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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 예수의 위대한 질문⑰ 예술로 재해석하는 창세기의 비극 ‘아케다’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1장 29절) 

예수의 수난과 죽음 암시한 구약의 비극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의 번제… 홀로코스트·전쟁으로 자녀 희생되는 현대의 비극 고발하는 소재 되기도 

배철현 인문학 인재양성기관 건명원(建明苑) 원장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구약성서의 장면 ‘아케다’는 신화나 서사시에 자주 등장하는 ‘존속 살해’란 비극의 연장선이다. 이 비극적 장면은 수많은 예술가의 새로운 해석으로 재탄생됐다. 카라바조(Caravaggio) 작 <이삭의 희생>(1603, 이태리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경전과 고전의 깊은 내면에는 폭력이 항상 존재한다. 자신의 무식이나 편견이 주변 사람들의 이익과 만날 때 갈등이 조성되며 그 해결점이 없을 때 언어적이거나 심리적인 폭력 혹은 무력을 이용한 폭력으로 자신의 바람을 관철시키려 한다. 경전은 바로 인간마음의 심연에 숨겨진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다. 인류가 사냥·채집경제에서 벗어나 농경·정착생활로 생활방식이 바뀐 후, 가족내 갈등은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복잡하다. 아버지가 가장(家長)으로서 어린아이의 생존을 책임지지만,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의 자리를 놓고 아버지와 갈등을 겪는다. 우두머리로서의 아버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아들과 필연적으로 대결한다. 이 대결이 심리적이며 본능적이지만 안정된 사회를 위해서는 이 갈등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제어되고 순화되어야 한다. 위대한 종교에서 항상 등장하는 덕목이 “부모에게 순종하라”라는 명령이다. 그러나 이 대결은 불가피하며 인류 문명과 종교를 다루는 신화나 서사시에서는 항상 ‘아버지 살해(patricide)’란 주제가 등장한다.

누구나 한두 번쯤 자신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맞닥트린다. 우리는 이 문제를 외면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방안이란 그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해서 견뎌내는 것뿐이다. 그 대면하는 시간엔 바닥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심오한 절망감에 휩싸이지만, 그 인내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지혜를 얻게 된다. 지혜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우리 삶의 일부로 수용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solve)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같은 깊은 경험을 통해 그 문제를 더 이상 문제로 바라보지 않고 해소(dissolve)해버린다. 우리는 이 문제를 ‘비극’이라 부른다.

‘비극’을 통해 우리는 성장한다. 비극은 과거의 자신을 송두리째 희생시키길 강요한다. 그래야 새로운 자신을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아니 서양 지성사의 시작은 바로 이런 ‘비극’ 작품의 등장과 일치한다. 비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잊을 정도로 배우들이 무대에서 하는 말과 행동을 깊이 관찰하여 그들의 생각에 저절로 몰입되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게 한다. 이것을 그리스어로 ‘엑스타시스(ekstasis)’ 즉 (자신의) 상태(stasis)로 부터 떨어져(ek) 나온다고 말한다. 이 경험이 ‘엑스타시’ 혹은 황홀경(怳惚境)이다. 자신의 처지를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의 희로애락을 똑같이 경험하면 알게 모르게 쌓아왔던 응어리가 풀어지는 경험을 한다. 이 경험을 ‘카타르시스’라고 부른다.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성서와 현실의 비극


▎베트남전쟁 중 자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미국의 행동은 아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려 한 아브라함의 행동과 일치한다. 팝가수 밥 딜런은 ‘61번 고속도로’라는 노래를 통해 미국을 ‘아베(아브라함)’에 빗대 국가의 폭력성을 고발했다.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쟁 모병 포스터.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성서에서도 발견된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조상’ 혹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브라함도 이 갈등을 겪는다. 유대인들은 창세기 22장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아케다(Aqedah)’라고 부른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 연습이 필요하다. 아무런 배경도 없이 신이 등장해 아브라함에게 무지막지한 요구를 한다. 잠시 이 장면을 여러분에게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고 가정해보자.

