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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② 쿠바 아바나 | 진하고 달콤한 에스프레소의 도시 - 인간 존엄과 극빈 공존하는 야누스의 광장 

한번 사랑한 사람들이 반드시 돌아오는 불가항력의 유혹… 낭만의 밑바닥에는 쿠바 민중의 고단한 삶이 잠복 

글·사진 배영옥 시인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무정형의 나라 쿠바. 아바나 거리에 넘치는 음악과 춤의 향연은 현란하다. 사회주의 혁명의 정신은 살사와 룸바의 음악적 열정과는 어떻게 통하였는가? 극심한 생활고와 맞서는 아바나 시민에게는 지금, 여기가 바로 생의 한복판이다. 가난한 혁명 따위는 내려놓은 지 오래다. 도취하라, 아님 죽든지! 아바나가 전하는 원색의 메시지다.

▎아바나시 혁명광장 앞 내무부 건물을 장식하고 있는 대형 체 게바라 초상과 쿠바 국기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나는 8개월을 생활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해외창작거점 예술가 파견사업’의 일환이었다. 2011년 운 좋게 그 사업의 선정 작가로 수혜를 받아 쿠바라는 환상의 땅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마침 첫 시집을 출간한 후 앞으로의 삶에 대해 숙고하던 차였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쿠바를 선택했다. 자본과는 멀찌감치 동떨어진 시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미혼 여성으로서, 무엇을 해도 늘 불안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시인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특히 부모형제와 주변인의 안쓰러운 시선이 나를 더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런 시선이 오히려 나를 더 불편함에 빠지게 했다. 쿠바에서 나는 다양성의 풍요롭고 다채로운 색깔을 만끽했다.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할 수밖에 없는 우리사회의 장단점까지 극명해지는 곳이 바로 쿠바의 아바나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영화를 보며 환상을 키우던 나는 아바나에 도착하고 나서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수밖에 없었다. 꿈꿔오던 흰 구름과 푸른 하늘의 선명한 대비에 감탄하고, 살사 음악이 흐르는 거리와 말레콘(아바나의 구시가지 북쪽에 위치한 해안)의 연인들과 흥에 겨운 초콜릿 빛깔의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영원히 한곳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파라다이스 아바나는 없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다. 지금 현재 쿠바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나는 아바나에서 우리와 함께 21세기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티끌 한 톨 없는 전신거울로 나를 점검해보는 흔치 않는 경험을했다.

확실한 것도 없고 확실하지 않은 것도 없는,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무정형의 나라 쿠바. 영화나 책을 통해 막연하게 알고 있던 쿠바는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로 대표되는 성공한 혁명의 나라였다. 또한 살사와 룸바 음악이 흐르는 정열적인 나라였다. 실제로 아바나 거리를 걷다 보면 사람들이 모여 기타와 봉고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여행객도 쿠바인도 스스럼없이 어울려 즐기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쿠바인 친구는 쿠바인의 핏속에는 음악이 흐른다고 했다. 그리고 춤과 음악은 자신들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아바나 사람들은 음악이 있는 곳이면 남 녀노소 할 것 없이 아무 곳에서나 춤을 추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어느 순간 그들의 생활 속으로 빠져드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채소가게 아저씨, 꽃 파는 아주머니, 거리의 청소부, 태극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허브농장의 할아버지, 순수한 눈동자의 아이들…. 아바나에 체류하는 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까사(민박집)에서도, 거리에서도, 말레콘에서도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놀랄 만큼 친절했다. 서로 다른 피부색과 다른 언어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집 앞 의자에 앉아서, 또는 말레콘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를 좋아했다. 말레콘은 아바나 시민의 야외거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애용하는 공간이었다. 냉방시설이 없는 서민이 열대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털어놓는 현지인들이 당황스러웠다.

아바나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나는 짧은 스페인어와 보디랭귀지로 쿠바혁명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쿠바인은 그저 순간순간 즐기며 살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의 혁명은 거대한 혁명광장과 광장을 내려다보는 호세 마르티 동상과 내무부 건물의 체 게바라와 정보통신부를 장식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남겨두었다.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쿠바인의 일상을 보며 나는 혁명이 과거의 유산으로 치부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쿠바인 친구에게 물어봐도 별다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답게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수다쟁이들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순수했던 쿠바혁명의 목표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날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는가. 나는 50년이라는 세월이 얼마나 무서운 망각의 늪인지 잘 몰랐다. 그들에게 쿠바혁명은 이제 생존의 한 형태일 뿐이었다.

