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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세월호 참사 1년 대한민국의 자화상 - ‘민심은 흩어지고 정치는 사라졌다’ 

1주기 맞춰 대통령은 외유, 선체인양 1년째 ‘검토 중’… 사회의 연대책임의식 갖고 피해자 슬픔 끌어안아야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전형우 인턴기자
진도 앞바다엔 올해도 어김없이 봄비가 내렸다. 흩뿌려지는 빗방울은 포구에 선 산 자들의 시선에 붙잡혀 방향을 잃고 좌우로 흔들렸다. 하지만 망설임은 잠시뿐이다. 이내 바다에 떨어져 자기 모습을 버리고 대양의 일부가 된다. 본래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올해도 안산 화랑저수지는 봄꽃들로 한껏 멋을 냈다. 곧 있으면 근처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몰려와 꽃으로 치장한 저수지를 배경삼아 ‘셀카’ 실력을 뽐낼 터다. 그런데 올해는 기다려도 아이들이 오지 않았다. 대신 화랑저수지의 봄은 아이들이 재잘거렸던 교실로 찾아 들었다. 1년째 먼지만 쌓였던 책상은 화단이 됐다. 텅 비었던 교실에 모처럼 화사한 생기가 돈다. 봄기운에 도톰하게 볼이 부푼 아이들의 모습처럼. 어김없이 봄은 왔다. 멈춰 있을 것만 같았던 1년이었다. 아니, 딱 하루만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었다. 봄빛은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천연색인데, 산 자들이 보는 세상은 여전히 잿빛에 갇혀 있다. 진도 앞바다에 깊이 배었던 눈물자국은 봄비에 씻겼어도 팽목항에, 광화문에 남은 산 자들의 눈물 자국은 깊어지기만 한다. 언제쯤 지워질까? 누가 저들의 눈물을 씻어줄 수 있을까?

▎2015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팽목항에 여명이 밝아온다. 1년 전 이곳을 지나던 세월호 탑승자들이 보았을 여명이다. 바닷속에 가라앉은 세월호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솟아올라 하늘로 날아오른다. 세월호 실종자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을 싣고서.
“얼른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요,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지나칠 수 없었어요.” 교복 차림의 앳된 소녀들을 만난 건 4월 15일 늦은 밤이었다.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와 유가족 천막이 있는 광화문광장에서 여학생 두 명이 서성이며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었다. 칸막이로 나눈 방마다 희생자들의 추억을 담은 ‘빈방’ 전시관에서 소녀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곳에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여학생 교복이 벽에 걸려 있었다. 1년 전 이날 수학여행을 떠나는 주인을 배웅하곤 여태 주인을 기다리며 방에 걸려 있던 것을 광장으로 가져온 것이다.

“저 교복 입었던 언니가 아마 한두 살 많을 거예요.” 서로 팔짱을 낀 소녀들의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근처의 고등학교에 다닌다고만 했다. 학원에 갔다가 집에 가는 길이었다. 봄이라지만 아직 밤공기는 쌀쌀했다. “추운데 얼른 집에 가야지?” 이 말에 소녀들의 감정이 터졌다. “작년에 배 안에 있었던 언니들은 지금보다 훨씬 춥고 무서웠을 텐데….” 소녀는 울먹였다. “자꾸 눈물 나게 왜 그래.” 옆에 있던 친구도 덩달아 눈물을 훔쳤다. 둑이 무너지듯 한 번 터져버린 감정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한동안 두 여학생은 고개를 숙인 채 흐느낌을 참으며 울었다.