자, 책상에서 만년필을 내려놓고 몰스킨 노트북을 치우고 소파에 편하게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다음을 상상 해보자. 당신이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다. 방 안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면서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가 평상시와 달리 멀리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아버지는 당신을 차에 태우고 한참을 달려 시골 한적한 곳에서 내려서 걷는다. 당신과 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다. 마침내 당신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빠, 우리 어딜 가는 거야?” 아버지는 “가면 알아”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이윽고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정상에 오르자 아버지가 당신에게 말한다. “바위 앞에 서서 움직이지 말아라.” 그런 후 아버지는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당신에게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 한다. 당신은 악몽에서 깨어난다.

이 악몽이 창세기 22장 1-19절에 기록되어 있는 아케다이다. 아케다는 히브리어로 ‘묶기’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외아들 이삭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제단 위에 묶어 올려놓은 사건을 총체적으로 지칭한다. 창세기 22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은 미친 사람처럼 행동한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음성을 듣고 그 아들을 사막으로 데려가 무참히 살해하여 신에게 바치려는 광신도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 신앙의 조상이며 신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희생시키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두려움과 떨림의 심정으로 따른다. 아케다를 해석해왔던 키에르케고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칼 융은 모두 아브라함에게 초점을 맞춰 그의 신앙을 여러 각도에서 찬양한다.

아케다 이야기를 통해 미국문화를 비꼰 싱어송 라이터가 있다. 밥 딜런이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로버트 알렌 짐머만이다. 밥 딜런은 1965년, 24세 때 아케다 이야기에 대한 미드라시적 해석을 붙여 ‘Highway 61 Revisited’ 라는 노래를 작곡한다.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Oh God said to Abraham, “Kill me a son”/ Abe says, “Man, you must be puttin’ me on”/ God say, “No.” Abe say, “What?”/ God say, “You can do what you want Abe, but/ The next time you see me comin’ you better run” Well Abe says, “Where do you want this killin’ done?”/ God says, “Out on Highway 61”

오! 신이 아브라함에게 말했죠. “나를 위해 아들을 죽여라!”/ 아베(아브라함)가 말합니다. “아이쿠! 신은 정말 나를 못살게 구는군요.”/ 신은 말한다. “아닌데.” 아베가 말한다. “뭐라고요?”/ 신은 말한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베야! 그러나/ 다음에 내가 오는 것을 본다면 도망쳐야 할 걸.” / 하는 수 없이 아베가 말한다. “어디서 죽이면 되죠?” 신은 말한다. “61번 고속도로에서”


밥 딜런은 아케다 이야기를 1960년대 미국을 빗대 미드라시적 해석을 하고 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인 때 반전운동과 히피운동의 선구자였던 딜런은 절대적인 종교의 힘을 빌어 미국의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내모는 아브라함을 개탄한다. 신이 아브라함에게 “나를 위해 아들을 죽여라”라고 요구한다. 딜런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미국식 영어로 줄여 ‘아베(Abe)’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의 이름은 원래 ‘아브람’이었다. 신은 ‘존경받는 아버지’란 의미를 지닌 ‘아브람’의 이름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의미인 ‘아브라함’으로 바꾼다. 딜런은 ‘아베’라는 이름을 통해 친근하면서 동시에 잔인한 아브라함의 이미지를 창출한다. 신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늘렸지만 딜런은 줄임으로써 베트남전쟁으로 미국 젊은이들을 몰고 가는 미국문화의 잔인성, 사디즘, 그리고 권력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여러 민족을 탄생시킨 ‘아브라함’이 아니라 자신의 민족조차 말살시키려는 ‘아베’를 고발한다. 미국문화에서 아브라함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남북전쟁을 종식하고 노예제도를 철폐한 아브라함 링컨(1809-1865)이다. 아브라함 링컨의 별명은 ‘위대한 해방자(the Great Emancipator)’와 ‘정직한 아베(Honest Abe)’였다. ‘아베’는 미국역사에 있어서 정의와 자유의 상징이지만, 이 노래에서는 정의와 자유의 부재, 폭력의 상징으로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내모는 괴물로 묘사된다.