아바나 거리에서 들려오는 ‘체 게바라여 영원하라라는 노래도, 체 게바라의 초상화도, 체 게바라가 애용했다는 시가도 모두 지나치게 상업적이었다. 피델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가 이제 혁명가가 아니라 최고 권력자가 되었듯, 혁명의 날은 지나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만 남아 있었다. 나는 순진한 생각에 빠져 그들을 오도하고 그들을 마음대로 재단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마저 오래된 속담으로 치부되는 시대다. 21세기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오히려 왜 이렇게 변했냐고 항변하는 자체가 실례가 될 것이었다.

이들은 혁명을 통해서 인간의 존엄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가난함을 받았다. 1959년 쿠바혁명 직후의 혼란스러운 아바나의 풍경은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 감독의 영화 <저개발의 기억>에서 볼 수 있다. 남자 주인공은 빗이 두 동강이 나 새 빗을 구하기 위해 정부가 운영하는 상점에 갔지만 빗은 없었다. 병 뚜껑인 코르크마개가 부족해서 청량음료 생산이 중단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영화 속 1961년 아바나의 모습과 현재 아바나 서민의 생활은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사실 이었다.

단지 수첩 하나를 구하기 위해 며칠 동안 문구점을 뒤져야 하는 게 현재 쿠바가 처한 현실이다. 계란을 사기 위해서는 몇 주를 기다려야 한다. 사소한 생활용품은 언제나 부족했다. 그들은 부족한 물자를 충당하기 위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직장에서 물건을 빼돌려 팔고, 불법 민박을 운영해서 세금을 포탈했다. 거스름돈을 잘 돌려주지 않는 상점 직원 때문에 나는 물건을 살 때마다 끊임없이 계산서를 확인해야했다. 이 모든 결점보다도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내 스스로 만든 쿠바라는 환상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미국 뉴욕대 학생들과 아바나대 학생들이 서로 어울려 살사춤을 추고 있다
쿠바라는 환상이 하나둘 깨어지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아바나에서 8개월을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는 표현은 나의 아바나에서의 생활을 가장 단적으로 묘사하는 말이었다. 돈이 있어도 나는 언제나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매일 아바나의 일반서민처럼 길거리 음식을 사먹고 배급소에서 1페소(55원)짜리 빵을 사먹었다. 물론 내 형편은 아바나의 서민보다는 월등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에 젖어 있던 나로서는 풍요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보다 더 큰 결핍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심리적 결핍이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덕분에 나는 내 안의 결핍을 끊임없이 점검하며 살았다.

아바나에서의 생활은 이곳 사람들과 문화를 끊임없이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단기간 쿠바를 다녀가는 여행객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쿠바를 떠날 수밖에 없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카리브해의 환상적인 섬나라는 얼마나 낭만적인가! 하지만 낭만이라는 환상의 밑바닥에는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쿠바의 민중이 있다. 부정확한 정보는 쿠바 여행객에게 엄청난 후폭풍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짧은 여행은 환상에 환상을 덧입힐 뿐이다. 쿠바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과 오래 더불어 살아봐야 한다.

20세기의 성공한 혁명국가,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헤밍웨이, 정열적인 살사, 파라다이스, 올드카,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 미수교국, 사회주의, 인종차별, 무료교육, 무상의료, 지상천국, 유기농업, 스페인풍 건물들, 말레콘, 연인들, 엘 모로성,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나라, 유령제국, 야누스의 얼굴처럼 양면성이 매력적인 곳이 바로 쿠바라는 나라다. 아바나에서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쿠바인들을 만났다.

아바나 시민들이 ‘현재’에 열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어떤 미래도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지금 현재를 즐기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은행에 저축할 돈도 없고, 설령 있다 할지라도 절대로 은행에 돈을 예치해두지 않는다. 국가를 믿지 못하는 저개발국 국민의 생존방법이다. 현금이 생기면 내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별 필요가 없는 물건까지 사들인다. 상품이 꽉 들어찬 한국의 마트와는 달리 이곳의 대형마트에는 물건이 거의 없다. 외국인과 부자가 이용하는 마트가 대부분인데도 그랬다. 마트 진열대에 물건이 진열되자마자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싹쓸이해버린다. 물론 돈이 있는 사람에 해당되며 가난한 사람은 부족한대로 지낼 수밖에 없다.

