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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공개] <현고기> 번역본으로 드러난 임오년 사도세자 비극의 顚末 

“처분을 ‘무공’으로 생각한 영조, 뒤주 참사 전에도 세자 살해를 시도했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사건을 목격한 관계자 증언 꼼꼼히 채록한 오늘날의 다큐멘터리식 탐사보도… 증언자 신분과 성명을 명확히 밝혀 사건기록으로서 신뢰성에 높은 평가 받아

▎완역돼 12월 중 발간을 앞둔 <현고기(玄皐記)>.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임오화변의 전말과 그의 추존 및 시파·벽파의 대립 등을 기술한 책으로 4권 2책의 필사본이다. 이 책은 영조-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시기의 정치사를 규명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 사진제공·수원화성박물관
광증설이냐, 당쟁희생설이냐? 250년을 끌어온 오랜 논쟁이다. <현고기>는 세자가 의탁했다는 소론 측 문신 박종겸의 기록이며, 의원과 군졸에 이르기까지 그 취재원이 다양하다. 그래서 ‘야사’ 중에선 가장 객관적인 기록이란 평가를 받는다. 최초로 번역돼 12월 중 두 권으로 묶여 출간되는 <현고기>의 핵심내용을 역자가 요약, 소개한다.


▎영조 / 사진·중앙포토


영화 <사도>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되었다. 논란의 쟁점은 세자가 정신병자인가(광증설), 당쟁의 희생양인가(당쟁희생설)이다. 아들이 정신병자라는 이유로 뒤주에 넣어 죽인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근 연구에서 사도세자의 죄목은 반역죄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조는 세자에게 살해 위협을 느끼고 처분을 내린 것이다. 이것이 영화 <사도>의 모티브가 된 정병설 교수의 저작 <권력과 인간>의 설명이다.

당쟁희생설은 1960년대 성낙훈의 <한국당쟁사>, 이은순의 <조선후기당쟁사연구>에서 처음 제기되었으며,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으로 널리 알려졌다. 사도세자는 미치지 않았는데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주장이다. 하기야 당쟁의 프레임으로 조선시대를 보면 모든 사건이 당쟁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상한 일은 따로 있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세자에게 병이 있다고 하였다. 생모 영빈도, 아내 혜경궁도, 아들 정조도 세자에게 병이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 세자도 제 입으로 병이 있다고 하였다. 국가의 공식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왕실의 기록인 <한중록>이 모두 일치한다.

김상로와 홍계희를 사도세자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


▎사도세자 / 사진·중앙포토
신하들도 세자에게 병이 있다고 하였다. 노론계에 속하는 서준보(徐俊輔)의 <시벽원위(時僻源委)>, 남인계에 속하는 박하원(朴夏源)의 <대천록(待闡錄)>, 현장에서 기록을 담당한 승정원 주서이자 역시 남인계에 속하는 이광현(李光鉉)의 <임오일기(壬午日記)> 등 당파를 막론하고 이견이 없다.

그런데도 당쟁희생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사도세자가 미치지 않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한중록>은 노론 측의 기록이니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영화 <사도>가 역사를 왜곡하였다고 비난한다. 대중은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렇다면 사도세자의 편이었다는 소론 측의 기록은 어떨까? 세자가 노론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다면, 세자의 편이었던 소론은 진실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올 12월 중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번역 출간하는 <현고기>는 사도세자에게 우호적이었던 소론 측에서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책이다.

현고기(玄皐記)의 원래 이름은 현구기(玄駒記). 현(玄)과 구(駒)는 육십갑자로 임(壬)과 오(午)에 해당하며, 고(皐)는 5월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고기는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년(1762) 5월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현고기의 저자 박종겸(朴宗謙, 1744~1799)은 본관이 반남(潘南)이다.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소론 가문이다. 박종겸의 조부 박사순(朴師順)은 소론 일부와 남인이 주도한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한동안 금고를 당했다. 혼맥을 살펴봐도 소론으로서의 정체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도세자가 죽었을 때 박종겸은 19세였다. 당시 박종겸의 부친 박함원(朴涵源)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탄하며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기록해뒀다. 1777년(정조 1년) 박함원이 세상을 떠나자 박종겸은 부친의 뜻을 이어 기록을 계속했다.

