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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초대석 | ‘논어와 60년’ 동양고전 연구가 성백효 씨 - “100년 전의 우리 문헌도 못 읽는 나라 돼서야!” 

지난해 12월 고희 기념 서전(書展) 겸 출판기념회 개최… 5년 내 <대학> <중용> <예기> ‘부 안설’ 출간 목표 

최경호 월간중앙 차장 사진 지미연 기자

▎<논어> 연구에 평생을 바친 성백효 해동경사연구 소장은 “<논어>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책”이라고 말한다. 최근 <논어>와 <맹자> ‘부 안설’을 펴낸 그는 고희의 나이임에도5년 안에 <대학> <중용> <예기>의 ‘부 안설’ 내놓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공자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듦을 안다”고 했다. <논어> ‘자한(子罕)편’에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대표적인 문인화(文人畵)인 <세한도>에도 인용돼 있다. <세한도>는 추사 60년 인생의 모든 것이 녹아 있는,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기에 그 의미는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평생 한길을 걸어온 성백효(70) 해동경사연구소장(한국고전연구원 명예교수)의 아호(雅號)인 한송(寒松)도 <논어>의 ‘자한편’ 제27장에서 따온 것이다. 추위 속에서도 꿋꿋한 소나무가 되겠다는 자기암시이자 다짐이다. 그는 “평생 그런 마음으로 살아오긴 했는데 아쉬움도 적지 않다”며 몸을 낮춘다.

나라가 광복을 이룬 1945년 충남 예산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성 소장은 어린 시절 전북 익산 등지의 서당에서 공부한 뒤 1977년 민족문화추진회(현 고전번역원) 부설 국역연수원에 입사해 동양고전의 보급에 매진해왔다. 국방군사연구소 선임연구원, 민족문화추진회 교수, 고전번역원 교수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가 번역·출간한 <논어> <맹자>는 일부 대학에서 교재로 채택돼 10만 권 이상이 팔린 스테디셀러다.

1990년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사실상 국내에서 최초로 번역했고, 2013년에는 <부 안설 논어집주(附按說 論語集註)>를 다시 펴냈다. <논어집주>는 주자(朱子)가 논어에 대한 각종 주석을 집대성하고 최종적으로 해석한 책이고, <부 안설 논어집주(833쪽 분량)>는 200여 쪽 분량의 <논어집주>에 다시 각 주를 달고 번역자의 평가와 해석을 가미한 것이다. 특히 성 소장의 <부 안설 논어집주>는 다산(茶山) 정약용과 중국 최고의 주석(註釋)학자로 평가되는 양보쥔(楊伯峻) 등의 해석까지 덧붙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안설’은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풀어 쓴 것을 이른다.

동양의 영원한 베스트셀러이자 ‘고전의 꽃’인 <논어>를 해석하는 데 평생을 바친 성 소장을 2014년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익선동 해동경사연구소에서 만났다. 그는 “모든 일에 인정을 남겨두면 훗날 좋게 만날 수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명심보감>에 있는 ‘범사유인정 후래호상견(凡事有人情 後來好相見)’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성 소장은 자신을 “최치원 이후 1천 년 전통의 옛날식 한학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 중의 하나”라고 소개한다. 이른바 ‘신학문’을 배우지 않고 한학자인 부친과 서당의 훈장 밑에서 수학했기 때문이다. <논어>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12세 때니 올해로 꼭 60년째 논어와 씨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 소장은 지난해 12월 고희(古稀) 기념 서전(書展)과 <부안설 맹자집주> 출판기념회를 겸한 ‘한송 성백효 선생 고희전’을 열었다.

회초리 들며 한학 가르친 아버지


▎고전을 독학으로 공부한 성백효 소장은 서예 역시 독학으로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다. 지난해 12월에 열린 ‘한송 성백효 선생 고희전’에서 관람객들이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농사를 지으며 한학을 공부했던 성 소장의 아버지는 아들이 열 살이 되도록 학교에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집이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것도 아니었다. 한학자인 부친은 오히려 신학문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를 말렸지만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성 소장이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전북 익산의 유명한 한학자였던 월곡(月谷) 황경연 선생에게 아들의 공부를 맡겼다.

“아버지는 회초리를 들어가며 한학을 가르치셨어요. 아버지는 ‘신학문은 학문이 아니고 한학만이 진짜 학문’이라는 신념이 강했던 분이었습니다. 한자에 한글 음을 달아놓으면 한자 실력이 늘지 않는다며 한글도 배우지 못하게 하셨을 정도였지요. 지금이야 예산에서 익산은 한걸음에 달려갈 거리이지만 당시만 해도 꼬박 14시간이나 걸렸습니다.”

