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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로드 클래식 | 그리스인 조르바② 생명과 자유, 그 충만한 매트릭스 - 허무 초월한 ‘生에너지’의 대폭발 

역마살 인생 속 무게중심은 늘 ‘존재의 심연’에 대한 탐구… 카잔차키스 삶과 문학의 종착지,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바라본 ‘나’의 자유 탐험기 

과부와 광란의 밤을 보낸 후 ‘나’는 마침내 그토록 갈망하던 ‘생의 율동, 우주의 진동’과 접속했다. 그날 밤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이고, 육체가 곧 영혼임을 깨달았다. 정신과 육신의 적대적 이분법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자유’라는 대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스 크레타섬의 항구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선박을 복제한 배가 시험 운항되고 있다. 크레타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무대로, 조르바와 작품 속 ‘나’가 자유를 찾는 영혼의 시험장으로 나타난다.
1914년(31세) 시인 앙겔로스와 함께 아토스 산을 여행. 여러 수도원을 돌며 40일간 머무름. 이때 <단테, 복음서, 불경> 등을 읽음.

1922년(39세) 5월부터 오스트리아 빈에 체재. 전 후 빈의 퇴폐적 분위기 속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붓다의 생애를 다룬 희곡을 집필하기 시작. 9월 베를린에서 그리스가 터키에 참패했다는 소식을 들음. 민족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에 동조. 혁명적 행동주의와 불교적인 체념을 조화시키려 시도함.

1924년(41세) 이탈리아에 체류, <붓다>를 완성하고 성자 프란체스코에 대한 흠모와 공경을 시작함. 공산주의 세포의 정신적 지도자가 됨.

1936년(53세) 내전 중인 스페인에 특파원으로 감. 독재자 프랑코를 인터뷰. 아이기나에 집이 완성됨. 그가 장기 거주한 첫 번째 집임.


<그리스인 조르바>(이윤기 옮김) 뒤에 붙은 카잔차키스의 연보를 ‘랜덤하게’ 추린 것이다. 이 사항들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생애가 지닌 ‘리듬과 강밀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일단 그는 늘 ‘길 위에’ 있었다. 평생에 걸쳐 그리스는 물론이고 유럽과 전 세계를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53세에 비로소 ‘집’이 생겼다니, 이 정도면 역대 최강급 역마살을 자랑하는 세르반테스도 울고 갈 지경이다. 더 놀라운 건 그의 사상적 여정이다. 31세에 ‘단테와 복음서와 불경’을 동시에 주파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프란체스코 성인과 공산주의에 대한 열정이 태연하게 공존한다.

요컨대 그는 ‘유동하는’ 존재였다. 시대 또한 쉬지 않고 요동쳤다.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벌어진 발칸전쟁을 비롯하여 제1, 2차 세계대전과 러시아발 소비에트혁명에 이르기까지. 그 각축과 진동의 시대를 그는 매끄럽게 유영하고 있다. 마치 장강을 거슬러 오르는 미꾸라지처럼. 그 유동성의 원천은 글쓰기다. 그는 온갖 정치적 운동에 참여했지만, 무게중심은 늘 ‘존재의 심연’에 대한 탐구에 있었다. 그 탐구의 결정판이 <그리스인 조르바>다. 지난호에선 조르바의 여정을 따라갔다면, 이번에는 카잔차키스의 분신인 ‘나’의 여정을 추적할 차례다.

갈탄광 사업을 위해 크레타로 향하면서 ‘나’는 이렇게 결심한다. “붓다에서 벗어나고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해방시킬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접촉을 가질 것.”(83쪽) 참 희한한 노릇이다. 채굴사업을 하겠다는 자본가가 이런 목표를 설정하다니. 헌데, 더 이상한 건 그렇게 결심했으면서도 지난 2년간 끌어안고 있던 ‘미완성 원고’를 챙겨간다는 사실이다. 멀리 카프카스로 떠나면서 ‘너는 대책 없는 책벌레’라고 냉소했던 친구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기를 싸듯이 조심스럽게 그 원고를 포장하여 다른 짐 속에 넣었다.”(15쪽) ‘책벌레’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책의 씨앗을 버리지 못하는 존재. 그가 원하는 건 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책에 육체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피와 땀과 근육이 펄떡거리는!