박종겸은 1785년(정조9)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정언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순조로운 관직생활이었다. 현륭원 조성을 앞둔 1789년 6월 13일, 그는 돌연 ‘역적’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무슨 사건이며 누구를 처벌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말하지 않았으나 사도세자 사건과 그 관련자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했다. 정조가 말하기도 슬픈 일이라며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종겸은 멈추지 않았다. 현륭원의 터를 잡은 9월 5일, 그는 다시 상소를 올렸다. 이번에는 구체적이었다. 김상로(金尙魯)와 홍계희(洪啓禧)를 사도세자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그들은 이미 죽었으니 가산을 몰수하고 처자를 노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렇다 할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관직을 버리고 물러난 박종겸은 사도세자 사건의 진실을 후세에 알리고자 <현고기> 편찬 작업을 계속했다. <현고기>가 완성된 것은 1795년(정조 19년), 정조가 사도세자에게 존호를 올리고 신원을 마무리한 해였다.

“아, 임오년의 일은 천지의 큰 변고이다. 그 일은 당시에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이야기는 오늘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차마 말할 수 없다고 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그 일은 점차 잘못 알려질 것이며, 감히 말할 수 없다고 끝내 말하지 않는다면 의리는 점차 어두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장차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 신민들이 자세히 말하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현고기> 서문)

<현고기>는 원편(原編)과 속편(續編)으로 구성돼 있다. 원편은 박함원의 기록으로 사도세자의 출생부터 정조 즉위 이전까지를 다루었다. 속편은 박종겸의 기록으로 정조 즉위 이후 사건 관계자들이 처벌을 받고 사도세자가 신원되는 과정을 다뤘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사도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세손 정조의 요청에 따라 <승정원일기>에서 사도세자 관련 기록을 모두 삭제했다. 이 때문에 실록을 비롯한 공식 사료에 보이는 사도세자 관련 기록은 불완전하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민간의 기록인 야사(野史)다. 사도세자 사건을 다룬 야사는 저자의 당파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앞서 언급한 <시벽원위>가 노론계, <대천록>과 <임오일기>가 남인계의 입장을 반영한다면, <현고기>는 소론계의 입장을 반영한다.

<현고기>의 내용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현고기>는 주로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이뤄져 있는데, 증언자의 신분과 성명을 명확히 밝혀 신빙성이 높다. 박종겸은 서문에서 세자가 평양에 놀러 간 일처럼 세자에게 불리한 이야기도 그대로 기록했다고 밝혔다. <현고기>가 나름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록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저자의 주장과 별개로 <현고기>의 공정성과 객관성은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고기>의 저자 역시 당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사도세자 사건에 대한 여러 기록의 하나로서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1757년 정성왕후가 승하한 뒤부터 병증 보여


▎영조는 정조의 품의를 받아들여 <승정원일기>에 실린 임오화변 관련 내용을 삭제했다. 왼쪽부터 <대천록(待闡錄)> <읍혈록(泣血錄·한중록)> <궁원의(宮園儀)> 등 사도세자 관련 민간기록이 그 공백을 메운다. / 사진제공·수원화성박물관
사도세자 사건은 당시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어쩌다 남은 기록도 애매모호한 언급으로 일관하여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연구자들의 오독(誤讀)을 초래한 것도 사실이다. <현고기>는 영·정조 정치사 연구에서 간혹 인용되곤 했으나 이러한 한계 때문에 그 내용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현고기>는 비교적 후대에 필사된 것이지만, 필사자가 부기한 주석 덕택에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소론의 관점에서 사도세자 사건을 조명한 <현고기>의 번역본이 12월 중 출간되면 영·정조 정치사의 이해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현고기>의 사도세자에 대한 입장은 대단히 우호적이다. 세자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영특했는지, 얼마나 효심이 지극했는지, 서연(세자의 수업)과 대리청정에서 얼마나 현명한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강조한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온양에 행차하였을 때 보여준 성군의 자질도 소상히 기록했다. 세자의 비행(非行)으로 알려진 사건들 중 일부는 근거 없는 모함이거나 세자를 칭탁한 자들이 벌인 짓이었다며 세자를 변호하기도 한다. <현고기>는 노골적으로 사도세자를 편든다. 그러나 이러한 <현고기>조차도 사도세자에게 광증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부정하지 않는다.

