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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日常반추’ | ‘심심함’의 심오함 

사색과 관조의 시간이자 통찰과 창조의 시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심심함을 잃은 상주(喪主)들 

삶은 무위에 처할수록 여유로워지고, 비울수록 채울 만해진다. 과잉 활동을 멈추고 무위에 처하면 삼라만상이 거울에 비친 듯 투명하게 보인다. 무위에 처하려면 멀티태스킹을 멈춰라!
수십억 년 전 지구에 나타난 “생명(들)은 원자들의 한바탕 웃음”(이브 파칼레)이다. 인류라는 지적 영혼들이 생명을 이루는 원자들의 웃음이 넘치는 녹색 행성에서 산다. 지구는 우주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생명들의 행성으로 빛난다. 생명은 나선형으로 꼬인 두 가닥의 DNA 사슬로 이루어지고, 자기를 복제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 자가복제 시스템이 생명의 중추를 이룬다. 생명들이 자가복제를 하며 번성해서 이 녹색 행성을 가득 채웠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움직인다. 수렵시대의 인류는 포식자를 피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움직여야만 했다. 이 움직임은 생명의 보존과 약진, 더 장기적으로는 생물학적 진화의 도약과 연관이 있다. 생명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곧 쉼 없는 움직임과 그 자취, 그 활동이 만든 성과들의 총체이다. 인류는 제 몸을 부리며 일하는 자로 살아왔다. 사람이 노동의 주체이자 그 도구로 살아왔다는 뜻이다.

수렵시대에서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로 넘어오며 인류는 밀림에서 초원을 거쳐 도시로 이동한다. 노동의 주 형태도 손발을 쓰는 사냥에서 머리를 쓰는 업무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더 많이 일한다. 가속화된 문명 세계에서 애꿎은 희생양으로 등장한 게 잠이다. 백열등이 나오면서 인류의 평균 수면시간은 근대 이전에 견줘 눈에 띄게 줄었다. 조너선 크레리는 에서 북미 성인의 하룻밤 수면시간이 대략 6시간 반이라고 지적한다. 한 세대 전에는 8시간, 20세기 초에는 10시간이던 수면시간이 점점 잠식당한 결과다. 수면시간이 이렇게 준 것은 잠까지 줄이며 해야 할 일들이 산적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바빠진 것은 십중팔구 절박한 내면의 필요보다는 외부에서 덧씌운 노동의 목표치와 할당량 때문이다. 마치 조용히 한 자리에 앉아 있는 법과 한동안의 고즈넉한 머무름을 잊어버린 듯 사람들은 정신없이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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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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