베트남전쟁 비판하는 은유로 활용


▎렘브란트가 그린 아케다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일치한다. ‘어린양’이 되어 죽음에 직면한 이삭을 세상의 죄를 대신해 제단에 바쳐진 예수의 이미지로 표현하면서 구약과 신약의 최대 비극을 신의 구원 계획에 의한 연속된 사건으로 해석했다. 렘브란트 작 <이삭의 헌신>(1635년, 러시아 국립에르미타주 미술관)
아베는 신의 터무니없는 명령을 듣고 맨 처음엔 “당신은 나를 정말 못살게 구는군요”라고 투덜댄다. 그러자 신이 본격적으로 협박한다.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콤플렉스가 그를 이 비극으로 내몰아도 자신이 그 상황을 직시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아베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한다는 범죄를 행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디서 죽이면 되죠?” 신은 말한다. “61번 고속도로에서.” 61번 고속도로는 미국의 남부 뉴올리언스부터 북부 미네소타 둘루스(Duluth)까지 2758㎞에 달하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가장 긴 고속도로다. 딜런의 노래에서 이는 미국 전역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는 유대교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십자가 사건의 핵심이기도 하다. 세례요한이 요단강가에서 세례의식을 베풀고 있을 때, 예수를 보고 말한 첫 마디가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였다. 이삭과 예수의 공통된 운명, 비극이란 주제를 그림을 통하여 해석한 렘브란트와 샤갈의 그림을 통해 이삭과 예수의 유사성을 살펴보자.

렘브란트는 구약성서 창세기 22장에 등장하는 ‘이삭 묶기’ 아케다의 주인공을 아브라함으로 잡았다. 그는 <이삭의 헌신>이란 그림을 1635년 자신이 화가로서 최고 명성을 누리고 있었을 때 그렸다. 그는 고향 라이덴을 떠나 열정적인 칼뱅신앙으로 가득 찬 암스테르담에 정착한 지 오래다. 칼뱅신앙은 프랑스 신학자 장 칼뱅(1509-1564)이 주장한 개신교 신앙 형태이다.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비덴베르크성당 문에 내 걸었을 때, 칼뱅은 여덟 살이었다. 칼뱅신앙이란 성서의 말씀만을 기초로 신학적인 논쟁을 유추하자는 신앙의 한 형태이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선택된 자들만이 구원을 쟁취하며, 예수는 이 구원이 예정된 자들만을 위해 죽었다고 주장한다. 1610년엔 라이덴의 개혁파 신학자 아르미니우스가 신의 예정과 은혜에 반응하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해 예정설을 반대하며 항의서를 국회에 제출하면서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분열됐다. 도르트에서 열린 네덜란드 개혁교회 총회(1618-1619)에서 아르미니우스파의 대표인 잔 본 올러바르너벌트(Jahn von Oldebarnevelt)가 처형된다. 이후 캘뱅주의는 네덜란드의 명실상부한 국교가 됐다.

렘브란트는 당시 유행했던 회화법인 키아로스쿠로(kiaroscuro)를 사용해 대상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대비시켰다. 특히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갈색을 많이 사용하였고, 무엇보다도 ‘손을 통해’ 그림의 핵심을 전달한다. 그는 신이 등장하는 바로 그 순간, 그 신의 현현(顯顯)인 에피파니(epiphany)를 묘사한다. 아브라함은 그 순간에 신이 예비하신 신비를 눈으로 인식한다. 여기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수다. 렘브란트는 아케다 이야기를 키아로스쿠로와 ‘말하는 손들’이라는 어휘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렘브란트는 아케다 전체를 다루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 집중한다. 아브라함의 얼굴은 주름지고 초췌하고 머리카락은 가늘고 힘이 없으며 머리카락과 수염은 거의 백발이다. 렘브란트는 창세기 22장 6절과 10절에 등장하는 ‘칼’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 칼은 아브라함의 손에 있지 않고 이삭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기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얼굴 전체를 질식시킬 만큼 큰 손으로 덮고 그의 머리를 뒤로 젖혀 이삭의 하얀 목을 노출시킨다.

왼편 상단에 있는 천사는 하늘에서 급히 날아왔다. 그는 22장 11-12절의 내용을 세 인물의 손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우선 천사의 왼손은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표시하기 위해 위로 추켜올렸으며, 그의 오른손은 칼을 쥔 아브라함의 손목을 살포시 잡는다. 거기엔 어떤 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이 칼을 놓칠 정도로 강력하다. 렘브란트는 떨어지는 칼을 통해 신의 명령이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묘사한다. 이 순간은 보는 이의 숨을 멈추게 한다. 칼이 땅에 떨어져야만 우리가 숨쉴 수 있을 것 같다.