세자는 신료들을 대할 적마다 말이 완곡하였고, 글 뜻을 강론할 적에는 남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으며, 위엄과 동작에 흠이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며 문장에도 익숙하여 성상께서 몹시 사랑하였고, 신민들의 기대도 두터웠다. 그러다가 정성왕후가 승하한 뒤로 좋은 소문이 점차 잦아들었다. 민간의 소문에 따르면 을해옥사 이후로 비로소 병이 생겼는데, 아무 귀신이 빌미가 되었기에 대내에서 야제(野祭), 불공(佛供) 따위를 자주 지내며 재앙을 없애려고 빌었다고 한다.

<현고기>에 따르면 사도세자에게 병이 생긴 것은 1757년 정성왕후가 승하한 뒤부터라고 한다. 정성왕후는 세자의 친모는 아니었지만 친모 못지 않은 지극정성으로 세자를 돌보았다. 그래서인지 정성왕후 발인 때 세자는 눈에 부종이 생길 정도로 통곡했다고 한다.

세자에게 병이 생긴 것은 을해옥사(1755) 이후라는 소문도 있었다. 을해옥사로 죽은 귀신이 빌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세자가 10대 후반부터 20세 초반 사이에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세자의 병이 심해지자 홍계희와 김상로가 일부러 더운 약재를 써서 병을 악화시켰다는 소문도 돌았다.

“춘휘당(春暉堂) 문턱에 아직도 칼자국이 있다”


▎영화 <사도>에서 송강호, 유아인이 각각 연기한 영조(왼쪽)와 사도세자. <현고기>는 사도세자를 두둔하면서도 부자(父子)가 비슷하게 갖고 있던 정신병증이 비극의 원인이 됐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현고기>는 세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중 몇 사람은 세자가 죽인 것이 아니라고 했으나, 세자가 사람을 숱하게 죽인 사실은 인정했다. 이것은 세간의 소문이 아니라 박종겸이 집안사람을 통해 직접 듣고 기록한 것이다. <현고기>에 따르면 세자는 이미 장성하기 전부터 사람을 죽였다.

세자가 평양에 갔을 때 수행한 평양사람 이신(李申)의 증언도 실려 있다. 세자는 갑자기 화가 솟구치면 쇠채찍을 휘둘러 옆에 있던 사람을 빈번이 죽였는데,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다만 세자의 광증은 ‘마치 하늘의 태양이 한창 밝다가 갑자기 구름에 가리는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발작했다고 한다. 세자가 보여준 성군의 자질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원래 미친 사람은 항상 미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미친 짓을 하는 법이다.

세자가 번번이 미행(微行)을 나가 유흥을 즐긴 것도 사실이다. 세자는 동교(東郊)의 환관 마을 뒤에 집을 짓고 유흥을 즐기는 장소로 삼았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평양 미행의 목적도 유흥이었다. 이렇게 되자 무뢰배들이 세자를 빙자하여 강도짓과 겁탈을 일삼았다. <현고기>는 이로 인해 세자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기록했다. 세자가 저지른 짓은 아니지만 세자의 잦은 미행이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광증과 살인, 그리고 잦은 비행은 영조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영조와 세자의 관계가 멀어진 것은 세자가 십대 후반 무렵부터였다. 영조는 신하들 앞에서 세자의 잘못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신하들이 만류할 정도였다. 문소의(영조의 후궁)와 화평옹주(영조의 딸)의 참소 역시 두 사람을 갈라놓는데 기여하였다는 것이 <현고기>의 주장이다.

