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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김인식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휴먼볼’ 

“나라가 부르잖아. 다른 이유가 필요해?” 

김식 중앙일보 야구전문기자
2002 아시안게임, 2006·2009 WBC에 이어 4번째 대표팀 사령탑에 선임… 11월 8일 개막하는 프리미어 12에 출전 미국·일본·베네수엘라 등과 우승경쟁

▎김인식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11월 8일 개막하는 야구 국가대항전 프리미어 12에 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한다. 김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것은 2002년 아시안게임, 2006·2009년 WBC에 이어 4번째다.
야구 국가대항전 프리미어 12에 참가하는 한국 야구 대표팀 명단이 10월 7일 발표됐다. 11월 8일 개막을 한 달 앞두고 대표팀의 윤곽이 드러난 것이다.

김인식(68) 대표팀 감독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올가을 절정의 타격을 선보였던 미국프로야구 추신수(33·텍사스 레인저스)를 엔트리에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MLB) 사무국이 빅리거의 프리미어 12 출전을 반대한 까닭이다. 마무리투수 오승환(33·한신 타이거즈)도 빠졌다. 시즌 막판에 입은 허벅지 부상이 심각해 11월 대회에 뛰기는 어렵다는 뜻을 전해왔다.

한국 야구는 선수층이 얇아 해외파에 대한 의존도가 크다. 가뜩이나 메이저리그 소속의 에이스 류현진(28·LA 다저스)과 유격수 강정호(28·피츠버그 파이리츠)가 모두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는 바람에 대표팀에서 제외된 터였다.

한국과 함께 예선 B조에 속한 일본·미국·도미니카공화국·베네수엘라·멕시코 등은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갖고 있다. 특히 저변이 넓은 일본·미국·도미니카공화국은 빅리거가 합류하지 않아도 메이저리그급 팀을 만들 수 있다. 한국 야구팬들의 눈높이는 4강에서 결승에 맞춰져 있지만 이번 대표팀은 선수구성부터가 쉽지 않았다.

대회 준비과정에서 “프리미어 12에 꼭 가고 싶다”고 나서는 선수가 없었다. 국제대회 경험이 풍부한 투수 윤석민(29·KIA)은 팔꿈치, 양현종(27·KIA)은 어깨 통증을 이유로 빠졌다. 컨디션이 괜찮은 선수들도 눈치만 봤다.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몸값에 비해 프리미어 12가 줄 수 있는 보상(대회 상금과 보너스, FA 등록일수 산정 등)이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노(老)감독의 주름이 깊어졌다.

“나라가 부르잖아.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필요해? 선수들도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국가대표가 돼서 뭘 얻을 생각부터 하지 말라고 말이야. 태극마크를 다는 거잖아. 어릴 때부터 그렇게 달고 싶어 했던 태극마크.”

김 감독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부터 해온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 감독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와 2006년과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도 선수들에게 국가를 대표한다는 사명감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김 감독은 “타선은 어떻게든 짜겠는데 마운드 운영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내가 이끈 대표팀 가운데 투수력은 이번이 가장 약한 것 같다”며 “그래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상외로 잘 던지는 투수가 나오길 기대한다. 어떤 여건에서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야구연맹(IBAF)과 일본야구기구(NPB)가 공동주최하는 대회다. 메이저리그가 주도하는 WBC와 맞서는 성격을 갖고 있다. 프로와 아마추어 선수들이 모두 참가하는 국가대항전으로서 의미는 있으나 선수들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사실 크지 않다.

한국 선수들이 국제대회를 통해 얻고자 하는 건 병역특례와 국제적 인지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현재 야구 선수들이 병역특례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아시안게임 금메달밖에 없다. 2008 베이징올림픽을 끝으로 야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야구는 곧 국가다


추신수·강정호 등 11명은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나성범·황재균 등 13명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로 혜택을 받았다.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야구가 정식종목으로 재진입할 가능성이 크지만 현역 선수에게는 너무 멀리 있는 기회다. 설령 야구대표팀이 프리미어 12에서 우승하더라도 병역특례와는 상관없다.

축구선수들은 월드컵에서 자신의 상품가치를 크게 올릴 수 있다. 200개국 이상이 즐기는 축구만큼 시장이 크지 않지만 야구도 국제대회를 통해 선수의 가치가 재평가된다. 베이징올림픽과 2009년 WBC에서 뛰어난 피칭을 선보인 류현진은 2013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2006년 WBC에서 묵직한 공을 뿌린 오승환은 지난해 한신에 입단했다.