예수의 죽음을 상징한 렘브란트의 아케다


▎샤갈은 아케다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갈등과 혼돈에 빠진 아브라함과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대인 등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인간들 사이에서 천사(신)는 눈을 감은 채 비극을 외면한다. 마르크 샤갈 <이삭의 희생> (1966, 프랑스 국립 마르크샤갈 성서미술관)
에피파니의 순간이 강력하게 표현된 것은 아브라함의 표정이다. 아브라함의 얼굴은 신의 등장에 놀란 나머지 어리둥절함과 안도를 동시에 품고 있다. 그는 위에 등장한 천사를 보고 놀라서 쳐다본다. 그의 얼굴은 고뇌에 찬 얼굴에서 마침내 이삭이 살게 되었다는 형용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기쁨으로 혼란에 빠져있다. 놀라서 벌어진 입은 그의 수염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너무 놀라 두려움에 몸을 웅크려 뒤로 빼며 천사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렘브란트가 그린 칼은 남다르다. 그는 아브라함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집을 정교하게 그렸고 칼은 이삭의 드러난 목을 향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손에서 떠난 칼은 예상 밖이다. 그 칼날은 무디고 달아 둥그렇고 희생제물을 벨 수 없을 것 같다. 이 칼은 살육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장식용처럼 보인다. 렘브란트가 그런 칼을 그림의 중심에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칼은 전략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삭으로 몬다.

렘브란트는 아케다 이야기를 통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해석하고 있다. 이삭의 몸은 그림 하단 3분의 1을 차지한다. 그는 건장한 청년이 아닌 열 살에서 열두 살가량 되어 보이는 아이다. 이삭은 두 팔을 뒤로한 채 나무 위에 고요하게 누워 있다. 굳이 두 팔을 묶을 필요도 없을 것만 같다. 렘브란트가 그린 이삭의 몸은 특이하다. 그의 몸은 흠이 하나도 없이 완벽하다. 그의 몸은 젊고 유연하며 조각처럼 우아하다. 렘브란트는 이삭의 몸을 유대교 희생 제물의 격에 맞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죄를 지고가는 완벽한 희생 제물로서 예수를 그렸다. 이삭의 몸은 자신의 운명을 감지라도 한 듯, 천사가 등장하고 아브라함이 그의 머리를 잦혀도 요동하지 않으며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처럼 관찰자를 향해 드러나 있다. 이삭의 허리감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연상시킨다.

이 그림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모든 것들-빛, 칼과 칼집, 천사의 눈길-은 이삭을 향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천사를 응시하고 있지만, 천사의 시선은 이삭을 향하고 있다. 이 그림이 성서의 아케다 이야기와 가장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이삭을 대신할 어린양이 없다는 사실이다. 렘브란트는 이삭의 얼굴을 가림으로써 여러 의미를 담고자 한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동시에 희생될 어린양이기도 하다. 그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희생될 어린양으로서 예수를 그렸다.

렘브란트는 이삭을 피에타의 예수로 표현했다. 피에타의 구성요소들, 특히 허리감개와 관찰자에게 확연히 드러난 몸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손으로 가려진 얼굴, 천상의 빛을 발하는 몸, 죽은 듯 움직임이 없는 몸, 무엇보다도 희생양, 이 모든 것은 이삭이 신약성서의 예수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증거다. 이삭의 모습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렘브란트가 캘뱅신앙의 본산지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그는 아케다 이야기를 예수의 십자가 처형사건의 예시로 보았다.

이삭을 마지막 순간에 살린 신의 은총 사건은 신이 아케다 사건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고, 그의 아들 예수를 희생양으로 주는 행위와 동일시된다. 신약성서 <로마서> 8장 32절에서 사도 바울은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신의 은총을 감사한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그림을 보는 당시 개신교인들에게 이삭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어린양, 즉 예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렘브란트는 아케다 이야기의 주제인 희생제사의 폭력성을 감소시켰다. 희생제사에 동반되는 폭력과 피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칼이 분명 그 폭력성의 도구이지만, 렘브란트가 그린 칼은 무뎠고 의식용일 뿐이다. 그 칼은 이삭을 향하고 있으며, 이삭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어린양, 예수다.