영조의 편집증도 세자의 증세를 악화시켰다. 영조는 걸핏하면 사소한 일로 세자를 꾸짖었다. 세자가 이 때문에 자살 시도까지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영조와 세자 사이에 여자 문제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일화도 실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기 전에 이미 한 차례 죽이려고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현고기>에 따르면, 시강원 관원이 어느 날 밤 세자의 급한 부름을 받고 달려가보니 세자가 속옷바람으로 계단 아래 서 있었다. 놀라서 무슨 일인지 묻자 세자가 말했다.

“막 취침하려 하는데 성상께서 홀연 창밖에 와서 ‘있느냐’ 하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 장차 일이 생길 줄 알고서 내가 뛰쳐나왔다.”

세자는 영조의 거동에서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 뛰쳐나왔던 것이다. 세자는 궁료에게 “춘휘당(春暉堂) 문턱에 아직도 칼자국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조가 세자를 향해 내리친 칼자국이다. 영조가 세자에게 자결을 명한 날, 세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 해에 신은 칼날에 죽은 혼백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는데, 지금 또 죽으라고 명하시니, 신은 마땅히 죽겠습니다.”

세자도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영조도 정상이라 보기 어렵다. 사도세자 사건은 한마디로 두 미치광이가 빚어낸 비극이었다.

뒤주에 갇혀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세자


▎이길범 화백이 2004년에 그린 정조 어진(御眞). 정조는 조부 영조에게는 정치적 의리를, 부친 사도세자에게는 부자의 의리를 지켜야 하는 살얼음판의 정국을 운영했다. / 사진·중앙포토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처분을 내린 것은 1762년 윤5월 13일의 일이다. <현고기>에 따르면 당시 경희궁에 머무르던 영조는 기우제를 핑계로 세자가 머물고 있는 창덕궁으로 와서는 갑자기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했다.

영조는 처음에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옷을 찢어 목을 매자 세자를 모시는 궁료들이 만류했다. 세자가 다시 허리띠로 목을 매었으나 역시 궁료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자는 이때 한 차례 기절했다. 세자가 깨어나자 영조는 뒤주를 가져오게 했다.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고 명하였으나 시강원과 익위사 관원들이 세자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영조는 화를 내며 군사들을 시켜 관원들을 끌어내게 하였다. 혼란한 와중에 군사들이 세자까지 밖으로 끌어내었다.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영조는 세자를 다시 잡아오라고 하였다. 승지 이이장(李彛章)이 영조를 말리며 자기가 직접 가서 데려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나가기도 전에 세자가 제 발로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세자는 뒤주에 갇히고 말았다.

뒤주에 들어간 세자는 한 차례 발로 차서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영조는 두꺼운 판자를 덧대고 못을 박은 뒤 굵은 밧줄로 묶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궁료들은 안팎을 오가며 정승들에게 세자를 구해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홍봉한, 신만, 정휘량 등 삼정승은 미온적이었다. 다급해진 궁료들은 세손을 데려왔다. 그러나 세손이 들어오는 모습을 본 영조는 급히 세손을 도로 데리고 나가게 했다.

세자가 뒤주에 갇힌 뒤 궁료들은 몰래 뒤주 옆으로 가서 세자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마실 것을 바치기도 하였다. 이를 발견한 영조는 궁료들을 모두 쫓아내고 포도대장 구선복과 군졸 100여 명을 시켜 지키게 했다. 구선복은 뒤주 옆에서 실컷 먹고 마셨으며, 지키던 군졸들도 뒤주에 갇힌 세자를 조롱했다. 구선복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무더운 날씨에 뒤주 속에 갇힌 세자를 괴롭히고자 뒤주가 있는 곳에 풀을 쌓아 더위를 부채질했다.