프리미어 12에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참가가 저조할 전망이다. 미국 중심의 WBC에 대항하는 대회에 연봉 수백만 달러를 받는 선수들이 굳이 출전할 이유가 없다. MLB 사무국도 각 구단의 40인 로스터에 포함되지 않은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프리미어 12에 참가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최고 선수들이 빠진 대회라면 선수들의 ‘세일즈 효과’도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 국내 선수들이 대표팀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이유다.

김 감독은 그걸 한탄한다. “보상받을 것부터 생각하면 안되지.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만큼 수준 높은 기량을 보여주고, 좋은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하잖아. 대표팀에 뽑힌 선수라면 야구로 많은 혜택을 입었을 것이야. 그걸 국민께 돌려드려야 해.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의 호소가 어디까지, 누구에게까지 전달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 감독은 비장하다. 그는 “프리미어 12가 첫 대회이긴 하지만 세계랭킹 상위 12개국이 참가하는 국가대항전이다. 몇몇 야구인은 2017년 WBC, 2020년 도쿄올림픽을 대비해 이번에는 젊은 선수들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미래 전력은 국가대표 상비군에서 만드는 거다. 국가대표는 현재 최고의 선수들이 모이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 감독은 대표팀 지휘봉을 잡으면 국가주의 또는 전체주의적 색깔을 드러낸다. 그에겐 야구가 곧 국가다. 평소 대한민국 최고의 덕장(德將)으로 꼽히는 김 감독이지만 대표팀 선수들에겐 특별한 책임감과 국가관을 요구한다. 20~30대 젊은 선수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을는지 몰라도 김 감독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형님은 대한민국 사람 아니요?”


▎2009년 3월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2회 WBC 준우승 축하연에서 건배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과 김인식 감독.
기자 초년병 시절 경험했던 김인식 두산 베어스 감독과의 술자리는 참 즐거웠다. 그는 권위적이지 않았고 대화를 일방적으로 끌어가지도 않았다. 코치들, 기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주량이 센 기자와는 폭탄주 수십 잔을 나눠 마시는 주당이었다.

두산을 떠나 한화 이글스 감독이 된 그는 2004년 12월 4일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불과 이틀 전 선배 기자의 상가에서 만났던 김 감독이 평소와 다르지 않아 보였기에 더욱 믿기 힘들었다. 걷기조차 힘든 상황에서 그는 재활훈련을 독하게 했다. 기적처럼 좋아졌다고는 해도 거동이 불편했다. 한화 구단은 그가 감독직을 계속 수행하도록 배려했다.

김 감독은 2005년 한화를 4강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듬해 WBC 감독으로 추대됐다. 당시 국가대표 감독은 명망이 높은 베테랑이 맡는 게 관례였다. 당시 최고령이었던 김응용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퇴진했다. 몸이 불편한 게 걸렸지만 김인식 감독은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했다.

야구대표팀 감독 자리는 사실 그다지 인기가 높지 않다. 축구대표팀 사령탑처럼 전임(專任)제가 아니고, 많은 연봉을 받는 것도 아니다. 프로팀의 감독에게 대표팀을 한 달 정도 맡기는 시스템이다. 게다가 야구는 국민들의 기대와 관심이 쏠리는 일본전에서 이길 가능성이 크지 않다. 이래저래 감독에게 부담이 많이 가는 자리다.

더구나 2006년 WBC는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기 어려운 첫 대회였다. 일본전이 힘겨워 보일 뿐 아니라 메이저리거가 대거 참가하는 미국·도미니카공화국·멕시코 등과의 경기는 공포감까지 줬다. 야구 대표팀을 구성하고 지원하는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연륜과 덕망을 갖춘 김 감독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 감독이 지휘봉을 잡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김재박 현대 유니콘스 감독, 조범현 SK 와이번스 감독, 선동열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코치로 합류했다. 해외파 선수 박찬호·이승엽·서재응·김병현 등이 기꺼이 태극마크를 달았다. 김 감독의 용기를 보고 최고의 지도자들과 선수들이 뜻을 모은 것이다.

야구대표팀은 2006년 WBC 1라운드에서 일본, 2라운드에서 미국·멕시코를 꺾고 4강에 올랐다. 결정적일 때 이승엽의 홈런이 터졌고, 박찬호·김병현의 호투가 이어졌다. 메이저리그 홈페이지는 “Who are these guys, anyway(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녀석들이야)?”라고 물었다. 준결승전에서 일본에 지긴 했지만 ‘김인식팀’은 야구 변방이었던 한국을 세계무대로 끌어올렸다.

