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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포커스] 전경련 VS 대한상의 비교연구 - 재계 파워시프트 박용만의 힘? 

전경련이 대기업 중심인 반면 대한상의는 중견·중소기업까지 아울러… 정치권도 대한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대표선수’ 지위 바뀔 수도 

이태명 한국경제신문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 5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경제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한 사람 건너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최경환 경제부총리,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한덕수 한국무역협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박 대통령, 허창수 전경련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2014년 7월 제주도 롯데호텔 1층. 대한상공회의소가 개최한 제주하계포럼 마지막 날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방상공회의소 회장단과 함께 출입기자단을 만났다. 가볍게 맥주나 한잔하자고 만든 자리였다.

밤 10시 무렵부터 2시간가량 이어진 술자리에선 ‘어디가 재계 대표단체냐’는 말이 화제에 올랐다. “전경련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재계 대표단체다”, “이제 대한상의가 재계 대표단체가 됐다고 봐야 한다”는 말들이 오갔다.

그때 박용만 회장이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대한상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데 어떻게 전경련과 비교해. 상대가 안돼….” 물론 웃자고 한 얘기였다. 그러나 박 회장의 농담 속에는 이제 대한상의가 전경련을 제치고 재계 대표단체로 올라섰다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전경련과 대한상의. 한국 경제계를 대표하는 두 단체의 명암이 엇갈린다. 한때 ‘재계의 맏형’으로 불리었던 전경련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반면 대한상의가 급속도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올해 들어서는 재계 차원의 주요 행사를 대한상의가 독식하다시피 한다. 수년 전만 해도 대다수 기업이 ‘전경련›대한상의’라고 여겼던 걸 감안하면 놀라운 변화다. 전경련의 쇠락과 대한상의의 부상. 재계 권력의 이동이 본격화되고 있다.

54년 VS 131년

‘경제 5단체’라고 하면 전경련·대한상의·한국무역협회·한국경영자총협회·중소기업중앙회를 말한다. 1960년대 이후 이들 5단체는 각자 영역을 나눠 민간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해왔다.

이들 5단체는 때때로 특정 현안에 대해 이견을 보이고 반목을 빚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론 협력관계를 맺어왔다. 관(官)의 입김이 셌던 정부 주도 경제발전 과정에서 ‘민간 영역’을 대변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5단체가 맡은 역할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정립됐다. 전경련은 재벌그룹 등 대기업을 대변해왔다. 대한상의는 대기업은 물론 중견기업·중소기업을 통틀어 대변한다. 또 무역협회는 주로 수출기업·경영자총협회는 대기업 중심의 노사문제 대응을 맡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이름 그대로 중소기업들의 권익을 대변한다.

5단체 간에 서열은 없지만 그동안 암묵적으로 전경련을 ‘제1단체’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이 가장 먼저 찾는 재계단체도 전경련이었다. 이는 전경련 회원사들의 화려한 면면 때문이다. 전경련은 삼성그룹·현대자동차그룹 등 내로라하는 재벌그룹 총수들이 회장단을 구성한다. 30대 그룹에 속한 기업 총수들이 여기에 포함돼 있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 지형도에서 정부가 기업 협조를 구하려면 당연히 전경련을 소통창구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반면 대한상의의 위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 높지 않았다. 회장단의 면면도 전경련에 비해 이름값이 떨어졌다. 주로 중견기업 위주인데다 일부 대기업 전문경영인(CEO)이 부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총수가 회장단에 가입돼 있는 전경련에 비하면 ‘급’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랬던 두 단체의 명암은 2013년부터 극명하게 엇갈리기 시작한다. 달라진 위상 변화는 올해 초에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동안 청와대와 정부, 정치권과의 소통창구 역할은 전경련이 도맡았다. 그런데 올해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지난 2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경제계 의견을 구하는 창구로 대한상의를 선택한 데 이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3월 대한상의를 찾은 것이다.

올해 들어 대한상의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경제계 간담회(1월 26일), 대통령 초청 경제계 신년인사회(1월 6일) 등 굵직한 행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4대 그룹 관계자는 “전경련에서 상의로 ‘파워 시프트’가 본격화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금이야 전경련과 대한상의가 재계 대표단체를 두고 다투는 듯하지만 수년 전까지만 해도 전경련의 파워가 대한상의를 압도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두 단체의 관계는 ‘대체재’보다 ‘보완재’에 가까웠다. 전경련과 대한상의는 그만큼 하는 일도 달랐고 역사도 달랐다.