뒤주에 들어간 세자는 그저 영조가 자신을 혼내려는 것이라 여겼다. 그는 뒤주 속에서 이제 그만해 달라고 빌기도 했으며, 누군가 영조에게 아뢰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영조는 그를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자가 믿고 있던 조재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현고기>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이전부터 여러 차례 조재호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조재호는 끝내 손을 내밀지 않았다. 당쟁희생설의 주요 근거 중 하나는 소론의 영수인 조재호가 세자를 구하려 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소론에 속하는 박종겸조차 조재호가 세자를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을 보면 설득력이 부족하다.

<현고기>는 조재호의 이중적 태도를 낱낱이 폭로했다. 그간 을해옥사는 노론이 소론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고기>에 따르면 소론 완론에 속한 그가 소론 준론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었다. 그런데 준론의 잔당이 자기에게 붙지 않고 노론에게 붙자, 시골로 물러나 다시 틈을 노렸다. 그는 줄곧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으나, 세자가 죽을 때까지 꼼짝도 않다가 자기 집안이 위태로워지자 그제서야 허겁지겁 한양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소론 측 사정에 밝은 저자의 주장이니, 경청할 필요가 있다.

“홍봉한은 사건의 주범 아니다”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융능.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합장능이다. 사도세자는 처음 경기도 양주군의 배봉산에 안장됐지만 정조 즉위 후 지금의 위치로 이장했다. /사진·중앙포토
뒤주에 갇힌 세자는 궁료가 넣어준 부채를 반으로 부수어 소변을 받아 마시며 버텼다. 뒤주를 지키던 이들은 세자가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때때로 뒤주를 흔들어보았다. 8일째 되던 날, 마침내 소리가 들리지 않자 지키던 이들이 영조에게 아뢰었다. 영조는 뒤주에 구멍을 뚫어 살펴보게 하고, 다시 큰 구멍을 뚫고 손을 넣어 만져보게 했다.

세자의 죽음이 확인되자 영조는 그제야 시신을 꺼내 안치하도록 했다. 세자의 시신은 구부정하게 누운 채 한쪽 무릎은 펴지도 못한 상태였다. 세자가 세상을 떠난 것은 20일 신시(申時)였으나, 죽음을 확인하고 시신을 꺼내는 과정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바람에 세자의 기일은 21일로 정해졌다.

<현고기>는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의 증언을 통해 다각도로 조명한다. <현고기>의 기록은 영화 <사도>의 장면과 상당히 비슷하다. 영화 <사도>가 모티브로 삼은 <권력과 인간>이 그만큼 상황을 정확히 재구성했다는 증거다. 아울러 <권력과 인간>이 근거하고 있는 <한중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현고기>는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현고기>에 따르면, 영조와 세자의 거리가 멀어지자 조정은 보호당(保護黨)과 종사당(宗社黨)으로 갈라졌다. 보호당은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종사당은 세자보다 종묘사직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보호당의 주축이 소론계 인사이며, 종사당의 주축이 노론계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완전히 당색으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다. 소론이면서 종사당을 편들거나 노론이면서 보호당의 입장을 견지한 인물도 적지 않다. 사도세자 사건을 바라보는 데 노론 대 소론의 프레임은 적합하지 않다.

당쟁희생설을 주장하는 쪽은 세자의 장인 홍봉한도 노론이므로 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현고기>는 홍봉한을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홍계희 무리는 여러 가지로 흉계를 꾸몄다. 십면에 매복하였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홍봉한은 여기저기 분주하게 다니며 소조(세자)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또 세손이 영특하고 현명하니 다른 근심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홍계희는 홍봉한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비로소 홍봉한을 죽이려고 논의했다. 심지어 홍봉한의 18학사를 죽이기까지 하였다. 모년(1762)의 일로 말하자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나서야 홍봉한이 비로소 뒤따라 갔다. 모년 이후로는 그 당시 사건의 책임을 모두 홍봉한에게 돌려 마치 앞장서서 논의를 주도한 것처럼 만들고는 이를 이용해 벗어나려는 계책으로 삼았다.

