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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⑩] 스페인 바르셀로나|‘오후의 삶’이 보장되는 공동체 

여유와 낭만 숨쉬는 카탈루냐의 심장 

글·사진 백승아 전 월간중앙 기자
축복받은 기후 덕에 ‘쉼’과 ‘축제’가 일상이 된 도시···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카탈루냐 사람들의 특별한 도시 사랑법

▎지난해 9월 10일 스페인 카탈루냐 주민들이 바르셀로나에서 독립 요구 횃불시위를 하고 있다. 카탈루냐 사람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 역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확신과 긍지가 있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테라스에서 마시는 맥주 한잔의 여유, 예술과 낭만이 채색된 거리에서 누리는 자유와 해방감, 평범한 축제의 뜨거운 열기까지.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는 이 도시를 두고 ‘유럽의 꽃’이라 칭송했다. 그 꽃의 강렬한 향에 취한 사람들은 이렇게 독백한다. “이토록 여유로운 일상에 그토록 치명적인 매력이 깃들 수 있다니!”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우디 앨런의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에서 여주인공 크리스티나는 강렬한 태양빛으로 가득한 바르셀로나에 들어서며 이렇게 말한다. 국내에서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이름으로 선보였지만, 본래 <비키 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서로 다른 사랑관을 지닌 단짝 친구가 바르셀로나에서 여름을 나며 겪는 로맨스를 그렸다. 영화 속에서 특정 도시를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우디 앨런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이야기 못지않게 배경이 되는 바르셀로나의 이곳저곳을 아름답게 담아냈다. “바르셀로나 자체를 찬양하고 싶어 작품을 기획했다”는 우디 앨런의 말처럼 스크린 속에 펼쳐지는 한여름 바르셀로나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 도시에 가면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주술적 낭만’에 사로잡히게 한다.

바르셀로나를 한 번이라도 다녀간 사람이라면 이 말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디 앨런이 그랬듯,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랬듯, 바르셀로나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여행자에겐 완전한 쉼과 해방을, 예술가에겐 자유의 정서를, 거주민에겐 긍정의 삶을…. 지중해 태양빛에 물든 도시가 선사하는 저마다의 ‘낭만’은 바르셀로나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하지만 이 도시가 가진 진짜 매력은 지금부터다. 보행자를 배려한 거리와 장애인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시스템, 거리 곳곳에 위치한 벤치와 아이를 위한 놀이공간 등 도시 구석구석에 숨은 시민을 위한 세심한 배려를 만나는 순간, 그렇게 이곳 사람의 일상을 경험하는 순간 ‘낭만’은 ‘현실’이 돼 진짜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여느 유럽 도시들보다 더 도시 같아.”

바르셀로나를 다녀간 여행자로부터 종종 이런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유서 깊은 유럽의 다른 도시처럼 역사적 전통과 웅장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널찍한 차도와 깔끔한 거리가 마치 모범생을 보는 듯 반듯하고 정갈한 게 ‘도시 중의 도시’ 같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1년 전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날 이곳의 ‘도시다움’에 놀랐다. 스페인이 가진 ‘열정의 나라’, ‘보헤미안의 나라’라는 이미지 때문일까? 무질서까진 아니더라도 적당하게 헝클어진 자유로운 모습을 기대했다. 하지만 마치 서울의 광화문 광장처럼 도로 한가운데에 넓은 인도가 있고, 그 옆으로 차도가 나있는 등 생각 이상으로 반듯하고 체계적인 거리 모습에 적잖이 실망한 기억이 난다. 물론 그때의 실망이 지금은 만족감으로 바뀌었다.

시대를 앞선 도시계획의 성과

건축의 도시답게 바르셀로나 거리에는 다양한 개성의 독특한 건물이 가득하다. 서울처럼 네모 반듯한 동일한 빌딩숲을 막 빠져나온 여행자라면 공통점을 찾아보기 힘든 서로 다른 매력의 건물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눈이 즐거울 것이다. 이는 건축미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칫 어지러울 수 있는 건물을 조화롭게 만드는 단조로운 거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화려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무대 장치를 최소화하듯, 정갈하고 반듯한 거리가 건축물의 개성을 배가시키고 있는 셈이다. 시내 관광을 위해 지도를 펼쳐 들면 차도와 길이 바둑판 모양으로 동일하게 나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단순한 구조덕에 길눈이 어두운 사람도 바르셀로나를 쉽게 돌아볼 수 있다.