두 단체는 출발부터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한쪽은 사실상 정부 압박에 의해 만들어졌고 다른 쪽은 자발적인 협의체로 시작했다. 전자는 전경련이다. 전경련의 시작은 196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부정축재자를 단죄하겠다”면서 경제인 13명을 구속했다. 내로라하는 재벌총수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들어갔다.

그때 기업인들의 살 길을 도모한 이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다. 이병철 창업주는 서울 시내 모 호텔에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나 “기업인들에게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할 기회를 달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1961년 만들어진 조직이 한국경제인협회다. 일본경제인연합회(게이단렌)를 벤치마킹해 만든 재벌그룹들의 자발적 협의체였다. 초대 회장은 이병철 창업주가 맡았다. 이 단체는 7년 뒤인 1968년 ‘전국경제인연합회’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주요 그룹들이 외국자본을 들여와 중화학, 조선 산업을 키우는 방식으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뒷받침했다.

재계 관계자는 “당시 소수의 몇몇 그룹이 대한민국 경제의 틀을 짜고 국가 주도 경제발전을 위해 기획·집행·실행을 맡았다”며 “이런 과정을 주도한 게 사실상 전경련”이라고 설명했다.

폐쇄적 VS 개방적


▎경제장관, 경제 5단체장 간담회가 3월 13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김인호 무역협회장,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장, 최 부총리, 허창수 전경련 회장.
대한상의의 출발점은 1884년 설립된 한성상업회의소다. 구한말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종로 일대의 육의전 상인들이 만든 민족계 상인조직이 바로 한성상업회의소였다. 국내 최초의 민간 경제단체다. 이 때문에 지금도 대한상의는 1884년을 상의 역사의 출발점이라고 평가한다.

한성상업회의소 설립 이후 부산·광주 등지에서도 지역 상의가 등장한다. 이들 자생적 상공인 협의체는 광복 직후에도 조선상공회의소와 22개 지방상의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8년 지금의 대한상공회의소로 이름을 바꿨다. 이어 1952년 대한상공회의소법이 제정되면서 대한상의는 법정단체로 인정받았다. 법정단체라는 성격 때문에 지금도 대한상의엔 민·관협력 기구와 조직이 많다.

두 단체는 역사와 성격만 다른 게 아니다. 회원 구성과 회장 선출방식 등도 판이하다. 단순 비교하자면 전경련은 폐쇄적이고, 대한상의는 개방적이다. 회원 구성을 보면 전경련은 ‘30대 그룹’+‘제조업’이라 할 수 있다. 현재 460여 개 회원사가 있는데 대부분 제조업종에 속한 대기업 계열사다. “전경련은 대기업 이익만 대변한다”는 비판이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대한상의 회원사는 폭 넓다. 대기업은 물론, 중견기업, 중소기업, 소상공인까지 포함한다. 현재 회원사는 15만 곳에 달한다. 규모만 놓고 보면 경제단체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회장단(회장+부회장) 구성도 차이가 난다. 전경련의 회장단은 21명. 주로 30대 그룹 총수들이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현재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쟁쟁한 멤버들이 부회장단이다.

회장단 가입요건은 까다롭다. 새로 회장단에 가입하려면 ▷현 회장단에 속한 그룹의 친족그룹(방계그룹)은 제외하고 ▷외국기업이 대주주이거나 오너 경영 체제가 아닌 곳은 배제한다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CJ나 KCC 등의 총수는 회장단에 절대 넣지 않는다는 의미다. 재계 서열은 높지만 그동안 CJ·신세계·LS·한진중공업·KCC·한라·현대산업개발·한국타이어·한솔 등 9개 그룹이 전경련 회장단에 끼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원칙 때문이다.

이에 비해 대한상의 회장단엔 그룹 총수도 몇 명 있지만 중견기업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더 많다. 박진수 LG화학 부회장, 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 심경섭 한화 사장, 장동현 SK텔레콤 대표, 지창훈 대한항공 사장 등 주요 기업 CEO가 부회장을 맡고 있다. 실무적 느낌이 강한 구성이다. 방계그룹 총수나 외국계기업 CEO는 회장단에서 제외한다는 등의 까다로운 가입요건도 없다.