홍봉한을 사도세자 사건의 주범으로 만든 것은 진짜 주범인 홍계희였다는 것이다. 홍봉한은 평소 세자의 보호에 힘썼으며, 조재호에게 돕자는 뜻을 전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홍계희에게 위협을 받았다. 세자를 처분하던 날 홍봉한이 우유부단한 처신으로 비극을 막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어째서 홍봉한이 사도세자 사건의 주범으로 몰리게 된 것일까? 그 해답 역시 위에 보인다. 홍봉한은 영조 말년에 사도세자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그를 주범으로 지목한 자들이 다름 아닌 홍계희를 비롯한 노론 남당이다. <현고기>는 홍계희 등이 사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홍봉한을 제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노론 대 소론의 프레임이 해석의 왜곡 불러

뒤주를 가져온 사람이 홍봉한이라는 것도 홍계희 측의 주장이다. <현고기>는 세자가 죽던 날 홍봉한이 동교에 있다가 황급히 들어왔다고 하면서 그가 뒤주를 바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 점은 <한중록>의 기술과 일치한다.

당쟁희생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홍봉한을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한중록> 때문이다. <한중록>이 당쟁희생설을 반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자 홍봉한을 주범으로 지목하여 그의 딸 혜경궁이 편찬한 <한중록>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노론의 시각에서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한중록>의 내용은 소론측의 기록인 <현고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고기>는 시종일관 홍봉한에게 우호적이며, 사건의 주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현고기>가 지목한 사도세자 사건의 주범은 김상로와 홍계희다. 이밖에 정휘량, 신만, 문소의, 화완옹주도 갖은 방법으로 세자를 모함한 공범이라고 했다. <현고기>는 세자가 이들과 갈등을 빚는 모습을 자세히 묘사했다. 세자는 특히 홍계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세자궁의 하인이 홍계희를 칭찬하고 다니자 세자는 곤장을 쳐서 그를 죽였다.

김상로와 홍계희의 당색을 굳이 따지자면 노론이다. 그렇다면 사도세자 사건의 주범은 역시 노론인가. 하지만 이들은 입장을 자주 바꾸어 노론에서도 배척받은 인물들이다. 김상로는 세자와 대립하다가 세자 편에 붙고, 다시 세자와 반목했다.

홍계희로 말하자면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노론의 정신적 지주,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자처했으나 정작 이재의 문인들에게는 배척받았다. 실록에 따르면 소론인 조현명, 송인명 등에게 붙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상로와 홍계희는 노론 중에서도 주변인이었던 셈이다.

정휘량은 화완옹주의 처숙부로 소론이며, 신만은 화협옹주의 시아버지로 노론이다.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당파가 아니라 왕실의 인척이라는 점이다. 사건 관련자들은 당파나 계파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중요시했다. 이들은 당파와 계파를 넘나들며 이합집산했다.

당쟁희생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세자가 노론에 의해 희생되었다면서도 노론의 주장을 답습하여 홍봉한을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사도세자 사건을 노론 대 소론의 프레임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이러한 모순을 야기한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사도세자 사건을 바라보는 데 노론 대 소론의 프레임은 적합하지 않다.

<현고기>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뒤주에 들어간 지 9일 만에 죽었다. 영조는 7일째 되던 날 개선가를 연주하며 먼저 경희궁으로 돌아갔다. 개선가는 역적을 처단하고 개선할 때 연주하는 음악이다. 영조는 세자를 처단하면서 세자를 폐위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세자가 죽은 뒤 다시 세자로 회복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현고기>에 따르면 영조는 삼년상이 끝날 무렵 대궐 서쪽에 세자를 위한 사당을 짓게 했다. 그런데 완성된 사당을 본 영조는 규모가 크다며 줄이라고 했다. 규모를 줄였더니 이번에는 동쪽으로 옮겨 지으라 했다. 사당에 신위를 봉안할 날이 며칠 남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간신히 날짜에 맞춰 옮겨지었지만, 사당 문이 좁아서 신위를 실은 가마가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가마의 가로목을 제거하고서야 간신히 들어갔다. 구차한 광경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처분한 일이 나라를 중흥한 공로에 버금간다고 여기며 존호(尊號)를 받고자 했다. 존호는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국왕에게 올리는 명칭이다. 영조는 내심 역적을 처단한 임금에게 올리는 ‘무(武)’자가 들어 있는 존호를 받고자 했다는 것이 <현고기>의 주장이다. 차마 그럴 수 없었던 신하들은 다른 존호를 올렸으나 영조는 신하들이 마음에 드는 존호를 올릴 때까지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현고기> 내용으로 보건대,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사도세자 처분하고 ‘존호’를 받은 영조