유대인의 영감으로 해석한 샤갈


▎예수의 죽음은 곧 인류의 구원을 의미한다. 신약의 기자는 예수를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진 어린양’이라고 고백했다. 미켈란젤로 작 <피에타>(1498, 이탈리아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
19세기말 벨라루스 빕테스크의 유대인 게토에서 태어난 마크 샤갈은 현대주의, 유대민속주의, 유대신비주의인 하시디즘 등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든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토라 읽는 소리에 잠을 깨고 토라를 히브리어 원문으로 외울 정도였지만 유대교 신자는 아니었다. 당시 다른 현대 화가들과는 달리 토라에 등장한 인물들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66년에 <이삭의 희생>이란 그림을 그린다. 굵은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으로 과감히 칠한다. 원색들을 이용해 대상을 평면으로 그려 마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위에 그린 것처럼 보인다. 샤갈은 아케다 이야기를 그리기 위해 렘브란트의 그림을 면밀히 연구한 후 자기만의 시각적 주석을 달았다.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샤갈도 등장인물들을 모두 그렸다. 아브라함은 칼을 들고 있고, 이삭은 나무 위에 누워있고 숫양은 멀리 떨어져 나무 밑에 조그마하게 그렸다. 그런데 천사가 두 명이다. 왼쪽 상단 구석에 그려진 천사는 흰옷을 입고 왼손을 들었다. 두 번째 천사는 하늘과 땅의 경계까지 내려와 아직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을 설득하고 있다. 이 두 번째 천사의 왼편에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옆에서 이 광경을 쳐다보면서 절규하는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은 이삭의 어머니 사라다. 사라가 아케다를 다룬 그림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사실 사라는 이 전체 이야기를 푸는 열쇠를 쥐고 있다. 그림의 오른편 상단에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묘사되었다. 샤갈은 사라와 예수 사건을 아케다 이야기에 대한 주석으로 그려 넣었다. 샤갈은 어려서부터 배워온 아케다 이야기와 그 해석이 들어 있는 미쉬나(Mishna) 주석을 이 화폭에 담았다. 샤갈은 다른 등장인물들을 화폭에 담아 유대인들의 해석과 그리스도교 해석을 표현한다.

샤갈은 렘브란트가 접근할 수 없는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의 심오한 해석 전통을 추가하였다. 그의 그림 자체가 아케다 이야기라는 본문과 주석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샤갈이 그린 아케다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살펴보고, 그 후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인들의 주석을 살펴보자. 이 그림의 핵심은 사라의 울부짖음이다. 그의 목소리는 실제로 아케다 이야기에서는 등장하지는 않지만, 죽을 위기에 처한 아들에 대한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샤갈의 그림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하단엔 아케다 이야기의 재현, 왼편엔 유대인들의 경전해석의 원칙인 침묵 속 웅변의 재현, 그리고 상단 오른쪽엔 그리스도교 경전해석의 원칙인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피에타가 그려져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림의 텍스트라면 어머니 사라의 절규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그 본문에 대한 주석이다. 우선 아브라함을 살펴보자. 아브라함은 자신을 부르는 천사를 쳐다본다. 그 순간 자신이 쥐고 있던 칼을 이삭의 몸으로부터 떼어낸다. 아브라함이 더 이상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지 않겠다는 몸짓이다. 아브라함은 영적인 ‘제3의 귀’를 지닌 자이기 때문에 신의 명령을 항상 감지하고 그 명령을 따랐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렘브란트 그림에서 묘사된 아브라함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샤걀의 그림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 아니라 할례의식을 행하는 자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의 왼손은 이삭의 발가벗은 허벅지 위에 놓여 있고 오른손에 칼이 들려 있다. 아브라함의 모습에서는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다. 샤갈은 붉은색으로 아브라함을 표현해 혼돈상태를 상징했다.