바르셀로나 도시계획의 역사는 놀랍게도 1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둑판 모양의 거리 구획은 1859년 건축가 일데폰스 세르다(1815~1876)에 의해 처음 고안됐다. 바르셀로나가 지금과 같은 구조를 갖게 된 건 19세기 후반 옛 성곽이 무너지면서부터다. 이 시기 세르다는 무분별한 도시 확장을 막기 위해 모든 건물의 앞면을 일직선으로 맞추고 바르셀로나의 신시가지를 정사각형 구획으로 나누었다. 이 정사각형 모양의 시가지를 ‘에이샴플라(Eixample)’라고 부른다.

이 구역 안에는 600여 개의 ‘만싸나(Manzana)’가 존재한다. ‘블록’을 의미하는 만싸나는 한 변이 113m인 정사각형 공간으로, 이 안에 건물 여러 개가 네모난 도넛 모양으로 배열돼 있다. 역사가 오래된 호텔이나 건물에 들어서면 종종 가운데 비어있는 공간에 ‘정원’이 꾸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도넛 모양의 이 구조 때문에 생긴 정원이다. 이 덕분에 바르셀로나는 도심 곳곳에 ‘녹지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만싸나’는 건물의 토대가 되는 공간인 동시에 도시를 이루는 하나의 ‘셀’ 역할을 한다. 지금도 바르셀로나의 모든 도시개발은 이 단위를 기본으로 진행된다. 한 ‘만싸나’ 안에 여러 건물이 세워져 있는 까닭에 재건축을 하는 일이 매우 드물다. 거리를 걷다 보면 100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낡은 건물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데, 건물 안을 보수할지언정 건물 자체를 허물거나 새로 짓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을 고수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만싸나’ 를 기본 단위로 삼은 세르다의 계획이 무분별한 도시 개발과 확장을 막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일반인에겐 ‘가우디의 도시’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세르다의 도시계획을 일찍부터 연구한 건축학계에는 농담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세르다가 차린 밥상에 가우디가 숟가락만 얹었다.” 한 세기를 앞선 세르다의 통찰력이 없었다면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도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란 의미다.

‘염원’이 담긴 랜드마크, 성가족성당


▎1.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경기이자 바르셀로나 축제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엘카스텔’의 현장. 아슬아슬하게 탑을 쌓아올리는 선수들을 여러 명의 ‘피냐(군중)’가 양손을 뻗어 지탱하고 있다. / 2. 오전 시간 시장을 찾은 바르셀로나의 주부들. ‘미식의 도시’답게 시장에는 신선한 식재료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셀로나를 얘기하며 가우디를 빼놓을 수는 없다. 바르셀로나가 ‘건축과 예술의 도시’로 불리며 여느 유럽 도시와 다른 독특한 개성의 도시라 평가받는 데에는 가우디의 역할이 컸다. 건축가로서의 삶을 시작해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는 바르셀로나를 떠난 적이 없다. 역작으로 평가받는 성가족성당(Sagrada Familia)을 비롯해 구엘공원, 구엘저택, 카사바트요, 카사밀라 등 대표 작품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편견과 공식을 깨는 독특한 건축법으로 주목받는다. 혹자는 그의 작품을 두고 ‘기괴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그의 작품은 여러 면에서 엉뚱하고 특이하다.

특히 바르셀로나 중심에 우뚝 선 성가족성당은 마치 수백 년 된 묵직한 나무가 도시를 감싸고 있는 듯하다. 화려미가 돋보이는 유럽의 다른 성당과는 달리 웅장미가 돋보인다. 1883년 첫 삽을 떴지만 가우디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채 완성되지 못한 성당은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여전히 공사 중이다. 건축 당시에도 시민의 기부로만 공사를 진행하며 가우디 자신도 마치 수행의 길을 걷는 듯 느리지만 정성스럽게 벽돌을 쌓아 올렸다. 지금도 그 정신을 이어 공사는 전적으로 입장료와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후원으로만 이뤄진다. 성가족성당이 도시를 대표하는 단순한 랜드마크를 넘어 지금도 바르셀로나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갖는 건 이 때문이다. 오늘도 성당을 높이는 벽돌 한 장에는 한 세기 넘게 이어져 온 시민의 소망과 염원이 감춰져 있다.

