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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 쿠바와 손잡은 미국의 이이제이(以夷制夷) 

53년 만에 외교관계 정상화로 중국·러시아 중남미 진출 봉쇄… 미·중, 미·베트남 국교 정상화에 버금가는 미국 외교사의 획기적 사건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지난해 12월 쿠바 수도 아바나 도심에서 시민들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훈련시킨 쿠바 망명자 1500여 명이 1961년 4월 17일 쿠바 남부 피그스만에 몰래 상륙했다.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승인한 CIA의 비밀작전은 쿠바 망명자들을 통해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정부를 전복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해변에 올라서자마자 쿠바 정부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이들의 상륙 정보를 미리 입수한 쿠바 정부는 2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포위작전을 폈다. 이들은 사흘 동안 쿠바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만 했다. 쿠바 정부군은 이들 중 100여 명을 사살하고 1113명을 생포했다. 미국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B-26 폭격기를 출격시켰지만 쿠바 공군 전투기들의 공격으로 격추됐다.

미국 정부는 이들을 석방하고자 쿠바 정부와 협상을 해야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보내 석방 교섭을 벌였다. 피델 카스트로는 1961년 12월 5300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과 이유식을 받기로 하면서 포로들을 풀어줬다. 미국 정부는 쿠바 침공작전 실패로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해야만 했다. 이후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완전히 냉각됐다.

또 미국의 피그스만 침공사건은 지난 1962년 10월 쿠바 핵미사일 위기의 단초가 됐다. 쿠바 정부는 미국의 침공 위협을 막기 위해 소련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피델 카스트로는 소련의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면 미국의 전면 침공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소련은 극비리에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했고, 미국은 U-2 정찰기가 촬영해온 소련 미사일 기지 사진을 보고 경악했다.

게다가 미국은 소련이 중거리 핵미사일을 선박을 통해 쿠바로 이송할 것이라는 계획을 알게 됐다.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를 단행하고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핵미사일 철수와 미사일 기지 철거를 요구했다. 양국은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갈 정도로 팽팽하게 대치했다. 결국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소련은 쿠바에서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기로 하면서 쿠바 핵미사일 위기는 해결됐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과 정부는 그동안 쿠바를 눈엣가시처럼 여겨왔다. 쿠바는 미국과는 플로리다 해협을 두고 불과 145㎞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작은 섬나라다. 중미 카리브해에 위치한 쿠바의 국토 면적은 11만㎢로 한국보다 조금 더 크지만, 인구는 1100만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쿠바는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제1차 항해 때 발견돼 스페인의 영토로 편입됐다.

스페인은 쿠바를 식민지로 삼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담배와 사탕수수를 재배하도록 했다. 스페인의 오랜 지배에 항거해 쿠바 주민들은 두 차례나 독립전쟁을 벌였다. 그러다 1898년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해군 순양함 메인호가 아바나항에서 폭발해 침몰했다. 당시 미국은 스페인의 소행으로 보고 독립전쟁에 개입했다.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쿠바를 넘겨받아 1899년부터 1902년까지 군정을 실시했다.

이후 쿠바는 미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미국은 쿠바 내정에 계속 간섭했다. 쿠바의 역대 정권은 미국의 대기업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아왔다. 특히 풀헨시오 바티스타 대통령(1933~44년, 1952~59년 재임)은 정적들을 처형하는 등 쿠바를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그러자 국민들은 바티스타 정권의 독재에 저항했고, 변호사 출신인 피델 카스트로가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인 체 게바라와 함께 1959년 혁명을 일으켜 바티스타 정권을 붕괴시키고 권력을 차지했다.

미국의 집요한 카스트로 암살 작전


▎쿠바의 수도 아바나 소재 공산당사 내부. 쿠바혁명을 묘사한 벽화로 장식된 대기실에 주민들이 앉아 있다. 벽화에서 가운데 인물이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농지를 국유화하는 등 국가 정체를 공산주의 체제로 바꾸었다. 또 쿠바에 있는 미국 기업과 국민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61년 1월 쿠바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피그스만 침공사건 이후 미국은 1962년 쿠바에 대한 금수조치를 단행했으며, 쿠바 핵미사일 위기를 거치면서 철저한 봉쇄정책을 지금까지 유지해왔다.