‘조르바’라는 인생학교에 다니는 ‘철부지 생도’


▎1975년 스페인 황태자 후앙 카를로스(오른쪽)와 프랑코 총통이 마주보며 미소짓고 있다. 카잔차키스는 내전 중이던 1936년 스페인에 특파원으로 파견돼 당시 극우 민족주의 세력의 리더 프랑코 장군을 인터뷰했다
그 여정에서 조르바를 만났다. 그는 한눈에 반한다. ‘푸짐한 입과 살아있는 가슴, 야성의 영혼’ 등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서다. 하여, 그는 갈망한다.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 있”기를. 그러자면 정신을 육신으로, 육신을 정신으로 채워야 했다. 즉, ‘정신과 육신’이라는 영원한 적대자를 화해시켜야 했다.

조르바와 ‘나’, 둘은 함께 간다. 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조르바는 채굴을 하고 인부들을 호령하고 또 위기에서 구출한다. 반면 ‘나’는 사유의 갱도를 채굴해 들어간다. 존재와 우주의 심연으로 향하는 길을 탐사하는 것이다. 전자의 길에선 ‘내’가 자본가고 조르바가 노동자지만, 후자의 길에선 조르바가 노련한 ‘튜터’라면, ‘나’는 철부지 생도에 불과하다. 물질적 세계와 비물질적 세계, 그 사이에서 생극(상생과 상극)의 파노라마가 펼쳐진 것. 과연 이 두 개의 상이한 포물선은 서로 마주칠 수 있을까?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매일 저녁 등불을 들고 거리를 다니면서 갓 도착한 나그네를 찾는다. 있으면 집으로 데려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는 안락의자에 앉아 지엄한 분부를 내린다. “말하소!” 직업 이며 이름, 어디에서 왔는지, 거쳐온 도시와 마을 등등 깡그리. 그러면 나그네는 ‘있는 말 없는 말, 겪은 일 안 겪은 일’을 되는 대로 주섬주섬 주워섬겼고, 그 사내는 안락의자에 편히 앉아 장죽을 문 채 귀를 기울이며 이 나그네를 따라 여행길로 나선다. 그는 마을을 떠난 적이 없었다. ‘왜 그 먼 곳까지 가? 길손들이 오면 다른 마을, 다른 세계가 내게로 오는 셈인데, 뭣하러 거기까지 가?’ 이 사내가 ‘나’의 외조부다.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외조부의 그런 기벽을 완성했다. ‘나’ 역시 등불을 들고 나가 나그네 하나를 발견한 셈이다. 밤마다 ‘나’는 일을 끝내고 오는 그를 기다려 맞은 편에 앉히고는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친다. “이야기하세요.” ‘나’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듣는다. 나그네는 이 세상 구석구석, 영혼 구석구석을 누빈 사람이다.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마케도니아 전체가, 산이, 숲이, 냇물이, 코미타지 게릴라가, 부지런한 여자들과 건강한 사내들이 그와 ‘나’ 사이의 좁은 공간 가득히 펼쳐진다. 매일 밤 조르바는 ‘나’를 그리스, 불가리아, 콘스탄티노플 구석구석으로 데려다 준다.

그렇다. 조르바라는 학교의 가장 중요한 교과서는 다름아닌 ‘조르바’ 자신이다. 그가 들려주는 인생역정에는 모든 과목이 다 들어있다. 문·사·철(文史哲)을 비롯하여 여성학과 인류학, 그리고 요리까지. 더구나 그는 이 모든 과목을 살아 숨 쉬는 언어로 풀어낸다. 그의 질펀한 ‘썰’에는 고매한 이치와 통속적 감각이 제멋대로 교차한다. 그것은 마치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높아졌다 낮아졌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나’는 이 ‘썰’의 파도를 따라잡는 데 여념이 없다. 대체 ‘나’는 이 텍스트에서 무엇을 배웠던 것일까?