하지만 월곡 선생은 성 소장이 스무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성 소장은 서암(瑞巖) 김희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머릿속이 맑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그를 짓눌렀다.

“공부가 돈이 되는 일이 아니라 갈등이 생기더라고요. 말이 주경야독(晝耕夜讀)이지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꾼으로 살아보려고 동생과 함께 농사도 짓고 농촌지도자 활동도 했습니다. 그런 방황이 10여 년 계속된 거죠.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일 겁니다.”

그러던 중 그는 서른세 살이던 1977년 인생의 변곡점을 맞는다. 신문을 보다 우연히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학자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이 단체는 월탄(月灘) 박종화(1901~1981), 일석(一石) 이희승(1896-1989) 선생 등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비로소 성 소장은 제자리를 잡았다. 학생으로 들어간 지 반년 만에 실력을 인정받아 그는 전문위원으로 채용됐고, 이후로 강의를 맡기도 했다. 성 소장은 “20여 년간 고전을 읽은 결과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왔던 것 같다. 당시 민족문화추진회 강의는 원로들만 맡았는데 30대 교수는 유일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성 소장은 단국대 동양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한한(漢韓)대사전 편찬위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국방부 전사(戰史)편찬위원회(국방군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시대에서 한문으로 발간된 병서(兵書), 군대에 관한 기록 등을 번역하면서 2012년까지 한국고전번역원 교수로도 재직했다. 2007년 고전 연구와 강의를 위한 해동경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성 소장의 이름이 알려지자 주요 국립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논어> <맹자>의 강의 요청이 잇달았다. “한문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참고할 만한 번역서가 없느냐”는 문의도 이어졌다. 성 소장이 후학들을 위해 고전 번역작업에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자가 쓴 논어 해설서 <논어집주>의 번역을 3년에 걸쳐 마무리했다. 성소장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맹자> <대학> <중용> 등 이른바 사서(四書)의 해설서 번역에 이어 <시경> <서경> <역경(주역)> 등 삼경(三經)의 해설서 번역에까지 뛰어들었다. 국내에서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주역>까지 마쳤다. 17년의 시간에 걸친 방대한 작업이었다. 성 소장이 펴낸 해설서 번역본들은 원전에 가장 충실한 번역서로 평가돼 10만 부 이상 팔렸다. 그의 사서삼경 번역서들은 한문공부를 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성백효의 파란 책(표지 색깔)’으로 통할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사서삼경의 해설서 번역작업을 마친 뒤로는 새로운 작업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해석을 담은 번역서 출간이다. 2013년 <논어집주>에 일일이 각주를 달고 자신의 평가와 해석을 더한 <부 안설 논어집주>와 지난해 말 펴낸 <부 안설 맹자집주>가 그런 경우다.

“5년 안에 사서삼경에 대한 ‘부 안설’ 집주 집필은 물론이고 <예기>와 <춘추좌전> 번역까지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게 후학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지금까지 인세(印稅)를 받은 데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60년 동안 <논어>를 공부한 성 소장이지만 <논어>는 읽을 때마다 그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미처 알지 못했던 뜻을 새로 깨우칠 때도 있고,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후학(後學) 기르기 위한 정진


▎허리와 무릎 등이 불편한 성백효 소장이지만 한 번 분필을 잡으면 강의는 3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논어>는 유학의 기본이자 공자의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책입니다. 또 <논어>는 매우 함축적인 책이기도 하고요. 그만큼 여백이 많기에 <논어>를 보면서 보다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논어>를 수없이 읽고 강의했습니다. 그럼에도 <논어>의 사상을 다 체득했다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논어>가 제 인생을 반성할 수 있는 거울은 충분히 됐다고 생각합니다.”

<논어>와 평생을 함께해왔다고 할 수 있는 성 소장이 특별히 곁에 두고 읽는 구절은 뭘까?

“어느 글인들 좋지 않을까마는 <논어> 20편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학이(學而)편’을 들고 싶습니다. ‘오일삼성오신 위인모이불충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라. 나는 날마다 무시로 내 자신을 반성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도모하는 데 진심을 다하지 않았는가? 친구들과 사귀면서 신실하지 않았는가?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았는가?’라는 구절이에요. 이 말에는 배우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가 담겨 있습니다.”

독학으로 지금의 경지에 이른 성 소장에 대한 학계 일부의 시기가 적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 이유에 선지 그는 예사롭지 않은 좌우명을 가졌다.

“<논어> <맹자>에서 좋아하는 구절이 다 좌우명이죠.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좌우명도 달라지더군요. 젊은 시절에는 의욕이 앞서다 보니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어했지만, 나이 든 뒤로는 남의 말이나 견해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게 됐어요. 내 갈 길만 가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일희일비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죠. 유불우지예 유구전지훼(有不虞之譽 有求全之毁)라는 말을 마음에 새깁니다.”