회장 선출방식도 다르다. 전경련은 만장일치 추대 방식이다. 총 21명의 회장단의 의견이 모아져야 새 회장을 선출할 수 있다. 단 한 명의 반대라도 있을 경우 끝까지 설득작업을 거친 뒤에야 선출 가능하다. 반면 대한상의는 71개 지역상의 회장 가운데 호선을 통해 선출한다. 복수 출마자 가운데 한 명을 선거로 선출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서울상공회의소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맡는다. 현 서울상의 회장은 박용만 회장이다.

‘스타’급 전경련 회장, 선출 때마다 잡음


▎1.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2월 13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입장하고 있다. / 2.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 2월 10일 열린 총회에서 재선임 인사말을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12월. 새 정권에 대한 당시 기업들의 불안감은 컸다. 반(反)재벌 성향의 정책이 펼쳐질 것이란 두려움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불만을 어떤 기업도 내뱉지는 못했다. 그때 전경련이 과감하게 나섰다. 김석중 당시 전경련 상무와 손병두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아직 출범도 하지 않은 정권을 향해 공세를 펼쳤다.

김 상무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정책방향은 사회주의적”이라고 했다. 손 부회장은 재벌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새 정권에 대해 “한국에는 재벌이 없다”고 맞받아쳤다. 일종의 ‘도발’이었다. 전경련의 공세에 당시 노무현 당선자는 “전경련이 새 정부의 정책 의지를 흔들고 시험하려 든다”고 일침을 가했다. 결국 전경련이 먼저 유화 제스처를 취하면서 정권과의 충돌은 피했지만, 이 사건은 전경련이 얼마나 막강 파워를 가졌는지를 실감케 하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만큼 전경련은 그동안 숱한 비판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많은 기업은 그 이유를 ‘스타급’ 총수들이 회장을 맡은 것에서 찾는다. 실제로 역대 전경련 회장의 면면은 화려하다. 1대 회장부터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맡으면서 대외적으로 재계를 대표한다는 인지도를 쌓았다. 이후 이정림 대한양회공업 회장, 김용완 경방 회장, 홍재선 쌍용양회 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전경련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인 이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 회장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1977∼87년 10여 년간 전경련을 이끌었다. 그는 재임기간 주요 재벌그룹의 이해관계를 조율해가면서 정부 주도의 경제발전 계획을 측면 지원했다. 정권과의 관계도 끈끈하게 유지했다. 1979년 여의도 전경련회관 준공식엔 박정희 대통령이 ‘創造(창조), 協同(협동), 繁榮(번영)’이란 휘호를 하사(?)했을 정도였다.

정 명예회장이 다진 기반을 토대로 전경련은 전성시대를 열었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18대), 최종현 SK그룹 회장(21~23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24~25대) 등 4대 그룹 회장들이 전경련 수장을 번갈아 맡았다. 전경련을 두고 ‘재계 본산’이란 수식어도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회장단 모임이 한 번 열리면 기업은 물론, 공무원과 국회의원 등도 회의 결과에 주목할 정도였다. 그때 전경련의 파워는 정말 대단했다.”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 전경련은 서서히 쇠락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복잡하게 작용했지만 외환위기의 여파가 컸다. 당시 전경련 회장사였던 대우그룹이 분해됐고, 이른바 ‘빅딜(주요 그룹간 사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반도체 사업을 현대그룹에 빼앗긴 LG그룹이 전경련 행사 불참을 사실상 선언했다.

삼성그룹과 현대그룹(현 현대자동차그룹)도 자동차사업 정리, 형제의 난 등으로 전경련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4대 그룹이 전경련에 관심을 끊자 회장 자리는 10대 그룹 이외의 그룹 총수가 돌아가며 맡았다. SK그룹 전문경영인이던 손길승 회장(28대) 이후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조석래 효성 회장이 전경련을 이끌었다. 이전에 비해 존재감이 확 떨어진 셈이다.

쇠락을 거듭하던 전경련은 2011년 허창수 GS그룹 회장을 새 사령탑으로 맞이했다. 1999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에 이어 12년 만에 10대 그룹 총수가 전경련 회장을 맡은 것이다.