이념과 주의는 ‘녹슨 고물총’


▎카잔차키스는 이탈리아에 오래 체류하며 <붓다>를 완성했다. ‘피사의 사탑’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카잔차키스와 그의 아내 엘레니
“시답잖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자식들, 창피한 줄도 모르는 모양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르바?” “임금이니, 민주주의니, 국민 투표니, 국회의원이니 해봐야 다 그게 그거니까 하는 소리요.”(27쪽)

조르바가 보기에 그 따위 이념과 주의는 ‘녹슨 고물총’이나 다름없었다. 산전수전을 거치면서 소위 ‘시대정신’의 허구성을 똑똑히 목격한 탓이다. 그것은 하나의 우상을 다른 우상으로 교체한 것에 불과하다. 왕권에서 민권, 봉건제에서 민족주의로의 변화는 분명 대단한 진보다. 하지만 그렇게 등장한 ‘민권, 민족’이라는 이념 역시 힘과 권위를 확보하는 순간 또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한다. 이념이건 종족이건 신이건 다 마찬가지다. 떠받드는 가치가 드높을수록 노예의 사슬은 더 한층 길어질 따름이다.

그즈음 ‘나’는 두 명의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하나는 아프리카로 간 친구. 그는 ‘그리스를 증오하는’ 그리스인이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미치도록 노동에 매진한다. 그에겐 오직 부를 창출하는 ‘노동, 노동’뿐이다. 다른 하나는 그를 책벌레라고 놀리며 떠난 친구. 그는 카프카스에서 난민을 규합하여 그리스로 향한다. 그들에겐 그리스가 곧 약속의 땅이다. 그에게는 오직 동포를 위한 ‘행동, 행동’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를 증오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그 둘은 방향만 다를 뿐 ‘샴쌍둥이’처럼 닮았다. 그리스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조르바는 그 모든 미망에서 벗어난 존재다. 그는 애국자가 될 생각이 없다. 애국심의 원천인 ‘신’과 ‘천당’에 대한 믿음 또한 없다. 사람들이 조국이나 천당같은 ‘우상’에 매달리는 건 허무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다. “나는 허무를 극복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어렵게 생각했지만 내겐 그럴 필요가 없어요. 나는 좋다고 기뻐하지도, 안 됐다고 실망하지도 않아요. 그리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는 소리를 들어봐야 터키가 아테네를 점령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211쪽)

그에게 있어 중요한 건 국적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냐’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앞으론 그것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좋은 ‘사람’이건 나쁜 ‘놈’이건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누구든 마음속엔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사지를 뻗고 땅 밑에 누워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결국 인간은 구더기 밥이라는 점에서 모두 한 형제다. ‘조국과 신’이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자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연민이 솟구친 것이다. 부처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이 시작되는 지점도 여기일터.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상은 또 다른 이상으로, 정열은 또 다른 정열로 화할 것이므로. 20세기 역사가 보여주듯, 민족·민주 등의 이념은 결국 공산주의로 도약한다. 계급을 통한 전 지구적 연대라는 이념이 탄생한 것이다. 카잔차키스 역시 그 혁명에 열렬히 동참한 바 있다. 한때 러시아로 이주할 생각을 했을 정도로. “내겐 로맨틱한 계획이 하나 있었다. 갈탄광이 성공하면, 모든 것을 서로 나눠 갖고 형제들처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 일종의 공동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새로운 종교집단, 새로운 생활의 기폭제를 구상해 왔다.”(79쪽) 그 낌새를 눈치채자 조르바는 곡괭이를 집어던지며 역정을 냈다. “제발 좀 끼어들지 마시오. 내가 아무리 애써놓아도 당신이 몽땅 무너뜨리고 말아요. 오늘 인부들에게 한 이야기, 그게 뭐요? 사회주의라고? 개코 같은 소리! 당신은 목자요, 자본주요? 결단을 내리쇼!” 어떻게 결단을 내린단 말인가? ‘나’는 이 양극을 결합하여 ‘지상의 생활’과 ‘하늘의 왕국’을 동시에 구현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공동체’ 혹은 ‘혁명’이라는 허깨비

하지만 조르바는 근본적으로 ‘인간’ 자체를 믿지 않는다. 인간이란 짐승이다! 짐승에겐 오직 힘의 원리만이 지배한다. “이 짐승을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갈 거요.” 그러니 거리를 두어야 한다. “우리는 평등하다, 우리에겐 똑같은 권리가 있다.” 이따위 소리를 하면 그들은 결국 “당신 권리까지 빼앗고 당신 빵을 훔치고 굶어 죽게 할” 것이다. 조르바의 말이 채찍이 되어 날아들었다. ‘나’는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한다. ‘내’가 꿈꾸는 공동체란 인간에 대한 고매한(실은 막연한) 이상에 근거하고 있다. 헌데, 만약 그 전제가 틀렸다면? 공동체고 혁명이고 단숨에 몰락해버릴 것이다. 그래서 몽상이고 망상이다. 하지만 조르바는 다르다. 조르바는 그토록 인간을 경멸하면서도 언제 어디서건 그들과 함께 한다. 위기가 오면 목숨을 걸고 그들을 구하지만 어떤 보답도 원하지 않는다. 근원적 연민 이외에 어떤 기대치도 없기에 가능한 행동이다.