처음 아바나 거리를 산책할 때였다. 베다도 23번 가를 걸어가던 나는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이 느긋하게 걸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나만 홀로 혼잡한 서울거리를 걸어가듯 빠르게 그들을 지나치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멍하니 거리에 서서 이방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얼마나 속도에 사로잡혀 살아왔던가. 하지만 몸과 마음에 각인된 악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아바나 시민처럼 느리게 즐기면서 걷기까지 몇 달의 시간이 걸렸다. 열대기후에 따른 국민성 탓인지 어떤 일을 시켜도 ‘마냐나 마냐나(내일 내일)’ 하며 미루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불안한 미래에 저당 잡혀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던 나로서는 이들의 대책 없는 낙천성이 부럽기만 했다. 음악이 들려오면 길거리와 식당에서 춤을 추고, 사람들과 수다를 즐기고, 동물을 사랑하고, 어린아이들을 귀애하는 아바나 사람들. 오직 현재를 중시하며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즐기는 삶의 방식을 이들이 언제까지 지켜나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바나는 아바나 비에하, 센뜨로 아바나, 베다도, 미라마르 등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그중 아바나비에하는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거리인 동시에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관광객의 거리를 조금 벗어나면 허물 벗은 뱀을 연상케 하는 낡은 집들이 늘어섰고, 그 집의 창을 통해 허름한 살림살이를 들여다볼 수 있다.

불리하고 불편한 것은 가급적 보여주지 않고 숨기려 할 텐데 그런 것이 없다. 숨기려면 몽땅 다 숨겨야하니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워낙 생활수준이 낮으니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리라. 북한처럼 완벽한 통제 사회도 아니니 쿠바정부로서는 최선의 방책인 셈이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오래된 건물들은 강한 햇살과 거센 해풍에 허물어졌다. 물자가 부족한 탓에 수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각목으로 대충 지지대를 하고 아무런 방편도 없는 집에 사람들이 기거했다. 침대도 없고 화장실도 변변찮은 방에서 여러 명이 기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바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개발이 되어 시 경계가 넓어졌다. 아바나 비에하 거리를 시작으로 천천히 걷다 보면 바로크, 로코코, 아르누보, 아르 데코 등으로 건물의 양식이 달라지는 걸 볼 수 있다. 서쪽으로 갈수록 현대적인 건물이 눈에 띄는데 특히 미라마르에는 각국 대사관이 있고 외국기업이 상주하는 빌딩이 많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남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식민지 시대의 건물과 좁은 길이나 있는 아바나 비에하는 빌딩숲과 넓은 대로가 있는 미라마르와 극명하게 비교된다.

자본주의 유입은 막을 수 없는 대세


▎엘 모로성이 바라다 보이는 말레콘 해변에서 뜨거운 입맞춤을 하고 있는 아바나의 청춘 남녀들. 말레콘은 아바나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명소다.
평등한 사회주의를 천명하는 쿠바지만 더 이상 자본주의의 유입과 흐름을 피할 수는 없을 듯하다. 피델카스트로가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국가의 통치권을 넘겨준 뒤부터 자본주의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작년 12월 17일 발표된 미국과 쿠바의 국교정상화 결정을 계기로 그 흐름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53년간 미국의 경제봉쇄로 고통을 겪던 쿠바는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 것인가.

쿠바 정부는 몇 해 전부터 개인가게 운영과 집 매매, 외국 자동차 수입을 일정 부분 허용하고 있다. 외국인을 상대로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과 일반인의 빈부격차는 엄청나다. 한 달 월급으로 20~25세 우세(20~25달러)를 받는 사람과 하루 민박요금으로 같은 금액을 버는 사람과의 빈부격차는 필연적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자본주의화를 더욱 가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쩔 수 없이 자영업은 늘어나고 아바나의 거리 풍경도 세태에 따라 조금씩 바뀔 수밖에 없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아바나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한국과 쿠바는 아직 미수교 상태다. 그럼에도 쿠바 전역에는 대략 1100여 명의 한인 후손이 있다.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어쩌다 이들은 먼 이국에서 이름도 얼굴도 생소한 쿠바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 호세 마르티 문화원의 직원인 세르히오 임은 독립운동가인 임천택의 후손이다. 한인 3세 화가인 알리시아 데 라 캄파 박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유명한 화가다. 이들은 1921년 멕시코에서 증기선을 타고 쿠바를 향해 떠나온 한인의 후손이다. 최근 활발해진 한·쿠바 민간 차원의 교류에 이곳 한인사회는 무척 고무되어 있다. 2014년 8월 아바나의 미라마르에는 한인 후손 문화회관(호세 마르티 한국 쿠바 문화클럽)이 세워졌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중 화폐제도를 고수하던 쿠바가 2013년 가을에 이를 공식 폐지했다.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태환화폐 세우세(CUC)와 불태환화폐페소(PESO)를 사용할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세우세는 페소의 24배다. 농산물을 살 때 페소를 사용하고 공산품과 민박 비용으로 세우세를 지불했다. 지금 수출입업체를 중심으로 이중 화폐제도를 폐지하고 있고 일반인은 아직 두 가지 화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복잡한 화폐체계 때문에 고생했던 나로서는 제도의 폐지를 당연히 환영해야 하겠지만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달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도 정비로, 쿠바가 자본주의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예상은 미국과의 국교정상화 발표로 오히려 명백해졌다.