그럼 전경련은 언제부터 영향력을 잃기 시작한 걸까. 많은 사람은 “4대 그룹 회장들이 전경련 회의에 참석하지 않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이건희 삼성 회장은 한동안 발길을 끊었다가 2011년 3월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잠깐 모습을 내비친 게 고작이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2013년 5월 전경련 회의에 참석했을 뿐이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외환위기 때 ‘빅딜’(5대 그룹 사업 구조조정) 이후 전경련 행사에 발길을 끊었고, 최태원 SK 회장도 구속되기 이전부터 전경련과 일정한 거리를 뒀다.

4대 그룹 총수들의 불참은 자연스럽게 전경련의 존재감 약화로 이어졌다. 2000년대 후반 이후 매년 다섯 차례(1, 3, 5, 9, 11월) 여는 전경련 회장단회의 참석자는 회장과 상근부회장 외에 4~5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10대 그룹 총수 참석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경련 안팎에서 “회장단 회의가 유명무실해졌다”는 비판이 쏟아질 수 밖에 없었다. 급기야 전경련은 고육지책으로 2014년 초부터 회장단 회의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전경련 내부 관계자는 “밖에서 욕을 먹느니 아예 회의를 하는지, 안 하는지조차 알리지 않겠다는 속셈”이라며 “(전경련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몰렸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두산가(家) 출신들이 주도한 대한상의

4대 그룹 총수의 불참은 또 다른 갈등을 낳았다. 매번 회장 선출 때마다 주요 그룹 총수들이 다들 ‘회장직을 맡지 않겠다’고 고사하는 일이 반복됐다. 2007년은 전경련의 허약해진 실태가 만천하에 드러난 해였다.

전경련은 그해 2월 강신호 회장(동아제약 회장)의 임기가 끝나자 강 회장을 재추대하기로 내부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한 달 만에 일이 꼬여버렸다. 재추대하기로 했던 강신호 회장이 아들과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데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회장단 운영 문제를 정면 비판하면서 사퇴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한 달 뒤 회장 선출을 위한 회장단 회의에서는 내분까지 발생했다. 그해 2월 27일 회장단 회의에선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차기 후보로 선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회의 도중 이준용 대림그룹 회장이 “70세 가까이 되면 전경련 회장직은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는 깜짝발언을 했다. 차기 회장이 유력한 조석래 회장의 나이를 겨냥한 것이다. 일각에선 강신호 회장이 회장단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임을 하려고 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이날의 내분 사태로 차기 회장 선출은 한 달가량 미뤄졌다.

2010년에도 한 차례 소동이 있었다. 2010년 7월 조석래 회장이 건강 문제로 사임하자 전경련은 또다시 차기 회장을 뽑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경련은 정병철 당시 상근부회장 주도로 이건희 삼성 회장을 추대하려고 시도했다.

그해 7월 서울 이태원동의 이건희 삼성 회장 집무실(승지원)까지 찾아가 추대의 뜻도 전달했다. 문제는 넉 달 뒤인 11월에 불거졌다. 정병철 상근부회장은 기자들과 만나 “지난 7월 승지원 회동에서 이 회장께서 (전경련 회장직 수락여부는) 3~5개월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자 삼성그룹은 “이 회장이 그런 얘기를 했는지도 불확실하다. 전경련이 언론 플레이를 하는 것 아니냐”고 불쾌해했다. 결국 이건희 회장 추대는 없던 일로 끝났고 전경련은 7개월간 회장 자리를 비워둬야 했다.

전경련에 비해 대한상의 역대 회장은 ‘스타’급이라고 하기엔 중량감이 떨어졌다. 특히 법정단체이다 보니 회장·부회장 자리에 관료나 정치인 출신이 오는 경우도 많았다. 때때로 대한상의가 ‘관변단체’ 취급을 받기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초대 대한상의 회장은 이중재 씨였다. 경성전기 사장이던 그는 상의 회장을 맡은 지 3개월 만에 재무부장관으로 임명돼 자리를 비웠다. 그의 빈자리는 이세현 조양견직 회장이 채웠다. 3~5대는 송대순 대한증권 사장이 맡았으나 중간중간 자리를 비워, 신민당 국회의원 출신인 전용순 씨와 전택보 천우사 회장이 각각 3개월씩 회장직을 대리하기도 했다.