이러한 정성 때문일까? 20세기를 마무리하는 1999년 바르셀로나는 도시로서는 처음으로 뛰어난 건축가에게 수여하는 ‘리바상(RIBA)’의 주인공이 됐다. 영국왕립건축가협회(Royal Institute of British Architectes)가 2년에 한번씩 수상하는 이 상은 본래 건축계에 공헌한 건축가에게 수상하는 상이나, 바르셀로나는 19세기부터 이어온 아름다운 계획도시라는 점과 ‘사람을 위한 도시’를 가꾸는 데 정성을 다하는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바르셀로나 도시계획의 강점은 ‘디자인’보다 도시의 주인인 ‘시민’의 동선을 고려했다는 데 있다. 체계적인 거리구획은 편리한 대중교통 시스템을 가능케 했고, 보행자 중심의 도로는 사람들의 이동을 유연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바르셀로나 시내에서는 다른 대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노인과 어린아이, 장애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은 관광지라도 유모차와 휠체어를 끌기 용이하게 도로가 나 있고, 모든 버스는 몸이 불편한 승객이 언제고 손쉽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문의 턱을 낮추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낮 카페 야외 테라스석에는 정갈하게 옷을 차려입은 백발의 노인이 가득하다. 한 손은 지팡이를, 나머지 한 손은 배우자의 손을 꼭 잡고 시내를 거니는 노부부의 모습도 이 도시에선 익숙한 풍경이다. 한국에선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기를 데리고 외출을 한다는 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곳 엄마들은 어린 아기를 유모차에 싣고 나와 친구를 만나고 쇼핑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다. 도시 곳곳에 위치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벤치와 ‘포켓파크(Pocket park, 소공원)’는 사람들의 일상에 여유로움을 더한다. 카페나 식당의 야외테라스석 한쪽엔 부모들이 맘 놓고 아이들을 뛰어놀게 할 수 있는 작은 놀이터가 위치한다.

여행자가 아닌 거주자 신분으로 이들의 일상을 경험하다 보면 이와 같은 도시의 배려에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처음엔 유독 자신들의 터전에 대한 ‘주인의식’이 강한 이곳 사람들을 보며 의아했는데, 이젠 그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이토록 자신들의 터전을 사랑하는 건 도시가 선사한 편안한 일상에 대한 보답이다.

사실 이곳 사람들의 ‘여유로운 삶’은 스페인의 국민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축복받은 기후 아래 예부터 ‘시에스타(Siesta, 낮잠)’라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은 일과에서 ‘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매사에 절대 서두르거나 보채는 법이 없다.

도시가 선사한 편안한 일상에 대한 보답

카탈루냐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이보다 더하면 더하다. 대도시를 살아감에도 ‘쉼’이 일상이 된 바르셀로나 사람들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 ‘여유’가 부럽다가도 게으르게 느껴질 때가 적지 않다.