<맹자>의 ‘이루장구(離婁章句)’에 나오는 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칭찬이 있기도 하고, 완전을 기했지만 비방을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상은 내가 한 일을 곧이곧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말은 참여정부 시절 ‘임대소득 탈루의혹’으로 퇴임압력을 받았던 이상경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사퇴의 변으로도 유명하다.

인터뷰 내내 잔잔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던 성 소장은 우리 교육의 문제점에 관한 질문을 받자 목소리를 높였다. 세월호 참사, 학교폭력, 군대폭력 등의 원인은 학교에서 고전교육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논어>니 <맹자>니 <명심보감>이니 하는 고전교육의 핵심은 바로 도덕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인(仁)과 예(禮)가 사회의 가장 큰 규범이었던 시절에도 죄를 짓는 사람들은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교육이 거의 사라진 세상에서 도덕적인 인간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성 소장은 세월호 참사는 바닥에 떨어진 도덕교육의 결정판이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남을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가르쳐온 학교와 가정부터 반성해야지 부처의 장관이 나와 머리 숙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요즘 젊은 학자들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요즘 학자들은 비판은 잘하지만 한문실력이 부족하다 보니 진정한 뜻을 새기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현들의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성 소장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정신적 빈곤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힐링(Healing) 열풍이 부는 원인도 고전교육의 부실로 진단했다.

“옛날에는 동도서기(東道西技,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라고 했는데 최근 10년 사이에 급격히 물질문명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렸어요. 세상이 오직 돈만 좇고 있다는 거죠. 인간이 육신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신이 육신을 지배해야 합니다. 그게 올바른 사람이고요.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 달러 시대가 된다고 좋아만 할게 아니라 그에 걸맞은 정신문화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돈 앞에서는 부모형제도 없는 풍토 속에서는 정신적으로 빈곤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만족하면 행복해진다”

그는 이러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개개인의 정신적 빈곤을 해소하려면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자신을 알려면 우선 겸손해져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책을 읽어야 합니다. 특히 고전 읽기를 권하고 싶어요. 고전은 오랜 역사를 거친 보물입니다. 고전이 수천 년간 생명을 유지해온 것은 그 안에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평생 고전을 읽고 강의해온 한학자로서 부실한 한문교육에 대해서도 개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문자의 단절로 인해 우리는 불과 100년 전의 선조들이 남긴 문헌을 읽고 해석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됐다. 그러니 門化光(광화문)을 문화광이라고 읽는 사람도 나오지 않나? 그래서 최소한 1500자 정도의 한자는 중·고교 때 가르쳐야 한다”며 “얼마전 한 대학에서 <고문진보>를 강의하는데 학생들이 기초가 워낙 안 돼 있다 보니 글자 가르치다가 학기가 끝났다. 그 뒤로 대학강단에도 아예 서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 소장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좋은 인연을 맺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좋게 헤어질 수도 있지만 서운하게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상대방에 대해 절대 험담해서는 안 돼요. 나쁜 인연이라는 게 처음부터 있는 게 아닙니다. 요즘에는 몇 년씩 연애한 뒤에 결혼하지만 몇 년 살지도 않고 이혼하는 경우가 허다하죠? 공자의 사상이 인(仁)인데 인은 곧 사랑입니다. 사랑하려면 내 것을 죽이고 상대방을 위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그런 자세만은 가져야겠지요.”

마지막으로 성 소장에게 행복한 삶에 대해 물었다. 그는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니고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만족할 줄 알아야 삶이 행복해집니다. <노자>에도 지족가락(知足可樂)이란 말이 나오지요? ‘만족함을 알면 즐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되 만족할 줄 알아야 됩니다. 누구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 누구나 류현진이나 김연아가 될 수도 없습니다.”

성 소장과 인터뷰를 하는 사이 그의 휴대폰이 서너 차례 울렸다. 웬 전화인고 하니 글을 읽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학생’들의 질문이 이어진 것이었다.

칠순의 노구이지만 성 소장은 요즘에도 고전번역원 수강생 등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서너 차례 강단에 선다. 한 번 분필을 잡으면 강의는 3시간가량 계속된다. “조금이라도 건강했을 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독학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성 소장이지만 학문의 ‘대’는 잇지 못했다. 슬하에 2남3녀를 뒀는데 장남만이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문을 전공했을 뿐이다. 그러나 장남은 한학자의 길은 걷지 않는다.

“한학을 공부하는 자식이 하나쯤 있기를 바랐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소원이 있다면 건강이 허락되는 한 계속 글을 쓰고 책을 펴내는 것입니다. 요즘도 하루에 5~6시간은 번역작업에 씁니다.”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사진 지미연 기자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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