특히 미국의 CIA는 피델 카스트로 암살 작전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기도 했다. 파비안 에스칼란테 전 쿠바 정보국장은 2006년 <카스트로를 죽이는 638가지 방법(638 Ways to Kill Castro)>이라는 책을 통해 1959년 피델 카스트로 집권 이후 암살 시도가 638번이나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피델 카스트로가 “올림픽에서 ‘암살에서 살아남기’ 종목이 있다면 단연 내가 금메달일 것”이라는 농담했을 정도로 CIA는 집요하게 암살을 시도했다.

암살 작전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담배에 독을 넣는 것이었다. CIA가 1960년대 애연가인 피델 카스트로를 죽이기 위해 시가에 보툴리누스 독을 넣기도 했고, 초소형 폭탄을 시가에 집어넣어 터뜨리는 방법도 추진했다. 이 때문에 피델 카스트로는 1985년 금연을 선언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스쿠버다이빙을 즐긴다는 점을 이용해 커다란 조개 안에 폭발물을 설치하거나, 다이빙 복에 피부병을 감염시키는 세균을 넣는 방법도 검토됐다.

CIA는 또 피델 카스트로가 해외를 순방할 때 호텔 직원을 포섭하거나 직접 암살 요원을 보내 음료에 독을 타거나 소파에 폭발물을 숨겨 놓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CIA가 벌였던 암살작전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옛 애인을 동원한 것이었다. CIA는 마리타 로렌츠라는 옛 애인을 포섭해 피델 카스트로를 독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로렌츠가 피델 카스트로가 머물던 아바나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 CIA가 준 독약 캡슐을 버리고 모든 사실을 고백하는 바람에 암살 작전은 실패했다. 미국은 1976년 공식적으로 피델 카스트로 암살 계획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 정부는 피델 카스트로의 신변안전을 위해 대역을 쓰는가 하면 20여 곳의 안전가옥을 두는 등 철저하게 경호해왔다. 현재 88세인 피델 카스트로는 아직까지 건재하다.

덩샤오핑 노선을 빼닮은 라울의 개혁 정책

쿠바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형제 권력 세습 국가다. 피델 카스트로는 2008년 친동생인 라울 카스트로(83)에게 최고 통치자인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물려주었다. 이에 앞서 피델 카스트로는 2006년 7월 장 출혈로 쓰러지면서 오랜 기간 병상에서 지내야만 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지난해 4월 쿠바 공산당 제6차 당 대회에서 국가 최고 권력 지위인 제1서기에서도 물러나면서 완전히 은퇴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그동안 현존하는 세계 최장기 독재자였다.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를 통치한 기간은 52년이고 공산당 제1서기는 46년 동안 역임해왔다. 이 기록은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라울 카스트로는 아바나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으며 형인 피델, 체 게바라 등과 게릴라 투쟁을 함께한 혁명동지다. 쿠바혁명이 성공하면서 1959년 국방장관이 됐고, 1976년부터 2008년까지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겸직하면서 오랜기간 형을 보좌해왔다. 라울은 두 얼굴을 가진 인물이란 말을 들어왔다. 라울은 피델보다 먼저 사회주의에 투신할 정도로 이념적인 면에서는 강경파다. 피델을 체 게바라에게 소개 해준 것도 라울이었다. 라울은 그동안 피델의 오른팔로서 정책을 조율하고 집행하는 관리자 역할을 해왔다. 중앙정보국(CIA)의 쿠바 분석가였던 브라이언 라텔은 저서 <피델, 그 이후(After Fidel)>에서 “라울은 어쩌면 형보다 더 잔인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라울의 또 다른 이미지는 실용주의자라는 것이다. 특히 라울은 그동안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실제로 라울은 시장경제 요소를 꾸준히 도입하는 등 개혁 정책을 추진해왔다. 또 정치범들을 잇달아 석방하고 국제사회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라울이 그동안 추진해온 개혁 정책들을 보면 식량배급제와 정부보조금의 점진적 축소, 자영업자 육성, 주택 및 중고 자동차 매매 허용, 자본주의식 소유권 도입, 부정부패 척결 등을 들 수 있다. 2013년엔 해외여행 허가 제도를 없앴으며 지난해에는 신외국인 투자법을 도입해 해외로 망명한 쿠바인의 투자까지 허용하기도 했다.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창궐하자 쿠바 정부는 256명의 의료진을 파견해 국제사회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라울은 평소에도 중국의 혁명가곡 ‘둥팡훙(東方紅)’과 중국 술인 ‘마오타이주(茅台酒)’를 즐긴다. 이 때문에 라울을 ‘쿠바의 중국인’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라울은 1995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감명받아 ‘중국부’라는 연구기관을 만들었다. 라울이 추진하고 있는 개혁 정책도 덩샤오핑의 노선과 닮았다고 볼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해 ‘적들과의 대화(engagement with adversaries)’ 원칙을 천명하면서 그 대상으로 북한·이란·쿠바를 꼽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같은 해 3월 쿠바계 미국인들의 쿠바 여행 제한을 완화하는 법안에 서명하는 등 쿠바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화해 제스처는 같은 해 12월 미국 국무부 대외원조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의 하도급 업체 직원이었던 앨런 그로스가 쿠바에서 인터넷 장비를 설치하려다 간첩 혐의로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으면서 다시 얼어붙었다.

