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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의 ‘생명예찬’⑩] 재산과 도덕,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 

유전적 이익 보장이 충성과 단결의 원천 

복거일(卜鉅一) / 조이스 진
이타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서 배신을 방지하는 수단은 도덕… 협력의 과실이 공정하게 분배된다는 믿음이 사회를 유지한다

▎우리는 경마장에 더는 못 갈 사람을 대신해서 돈을 걸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은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다.
도덕은 우리의 행동을 인도하고 제약하지만, 자신의 인격을 세우는 바탕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덕이 요구하는 것을 훌쩍 넘어 자신의 천성에 담긴 가능성을 펼칠 수 있다. 자유는 바로 이 주체적 선택의 결과로 홀연 나타난다.

골목길 담장 너머로 감들이 탐스럽게 익어간다. 내가 자란 산골에선 과수원이 드물었고 감나무 대추나무가 흔했다. 그래서 감꽃이 피거나 감이 익으면, 어릴 적 생각이 난다. 그 가난했던 시절에 먹었던 소금물에 우린 땡감의 찝찔한 맛은 지금도 그립다.

하긴 이제는 그 시절 것들은 모두 그립다. 통증으로 느껴지던 배고픔까지 세월의 마법에 홀린 듯 그리움의 빛깔을 살짝 입고서 떠오른다. 노래도 그렇다. 그때 뜻도 제대로 모르고 배운 유행가들이 지금도 나의 애창곡이다. 현인의 ‘전우야 잘 있거라’, 심연옥의 ‘한강’, 허민의 ‘페르샤 왕자’, 박재홍의 ‘물방아 도는 내력’과 같은 노래다.

그 노래 가운데 특히 아릿한 그리움으로 떠오르는 것은 ‘각설이 타령’이다. 그때는 각설이가 많았다. 전쟁에서 다리나 팔을 잃은 상이용사가 깡통 들고 돌아다니면서 구걸했다. 그리고 보답으로 문간에서 타령을 했다. 대개 둘이나 셋이 한 패가 되어 찾아오는데, 아버지께선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시는 법이 없었다. 문간에 서서 안을 기웃거리는 각설이에게 타령을 해보라 하셨다. 타령을 잘하면, 동냥을 주시면서 재청을 하셨다. 그러면 자기들 노래 솜씨를 알아주는 사람을 마침내 만났다는 반가움에 그들은 목청을 가다듬고서 숟가락으로 깡통 밥그릇을 두드리면서 열심히 품바를 해댔다. 그러면 아버지께선 쌀이나 보리를 한 됫박 내미셨다. 그래서 어머니께선 문간에서 ‘각설이 타령’이 들리면, 질색을 하셨다.

어헐씨구씨구 들어간다/ 저헐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각설이라 하지만/ 이래봬도 정승판서 자제로/ 팔도감사를 마다하고/ 돈 한푼에 팔려서/ 각설이로 나섰네

‘각설이 타령’에서 마음이 유난히 끌리는 부분은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다. 거지에게 동냥을 주는 것은 인정(人情)이다. 그래서 밥 한 술을 주지만, 없는 살림에 동냥을 하는 것이 흔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런 안주인의 미묘한 심사를 잘 알기 때문에, 각설이가 “죽지도 못하고 또 와서 미안하다”는 뜻을 밝히는 것이다.

배신을 방지하는 수단을 찾아라

이처럼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과 자기도 어렵다는 생각 사이의 갈등이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미묘한 부분이다. 이기심과 이타심이 미묘한 균형을 이룬 그 심리 상태가 사회의 본질을 잘 드러 낸다. 사회는 자기 이익만을 챙기고 사회의 유지에는 별 관심이 없는 개체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모든 사회의 중심적 문제는 응집력의 확보다.

응집력은 구성원이 사회에 속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때에만 확보될 수 있다. 즉 구성원이 협력해서 보는 혜택이 개별 이익을 공동 이익에 종속시켜서 치르는 비용보다 커야 한다. 협력을 통해서 개체가 이익을 얻을 기회는 많다. 그러나 협력 대신 배신을 택하면 훨씬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므로, 배신자가 나올 가능성은 늘 있다. 따라서 응집력을 확보하는 길은 실제로는 배신을 방지하는 수단을 찾는 것이다.

배신 방지의 원리는 간단하다. 개체들의 궁극적 이익은 자신의 유전자의 존속이다. 따라서 유전자가 사회를 통해서만 존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개체의 유전적 이익이 공평하게 보장되도록 해야 한다. 이 두 조건이 충족되면, 사회는 응집력을 확보할 수 있다.

어떤 사회나 유전적 이익이 공평하도록 애쓴다. 유전자의 수준에선, 난자와 정자를 생산할 때 유전자를 철저하게 뒤섞어서 무작위적 선택을 한다. 세포의 수준에선, 성세포를 체세포로부터 분리해서 독립성과 공정성을 확보한다. 개체의 수준에선, 여왕만 생식하도록 해서, 독립성과 공정성을 확보한다. 우리는 여기서 새삼 확인한다, 공정한 사회만이 구성원의 충성심을 확보한다는 사실을.

