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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⑫] 이스라엘 예루살렘|역사를 잊어야 평화 이루는 역사적 도시 

감람산 위에 올라 황금돔 모스크의 위용에 취하다 

글·사진 김재명 국제분쟁전문기자, 성공회대 겸임교수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등 3대 종교의 주요 성지… 텔아비브에선 놀고(play), 예루살렘에선 기도하는(pray) 삶을 영위하는 시민들

▎댄스 파티를 즐기고 있는 예루살렘 시민. 종교와 민족적 색채가 강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세속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세속적인 유대인에게 유대교 랍비가 거리를 활보하는 예루살렘은 숨막히는 도시다. 그 출구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텔아비브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많은 시민들이 저녁이면 차를 몰고 아예 텔아비브로 간다. 성과 속, 일상의 사랑과 민족적 증오가 교차하는 곳. 정복과 피지배가 남긴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들 때, 신과 인간은 다시 화해할 것이다.

예루살렘은 역사의 숨결을 지닌 도시다. 타임머신을 타고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도시에 내리면, 그때도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오랜 세월 예루살렘을 거쳐간 사람들은 저마다 영광 또는 오욕의 순간을 겪었다. 어떤 순간은 자랑스러운 대서사시가 됐고, 다른 어떤 순간은 참담한 비극으로 기록된다. 예루살렘은 정복과 피지배가 되풀이됐던 유혈과 폭력의 도시다. ‘평화의 도시’와는 거리가 멀다. 21세기 지금의 승자는 유대인, 패자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이슬람교 성지인 황금돔 사원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이슬람교도 구역의 중심부다. 모스크 바로 밑의 높다란 돌담이 유대인 성지인 ‘ 통곡의 벽’이다.
인구나 면적으로만 볼 때 예루살렘을 가리켜 세계적인 대도시라고 말하긴 어렵다. 면적은 125㎢, 인구는 90만 명으로, 서울(면적 605㎢, 인구 1천10만)에 견주면 넓이는 5분의 1, 인구는 10분의 1도 채 안 된다. 한국으로 치면 그저 지방 중도도시 수준이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세계적인 도시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이곳이 역사와 종교의 무게감을 지닌 도시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고급종교(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주요 성지다. 예루살렘 시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유대인에게는 유대민족주의의 뿌리이고, 기독교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현장이며, 무슬림(이슬람교도)에게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을 때 이곳에서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제3의 성지다.

예루살렘은 종교와 신화가 서린 도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저마다 예루살렘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선지자와 예언자,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들은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자리한 신전에서 그들이 믿는 절대자에게 경배를 드렸다. 문제는 예루살렘의 지배자가 누구냐였다. 정복자는 피지배자의 신전을 허물고, 그 폐허 위에 그들이 믿는 신을 모시는 새로운 성전을 세웠다. 피지배자는 허물어진 신전을 복원하기 위해 복수를 맹세했고, 피가 피를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11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무려 8차에 걸쳐 벌어졌던 십자군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예루살렘은 분쟁의 도시였다. 아랍 연합군-이스라엘 사이의 제1차 중동전쟁(1948년)이 끝났을 때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은 트란스요르단(지금의 요르단)이 각각 나누어 차지했었다. 그로부터 19년 뒤인 1967년, 이스라엘이 이웃 국가인 이집트와 시리아를 기습 공격해 6일 만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른바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차지했다. 역사의 도시 예루살렘 전체가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잇단 전쟁에서 모두 진 아랍인은 이스라엘 군인이 총을 들고 지켜보는 살벌한 분위기 아래, 때로는 군홧발에 엉덩이를 차이는 수모를 당하면서 예배를 드린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예루살렘에서 저 유대인을 내몰고 자유를 되찾고 싶다는 생각을 곱씹는다. 예루살렘은 그렇듯이 현재진행형인 분쟁의 도시다.

영감 불러일으키는 올리브산 언덕


▎예루살렘 구 시가지 골목길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시민들. 느긋한 분위기 때문에 이곳이 현재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도시란 느낌을 받지 못한다.
역사와 종교의 도시 예루살렘에 산다는 특권을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장소 하나만 꼽으라면, 올리브산(감람산) 언덕이다. 유대인이나 아랍인 가릴 것 없이 많은 예루살렘 시민이 돈 문제나 이성과의 애정 문제, 직장 문제 등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혼자 조용히 찾아가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올리브산 언덕에 올라 아무데나 걸터앉으면, 동예루살렘 성곽은 물론 서예루살렘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다.