양국이 다시 물밑 대화를 시작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후인 2013년 1월부터였다. 오바마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벤 로즈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부보좌관, 리카르도 수니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서반구 담당국장 등이 캐나다 등에서 쿠바 측과 18개월에 걸친 비밀협상을 벌였다. 협상과정에서 쿠바는 미국에서 스파이 혐의로 검거돼 2001년 수감된 자국인 3명을 석방해줄 것을 주장했고, 미국은 앨런 그로스와 CIA에 협력한 혐의로 체포돼 20년째 수감 중인 전직 쿠바 정보장교를 석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협상 돌파구를 제공한 프란치스코 교황


▎1.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17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쿠바에 대한 봉쇄조치를 풀고 국교 정상화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 2. 같은 시각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도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라울은 미국과의 수교 이후에도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한다고 강조했다.
양국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협상이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양국의 협상에 돌파구를 제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3월 백악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면서 쿠바와의 관계 복원 의지를 밝혔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후 오바마 대통령과 라울 국가평의회 의장에게 친서를 보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해당 수감자들을 석방해줄 것을 호소했다. 전체 인구의 60%가 가톨릭 신자인 쿠바 정부는 교황의 호소를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교황은 지난해 10월 양국 대표단을 바티칸으로 초청해 양국 관계 정상화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를 주선했다. 오바마 대통령과 라울 의장은 지난해 10월 16일 45분간 통화하면서 협상의 마지막 쟁점을 타결했다. 양국 정상이 전화 통화를 가진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미국 국무부의 한 고위 관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협상의 핵심은 본질적인 교착 상태를 해소하는 게 아니라 양측이 신뢰할 만한 제3자를 확보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라고 밝혀 프란치스코 교황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중간선거가 끝난 이틀 뒤인 지난해 11월 6일 쿠바와의 관계 복원 결정을 내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12월 17일 특별성명을 통해 “미국은 쿠바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역사적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면서 외교관계 정상화를 선언했다. 라울 의장도 같은 시간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미국과 쿠바가 외교관계 정상화를 결정한 것은 53년 만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쿠바에 대한 봉쇄정책은 실패했으며, 이제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현재 쿠바는 1961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카스트로 일가와 공산당이 통치하고 있다”면서 “어떤 나라를 실패한 국가로 몰아붙이는 정책보다 개혁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것이 더 낫다는 교훈을 어렵게 얻었다”고 밝혔다.

미국 언론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결정이 1979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 1995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베트남과의 국교 정상화에 맞먹는 사건으로 평가했다. 말 그대로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에 대해 이른바 ‘햇볕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양국은 앞으로 수개월 내 워싱턴과 아바나에 대사관을 개설하기 위해 외교관계 정상화 협상을 벌일 예정이다. 미국 정부는 이를 위해 조만간 로베르타 제이콥슨 국무부 서반구 담당 차관보가 이끄는 대표단을 아바나에 파견해 쿠바 정부와 고위급 대화에 착수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에 대한 햇볕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먼저 미국의 중남미에 대한 전략적 이해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중남미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앞마당’이라고 불려온 지역이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중남미 국가들에선 대부분 좌파 정권이 통치하고 있다. 현재 중남미 18개국 중 12개 국가(남미 10개국 중 8개 국가)에서 좌파 정권이 집권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줄고 있다.