<현고기>는 정조가 즉위한 뒤 사도세자에 대한 기억을 조작하는 과정도 여실히 보여준다. 영조가 세자를 죽인 뒤 후회하며 남겼다고 알려진 ‘금등지사’는 이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도세자가 죽은 지 31년 만인 1793년(정조17) 8월 9일, 정조는 금등지사의 내용을 공개했다. 영조가 도승지 채제공을 시켜 사도세자 신위 아래에 숨겨놓게 하였다는 것이 정조의 주장이다. 금등지사의 내용은 영조가 세자를 죽인 뒤 후회하였다는 증거가 되기 충분했다. 사도세자의 신원은 이를 계기로 가속화되었다. 결국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에게 존호를 올리고 신원을 마무리한다. 박종겸의 기록은 여기서 끝이다.

과연 금등지사는 진짜일까? <현고기>는 금등지사의 진위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정조 역시 사도세자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후회하지 않았고 아무도 화해하지 않았다. 이것이 영화 <사도>가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이다.

당쟁이라는 프레임으로 조선시대를 보면 모든 사건은 당쟁의 산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당쟁은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정조 시대의 당파는 노론과 소론만이 아니다. 남인과 소북이라는 변수도 있다. 당내에는 수많은 계파가 있다. 노론의 남당과 북당은 서로를 원수로 여겼으며, 소론도 준론과 완론이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계파간의 대립은 때로 당파간의 대립보다 치열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계파 내에서도 각 개인의 정치적 성향도 제각각이다. 개인의 정치적 입장은 계파나 당파의 정치적 입장과 다를 수 있으며, 개인의 이익이 계파나 당파의 이익보다 우선시되기도 한다. 노론과 소론이 영조와 세자 편으로 나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조선의 정치 세력은 당파만이 아니다. 외척도 정치 지형의 변동에 가세한다. 이들 역시 단일한 정치 집단이 아니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와 정순왕후의 친정 경주 김씨는 같은 외척이었으나 상극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 영조와 사도세자의 독특한 성격도 고려해야 한다.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한둘이 아니다. 당파와 계파의 대립, 개인의 정치적 입장, 자연 현상, 외교적 환경, 민심의 동향, 이처럼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여 때로 의외의 결과를 빚어내는 것이 정치다. 따라서 정치는 예측하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렵다. 정치는 복잡하다. 노론 대 소론의 단순한 이분법적인 편가르기로는 조선후기 정치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복잡한 현상을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선과 악, 아군과 적군, 진보와 보수, 종북과 애국, 그리고 예수천국과 불신지옥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이분법이 난무한다. 어째서일까? 이분법적 편가르기가 가져다주는 효과 때문이다.

상대를 배제하고 부정하는 이분법적 편 가르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다. 그것은 선동의 수단이자 이익을 독점하기 위한 논리다. 이분법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건 이분법적 편가르기를 일삼는 자들이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현고기>의 첫 번역을 통해서 본 사도세자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이분법적 편가르기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실존적 인물들의 진실이 숨어 있다.

-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장유승 - 성균관대 한문학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거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다. 한문 문헌의 번역과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영조 승정원일기>(공역), <정조어찰첩>(공역) 등 20여 책의 한문 문헌을 번역했다.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으로 한국출판문화상 편집상, <동아시아의 문헌교류>(공저)로 한국출판학술상 우수상을 받았다.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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