▎노랑리본은 희망의 상징이다.
오후 11시. 광화문광장은 드문드문 사람의 발길이 이어졌다. 회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인 듯한 불콰한 얼굴의 회사원 두 명이 마침 횡단보도를 건너다 분향소 앞에서 멈칫 했다. “내일이 세월호 1주기인데 조문은 하고 가야지.” 한 사람이 제안하자 일행도 고개를 끄덕였다. 넥타이를 고쳐 매고 분향소에 들어서는 이들의 얼굴에 방금 전까지 보였던 술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분향소 양쪽으로 늘어선 천막 안에는 자원봉사자 10여 명이 둘러앉아 열심히 리본을 만들고 있었다. 다음날(16일) 있을 세월호 1주기 추모행사에 나눠줄 노랑 리본이다. “오늘 밤샘 작업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 옆 천막에는 두툼한 점퍼를 입은 서너 명이 웅크리고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지난 3월 30일부터 노숙 농성을 시작한 단원고 고 오영석 군의 아버지 오병환 씨와 고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 씨 등 세월호 희생자의 유족들이다. 이들의 노숙 농성은 416시간 동안 계속됐다. 16일 오전 세월호가 침몰한 시간까지다. 단식농성도 함께 했다. 시민들이 하루씩 릴레이식으로 동참해 이들을 응원하고 있다.

유족의 바람은 진상 규명과 선체 인양뿐


▎세월호 가족들은 광화문광장을 ‘세월호광장’이라고 부른다. ‘유민아빠’ 김영오(사진) 씨를 비롯한 피해자 가족들은 조속한 진상규명과 선체인양을 바라며 이곳에서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의 공간을 유가족들은 ‘세월호 광장’이라 불렀다. 광장을 지키는 유족들 사이에 반삭이 채 안 되는 짧은 머리가 눈에 띄었다. 지난 4월 2일 삭발을 한 이들이다. 유가족 52명이 삭발에 동참했다. 그날 삭발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 유예은 양의 아버지 유경근(세월호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 씨는 “삭발의 목적이 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기자들 앞에 선 유가족들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잦은 도보 행진과 농성 때문이다. 지난겨울 칼바람이 할퀴고 간 얼굴은 깊은 생채기만 남았다. 눈은 움푹 들어가고 이마와 미간에는 골 깊은 주름이 패였다. 목발을 짚고 마이크를 잡은 고 신호성 군의 어머니 강부자 씨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제가 이런 나라에서 내 새끼를 키웠는지….” 울먹이다 이내 북받친 감정에 오열이 터져 나왔다. “내 새끼 살려내!” 스피커를 통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자식 잃은 어미의 쇳소리였다. 강 씨는 “내 새끼 간 건(이유는) 똑바로 알고 죽어야겠다”고 했다. “진실을 밝혀 달라는데 정부는 돈 한두 푼 주면서 먹으라고 한다”며 마이크 쥔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저들의 울부짖음이 향하는 곳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닿고자 한 곳에 제대로 도달했을지는 미지수였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추모하는 4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은 해외로,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저마다 일정을 핑계삼아 추모식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부짖음이 메아리치는 곳에서 귀를 틀어막느니 차라리 소리가 닿지 않는 곳으로 피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정부의 노골적인 외면을 마주한 실종자 허다윤 양의 아버지 허흥환 씨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대통령이 실종자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잊겠나. 죽어야 손을 놓는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대로 끊으란 말인가?”라고 물었다. 감정이 복받친 듯 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부모가 마지막으로 할 일은 자식을 찾는 것뿐이다. 집에서 나올 때마다 다윤이에게 오늘은 꼭 찾겠다고 약속한다.”


▎1. 4월 16일 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세월호를 추모하는 인파로 가득 찼다. 이들이 한 목소리로 정부의 올바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동안 박근혜 대통령은 남미 순방을 위해 해외에 나가고 없었다. / 2. 세월호 가족들은 태어나 처음 삭발을 했다.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몸부림이었다.
대부분의 유가족들은 집회나 시위처럼 사회참여 운동을 해본 경험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그런 이들이 삭발하는 모습은 애처로웠다. 박래군 세월호국민대책회의 공동위원장은 “삭발만은 말리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월요일부터 풍찬노숙하고 있는 유가족들의 뜻을 정부가 묵살했다. 유가족은 정부 시행령안 폐기와 선체 인양을 말하고 있는데 정부가 갑자기 배 보상 이야기를 꺼냈다”고 박 위원장은 주장했다.