이곳에선 오후 2시는 돼야 점심시간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사람이 바쁘게 업무를 보다가도 점심시간이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식당을 찾아 여유롭게 식사를 한다. 가까운 도시 런던만 하더라도 바쁜 직장가에선 빨리 점심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테이크 아웃 샌드위치나 도시락 가게가 인기가 좋다. 바르셀로나에선 ‘맥도날드’나 ‘버거킹’과 같은 프랜차이즈 체인을 제외하곤 패스트푸드 식당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거리를 걸으며 샌드위치를 먹는 건 더더욱 상상 못할 일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게 이곳 사람들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관광 중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싶은데 적당한 식당을 찾지 못한 여행자 중엔 종종 “한국의 김밥이나 떡볶이처럼 빠르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분식가게를 차리면 ‘대박’ 날 것 같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이곳 사람들의 문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상이다. ‘미식의 도시’에 분식집이 없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대신 이들은 점심식사로 잘 차려진 코스 요리를 먹는다. 스페인에서는 점심시간 어떤 식당에 가도 ‘메뉴 델 디아(Menu del dia: 오늘의 메뉴)’라는 정식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전채요리, 메인, 후식으로 구성된 코스로, 푸짐한 양에 가격도 10유로(한화 약 1만3천원) 내외로 저렴해 스페인 사람은 물론 관광객에게도 인기가 좋다. ‘메뉴 델 디아’의 전통은 프랑코 독재정권 시절부터 이어져온다. 열심히 일한 노동자에게 값싼 점심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마련된 이 제도는 독재정권이 막을 내린 지금까지 이어져 스페인 사람들의 점심식탁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여유로운 식사 후에는 ‘시에스타’ 시간이 이어진다. 시에스타가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의견에 따라 2006년 이후 일반 직장과 정부기관에서는 이 전통을 폐지했지만, 관광지를 제외한 동네의 가게는 여전히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오후 2시부터 4시, 혹은 5시까지 시에스타 시간을 갖는다. 구멍가게부터 철물점, 문구점, 옷가게까지 카페와 식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게가 셔터문을 내린다. 은행을 비롯한 동사무소, 경찰서 등 관공서의 업무도 오후 2시면 끝난다.

시에스타가 끝난 오후 6시, 거리는 다시 활기를 띤다. 골목은 하교한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고 동네 상점은 저녁식사 거리를 준비하러 나온 주부들로 붐빈다. 동네 바(Bar)도 퇴근 후 간단하게 맥주를 찾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다. 저녁식사가 이르면 오후 8시, 보통 9시가 넘어 시작되는 터라 이곳 사람들은 이 시간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 대신 바를 찾아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일상 속 수다’를 즐기는 사람들


▎지난해 11월 카탈루냐에서 실시된 분리독립 찬반투표를 앞두고 지지자들이 얼굴에 ‘찬성(Si)’이라는 글을 새긴 채 시위를 하고 있다.
‘쉼’에 익숙하지 않은 바쁜 도시인의 시선으론 이곳 사람들의 이런 일과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필자 역시 이곳의 ‘시계’에 적응하기 전에는 점심식사를 늦게 하는 일도, 오후시간 텅 빈 거리를 거니는 일도, 오후 2시면 문을 닫아버리는 관공서의 업무 시스템을 이해하는 일도 모든 게 낯설었다. 때론 여유롭다 못해 느려터진 관공서의 업무 처리에 화가 치밀 때도 있었다. 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듯, 이들의 생활방식을 인정하고 익숙해지니 이젠 ‘나만의 오후시간’을 누리는 여유가 생긴 듯하다.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쉼을 통해 하루를 점검하고 재충전하는데서 오는 행복감. ‘오후가 있는 삶’이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이다.

다만 여유롭다 못해 가끔 약속시간까지 한참이고 늦어버리는 이곳 사람들의 성향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이곳에선 친구나 가족과 같이 가까운 사이에선 “몇 시에 만나자”는 약속이 효력이 없을 때가 많다. 가령 “오후 2시 즈음에 만나자”는 제안은 2시 반, 혹은 3시가 넘어 약속장소에 오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들의 문화를 알 리 없는 외국인의 입장에선 짧은 대화만으로 숨은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답답한 마음에 한번은 이곳 출신의 스페인 친구에게 “왜 스페인 사람들은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친구의 답변은 나름 그럴싸했다. 그 설명에 따르면 긍정적인 성격을 타고난 스페인 사람들은 대화 상대방에게 “노(No)”를 잘하지 못해 항상 직접적인 표현보단 간접적으로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제안한 약속시간이 불가능하더라도 딱 잘라 “안 된다”고 하지 않고 “그 즈음에 괜찮다”는 식으로 돌려 말한다는 것. 그 친구는 “스페인어에 영어로 치면 ‘I think’, ‘I believe’와 같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표현들이 다양한 것도 스페인 사람들이 ‘좋다’ 혹은 ‘싫다’처럼 직접적으로 의견을 표현하기보단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유를 설명하길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또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이 수다스럽다”는 것이 이 친구의 그럴듯한 해석이다.