대한상의가 자리를 잡은 건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 때다. 박 초대회장은 1967년부터 상의 회장을 3연임(6~8대)했다. 박 초대회장의 뒤를 이어 김성곤 쌍용양회 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았지만 곧바로 태완선 포항종합제철 사장, 김영선 대한재보험 회장 등 정치인 출신이 다시 회장에 올랐다.

이후 정수창 회장(10~12대) 시대를 지나면서 대한상의에도 오너 출신 회장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13~16대 회장은 김상하 삼양사 회장이 맡았으며, 2000년엔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17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박용성 회장 재임 시절 대한상의는 대외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박 회장은 정부 정책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발언을 자주 쏟아냈다. 박 회장이 ‘쓴소리’만 잘한 건 아니다. 그는 재임기간 현재 남대문로에 있는 대한상의 회관을 신축했다.

박용성 회장의 뒤를 이어 취임한 이는 손경식 회장이다. 18~21대까지 장기간 회장직을 맡았다. 손 회장은 재임 기간에 비해 대외적으로 대한상의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손 회장이 2013년 7월 갑작스럽게 물러나면서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후임 회장을 맡았다. 두산그룹 출신의 세 번째 상의 회장이었다.

2013년 전경련과 대한상의는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전경련은 ‘재벌 편향’, ‘폐쇄성’, ‘불통’의 이미지를 벗어야 했고, 대한상의는 ‘존재감 부족’, ‘준(準)공무원 조직화’라는 문제해결이 시급했다.

허창수 vs 박용만의 자존심 싸움?

허창수 회장과 박용만 회장에게 주어진 미션도 이것이었다. 허 회장은 2013년 전경련 회장으로써 두 번째 임기를 막 시작했고, 박 회장은 그해 8월 손경식 회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상의 회장직을 물려받았다. 두 사람 가운데 더 다급한 쪽은 허창수 회장이었다. 회장단 회의가 유명무실해졌고, 각종 현안에 대한 전경련의 주의·주장은 ‘재벌그룹들의 떼쓰기’ 정도로 치부되던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허 회장의 승부수는 회장단의 재편이었다. 2013년 초 회장단 가입 범위를 ‘30대 그룹’에서 ‘50대 그룹’으로 넓혀 영입 작업을 벌였다. 현재현 동양 회장, 강덕수 STX그룹 전 회장, 최태원 SK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가 회장단 활동을 못하게 되면서 불가피한 선택으로 비쳤다. 그러나 영입작업에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등이 물망에 올랐지만 모두 고사했다. 이들은 “전경련 회장단에 이름을 올리기 싫다”는 의사를 완곡하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흐른 올해 초 허 회장은 다시 한번 영입작업을 추진했다. 역시 쟁쟁한 총수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최종 영입한 이는 이장한 종근당 회장 단 한 명뿐이었다. 결국 3년간 허 회장이 추진한 ‘전경련 외연확장’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다.

이에 비해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대한상의의 위상 제고에 성공했다. 시도한 프로젝트마다 큰 성공을 거뒀다. 지난해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을 회장단으로 영입했다. 서경배 회장은 2013년 전경련이 영입하려고 했지만 결국 대한상의 품에 안겼다. 박 회장은 올해도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이만득 삼천리 회장을 대한상의 회장단에 합류시켰다. 모두 박 회장의 끈끈한 인맥을 십분 활용해 영입한 이들이다.

이뿐만 아니다. 박 회장은 전경련과의 차별화도 시도했다. 그는 평소 “기업도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로 무분별한 기업 편들기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전경련이 주요그룹 총수가 사법처리를 당할 때마다 “국가 경제를 위해 선처를 바란다”는 입장을 낸 것과 달리 대한상의가 침묵을 지키는 것도 그의 뜻을 반영한 결과다.

현재까지는 전경련과 대한상의의 ‘재계 대표단체’ 타이틀 경쟁에서는 대한상의 쪽으로 무게추가 쏠리는 느낌이다. 재계는 이런 역학관계가 앞으로 더 가속화할 것으로 점친다. 당장 전경련은 2017년 2월 ‘포스트 허창수’ 시대를 준비해야 하지만 아직 누가 차기 전경련 회장을 맡을지 가늠조차 안되는 상황이다.

전경련이 추락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또 대한상의가 전경련의 역할까지 도맡을 수 있을까? 요즘 재계의 가장 큰 관심사다.

- 이태명 한국경제신문 기자

201505호 (20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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