WBC를 계기로 한국 야구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야구대표팀은 김경문(57) 감독의 지휘로 사상 첫 전승(9승) 금메달을 따냈다. 일본을 두 차례, 결승에서 쿠바를 꺾고 이룬 성과였다. 팬들의 기대치는 더 높아졌다.

2009년 WBC를 앞두고 KBO는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현역 감독들이 모두 대표팀 사령탑을 고사한 것이다. 야구 열기가 뜨거워진 만큼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이 컸던 탓이다. 김경문 감독도, 김성근 당시 SK 감독도 WBC 대표팀을 맡길 꺼렸다. 또다시 김 감독에게 공이 넘어왔다.

하일성 당시 KBO 사무총장이 김 감독을 찾아왔다. 하 총장은 방송 해설위원으로 활동할 때부터 40년 가까이 김 감독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는 용건을 꺼내지 않고 자리에 앉자마자 소주를 들이켰다.

김 감독은 “하 총장도 큰 수술(심근경색)을 받았잖아. 술 많이 마시면 안 되는데 앉은 자리에서 몇 잔을 들이키더라고.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내년 WBC 대표팀 감독을 맡아 달라’는 거야. 어렵다고 했지. 내 건강도 좋지 않고, 소속팀에도 미안하니까”라고 회상했다.

하 총장은 그 자리에서 술을 더 먹었다. “형님, 형님은 대한민국 사람 아니요? 나라를 위해서 맡아줘요.” 하 총장에게서 ‘나라’라는 말이 나온 순간, 김 감독의 말문이 막혔다. 짧지 않은 침묵을 김 감독이 깼다. “왜 또 나야? 아무튼 알았어.”

대한민국은 또 그가 필요하다


▎2009년 WBC를 앞두고 가진 미국 하와이 전지훈련에서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는 김인식 감독(왼쪽)과 김성한 수석코치.
김인식 감독은 한화와의 계약 마지막 시즌을 앞두고 있었다. 박찬호·이승엽 등이 소속팀 사정 때문에 참가할 수 없어 3년 전 같은 선수 구성을 할 수 없었다. 반면 팬들의 눈높이는 2006년 대회처럼 4강에 맞춰져 있었다. 야구대표팀 감독은 여전히 ‘독이 든 성배’였다.

게다가 2009년 대회를 앞두고 WBC에 대한 병역특례혜택이 없어졌다. 선수들은 물론 각 구단도 대표팀 구성에 협조적이지 않았다. 대표팀에 시간과 노력을 쓰면 그만큼 소속팀의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구단 감독들로 대표팀 코치진을 구성해 달라는 김 감독의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김 감독은 김성한 수석코치(전 KIA 감독)와 이순철 타격코치(전 LG 감독) 등 야인(野人)을 중심으로 스태프를 구성했다. 코치진 명단을 발표하면서 그는 “국가가 있어야 야구도 있다”고 말했다. 각자의 이유로 대표팀을 외면한 구단과 감독, 선수들을 향한 일갈이었다.

며칠 후 김 감독을 따로 만나 그 말뜻을 자세히 물었다. 그는 혀를 끌끌 찼다. “자기들만 팀이 있어? 자기들만 소속팀에서 훈련해야 하느냐고? 각자 성적이 중요하다고, 보장된 혜택이 없다고 내빼면 부끄럽지 않아? 국가가 있어야 야구가 있고, 야구가 있어야 구단과 선수가 있는 거잖아.”

김 감독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몸이 불편하고, 자리가 위태롭고, 잘해야 본전인 상황에서도 그는 기꺼이 태극마크를 품었다. 그랬기 때문에 “국가가 있어야 야구도 있다”는 그의 말은 수많은 야구인을 부끄럽게 했다. 2009년 WBC 대표팀은 결국 준우승을 일구어냈다.

반면 한화는 최하위로 추락해 김 감독은 2009시즌 뒤 유니폼을 벗었다. 그래도 그는 “아쉽지만 할 수 없지. 한화 성적이 나빴던 건 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가 아니라 부상 선수가 많았기 때문이었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야구인들은 그에게 더 미안해했다.

2009년을 끝으로 한화 지휘봉을 내려놓았을 때 그의 나이 만 62세. 김 감독이 떠난 프로야구는 거센 변화의 파고를 넘었다. 류중일(52) 감독이 이끄는 삼성 라이온즈는 견고한 육성 시스템을 구축해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 연속 통합우승을 차지했다. 김경문 감독의 NC 다이노스, 염경엽(47) 감독의 넥센 히어로즈도 큰 틀에서는 삼성 라이온즈와 유사점이 많다. 감독은 경기에만 전념하고, 중·장기 플랜을 짜서 팀을 운영하는 건 구단 사장·단장의 몫이 됐다.