개미, 벌, 그리고 흰개미는 여왕이 생식을 독점한다. 따라서 다른 개체는 생식할 수도 없고, 모두 여왕의 자식이므로 혈연적으로 가까워서 배신할 필요도 없다. 덕분에 그런 종의 사회는 번창한다. 뇌가 발달해서 지능이 중요해지면, 낯선 개체들이 어울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선 혈연만으로 응집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대신 협력을 통한 이익의 추구가 응집력을 제공한다. 바로 상호적 이타주의다.

재산에 대한 존중이 우리의 천성?


▎상호적 이타주의가 혈연을 보완하는 원리가 되자, 정의감은 더욱 강렬해졌고 배신에 대한 응징은 더욱 엄해졌다
상호적 이타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서 배신을 방지하는 수단은 도덕이다. 혈연이 없는 개체가 협력을 통해 큰 이익을 얻으려면,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상대가 배신하지 않아서 협력의 과실이 공정하게 분배된다는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협력이 나온다. 그런 믿음을 제공하는 것이 도덕이다. 풍습이나 법과 같은 사회적 강제는 도덕을 강화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적 사회에선 배신이 적으므로, 협력이 쉽고 거래 비용이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당연히, 사회 전체가 번창한다. 도덕이 허약해지면, 웅장한 제국도 흔들린다.

통념과 달리, 도덕심은 재산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됐다. 재산은 생명체만이 만든다. 무생물은 재산을 만들지 않는다. 재산이 삶에 도움이 되므로, 개체는 그것을 만든다. 육신과 재산 사이엔 뚜렷한 경계가 없다. 둘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다. 그래서 재산은 ‘확장된 육신’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생명체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 애쓴다. 동물이 둥지와 그 둘레의 땅을 자신의 재산으로 여기는 영역성(territoriality)은 전형적이다. 어린애가 맨 먼저 외치는 소리가 “그거 내 거!”라는 사실은 사람의 재산에 대한 애착이 본능적임을 보여준다. 모든 사회가 도둑질을 무겁게 벌한다는 사실은 재산에 대한 존중이 우리의 천성임을 증언한다.

재산은 생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얻고 다른 사람과 사귀는 데에도 재산은 필수적이다. 사람은 ‘자기 것’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어린애가 닳은 담요나 너덜너덜해진 인형에 큰 애착을 지니는 것은 그것들이 자신의 정체성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되도록 많은 것을 공유하라고 배운 청소년들은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 데 애를 먹는다 한다.

재산이 그리도 중요하므로, 그것에 대한 권리인 재산권은 가장 근본적인 제도다. 사회철학은 본질적으로 재산권에 관한 이론이고 사회체제는 재산권의 모습이 구체화된 것이다. 거의 모든 사회에서 재산권의 바탕은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이다. 어떤 재산을 만드는 데 공헌한 사람들이 공헌의 정도에 따라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이 기준은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고 합리적이어서, 우리는 다른 기준을 생각해낼 수 없다.

공산주의도 실은 이 기준을 따르니, 마르크스를 비롯한 모든 사회주의 사상가는 재산권이 재화를 생산한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한다고 여겨지는 원시 사회에서도 이 기준은 지켜진다. 사냥에서 짐승을 잡은 사람이 그 고기의 좋은 부분을 먼저 차지하고 나머지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준다. 동물도 그러하니, 자기가 지은 둥지는 자기 것이고 남이 지은 둥지는 남의 것이다.

당연히, 재산권에 대한 침해는 거센 분노를 부른다. 사람은 특히 격렬하게 반응한다. 동물의 영역성엔 한계가 있지만, 사람은 애국심이라는 형태로 영역성을 극대화한다.

재산권의 침해에 대한 이런 분개가 정의감의 원초적 형태다. 자기가 힘들여 마련한 재산을 남이 차지하는 것은 이 세상의 이치에 어긋난다고 우리는 느낀다. 그렇게 거센 감정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우리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물리친다. 다른 고등 동물도 이런 원초적 정의감을 보인다. 예컨대 원숭이들은 자신이 동료보다 나쁜 대우를 받으면 분개한다. 그러나 세련된 정의감을 지닌 사람과는 달리, 그들은 다른 원숭이가 차별대우를 받는 것엔 마음을 쓰지 않는다.

상호적 이타주의가 혈연을 보완하는 원리가 되자, 정의감은 더욱 강렬해졌고 배신에 대한 응징은 더욱 엄해졌다. 배신하는 사람들은 재산권을 해치는 존재가 되었고 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 아울러 정의감은 훨씬 세련된 모습으로 진화했다.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수준을 넘어 ‘모든 사람이 공평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모습으로 다듬어졌고, 그런 정의감은 상호적 이타주의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재산권 침해가 거센 분노 부르는 이유

이처럼 재산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한 정의감이 도덕심의 핵심이다. 어려운 도덕적 문제에 부딪치면, 우리는 바로 ‘무엇이 정의로운가?’라고 묻는다. 정의롭지 않은 도덕심이나 도덕률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진화의 산물이므로, 정의감은 모든 인류가 공유한다. 모든 사회의 윤리 규범과 모든 종교의 계명이 본질적으로 같다. 우리는 도덕적 ‘문법’을 공유하고 필요에 따라 도덕률이라는 ‘글’을 만들어낸다.