그의 말을 온전히 신뢰할 순 없었지만, 특히 약속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것이 ‘긍정적인 성격’ 때문이라는 설명은 쉽게 납득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말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바로 이곳 사람들이 ‘낙천적’이고 ‘수다스럽다’는 의견이다. 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 의견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바르셀로나의 지하철과 버스는 승객의 대화소리로 항상 시끌벅적하다. 대화를 즐기는 이곳 사람들은 일행과는 물론 초면인 사람과의 대화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후자의 경우 대부분 간단하게 날씨 얘기를 나누다가 대화를 이어가는 식인데, 경우에 따라선 서로의 가족은 물론 사돈의 팔촌에까지 대화 주제가 확장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이곳에선 옆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만으로도 이동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우리의 생각으론 낯선 사람과 대화를 이어가는 게 부담이 될 법한데, 새로운 만남을 즐기는 이곳 사람에겐 오히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이동을 하는 게 고역인 모양이다. 몇 년 전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한 스페인 친구는 “도쿄 지하철이 너무 조용해 힘들었다”는 일화를 전해 필자에게 웃음을 안긴 적이 있다.

‘긍정성’과 ‘하나됨’이 이룬 축제문화


▎바르셀로나 거리를 걷다 보면 카탈루냐 주정부 깃발인 ‘에스텔라다’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카탈루냐 독립을 염원하는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공휴일이 아닌 평상시에도 창밖에 깃발을 내건다.
뭐니뭐니해도 이들의 여유와 낙천성이 제대로 반영된 건 ‘축제문화’가 아닐까? “축제를 즐긴다”를 넘어서 “축제가 일상이 됐다”는 표현이 적합할 만큼 축제를 사랑하는 이곳 사람들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할 것 없이 365일 내내 크고 작은 축제를 즐긴다. 이는 일상 속 언어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축제’를 뜻하는 ‘피에스타(Fiesta)’는 국가 차원의 큰 축제부터 생일파티, 하다못해 친구들과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즐기는 작은 파티에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이들의 축제 사랑을 증명하듯, 바르셀로나시 홈페이지에는 연중 축제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하지만 축제라고 해서 언제나 커다란 무대와 화려한 볼거리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 공휴일을 기념하는 시 차원의 큰 축제를 제외하고도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작은 동네축제가 이곳저곳에서 열린다. 바르셀로나의 축제문화가 특별한 건 바로 여기에 있다.

흔히 지역축제라고 하면 그 지역을 대표하는 몇몇이 마련한 프로그램에 거주민들이 참여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에선 동네의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모두가 축제의 준비위원이 된다. 동네상점은 의기투합하여 축제의 먹거리를 마련하고, 아이와 어른은 하나가 돼 오랫동안 준비한 퍼레이드를 선보인다. 무대 위에는 유명 초대가수 대신 연인, 친구, 할아버지와 손주가 주인공으로 올라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춘다. 이들에게 ‘축제’는 단순히 먹고, 보고, 즐기는 것보다 ‘함께함’의 의미가 더 크다.

특히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카탈루냐 사람들은 축제를 즐김에 있어 ‘공동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축제의 하이라이트’이자 카탈루냐 지방의 전통놀이인 ‘엘 카스텔(El Castel: 인간 탑 쌓기)’은 이들의 ‘공동체주의’를 잘 보여준다. 이름 그대로 어린아이부터 장성한 어른까지 여러 명의 참가자가 서로를 지탱하며 탑을 쌓는 ‘엘 카스텔’은 고도의 집중력과 협동심을 요구한다. 경우에 따라선 건물 10층 높이까지 탑을 쌓기도 하는데, 카탈루냐에서는 매년 각 지역별 대항대회가 열릴 만큼 중요한 경기다.

순서는 간단하다. 건장한 남성들이 2층가량의 탑을 만들면 그 위로 10대 청소년과 어린아이들이 올라 차례로 탑을 쌓아간다. 탑의 맨 꼭대기는 참가자 중 몸이 가장 가벼운 어린 소녀가 장식한다. 마치 코알라가 나무를 오르듯 작은 발로 탑을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군중들은 혹시나 소녀가 떨어질까 탑을 둘러싸고 양팔을 뻗어 탑의 기초를 지탱하는데, 이 군중을 일컬어 ‘피냐(Pinya)’라고 부른다. 누구나 양팔을 뻗어 탑을 둘러싸는 순간 ‘피냐’의 일원이 될 수 있다.