아브라함과 달리 이삭과 천사의 모습은 이상하다. 이삭의 묶이지 않은 오른손은 우리에게 정면으로 향해 있다. 특이한 점은 렘브란트와 카라바조의 그림과 달리 이삭은 소년이 아니라 청년이다. 샤갈은 아케다 이야기를 히브리 원문으로 숙지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이삭을 청년으로 표현하였다. 이삭을 청년으로 표현했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표현은 샤갈의 윙크다. 이삭은 오른쪽 눈은 감고 왼쪽 눈만 뜬채 우리와 교감하고 있다. 이삭의 윙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림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라고 하는 촉구이다. 아케다를 스스로 검증한 적이 없이 남들의 이야기만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림 안에서 새로운 해석을 찾아내라는 눈짓이다.

샤갈이 그린 이삭의 모습은 정형화된 모습이다. 샤갈이 <인간창조>라는 그림에서 그린 하늘에서 천사의 날개를 타고 지상에 내려온 아담의 모습도 이삭의 모습과 유사하다. 아담은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자신이 해야 할 미션을 지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으로 묘사되었다. 이 모습은 그가 그린 <야곱의 꿈>이란 그림에도 등장한다. 이 그림에 천사들이 하늘을 오르내리는 장면이 있다. 그 가운데 한 천사가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다가 장대에 옆구리를 찔려 떨어진다. 이 천사의 모습도 이삭과 유사하다. 샤갈의 이삭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생명을 내어주는 대속자의 모습이다. 샤갈은 영적인 깨달음으로 노란색을 신적인 경지로 표현한다. 샤갈은 이삭의 상반신을 노란색으로 칠했다.

죽음과 부활로 가는 어린양의 통과의례


▎샤갈의 아케다에 등장한 이삭은 그의 다른 그림에서도 등장한다. <야곱의 꿈>과 <인간창조>에서 이삭의 모습을 한 남자(아담)로 그림으로써 이삭과 예수, 인류를 동일체화한다. 마르크 샤갈 작 <야곱의 꿈> (1966, 프랑스 국립 마르크샤갈 성서미술관)
왼편에 그린 두 명의 천사도 비정상적으로 표현되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에 파란색으로 그려진 천사는 그 모습이 선명하지 않다. 이 천사는 땅과 하늘의 중간에 묘사되었다. 그는 뒤로 두 날개를 휘날리며 아브라함에게 팔을 내밀지만 짧아서 미치지 못한다. 샤갈은 그가 눈을 감고 있는 것으로 그렸다. 그림의 왼편에 나무가 있고 그 밑에는 숫양이 있다. 그는 숫 양의 뿔이 걸린 수풀 대신 나무를 그렸다. 너무 작아 아브라함이 인식하지도 못한다. 샤갈이 그린 두 번째 천사는 흰색으로 표현된다. 그는 하늘에서 아브라함에게 외친다. “주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까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창세기> 22장 16-18절) 이 하얀 천사는 왼손으로 그림의 상단 오른편에 있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손으로 가리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십자가 사건을 보지 못한다.

그림의 중앙에 자리잡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습은 다중적 의미를 지닌다. 샤갈은 그 의미를 서로 다른 색으로 표시한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아브라함은 천사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다. 이삭을 죽이려던 칼을 들어 올려 이삭의 생명엔 지장이 없다. 그러나 이삭을 보면 상황이 다르다. 이삭은 불의 색인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휘감겨있다. 불이 붙은 나무로부터 노란색, 붉은색, 주황색 연기가 피어 오른다. 이삭은 불길 가운데 연소되고 있는 번제물이다.

