 총리의 운명은 길(吉)인가, 흉(凶)인가? 필자는 왠지 아베 총리가 이미 자신의 ‘운’을 다 써버린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으로 정국을 바라보게 된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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