물론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계몽이 필요한 거 아니냐고. 계몽이란 무엇인가? 어둠에 갇힌 대중을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 목자가 양떼를 이끌 듯 돌보아주는 것. 하지만 조르바는 즉각 반문한다. 만약 사람들이 눈을 뜨고 밖으로 나왔을 때 지금의 암흑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가? ‘나’는 알지 못했다.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할지, 그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하지만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여, 비전은 늘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모호하다.

‘나’의 비전은 영성과 지성이 결합된 예술가의 공동체다. “낮에는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만 만나 함께 먹고 마시고 읽고 인간의 중요한 관심사를 서로 토론하고 기존의 해답을 뒤집고자 했었다. 나는 그 공동사회의 규칙까지 정했다. 뿐만 아니라 사냥꾼 성요한이 은거하던 이메토스 산길 옆에다 마땅한 건물까지 하나 물색해두었던 것이다.” 조르바는 자신을 그 수도원의 문지기로 취직시켜달란다. “밀수도 좀 해먹고 이따금 그 성스러운 경내에다 괴상한 물건도 좀 들여놓게. 여자, 만돌린, 라키 술통, 애저구이. 그래야 당신네들이 허튼수작이나 부리며 인생을 우습게 살아버리지 않을” 거라면서.

우물에 빠진 ‘붓다’? 혹은 ‘붓다’라는 우물!


▎일본 도쿄 긴자의 상점에 진열되어 있는 순금 부처상. 카잔차키스는 평생 혁명적 행동주의와 불교적 체념주의를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조르바가 말하는 건 삶이다. 삶은 생명이고 욕망이며 일상이다.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또 속고 속이고, 죽고 죽이는 육체들의 향연. 이 생의 한가운데를 관통하지 못한다면 어떤 혁명도, 이상도 다 ‘허깨비’에 불과하다.

‘나’ 또한 거기에 동의한다. 20세기 초의 격변 속에서 ‘노동과 행동’, ‘투쟁과 혁명’이라는 이상이 어떻게 타락해가는지를 충분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가치는 욕망의 소용돌이와 생의 도저한 흐름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단테와 복음서, 불경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르바가 갱도를 파는 동안에도 나는 단테의 시행을 외고, 불경을 필사하고, 말라르메의 시집을 읽는다. 이중에서 ‘나’를 특별히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붓다다.

초등학교 1학년 알파벳 독본에서 우물에 빠진 아이가 그 속에서 화려한 도시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나’는 우물가로 달려가 검고 부드러운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오래지 않아 내 눈에도 저 환상의 도시, 거리, 아이들, 포도 넝쿨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우물 속에 머리를 처박고 팔을 뻗으면서 땅을 박차고 우물의 가장자리를 넘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머니가 나를 보셨다.(254쪽)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내 허리띠를 잡으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우물 속으로 뛰어들 뻔 했다. 자라면서 ‘나’는 ‘영원’이라는 말, 사랑·희망·국가·하느님 같은 말 쪽으로 가파르게 기울어졌다. 한단어 한 단어를 정복하면서 ‘나’는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아니었다. ‘나’는 겨우 말을 바꾸어 놓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 ‘내’가 2년 전부터는 ‘붓다’라는 말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붓다’라는 또 하나의 우물에 빠진 것이다.