아바나에 봄은 오는가


▎미국의 국회의사당을 본떠 만든 쿠바의 국회의사당 카피톨리오. 쿠바는 사회주의혁명 이전 정치와 경제 양면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아바나의 지인은 미국과 쿠바의 국교정상화에 대해 한국의 언론과 기업체 등에서 수많은 문의를 받았다고 한다. 12월 중순부터 연말까지 정신 없이 시간을 보냈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현지인과 현지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은 모두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본다는 것이 지인의 전언이다. 물론 당장 미국 관광객들이 증가하고 미국의 쿠바인이 쿠바에 있는 친척에게 보내는 송금액이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마이애미의 자본이 전보다 많이 쿠바로 유입되더라도, 이 돈이 허물어져가는 건물을 수리하고 구멍투성이 도로를 보수하는 데 쓰일지는 알 수 없다.

이미 개인 식당, 카페 등 자영업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이번 조치로 더 늘어날 가능성은 많아졌다. 그러나 일반 쿠바인의 삶은 미국과 쿠바와의 관계개선에도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쿠바는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다. 결코 국가의 근본인 사회주의가 위험에 처하는 모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우리가 이제껏 50년을 견뎌왔는데 앞으로 50년은 충분히 더 견딜 수 있다”며 미국과의 들뜬 수교 분위기를 경계한다고 한다. 라울 카스트로가 물러나는 2017년 말 이후를 대비하는 계획의 일환이라는 소문도 있다. 이번 발표는 미국과의 간극을 좁혀 앞으로의 충격적인 개방에 대비하기 위한 중장기 포석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경험한 아바나와 아바나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미국 코앞에서 전쟁위협과 경제봉쇄 조치를 반세기 동안 버텨낸 쿠바의 저력을 절대로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쿠바인은 자존감이 강하고 조국 쿠바에 대한 사랑이 넘친다. 주요 관광지인 아바나 비에하 광장을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사용하고, 외국인 전용 호텔의 출입을 내국인에게도 점차 허용하고 있다. 비록 가난한 나라이지만, 이곳의 주인은 관광객이 아니라 쿠바인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행동이다.

‘낭만 쿠바’는 어디에


▎아바나를 빛낸 전설적인 예술가들을 모래로 그려놓은 벽화. 그 앞을 두 노년의 부부가 그들의 전성기를 회고하며 걷고 있는 듯하다.
외국인과 결혼한 쿠바인이 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쿠바를 그리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쿠바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단다. 앞으로 미국 이민이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현행 ‘쿠바수정법’은 조건을 갖춘 쿠바인에게 합법적인 미국 영주권과 시민권을 보장한다. 멕시코 등 남미국가에서 목숨을 걸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파격적인 혜택이다. 쿠바인은 가난과 사회주의 쿠바를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 망명을 한다. 그동안 큰 어려움 없이 난민으로 인정돼 상당수가 합법적으로 미국 체류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과 쿠바 간 국교정상화가 이뤄지면 앞으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마이애미의 쿠바인 중에는 국교정상화 발표에 울면서 감격하는 사람도 있고, 오바마 대통령이 잘못한 것이라며 비분강개하는 쿠바 출신 젊은 공화당의원도 있다고 한다. 이번 조치에 대해서는 확대해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세계사를 바꾼 독일의 베를린장벽 붕괴가 아니라는 사실을 현지인과 아바나에서 오래 거주한 외국인들은 잘 알고 있다. 미국과 쿠바가 미래를 위해 한 발 내디뎠다는 점에 의의를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미국과 쿠바의 국교정상화가 발표되던 즈음, 나의 쿠바 여행 산문집 <쿠바에 애인을 홀로 보내지 마라>가 출간되었다. 나는 책 제목을 먼저 정해두고 글을썼다. 한국의 지인들은 제목을 듣자마자 왜 <쿠바에 애인을 홀로 보내지 마라>인지 정말 궁금해 했다. 그러나 아바나의 친구들은 쿠바와 아바나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제목을 선택했다며 감탄했다. 일정기간을 아바나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쿠바가 얼마나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위험한(?) 나라인지를.