샤갈은 유대인이면서도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성서 해석을 받아들여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 그렸다. 유대인인 그는 이 그림의 제목을 ‘아케다’로 부르지 않고 ‘이삭의 희생’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을 신약시대 예수의 예표(豫表·prefiguration)라고 해석한다. 예수는 이삭처럼 신의 ‘사랑받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며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알면서도 이삭이 올랐던 모리아산과 같은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예수는 이삭처럼 자신이 희생제물이 될 때 사용될 나무-십자가-를 지고 올랐다. 그러나 이삭은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모면하지만, 오이디푸스처럼 버려진 아들인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이 차이다. 예수는 사랑의 화신으로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만난다. 이삭에겐 이 경험이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지만 예수에겐 죽음과 부활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유대교 경전을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포함시키면서, 토라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신약성서의 예표라고 생각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케다 이야기다. <바나바 편지> 7장 3절의 기록이다. “예수는 제단에 바쳐진 이삭을 통해 예정된 사건을 완성하였다.” 특히 성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 16장 32절에서 이삭이 자기번제에 사용될 나무를 지고 걸어갔던 사실을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간 사건과 연결지었다. “우리 주님(예수)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간 것처럼 이삭은 제사의 장소로 자신이 희생될 나무를 지고 갔다.” 마침내 이삭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그를 죽이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대신 제물로 바쳐진 숫양은 누구인가? 누구의 피로 희생제물이 완성되었나? 아브라함이 그(예수)를 보았을 때, 그는 가시덤불에 뿔이 걸렸다. 숫양이 예수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가 제물로 희생되기 전에 누가 가시면류관을 썼는가? 이삭의 음부가 피로 물들어있다. 샤갈은 아케다 이야기를 이삭의 성인식으로 해석한 것 같다. 이삭은 이 과정을 거쳐 아브라함의 대를 있는 이스라엘 신앙의 조상으로 자립하게 될 것이다.

사라의 눈으로 이삭·예수·홀로코스트를 바라보라

샤갈은 자신의 어릴 적 기억들을 그렸다. 검정색 긴 외투를 입은 수염 달린 사람은 왼팔에 토라를 들고 있다. 그가 자신의 고향 빕테스크에서 어린 시절 보았던 유대인의 모습이다. 그 위엔 한 여인이 두 팔을 위로 올리고 무릎을 꿇고 절규하는 모습이다. 그녀의 뒤로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나오는 연기에서 사람들이 파란 하늘로 사라진다. 여기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예수일 수도 있고 샤갈이 목격한 유대인들의 대표일 수도 있다.

샤갈의 그림 전체를 이해하는 실마리는 사라의 모습을 통해 추적할 수 있다. 성서 아케다 이야기에는 사라가 등장하지 않는다. 사라는 이 그림에서 남성들만의 이야기를 관조하고 개입하는 관객이다.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고 눈을 부릅뜨고 두 손을 간청하듯 올리며 말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을 관찰하고 반응하라고 촉구한다. 사실 아케다 사건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피해자는 어머니 사라다. 실제로 <창세기> 23장은 사라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이삭의 몸은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아브라함의 접힌 옷은 불길과도 같다. 샤갈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함께 홀로코스트의 불길에서 연소되고 있는 것처럼 그렸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연소된 것처럼, 맨 위에 그려진 다른 유대인들도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진다. 샤갈은 아케다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들에게 일어날 비극을 그렸다. 아브라함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파란 천사는 눈을 감고 있다. 유대인 600만 명 이상이 홀로코스트 사건으로 사라졌는데, 신은 눈을 감고 잠자고 있다. 그 뒤 하얀 천사가 축복의 말을 건넸지만, 그의 손이 인도하는 것처럼 홀로코스트가 그들을 맞이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말처럼 ‘신이 깜빡 졸았다’. 인간의 고통을 바라볼 의사도, 능력도 없는 신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에 개입하려 한다. 샤갈의 그림은 신에 대한 불평이다. 피어 오르는 불길은 신에 대한 항거다.

신은 이 비극의 장면을 외면했지만, 사라로 대표되는 여인들은 홀로코스트에 참여하고 반응한다. 이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라는 우리에게 방관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있다. 왼편 상단, 십자가를 지고가는 예수 앞에도 두 명의 여인이 서 있다. 아마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수제자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다. 이 감성은 아이를 낳은 어머니의 마음에서 온다. 그림 오른편에는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 장면이다. 동시에 사라가 이삭을 안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은 서로 다르게 세 번 등장한다. 사라-이삭, 마리아-아기 예수, 그리고 마리아-십자가를 진 예수. 어머니와 아들의 그림으로 우리의 관심이 아케다 이야기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옮아간다. 샤갈은 아케다 이야기를 사라의 눈으로 해석하라고 말한다. 우리로 하여금 이삭을 사랑하는 아들이자 희생된 아들로 인식하게 만든다. 사라를 통해 우리는 이삭, 예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로 보게 될 것이다.

배철현(eduba@naver.com)은 하버드대학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문헌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이며, 인문학 인재양성기관 건명원(建明苑)원장이다.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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