‘나’는 부르짖었다. 붓다는 최후의 인간이다! 붓다에겐 ‘순수한’ 영혼이 있다. 붓다의 내부는 공허하며 그 자신이 바로 공(空)이다. 하여, ‘나’는 확신했다. “붓다는 최후의 우물, 마지막 심연의 언어이며 영원한 구원의 문이 될 것”이라고. 영원? 확신이 올 때마다 써오던 말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붓다 역시 또 하나의 미망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렇다. “나는 붓다, 하느님, 조국, 이상, 이 모든 허깨비에게서 풀려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붓다, 하느님, 조국, 이상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264쪽) 그런 점에서 붓다는 최후의 승부처다. 물러설 곳도, 나아갈 곳도 없다. “내 기필코 언어를 동원하고 언어의 주술적인 힘을 빌리고, 그 마술적인 율동에 의지하여 그를 포위 공격하고 무찔러 내 오장육부에서 내쫓고 말리라.”(196쪽)

이 대결의 배후조종자는 조르바다. 조르바가 아니었다면 ‘나’는 붓다라는 우물에 빠져 또다시 허우적 대고 말았으리라. 조르바는 붓다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붓다의 가치를 체득한 존재다. 그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 대한다. “태초에 이 땅에 나타났던 사람들의 경우처럼, 조르바에게 우주는 진하고 강력한 환상이었다.” “그는 이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흙과 물과 동물과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199쪽)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붓다의 소리

그렇다. 조르바는 생의 원초적 에너지로 충만하다. 모든 우상으로부터 도주했으면서도 결코 허무에 빠지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나’에게 절실한 것도 바로 저 생명력이다. 드디어 실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실전의 파트너는 과수댁. 모든 마을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에로스의 화신. 생의 원초적 충동을 내재한 여인이다. 치명적인 너무나 치명적인! 파블리라는 청년은 이 과부에 미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유혹의 메시지를 보낸다. 조르바는 말한다. “여자는 맑은 샘물과 같습니다. 거기 들여다보면 모습이 비칩니다. 마시면 되는 겁니다. 뼈마디가 녹신녹신할 때까지 마시면 되는 겁니다.”(124쪽) ‘나’ 또한 흑표범처럼 탄탄한 그 몸을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말썽이 생기는 건 딱 질색이니까. 다시 조르바의 채찍이 날아든다.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옳다! 하지만 ‘나’에겐 그럴 용기가 없었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의 사랑과 책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150쪽)

‘나’는 그녀와의 실전을 격렬하게 저항한다. 붓다의 노래를 베끼면서. 붓다를 쳐부수겠다면서 붓다의 품으로 도주한 것이다. 하지만 갱도가 무너져 죽을 뻔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 과부는 ‘내 속으로 들어와 피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과부가, 탄력 있는 허벅지와 엉덩이를 한 여자 형상의 악령, 마라라고 생각한다. 최후의 순간에 붓다를 유혹한 악령, 마라! ‘나’는 마라와 싸웠다. ‘나’는, 원시인이 동굴에다 뾰족한 돌과 붉은색, 흰색 안료로 사나운 맹수를 그리는 기분으로 불경을 베꼈다. 원시인 역시, 이들 맹수를 새김으로써 바위에다 묶어버리려고 애를 쓰지 않았던가.(166쪽) 낮 동안은 그럭저럭 싸울 만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문이 열리면서 과부가 들어왔다. 아침이면 ‘나’는 지친 패배자로 일어났다. 그리고 싸움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육신을 붓다로 만들려고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또다시 날아드는 조르바의 채찍. “오늘 밤에 그 집에 가요!” 결국 그는 깨달았다.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은 교활한 뚜쟁이, 마라의 악령”이라는 것을. 이윽고 마음은 명령했다. 가는 거다! 앞으로 갓! ‘나’는 단호하게 마을 쪽으로 돌아서 걸었다. 걸으면서 나도 모르게 조르바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다, 여자, 술, 그리고 힘든 노동! 일과 술과 사랑에 자신을 던져 넣고, 하느님과 악마를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것이 젊음이란 것이다!’ 드디어 과부의 뜰 앞에 이르렀다. 여자는 곤충의 암컷처럼 크고 탐욕스러워 보였다. 그 여자 역시 새벽이면 수컷을 잡아먹을 것이다. 드디어 합체! 다음날 내게서 과부의 냄새를 맡은 조르바가 말하길, “축복을 받으시오!”

그녀의 품속에 뛰어든 이후 ‘나’는 세포 하나하나가 눈뜨는 소리를 들었다. 마침내 그토록 갈망하던 ‘생의 율동, 우주의 진동’과 접속하게 된 것이다. 그날 밤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이고, 육체가 곧 영혼임을 깨달았다. 정신과 육신이라는 적대적 이분법을 비로소 벗어난 것이다.