세월호 가족들이 억울해하는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세월호 사고의 진실을 규명해달라는 건 사고 직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가족들의 요구였다. 여론에 힘입어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 지난해 11월 19일 공포됐다. 특별법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구조구난 작업과 정부 대응이 적절했는지를 조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조사는 특별조사 위원회가 맡는다. 유족이 추천하는 위원장을 비롯해 17명으로 구성돼 18개월 동안 활동한다. 진상규명소위원장은 야당이 지명하고 다수의 민간위원이 참여해 독립성을 보장했다.

정부 시행령이 세월호 특별법 무력화


▎정부가 입법예고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은 특별법이 보장한 특별조사위원회의 권한과 독립성을 크게 훼손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세월호 특조위원들은 3월 29일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해수부의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의 문제를 지적하며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특조위의 면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별법 제정의 후속조치로 해양수산부는 지난 3월 27일 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이때부터 ‘특별법 무력화’ 논란이 시작됐다. 새정치민주연합 세월호 대책특위 위원인 김승남 의원은 “정부가 발표한 시행령(안)은 세월호 특조위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도 정부 시행령이 ‘특조위 해체 수준’이라며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유가족이 삭발을 하고 416시간 노숙농성을 시작한 것도 시행령이 발단이었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특별법 제정까지 끝난 사안이 다시 불거진 걸까?

해수부가 내놓은 시행령의 내용 중 논란이 된 부분은 특조위 구성과 업무 영역이다. 특조위에는 사무처와 3개 소위원회(진상규명·안전사회·지원)로 구성된다. 특조위가 만든 조직구성안에는 각각의 소위 아래에 3개 국(진상규명국·안전사회국·지원국)을 두어 소위의 기능을 보좌하도록 되어 있다. 업무별로 조직을 나눠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각각의 상임위원회 안에 세부 업무별 소위를 두는 건 일반적인 조직 형태다. 국회도 이런 형태로 구성돼 있다. 사무처와 기획행정담당관은 특조위의 행정사무를 지원하는 범위로 업무를 한정했다. 위원회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해수부가 만든 시행령에는 이 3개 국이 특조위 사무처 소관으로 바뀌었다. 사무처마저 1국 2과로 조직을 축소해 진상규명국만 3개 과(조사 1·2·3과)를 유지하고 나머지는 안전사회과, 피해자지원점검과로 격하했다. 사무처에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3급 이상 고위공무원부터 6급 이하까지 일반 공무원들이 파견돼 업무를 맡는다. 진상규명과 사회안전망 제도 개선, 피해자 지원 등 특조위의 핵심 업무를 일반 공무원이 통합 조정하게 된 것이다. 직제표상으로 운영되면 사무처 안에서 모든 특조위 업무가 이뤄지고 조정을 거친 것들을 상임위원회와 소위원회로 보고가 되는 시스템이다. 당초 위원회의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에 그쳤던 기획행정담당관은 기획조정실로 격상됐다. 기획조정실은 진상규명에 관한 종합 기획과 조정 업무, 안전한 사회건설을 위한 종합대책 수립 관련 기획 및 조정 업무, 피해자 지원대책의 점검에 관한 기획 및 조정 업무, 조사 신청의 접수 및 처리 총괄 업무 등 실질적인 컨트롤타워로 위상을 강화했다.