특히 중국은 이 점을 이용해 중남미에 적극 진출해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7월 중남미를 순방하면서 남미국가연합(UNASUR), 라틴아메리카-카리브국가공동체(CELAC) 등과 정상회의를 통해 역내 대규모 투자와 금융지원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시 주석은 당시 CELAC과의 정상회의에서 인프라 구축에 200억 달러 등 250억 달러 규모의 투자기금 설치를 제의하고 중남미 국가들에 100억 달러 규모의 별도 금융지원 계획을 발표했으며, 중국-라틴아메리카 포럼 창설도 공식화했다.

미국 앞마당 넘보는 중·러의 야심


▎1. 쿠바 아바나에서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자축하는 시민이 “지금, 자유”라고 써 있는 ‘쿠반 파이브’ 포스터를 들고 있다. 쿠반 파이브는 1998년 미국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쿠바 정보요원 5명을 의미한다. / 2.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을 차지한 쿠바 야구 대표팀을 격려하는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로 야구 선수의 미국 수출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중국의 의도는 중남미의 풍부한 천연자원과 시장을 확보하는 등 영향력을 확대해 미국을 견제하려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중남미의 주도권을 중국에 넘겨줄 경우 자국의 안보에 대한 위협이 되는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국의 중남미 진출 교두보는 쿠바다. 쿠바는 중남미 좌파 국가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미국은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차단하기 위해 쿠바와 관계를 개선하고 이를 통해 중남미의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미국이 쿠바와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이유는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포석이라고도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쿠바의 아바나 남부에 있는 루르데스 감청 기지를 재가동할 계획이다. 루르데스 기지는 쿠바 미사일 위기 2년 뒤인 1964년에 설치된 레이더 기지다. 미국 해안에서 불과 250㎞ 떨어진 이곳에 소련은 정보요원 3천 명을 상주시켰다. 냉전 이후 효용성이 떨어져 점차 방치되다 2001년 폐쇄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쿠바를 방문해 감청기지 부활 대가로 옛 소련 시절 쿠바의 부채 320억 달러 가운데 90%를 탕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푸틴 대통령은 쿠바를 연결고리로 중남미 좌파국가들과 연대를 공고히 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사태로 제재를 가하는 미국을 견제하려는 전략을 추진해왔다. 미국은 과거 쿠바 핵미사일 위기처럼 자국의 턱 밑에 러시아의 레이더 기지 재가동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또 쿠바 인근 해저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석유와 천연가스를 개발하려는 속셈도 갖고 있다. 미국 에너지 기업들은 그동안 금수조치 때문에 쿠바에 대한 투자를 전혀 하지 못했다. 쿠바를 비롯해 자메이카·바하마·아루바·수리남·가이아나 등 카리브해의 섬나라는 최근 들어 심해유전과 천연가스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 에너지 기업들은 카리브해의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 프로젝트에 적극 투자할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쿠바에 대한 금수조치가 해제 되지 않는다면 투자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은 쿠바의 개혁파와의 협력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를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최선의 방책으로 보고 있다. 쿠바는 북한·중국·베트남 등과 함께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다. 미국은 쿠바가 정치·경제 개혁 정책을 적극 추진한다면 제2의 미얀마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미얀마는 수십 년간 군부독재 체제를 고수해오다 2011년 테인 세인 대통령 집권 이후 과감한 민주화와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쿠바의 제2인자는 미겔 디아스 카넬 국가평의회 수석 부의장(54)이다. 디아스 카넬은 라울 카스트로가 임기 5년 내 유고로 인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경우 헌법에 따라 의장직을 대리할 수 있다. 디아스 카넬 수석 부의장은 쿠바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포스트 혁명’ 세대의 선두주자다. 2013년 수석 부의장으로 선출된 디아스 카넬은 전기 엔지니어 출신으로 2009년부터 고등교육 장관을 맡았었다.

쿠바 정치·경제 개혁 본격화할 가능성은?