조르바는 노동의 화신이자 에로스의 달인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모든 사물에서 영혼을 발견하는 범신론자다. 그에게는 몸과 자연이 곧 현장이자 스승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존재와 세계를 만나는 장소는 텍스트다. 그의 노동과 전투는 모두 책을 통해 이루어진다.

붓다와의 대결 역시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나’는 존재의 심연에서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붓다의 소리를 듣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썼다. 쓰는 게 아니라 받아 적는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그 과정에서 영혼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정신이 되었으며, 정신은 무(無)가 되었다. 붓다의 폭풍이 나를 엄습하여 ‘내’ 육신을 지치고 텅 비게 만들어놓고 떠난 것이다.

조르바가 새 갱도를 열면 ‘나’는 붓다에 대한 원고를 열었고, ‘나’ 역시 내 갱도를 파들어갔다. 쓰면 쓸수록 마음이 가벼워졌다. 안도, 긍지, 혐오감이 교차했다. 불경을 베껴 쓴다는 것은 ‘내’ 내부에 도사린 무서운 파괴력과의 생사를 건 싸움이며, ‘내’ 가슴을 말리는 위대한 부정과의 결투였다. 이 결투의 결과에 영혼의 구원이 걸려 있었다.

말했듯이, 붓다는 ‘최후의 인간’이었다. 허나, ‘내’가 보기에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 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이 숨이 가쁜 사람은 우리에게 너무 빨리 찾아온 것이었다. 우리는 되도록 빨리 그를 내몰아야 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하며 쓰기 시작했다. 아니, 쓰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었다. 무자비한 추격전, 포위 공격, 괴물을 불러내기 위한 주문이었다.”(197쪽)

조르바가 수없이 강조하듯, 이 이성과 관념이 주도하는 비물질적 전장에서 승리하려면 인생과 우주의 ‘쌩얼’과 마주해야 한다. 계절의 어김없는 리듬, 무상한 생명의 윤회, 태양 아래서 차례로 변하는 지구의 네 가지 얼굴, 생자필멸, 이 모든 사실이 다시 한 번 내 가슴을 조여왔다. 해오라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경고였다.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경고였다.”(246쪽) 그렇다! 산다는 건 ‘지금, 여기’를 누리는 것일 뿐! 그런 점에서 ‘과수댁’ 역시 일종의 자연이다. 오직 에로스적 충동만으로 덮쳐오는 육체라는 점에서 말이다.

조르바, 불멸의 텍스트가 되다


▎영혼의 자유를 갈망하며 전 세계를 방랑했던 카잔차키스. 그의 묘비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나’는 결국 자연의 리듬과 과수댁의 야성에 몸을 맡겨버렸다. ‘나’는 내 몸이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짐승처럼 환희를 즐기도록 내버려두었다. 다시 붓다의 원고를 폈다. 원고는 완성되어 있었다. 최후의 붓다는 꽃피는 나무 밑에 누워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다섯 가지 요소(흙·물·불·공기·정신)에 해제를 명하고 있었다. 나 역시 손을 들어 붓다에게 해제를 명했다. 나는 마지막 구절을 원고에다 휘갈기고 한 소리를 지르고 나서 붉은 연필로 내 이름을 큼지막하게 썼다. 그리고 끝!

그와 동시에 존재의 심연에서 ‘나’는 소리쳤다. “유아독존! 오 대지여! 나는 그대의 막내, 그대 젖줄을 빠는 나는 그대를 놓치지 않으리라. 그대는 다만 한순간의 삶을 내게 베풀겠지만 그 한순간이 젖이 되고 나는 그 젖을 빨 것이오.” 마침내 그토록 열망하던 생명의 매트릭스에 접속하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그 충만감을 만끽하는 순간, 파국이 왔다. 파국은 바람처럼 덮쳤다. 조르바의 야심작인 고가선 설치의 실패로 ‘나’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완전 빈털터리가 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그 순간, 내 안에 참을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왔다는 사실이다. 외적으로는 참패했지만 내적으로는 정복자가 된 것이다. 파멸은 지복(至福)으로 바뀌었다. 이보다 더한 자유가 또 있으랴. 드디어 조르바라는 ‘텍스트’를 마스터한 셈이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조르바: 우리 헤어지는 건가요? 어디로 갈 작정이오, 두목?