한화 이글스만 김 감독 이후에도 사령탑 중심의 팀 운영을 하고 있다. 2013년 김응용(74) 감독을 선임했고, 올해는 김성근(73)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한화 이외의 팀들은 노장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김인식 감독은 KBO 기술위원장을 맡으며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조범현 감독) 2013년 WBC(류중일 감독),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류중일 감독)을 지원했다.

WBC 감독 선임 때마다 잡음이 일자 2009년 KBO 규약이 생겼다. 전년도 우승 또는 준우승 감독이 자동으로 대표팀을 맡자는 것이었다. 우승 감독은 심적인 여유가 있고 소속팀의 신뢰를 받을 테니 대표팀을 위해 희생하자는 합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5년밖에 가지 못했다. 대회로 치면 세 차례만 유지됐다. 현역 감독들이 “소속팀과 대표팀 지휘를 함께하기에는 부담스럽다”며 고사한 것이다.

프리미어 12를 앞두고도 류중일 감독과 염경엽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는 걸 사실상 거절했다. 현장 감독들은 “김인식 감독님이 맡았으면 좋겠다”고 뜻을 모았다. 결국 각 구단 대표이사들의 의결기구인 KBO 이사회가 김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사람을 움직이는 김인식표 야구


▎제1회 야구월드컵인 2006년 WBC에서 4강 쾌거를 이룬 김인식 감독이 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고 있다. 왼쪽은 대표팀 주장 이종범.
프리미어 12 대표팀은 선수 구성부터 애를 먹었다. 메이저리그 팀들뿐 아니라 국내 구단들도 선수와 코치를 내주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어려움 속에서 대한민국 야구는 또 김인식을 찾았다. 김 감독이라면 위기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어려운 상대와 담대하게 싸울 것으로 믿는 것이다. “야구는 국가다”라고 말하는 그이기에 선수들이 믿고 따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김 감독이 대표팀을 맡는 건 이번이 네 번째다. 프로리그에서 정규시즌 통산 1567승을 거뒀고, 한국시리즈에서 10차례 우승한 김응용 감독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만 맡았다. 통산 1300승을 돌파한 김성근 감독은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적이 없다. 다른 감독들도 한 번 성과를 내면 더 이상 대표팀 지휘봉을 잡지 않았다.

특히 프리미어 12를 앞두고는 대표팀 감독 기피 현상이 극심했다. 4년 연속 챔피언에 오른 류중일 감독부터 “더 이상은 어렵다”고 고사했다. 현역 감독들은 “일본처럼 전임 감독을 선임해 장기간 대표팀을 관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숙적 일본은 올해 초 고쿠보 히로키(44)를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해 일찌감치 대회를 준비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일본 야구는 ‘고쿠보 체제’가 2017년 WBC까지 이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2020년 도쿄올림픽에 야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것까지 계산했다.

한국과 일본은 11월 8일 일본 삿포로에서 대회 개막전을 치른다. 일본은 자국 리그에서 최고의 팀을 구성하고 있고, 한국전 선발 투수로 괴물투수 오타니 쇼헤이(21·니혼햄)를 내정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김 감독은 “역시 일본전이 가장 어렵다”고 토로했다. 일본은 한국보다 기량이 한 단계 위인 데다 대회 준비에도 적극적이다. 한일전의 해법 역시 김인식 감독이 갖고 있다. 그는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한일전을 지휘했고 가장 좋은 성과를 냈다. 두 차례 WBC에서 8번 만나 4승 4패를 기록했다. 전력의 열세를 딛고 선수들과 함께 이뤄낸 성과였다.

김 감독의 야구는 ‘휴먼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작전을 많이 걸거나 변칙을 구사하지 않는다. 선수들의 마음을 얻어 그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야구를 구현한다. 이런 전략은 일본 등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울 때 효과적이다.

김 감독이 2006년 WBC에서 박찬호와 구대성·김병현 등 해외파 선수들을 활용한 것에서 그의 스타일을 읽을 수 있다. 당시 박찬호는 구위가 많이 떨어져 있을 때다. 그러나 박찬호는 1라운드 일본전 1이닝 세이브, 2라운드 일본전 선발 5이닝 무실점(승리투수는 김병현)을 기록했다. 일본 대표팀 최고 타자인 스즈키 이치로를 잡아내고 박찬호가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는 장면은 국민들을 통쾌하게 했을 뿐 아니라, 대표팀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김 감독은 “힘이 조금 떨어졌다고 해도 박찬호는 박찬호다. 길지 않은 이닝은 충분히 막아줄 걸로 봤다. 그런 큰 경기에서 중요한 건 공 스피드가 아니라 경험과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박찬호는 이때부터 김인식을 감독이 아닌 스승으로 존경하기 시작했다.