탄탄한 기초 위에 탑이 높아질수록 군중들의 응원소리도 커진다. 마지막 순간, 산 정상을 정복하듯 어린 소녀의 발이 탑의 꼭대기에 다다르면 여기저기서 격려의 함성이 터져나온다. 참가자들의 땀과 이들을 지지하던 ‘피냐’의 응원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탑이 완성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숙련된 곡예사의 퍼포먼스를 볼 때 느끼는 전율과는 차원이 다르다. 세대를 초월한 ‘하나됨’이 이룬 감동과 희열은 현장의 모든 사람에게 ‘우리 모두가 축제의 주인공’이라는 축제의 참 의미를 전달한다.

이들의 ‘하나됨’은 ‘엘 클라시코(El Cl?sico)’에서 더욱 더 빛을 발한다. ‘전통의 경기’라는 의미의 ‘엘 클라시코’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최대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축구경기를 일컫는다. ‘축구사랑’이 유별난 바르셀로나 사람들에게 ‘엘 클라시코’는 단순한 축구경기가 아니다. 1년 중 가장 큰 축제이자 온 가족이 함께하는 명절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세기의 대전, ‘엘 클라시코’


▎FC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캄프누’를 가득 메운 관중.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린아이서부터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의 시민들이 경기장을 찾아 ‘바르샤!’를 외친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손자부터 할아버지까지 모두가 FC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과 TV 앞에 앉아 ‘바르샤(Barca)’를 외치고, 경기장에는 스페인 국기대신 카탈루냐 주정부 깃발인 ‘에스텔라다(Estelada)’가 걸린다. 카탈루냐의 자존심이 걸린 역사적인 날이기 때문이다. ‘엘 클라시코’가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일상에서 이토록 중요한 날이 된 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이들이 자신의 ‘군대’라 여기는 FC 바르셀로나에는 카탈루냐의 뼈아픈 근대사가 농축돼 있다.

FC 바르셀로나는 1899년 카탈루냐의 자치권 회복의 염원 속에 탄생했다. 1137년 아라곤 왕령에 의해 스페인에 통합된 이후 끝없이 독립을 염원했던 카탈루냐는 17세기 이르러 카스티야와의 갈등으로 스페인 왕권이 힘을 잃자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후 1913년 미약하게나마 어느 정도 자치권을 획득한 카탈루냐는 1925년 ‘프리모 데 리베라’ 군부정권의 탄압 아래 모든 독립 시위를 진압당했다. 이에 분개한 FC 바르셀로나 팬들은 1925년 6월 14일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퍼포먼스를 펼쳤고, 그 결과 경기장은 폐쇄됐다.

FC 바르셀로나가 레알 마드리드와 돌이킬 수 없는 앙숙관계가 된 건 이때부터다. 이후 1936년 스페인내전이 발발했고, 1937년 FC 바르셀로나의 초대 회장 호셉 수뇰이 프랑코 정권의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며 스페인 정부에 대한 FC 바르셀로나 팬의 반발심은 더욱 거세졌다. 이 시기 프랑코 정권은 카탈루냐어는 물론 카탈루냐 국기 사용을 금지했고, 구단 이름을 ‘CF 바르셀로나’로 바꾸었다.

FC 바르셀로나가 오늘날의 모습을 되찾은 건 1970년대 중반 이후 프랑코 정권이 무너지면서부터다. 독재정권의 몰락과 함께 1977년 9월 자치권을 부여받은 카탈루냐는 1979년 행정구역상 지방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완전한 자치권을 누리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1974년 FC 바르셀로나는 스타 플레이어 요한 크루이프를 영입하며 2년 연속 시즌 우승을 이뤄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FC 바르셀로나는 1988년 요한 크루이프를 감독으로 영입하며 1990년대 스페인 축구를 평정했다.