특조위는 즉각 반발했다. 이석태 특조위 위원장과 권영빈·박종운 상임위원은 3월 2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이제 사무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며 “입법예고된 시행령안은 세월호 특조위의 업무와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행정부의 하부조직으로 전락시킬 의도가 명확하다”고 비판했다. 이 위원장은 “정부안은 위원장이 해야 할 각 소위원회 기획·조정업무를 1차 조사대상 기관인 해수부 파견 공무원들이 담당하게 된다. 행정사무 지원에 그쳐야 할 사무처 공무원이 위원회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또 있다. 업무 영역을 제한한 것이다. 진상규명국이 담당하는 원인 규명과 조사 범위를 ‘정부조사 결과의 분석 및 조사’로 좁혔다. 정부 기관을 상대로 구조구난 작업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조사하는 것도 ‘구조구난 작업에 대한 정부조사자료 분석과 조사’로 범위를 제한했다. 모든 조사 업무가 ‘정부조사 결과’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해수부 파견직원이 특조위 내부문건 유출


해양수산부와 해양경찰청을 흡수한 국민안전처 소속 일반 공무원의 파견 비율도 지나치게 높다. 해수부 시행령에 따르면 위원회 정원 중 42명은 각 부처에서 파견하는 일반공무원으로 충원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해양수산부에 가장 많은 인원을 할애했다. 고위공무원(1~2급)을 포함해 9명이다. 국민안전처도 8명이나 된다. 두 기관에 할당된 인원이 전체의 40%를 차지한다. 직급에서도 나머지 감사원(3), 방송통신위(1), 국무조정실(1), 인사혁신처(1), 기획재정부(3), 교육부(1), 법무부(5), 행정자치부(5), 보건복지부(1), 경찰청(4) 할당인원 중 가장 높은 직급은 서기관(4급)으로 차이가 크다. 유가족과 특조위가 “조사받아야 할 해수부가 특조위를 장악했다”고 반발하는 건 이 때문이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협의회는 국무총리와 국회의장, 새누리당·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해수부의 시행령(안)은 잠재적 조사 대상인 정부부처에서 파견한 공무원들이 특별조사위원회의 업무를 주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에 반해 각 소위원장은 소위 업무를 지원하는 각 국과 과에 대한 지휘 감독권한이 없다”고 지적했다.

새누리당에서도 정부 시행령안이 문제가 있다며 재검토를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도 16일 열린 차관회의에 시행령을 안건으로 올리지 않았다. 여론을 의식해서다. 그러나 특조위와 유족들의 주장에는 “오해가 있다”고 해명했다. 해수부 관계자는 “진상규명 조사 업무를 정부조사 결과에 한정시킨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그는 “검찰·감사원 등 조사결과 분석을 거쳐 조사계획을 수립하고 체계적으로 실시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직체계의 문제점에 대해선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정부 파견 공무원에 의해 특조위의 독립성이 훼손될 것이란 우려는 특조위가 공식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현실로 나타났다. 특조위에 파견된 해수부 공무원이 내부 문건을 이메일로 유출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특조위에 따르면 위원회의 실무지원단에 파견된 해수부 사무관이 청와대와 새누리당, 해양수산부, 방배경찰서 관계자들에게 특조위 업무 내용을 이메일로 보낸 사실이 확인됐다. 이석태 특조위원장은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이 특조위를 ‘세금도둑’으로 지칭한 발언으로 특조위 출범 준비가 중단된 바 있었다”며 “김 의원이 근거로 제시한 것은 특조위 설립준비단의 공식안이 아니라 해수부 파견 공무원을 통해 가공 유출된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 위원장은 “특조위 설립 준비를 시작하고 3개월 동안 위원회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흔드는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다”고도 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청와대는 묵묵부답이다. 이 위원장이 3월 23일부터 두 차례에 걸쳐 박근혜 대통령과 면담을 요청했지만 청와대는 4주째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참사 1주기인 4월 16일에는 박 대통령이 남미 순방을 위해 출국했다. 16일부터 9박12일 일정이다. 해외순방 일정을 세월호 참사 1주기에 맞춰 정한 것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과거 박 대통령의 해외순방 스타일을 비춰보면 이번 순방은 무척 ‘여유만만한 일정’이다. 2013년 11월 박 대통령의 유럽 순방 일정은 모두 9일. 프랑스·영국·벨기에·EU를 방문해 정상회담과 세일즈외교를 펼쳤다. 이번 순방보다 3일이나 짧다. 지난해 11월 9~17일에는 중국 베이징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미얀마 동아시아정상회의(EAS), 호주 브리즈번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일정을 소화하는 데 단 9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더구나 이번에는 대통령의 직무를 대행할 이완구 국무총리가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연루돼 정상적인 직무 수행이 어려운 상황까지 겹쳐 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여론의 비판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하다. 박 대통령은 15일 “내일 126명의 최대 규모 경제사절단과 함께 중남미 순방을 떠나는데, 이렇게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민과 기업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면서도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언급은 일절 하지 않았다. 이런 박 대통령의 모습에 대한 여론은 싸늘하다. 심지어 박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대해 ‘세월호 망명’이라는 비아냥마저 나온다. 새정치민주연합 김민기 의원은 “순방계획이 1년 전부터 계획돼 있었다면 일정을 바꿀 시간이 충분했고, 상대국에서도 충분히 양해했을 것”이라며 “그게 아니라면 세월호 1주기를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일정을 정한 것 외에 달리 순방을 꼭 강행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 세월호 피해 ‘망명’ 떠나나” 여론 싸늘