2009년 WBC는 해외파 선수들이 대거 빠졌다. 도쿄에서 열린 1라운드 첫 일본전에서 한국은 2-14로 대패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일본 킬러’로 활약한 김광현이 무너져 팀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인터뷰룸에 들어온 김 감독은 “진 것은 아쉽지만 야구는 2-14로 지나, 0-1로 지나 똑같은 1패로 기록될 뿐이다. 다음에 이기면 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틀 후 도쿄에서 다시 열린 한·일전에서 한국은 1-0으로 이겼다. 김인식 감독은 두 번째 일본전 선발 투수로 봉중근을 올렸다. 모두의 예상을 깬 선택이었다. 봉중근은 빠른 공을 던지지는 않지만 제구력이 안정됐고 떨어지는 변화구가 좋다. 김 감독은 상대성을 볼 때 봉중근이 일본 타자들을 잘 막아낼 것으로 생각했다.

이 경기에서 봉중근은 5와 3분의 1이닝 동안 3피안타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일본야구의 심장인 도쿄돔에서 그들의 자존심을 꺾은 그는 ‘봉중근 열사’로 추앙받았다. 봉중근은 3월 18일 2라운드 일본전에서도 선발 등판, 5와 3분의 1이닝 동안 3피안타 1실점으로 호투했다.

인내와 신뢰는 힘의 원천


▎김인식 감독이 제1회 WBC 4강 금자탑을 세운 뒤 그의 리더십이 크게 부각됐다. 서울 영풍문고에서 <김인식 리더십: 야구를 경영하는 감독의 6가지 원칙>을 보고 있는 시민들.
한국대표팀은 두 차례 WBC에서 4강전과 결승전에서 각각 일본에 패했다. 그러나 누구도 김 감독을 패장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조직을 더 강하게 하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보여줬다. 2006년 WBC에서 각종 외신은 ‘김인식 감독은 강인하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다. 2009년 한국을 꺾고 일본의 우승을 이끈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김인식 감독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감독으로서 400패를 당해 보니 뭔가 알겠더라. 실패와 패배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내가 진 이유를 생각하고, 당장의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이기는 길이 보인다. 400패를 당한 감독은 400승쯤 했을 거다.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좋은 지도자가 된다”고 강조했다.

두산 선수였던 정수근은 “우리가 연패에 빠진 때였다. 김인식 감독님이 선수들을 모아놓고 한마디하셨다. 당연히 야단맞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졌다고 고개 숙이지 마. 내일 또 져도 괜찮아’라고 말씀하셨다. 아, 세상에 어느 감독이 내일 또 져도 된다고 하실까. 선수단 분위기가 좋아졌고, 이튿날부터 연승행진이 시작됐다”고 돌이켰다.

김 감독의 리더십은 인내와 신뢰로 상징된다.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시절이었던 91년 신인 김기태를 4번타자로 세웠다. 김기태가 4월 한 달 동안 타율 1할에 그쳤으나 김 감독은 그저 참고 기다렸다. 5월부터 맹타를 터뜨린 김기태는 왼손 타자 역대 최다 홈런(27개·당시 기준)을 기록했다.

OB(현 두산) 감독 시절인 98년의 타이론 우즈도 마찬가지다. 우즈는 변화구만 날아오면 헛스윙했다. 김 감독은 기다렸다. 감독으로부터 신뢰를 받는다는 걸 느낀 우즈는 나쁜 공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스윙은 더 강해졌다. 전반기 18홈런을 때린 우즈는 후반기 24홈런을 날리며 이승엽과의 홈런왕 경쟁에서 이겼다. 훗날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우즈는 “김인식 감독님은 내 은인이다. 지금도 자주 전화를 드린다”라고 말했다.

구성원 모두를 믿을 순 없지만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게 김인식 감독을 상징하는 ‘믿음의 야구’ 요체다. 그의 안목과 인내가 신뢰를 만들고 선수를 성장하도록 돕는다. 일본을 비롯해 프리미어 12에서 만나는 국가들 대부분은 한국보다 시장이 크고, 탄탄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한국 대표팀이 믿을 건 사람뿐이다. 그래서 한국 야구는 김인식을 선택했다. 그의 ‘휴먼볼’은 한국 야구의 국제경쟁력이다.

- 김식 중앙일보 야구전문기자

201511호 (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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