FC 바르셀로나는 지금도 프리메라리가는 물론 유럽챔피언스리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리오넬 메시, 루이스 수아레즈 등 스타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2005년부터 총 여섯 차례 프리메라리가 타이틀을, 세 차례에 걸쳐 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도시를 지켜낸 것은 공동체의 ‘자긍심’

FC 바르셀로나는 시민의 구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FC 바르셀로나는 한 명의 구단주 대신 160만 명의 바르셀로나 시민을 구단주를 두고 있다. 그래서일까? 리오넬 메시를 비롯한 FC 바르셀로나 소속 선수들의 자긍심은 바르셀로나 사람들 못지 않다. ‘스타 선수’이기 앞서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FC 바르셀로나의 일원으로서 이들 모두는 바르셀로나 시민의 염원을 대변한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홈구장 ‘캄프 누(Cam nou)’엔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라는 커다란 문구와 함께 스페인 국기대신 카탈루냐 주정부 깃발이 걸린다. 카탈루냐 독립을 지지한다는 뜻이다.

‘엘 클라시코’에서 엿볼 수 있듯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자긍심은 실로 엄청나다. 카탈루냐의 완전한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은 공휴일이 아닌데도 창밖에 ‘에스텔라다’를 내걸고, 곳곳에선 카탈루냐의 독립을 지지하는 세미나가 열린다. 독립을 열렬히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긍심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스페인 사람이라기보단 ‘카탈루냐 출신’이라고 소개할 만큼 이곳 사람들이 느끼는 소속감은 매우 크다.

그도 그럴 것이 바르셀로나에서 모든 교육은 카탈루냐어로 이루어진다. 카탈루냐어를 도시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고 있는 만큼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전 교육 과정이 카탈루냐어로 진행된다. 그렇다 보니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스페인 국적을 가졌음에도 스페인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카탈루냐 토박이들 중엔 스페인어 문법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적다고 한다.

외국인의 시선으론 한 나라 안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게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탄압의 시기를 몸으로 경험한 이전 세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역사적 공감대가 적은 젊은 세대들의 의견은 새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한 20대 초반의 청년에게 “카탈루냐와 스페인어를 둘 다 익히는 게 버겁지 않냐”고 물은 적이 있다. 돌아온 답변은 잠깐의 기대를 단번에 무너뜨렸다. 그 청년의 대답은 매우 간결했다. “전혀! 우리는 ‘카탈루냐 사람들’인 걸(No, somos catalanes).”

그의 말처럼 이들에겐 ‘왜’라는 이유보단 ‘카탈루냐 출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해 보인다. 어려서부터 익힌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 역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확신과 긍지가 있다. 타 지역의 사람에겐 배타적으로 보일지라도 도시의 전통을 계승하며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로서는 타당한 자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탈루냐 독립을 위한 염원과 진짜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어 보인다. 지난해 11월 카탈루냐 전 지역에서 열린 카탈루냐의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비승인 주민 투표에는 전체 유권자 540만 명 중 225만 명만이 참여했다. 매년 스페인 중앙정부에 150억 유로 상당의 세금을 바치고 있지만, 카탈루냐에 편의가 돌아오기는커녕 오히려 가난한 타 지역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는 독립 요구 운동에 불을 지폈지만 정작 독립 이후 감당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 앞에 힘을 잃은 듯하다.

그럼에도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유별난 ‘공동체 사랑’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성가족성당’에 담긴 염원과 ‘엘 카스텔’의 하나됨, ‘바르샤’라 외치는 뜨거운 함성 속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신들의 터전과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어쩌면 이 ‘자긍심’이 독재정권의 탄압과 경제 위기 속에서도 바르셀로나를 ‘주눅들지 않는 도시’로 지켜낸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도시가 선사한 낭만과 여유, 그리고 이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한 곳, 바르셀로나가 특별한 이유가 바로 이 대목 어딘가에 있다.

백승아 - 고려대학교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후 3년간 <월간중앙> 기자로 일했다. 2014년 남편과 함께 MBA 유학길에 올라 현재 1년째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거주 중이다. 카탈루냐 사람들과 여유로운 일상을 공유하며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다. 매달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에 스페인 내 한류소식을 전달한다.

201510호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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