▎보수단체 회원들이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둔 4월 15일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인양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민심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동안 이를 한데 모을 정치는 사라졌다.
세월호 참사 이후 1년간 대한민국은 역주행을 하는 모양새다. 민심은 흩어졌다. 둘로 쪼개진 정치는 민심 이반을 부추긴다. 청와대와 국회, 국민의 불통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언제든지 만나겠다”던 박 대통령의 약속은 공염불에 그쳤다. 거듭된 세월호 가족들의 호소와 만남 요청은 번번이 묵살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4월 16일 해외순방 출발시간을 늦추고 진도 팽목항을 방문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분향소를 걸어 잠그고 박 대통령의 방문을 보이콧했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가족들과 만난 건 지난해 5월 16일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가족들이 청와대를 찾아갔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난해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에도 공항까지 교황을 마중 나간 박 대통령은 끝내 세월호 가족들을 외면했다. 당사국의 대통령이 자국민을 외면하는 동안 벽안의 교황이 가족의 슬픔을 위로하는 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본 건 다름 아닌 국민들이다. 지난해 10월 29일 박 대통령이 시정연설차 국회를 방문했을 때에도 미리 와서 기다리던 가족대책위의 면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 보좌관은 “대통령이 세월호 문제를 진영 간의 대결로 인식하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신에 대한 진보진영의 정치적 공세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는 새누리당 안에서도 딜레마에 빠져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정치권에서 세월호를 놓고 서로 정치적 실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없던 것은 아니다. 이건 정치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렇게 인식하는 건 굉장히 우려스럽다. 진보든 보수든 다 품에 안고 국민적 아픔을 치유하겠다는 소명의식을 가져야 하는 위치인데 오히려 여당 안에서 대통령의 눈치를 보느라 세월호 대책에 대해 소신 있게 발언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16일 낮에 진도 팽목항을 찾았다. 팽목항 분향소를 지키고 있는 세월호 가족들과 사전에 전혀 교감이 없는 전격적인 방문이었다. 수차례 만남을 고대했던 가족들은 오히려 등을 돌렸다.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에 분향소를 걸어 잠그고 아예 자리를 비웠다. 박 대통령은 사진들을 둘러보고는 등대가 있는 방파제에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박 대통령은 “갑자기 가족을 잃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안다”면서 “이제는 가신 분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그분들이 원하는 가족들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고통에서 벗어나셔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빠른 시일 내에 선체 인양에 나설 것”이라며 “유가족과 피해자의 배상과 보상도 제때 이뤄지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사고 진상 규명에 대한 의지는 끝내 언급하지 않았다.