자본주의는 재산의 형성에 공헌한 사람에게 재산권이 주어지는 체제다. 따라서 자연스럽고 정의롭다. 사람들은 흔히 자본주의는 효율적이지만 정의롭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정의롭지 않은 사회가 어떻게 효율적일 수 있을까?”

자본주의를 수술하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그런 시도가 만든 사회는 한결같이 정의롭지도 못하고 효율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재산권을 보장하지 못하면, 정의도 자아의 실현도 효율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도덕이란 개념이 자본주의 사회와 전체주의 사회에서 다른 뜻으로 쓰인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덕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정의감에 바탕을 두고 도덕률과 법이 만들어진다. 도덕률과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이 마련한 재산을 자신이 원하는 목적에 쓸 수 있다.

전체주의 사회에선 지도자가 제시한 사회적 목표에 모든 자원이 동원된다. 개인의 재산권은 있을 수 없다. 자연히 도덕의 성격이 바뀐다. 지도자가 제시한 목표에 도움이 되면, 어떤 행위든 도덕적이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부도덕하다. 도덕이 객관성을 잃은 것이다.

그래서 전체주의 사회에선 객관적 도덕에 바탕을 둔 ‘절차적 안정성’이 없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역적이 되고 작년의 진리가 금년엔 허위가 된다. 객관적 도덕이 없으니, 지도자의 행위는 모두 정당화된다. 전체주의 사회를 장악한 지도자가 예외 없이 황음무도해지고 사회주의 혁명을 기도한다는 세력이 으레 부도덕한 집단으로 타락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이다.

도덕은 우리의 행동을 인도하고 제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자신의 인격을 세우는 바탕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덕이 요구하는 것을 훌쩍 넘어 자신의 천성에 담긴 가능성을 펼칠 수 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Otrega y Gasset)의 말대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숙명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행사할 책임이 있음을 느끼는 것,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될까 결정하는 것”이다. 도덕은 우리에게 도덕을 넘는 것을, 이해와 공감과 연민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에 공감하고 그들의 처지에 연민을 느끼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뜻에서 자유롭다. 그런 자유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도덕은 이해와 연민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이앤 와코스키(Diane Wakoski)의 ‘경마장에 더는 못 갈 사람을 대신해서 2달러를 걸면서 (Placing a $2 Bet for a Man Who Will Never Go to the Horse Races Any More)’는 그 점을 잔잔히 일러준다.

슬픔과 슬퍼함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아닐지도/ 어쩌면 위엄이/ 나은 말일지도 모른다/ 그저 몸이 가리키는 것들을/ 먹을 것/ 입을 것/ 비바람을 막을 곳을 넘어/ 삶을/ 말해주므로.

(중략)아버지,/ 나 지금 아버지 대신 돈을 걸어요/ 이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나는 아직 살았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말에 걸어요./ 노름꾼들은 감상적이니/ 아버지는 나를 용서할 거예요/ 지금 살아서/ 내 사랑을 함부로 주어버리는 나를. 따든 잃든/ 아버지는 매일 경마에 거셨죠./ 나는 바라요/ 어떤 정신을/ 아버지가 내게 넘겨주었기를.

There is some beauty in sorrow/ and in sorrowing,/ perhaps not beauty/ perhaps dignity/ would be a better word/ which communicates/ life/ beyond just what the body indicates/ food/ clothing/ shelter.

(중략)

Old man,/ I place a bet for you/ now that you’re dead/ and I am still living./ It is on a horse called, “The Man I love.”/ Gamblers are sentimental/ so you will forgive me/ living now/ and giving away my love./ Win or lose/ you placed the races every day./ A certain spirit/ I hope/ you’ve passed on to me.


혼자 떠돌아다니다 열네 해 만에 찾아온 딸을 데리고 겨우 경마장에서 돈을 잃고 애써 우아한 모습을 보이려 애쓴 아버지, 날마다 경마에 돈을 건 아버지의 끈기를 자신이 물려받았기를 바라는 딸? 그 모습은 도덕의 울타리를 기어올라가 파란 하늘 속에서 문득 작은 꽃을 수줍게 피어 올린 울콩 같다.

복거일(卜鉅一) -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1967년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 1987년 소설 <비명을 찾아서> 발표. 이후 50여 권의 저술을 펴냄. 최근에는 소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와 6·25 전쟁사 <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및 전기 <리지웨이, 대한민국을 구한 지휘관>이 있다.

조이스 진 - 연세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현재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14년 봄에 첫 전시회를 가졌고 4월부터 <동아일보>에 <세상의 발견>이란 제목으로 그림과 글을 연재 중이다. <그라운드 제로> <서정적 풍경 1,2>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 등의 책에 삽화를 그렸고 연극 <아, 나의 조국> 의 미술을 담당했다.

201510호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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