나: 조르바, 나는 외국으로 나갈까 해요. 내 뱃속에 든 염소라는 놈이 아직 종이를 더 씹어 먹어야 성이 차겠대요.

조르바: 두목, 그렇게 일렀는데 아직 못 알아들으셨군요?

나: 그래요, 조르바, 당신 덕택이에요. 나도 당신 방법을 채용해 볼까 합니다. 당신은 버찌를 잔뜩 먹어 버찌를 정복했으니 나는 책으로 책을 정복할 참이에요. 종이를 잔뜩 먹으면 언젠가는 구역질이 날테지요. 구역질이 나면 확 토해버리고 영원히 손 끊는 거지요. (…) 훗날 우리만의 수도원을 지읍시다. 신도 없고 악마도 없고 오직 자유로운 인간만 있는 수도원 (…) 당신은 문지기가 되세요, 조르바.(427쪽)

이별은 ‘칼로 벤 듯이’ 깨끗했다. 이후 5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시간에 가속도가 붙었고 지리적 국경선이 아코디언처럼 늘어나고 줄어들었다. 조르바는 쉬지 않고 엽서를 보냈다. 아토스 산에서, 루마니아에서, 시베리아에서. ‘나’ 역시 유랑자처럼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었다.

육체를 떠난 조르바의 영혼

그러던 어느 날 밤, 아이기나 섬의 바닷가에서 조르바가 꿈에 나타났다. 그때부터 ‘나’는 그와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보존하고 싶다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욕망을, 이 지구 어느 곳에선가 조르바가 죽어가고 있는 징후로 파악했다. 유치한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하여, ‘나’는 내게 이 일을 시키는 저 신비로운 손과 싸워야 했다. 이틀, 사흘, 일주일을 버티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조르바를 대신하여 이 엄청난 격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어느날 정오,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테라스의 뜨겁게 달아오른 판석 위에다 종이를 펼쳐 놓고 조르바의 말과 행적을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과거를 현재로 재현시키고 조르바를 기억해내어 실체 그대로 소생시키면서 미친 듯 써 내려갔다. ‘나’는 꿈에 본 조상의 모습을 동굴에 생생하게 그려놓으면 조상의 혼이 자기 몸인 줄 알고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믿던 아프리카 야만족의 마술사처럼 일했다.

몇 주 만에 조르바에 대한 ‘나’의 연대기는 완성되었다. 마지막 날 ‘나’는 첫날처럼 테라스에 앉아 늦은 오후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탈고한 원고가 놓여 있었다. 마치 갓 나온 아기를 안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조르바가 책으로 ‘화한’ 것이다. 크레타로 향하면서 조르바와 ‘내’가 쏘아 올렸던 두 개의 포물선이 비로소 마주친 셈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고 육신이 책이 되는 ‘유동성’의 바다! 그 매트릭스에서 조르바는 이제 ‘불멸의 텍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예견대로 그 순간 조르바의 영혼은 육체를 떠났다. “나는 무슨 짓을 했건 후회는 않더라고 해주시오. (…) 신부 같은 게 내 참회를 듣고 종부 성사를하러 오거든 빨리 꺼지는 건 물론이고 온 김에 저주나 잔뜩 내려주고 꺼지라고 해요”라는 유언과 분신과도 같은 산투르를 정표로 남기고서.

1957년(74세)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다가 아시아 독감으로 독일의 한 병원에서 사망.

카잔차키스 연보의 마지막 항목이다. 길 위를 떠돌다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한 것. 그리스정교회의 반대로 시신은 아테네로 가지 못하고, 크레타로 가서 안치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생전에 미리 작성해둔 묘비명이다. ‘인간은 자유다!’라는 조르바의 명제가 멋지게 변주되고 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한 자유는 불가능하다. 그 정열이 나를 지배할 것이므로. 뭔가를 두려워하는 한 자유는 불가능하다. 불안과 공포가 나를 짓누를 것이므로. 욕망에도 두려움에도 휘둘리지 않는 충만한 상태, 그것이 곧 자유다! 어떻게 해야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까? 저 깊은 곳에서 이런 질문이 솟구친다면 당신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날 준비가 되었다.

고미숙 - 고전평론가.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작은 광산촌에서 자랐다. 고려대학교에서 고전시가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40대 이후 지식인 공동체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감이당&남산강학원에서 ‘공부와 밥과 우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지금까지 낸 책으로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등이 있다.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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