푸른 하늘과 달콤한 공기와 자유로운 사고방식, 비너스 몸매의 여자들과 깨끗하게 차려입은 원색의 옷차림, 다채로운 피부색, 그리고 어떤 갑옷도 무장해제시키는 살사 춤과 음악의 힘은 놀랄 만큼 강했다. 나는 몇 달 동안 주위의 사람들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치 투명한 거울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되었다. 사람도 공기도 언어도 낯선 곳에서 가장 연약한 자신의 모습이 슬며시 나타난다. 가면을 벗은 비루한 진면목을 마주하게 되면 극력 외면하고 싶어진다.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무수한 가면을 써야 하는 한국과는 달리 쿠바에서는 가면 자체가 필요치 않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도 없다.

원색적이고 원초적이며 대지에 가까운 사람들, 자유와 방종이라는 단어의 차이조차 환한 햇살 아래 희미했다. 모든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람들은 부끄러워하거나 체면치레의 말을 하지 않는다. 아바나에서 나는 적나라한 인간의 민낯을 대면했다. 그리고 왜 여행객들이 쿠바에 매료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흥과 멋에 취한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으면 고정되었던 의식이 붕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세상 무엇도 지금 이 순간 외에 중요하지 않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원색의 올드카, 후미진 골목의 추억


▎1. 아바나 도로를 질주하는 올드카. 아바나는 형형색색 올드카의 천국으로 세월을 되돌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2. 과일과 채소를 파는 상설 재래시장. 아바나 곳곳에는 서민들이 즐겨 찾는 작은 시장이 많다.
그러므로 쿠바에 매료되든 쿠바노(쿠바사람)에게 사로잡히든 혼자만의 여행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시도하지 말기를 바란다. 홀로 거리를 걸어갈 때마다 중남미 국가에서의 위험과는 또 다른 종류의 위험에 맞닥뜨리게 된다.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물라토(스페인계 백인과 흑인의 남자혼혈)들 때문에 성가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입에 발린 추파와 찬사는 시간이 지나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들이 가난에서 탈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이다. 2013년 일반인들의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지만 외국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권력을 가졌거나 부자이거나. 소수의 사람들은 이미 해외여행자유화 이전에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었고 자식들을 외국유학을 보냈던 계층이다.

일반서민이 쿠바라는 나라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트렁크를 끌고 아파트 복도와 거실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행위예술(?)처럼 보이는 이 소동은 다름 아닌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는 강력한 소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문화와 국민성, 기후, 역사 등으로 인해 이들을 이해하기란 애당초 힘든 일이었다. 굳이 내 시선으로 이들을 재단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스스로 돌이켜보기까지 했다.

나는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앨리스처럼 놀라고 감탄하면서 아바나 곳곳을 돌아다녔다. 낡은 지도를 들고 날마다 거리로 나서기 전 달콤하고 진한 쿠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카페인의 힘으로, 쓰러져가는 건물이 즐비한 아바나 거리를 걸었다. 밤사이 말레콘을 넘어온 바닷물과 청소부의 야자수 빗자루 소리를 들었으며, 비너스를 닮은 여자들을 지나 과일과 채소를 파는 시장과 미술관과 박물관을 떠돌았다.

정말 이상했다. 아무리 애써도 손에 잡히지 않던 아바나의 실체가 아바나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에 도착해서야 홀연히 나타났다. 아바나를 여행한 관광객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여준다. 파라다이스를 경험한 듯 극찬하는 사람과 ‘낭만 쿠바’는 현실을 도피한 자들의 소굴이라며 폄하하는 사람이 있다. 이처럼 반응은 극단적이지만 사실 두 부류 모두 쿠바와 아바나의 마력에 사로잡힌 것이다. 한번 쿠바를 사랑한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쿠바로 되돌아온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세상인 듯 허공을 떠돌던 달콤한 공기와 원색의 올드카와 후미진 골목의 퀴퀴한 냄새와 지저귀던 새소리 같던 쿠바식 스페인어와 초콜릿 빛깔의 남녀들과 열대의 태양과 끈적이던 살갗의 감촉과 새벽마다 잠을 깨우던 닭 울음소리…. 이 모든 것의 총체가 아바나다. 오늘도 나는 내 생애 가장 뜨거웠던 아바나의 여름과, 아직도 아바나 골목을 헤매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상상에 빠지곤 한다.

- 글·사진 배영옥 시인

배영옥 -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해외창작거점 예술가 파견사업’에 선정되어 쿠바에서 8개월간 체류하며 쿠바에 관한 글을 썼다. 현재 시를 쓰면서 쿠바 문화에 대한 특강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뭇별이 총총>과 여행 산문집 <쿠바에 애인을 홀로 보내지 마라>가 있다.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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