그나마 선체 인양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은 다행이다. 그동안 인양에 소극적이었던 새누리당도 적극적으로 돌아섰다. 정두언 의원은 우원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정진후 정의당 의원과 함께 지난 4월 7일 세월호 인양 결의안 발의에 동참했다.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도 여론조사 없이 세월호를 인양해야 한다며 입장을 선회했다. 그러나 시민 사회와 세월호 가족 측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광화문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한 시민 단체 관계자는 “원래 16일 노숙농성을 마치고 광화문 농성을 마무리할 계획이었는데 철수 시기가 조금 미뤄질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정부가 선체 인양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인양이 이뤄질 때까진 신뢰할 수 없다는 게 가족들의 입장”이라며 “아마도 선체 인양이 완료되는 시점에 철수 여부를 다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월호 가족들의 바람은 단 두 가지로 모아진다. 진상 규명과 선체 인양이다. 고 김동혁 군의 어머니 김성실 씨는 “어떻게 진상을 규명할지 얘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하나같이 다 하는 얘기는 추모와 기억뿐이다”라고 말했다. 고 안주현 학생의 어머니 김정해 씨는 “아이를 잃은 부모로서 우리가 바라는 건 진실 규명뿐”이라고 했다. 광화문에서 만난 가족들은 진상 규명 요구가 어떤 보상을 바라고서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아이들이 죽어서 남긴 건 산 사람들이 책임의식을 느끼게 만든 거예요. 우리 같은 억울한 피해자가 또 나오지 않는 세상 만들어 달라는 아이들의 요구를 모른 체할 순 없잖아요. 나중에 저 세상에서 만났을 때 떳떳한 아빠 엄마가 되려면 진실을 제대로 밝혀서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죠.”

피해자가 비난받는 부끄러운 자화상


▎광화문광장의 세월호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 헌화하고 있다. 분향소는 당분간 계속 유지될 예정이다.
진상 규명 요구가 유족의 사회적 책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선체 인양은 그보다 좀 더 개인적 바람이다. 고 박선균 군의 아버지 박형민 씨는 “일 년째 바닷속에 있는 아홉 명이 있잖아요. 뼈 한 조각이라도 만져보려고 기다리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실종자 허다윤 양의 어머니 박은미 씨는 더 이상 실종자 가족으로 불리는 게 싫다고 했다.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걸 뻔히 아는데 ‘실종자’란 단어 때문에 헛된 희망을 갖게 되는 게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다. “사랑하는 내 가족을 찾아서 ‘유가족’이 되는 게 소원이에요.” 박씨의 바람은 그것뿐이다.

1985년 8월 12일 520명의 희생자를 낸 일본항공(JAL) 여객기 추락 사고 등 대형 참사 피해자들의 심리치료 기록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에서 일본의 정신병리학자 노다 마사아키는 유족이 시신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던, 바로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가족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이 병원에서 병사한 경우하곤 다르다.” 예기치 않은 죽음이기에 시신의 일부라도 확인하지 않고는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심리다. 죽음의 부정은 현실감 상실로 이어진다. 결국 살아있는 사람마저 파멸로 몰고 간다. ‘실종’이란 꼬리표가 가진 부작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세월호 가족은 피해자다. 그런데도 피해자가 비난받는 사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보수단체 대표들은 “세월호 인양을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인양해서 얻는 것보다 비용부담이 너무 크다”는 논리를 편다. 그것이 마치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인 것처럼 말이다. 피해자 가족들이 수억원의 보상금에 눈이 멀어 억지를 부린다는 비난이 온라인을 난무한다. 상대방 입장에서 진지하게 고려하고 사려 깊게 선택된 주장과 비판이라면 수긍하겠지만 단지 ‘관심’을 끌고자 피해자들을 입에 담지 못할 말로 욕보이고 희롱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무언가 단단히 꼬여있고 중요한 무언가가 실종된 사회다. 세월호 참사 1주기의 대한민국의 맨 얼굴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버리지 말아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우리’는 참사 앞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전형우 인턴기자

201505호 (20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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