쿠바 정부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상당한 이득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라울이 미국과 악수하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 베네수엘라의 경제위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는 국제유가 폭락으로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해있다. 베네수엘라는 국가 재정의 95%를 원유 수출로 충당하고 있는데, 최근 유가가 급락하자 경제는 크게 위축됐다. 물가는 치솟고 재정적자가 커지는 등 디폴트(채무 불이행) 직전까지 내몰려 있다. 의료 수준이 높은 쿠바는 우수한 치료진을 베네수엘라에 제공하는 대신 하루 평균 10만 배럴의 원유를 베네수엘라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쿠바 전체 소비량 중 3분의 2에 해당 한다. 한 해 32억 달러(3조5천억 원)어치 정도의 원유가 무상으로 쿠바에 공급돼왔다. 이는 쿠바가 냉전 시절 옛 소련으로부터 받은 원조 규모를 능가하는 규모다. 쿠바는 1991년 옛 소련의 원조가 중단된 뒤 끔찍한 경제난을 겪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쿠바 정부로선 돈줄이었던 베네수엘라에서마저 원조가 끊길 기미를 보이자 미국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셈이 된 것이다.

또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는 쿠바를 저성장의 늪에서 꺼내 줄 결정적 카드가 될 전망이다. 미국의 교역 봉쇄 해제로 쿠바에 대한 1인당 송금 한도가 분기당 500달러에서 2천 달러로 오른다. 자본유입과 여행규제 완화에 따른 관광객 증가로 내수에 온기가 돌 것으로 예상된다. 또 미국의 시가 수입금지가 풀리고 쿠바 여행자가 미국에 입국할 때 담배와 술을 100달러까지 반입할 수 있게 돼 쿠바의 최대 수출품인 시가 산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시가는 1억 개비 이상 외국으로 수출돼 4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쿠바의 외화벌이 효자상품이다. 국교가 정상화되면 쿠바산 시가가 미국 시장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시가 시장은 80억 달러 규모다.

쿠바는 야구 등 우수한 스포츠 선수들을 미국에 수출할 수도 있다. 쿠바는 아마야구 최강국이다. 쿠바 야구선수들은 그동안 미국의 프로야구인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려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국제대회에 참가한 뒤 팀을 이탈, 제3국으로 망명해 미국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대부분의 선수는 보트를 타고 쿠바를 탈출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해왔다. 쿠바 정부는 앞으로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선수들을 수출해 상당한 자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양국이 외교 관계를 정상화할 경우 쿠바에서 보트를 타고 미국으로 탈출하는 난민도 크게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쿠바 정부가 미국과 화해에 나선 숨은 이유는 반체제 인사들의 강력한 민주화운동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쿠바 반체제 인사들은 2013년 민주화운동을 주도할 통합 단체인 ‘애국 쿠바연합’을 만들고 적극적으로 반정부 활동을 벌여왔다. 라울 의장은 반체제 운동이 크게 확산될 경우 ‘아랍의 봄’처럼 정권이 붕괴될 위험이 있다고 걱정해왔다. 라울 의장으로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할 경우 쿠바에서 반체제 운동의 동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쿠바에서 오랫동안 반체제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은 미국에 배신감을 나타냈다. 쿠바 반체제 인사인 기예르모 파르나스는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와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 전에 우리와 상의한다고 해놓고선, 우리 몰래 쿠바와 손을 잡았다”며 비난했다.

하지만 쿠바 반체제 운동이 미국과의 수교 때문에 약화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자본이 대거 쿠바로 들어가고, 교류가 확산될 경우 쿠바는 서서히 민주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또 가톨릭 교회도 앞으로 쿠바 민주화에 구심점 역할을 할 것이란 말도 나오고 있다. 라울 의장은 미국과의 외교 정상화가 가져올 후폭풍을 벌써부터 우려한다. 그는 지난해 12월 20일 인민권력국가회(의회) 정례회의에서 연설을 통해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급격한 체제 변동은 없을 것”이라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쿠바가 힘들게 지켜온 가치를 버릴 수는 없다”고 밝혔다. 반면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의 변화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더라도 서서히 있을 것이며, 있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역사적인 햇볕정책이 성공할지 주목된다.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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