특히 저녁 해가 질 무렵 이곳에 혼자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철학자나 시인이 된다. 동예루살렘의 랜드마크인 황금돔 모스크의 지붕이 저녁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정지된 느낌조차 든다. 그곳은 나무가 별로 없는 언덕이라 맞바람이 세차다.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겉옷도 바람에 흔들린다. 1시간쯤 앉아 있다 보면 여름철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다. 그렇게 체온이 내려갈 무렵이면, 일상사의 스트레스로 복잡해졌던 머리는 차분해지고 생각도 정리되기 마련이다.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 시가지를 한눈에 굽어보는 지형이다. 날씨가 맑은 날에 그곳을 오르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멀리 사해를 비롯한 요르단 강 주변 지역까지 보인다. 예루살렘 자체가 이스라엘에서는 고지에 속한다. 해발 800m의 언덕 위에 도시가 세워졌고, 도시 주변을 또 다른 언덕이 둘러싼 형세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아랍인은 예로부터 “마지막 언덕을 넘기 전까지 예루살렘을 볼 수가 없다”는 말을 전했다. <구약성서> 시편도 “산이 예루살렘을 감싸주듯 야훼(유대교의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영원히 감싸주시리라”라고 읊고 있다.

종교적으로도 올리브 산은 매우 뜻 깊은 곳이다. 2천 년 전에 예수가 예리코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그곳을 거쳐갔다. 올리브 언덕에서 예루살렘 성곽을 바라보면서 예수는 그곳 사람을 어찌 구원의 길로 이끌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예수 눈물 교회’라는 이름의 오랜 교회가 올리브 산에 들어선 것도 그런 역사적 배경을 지닌다.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죽음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을 기록한 <신약성서> 속의 게세마니 동산도 바로 이곳 가까이 있다. <사도행전> 1장에 따르면, 예수가 죽을 때 올리브 산을 거쳐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기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어느 누구라도 올리브 산 언덕에 서면, 2천 년 전 고난의 길을 걸어갔던 한 위대한 인물을 떠올린다. 그의 삶과 죽음에 얽힌 의미를 곰곰 씹어보며 지금 자신의 문제를 차분하게 바라보게 된다. 바로 그렇기에 유대인이나 아랍인 가릴 것 없이 머리가 복잡한 예루살렘 시민들은 혼자 이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예수의 발자취가 서린 올리브 언덕에 서면, 종교적 의미와는 별개로 삶과 죽음의 문제에 그 나름의 영감을 주는 또 다른 구조물이 발 아래로 보인다. 반듯하게 자른 대리석으로 지어진 수천 구의 무덤이 올리브 산 기슭에서 동예루살렘 성벽 가까이로 뻗어 있다. 그 대부분은 유대인의 오래된 무덤이다. 예부터 많은 유대인은 죽어서도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곳에 묻히길 바랐다. 해질 무렵 그 석조 무덤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 시민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모처럼 바람을 쐬러 그곳을 찾은 아랍인은 고개를 들어 올리브 산 꼭대기 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곳 전망대엔 이스라엘 대형 국기가 휘날리고 있고, 그걸 바라보는 순간 차가워졌던 머리는 다시 열을 받기 십상인 탓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 서울 남산에 올랐다가, 그곳에서 휘날리는 일장기가 보이는 바람에 모처럼 산뜻해진 기분을 망쳤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다.

텔아비브는 21세기의 소돔과 고모라


▎올리브 산(감람산) 위에서 바라본 동예루살렘 전경. 사진 아래쪽에 유대인들이 묻혀 있는 오래된 공동묘지가 보인다.
인구만을 놓고 볼 때 이스라엘 제1도시는 예루살렘이고 제2도시는 지중해변의 텔아비브(인구 40만)다.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견줄 때 이곳 유대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텔아비브에선 놀고(play) 예루살렘에선 기도한다(pray).” 우리 인간이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임을 잘 보여주는 곳이 텔아비브다. 중동의 라스 베이거스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온갖 유흥으로 흥청대는 환락의 도시다. 여인들은 시내 서쪽 지중해변의 널찍한 백사장에서 맨 가슴을 드러낸 채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긴다. 어스름한 저녁이면 수영복을 벗어 던진 남녀 연인의 노골적인 정사신이 목격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성에 관한 한 매우 개방적인 나라다. 근엄한 유대교 성직자에겐 물론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예루살렘의 밤이 어두운 편이라면 텔아비브의 밤은 다르다.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의 네온사인이 곳곳에서 빛난다. 이른바 물 좋다고 입소문이 난 나이트클럽은 발 디딜 틈이 없다. 동성애자만 모이는 나이트클럽도 여러 개 성업 중인 곳이 텔아비브다. 젊은이들은 밤새 술을 마시고 춤추며 놀다가 새벽 5시나 돼야 집으로 돌아간다. 대마초도 쉽게 구할 수 있고 ‘에스콧’이란 이름 아래 창녀들도 득실댄다. 그곳 환락가의 시계는 밤 12시에서 멈추지 않는다. 밤이 깊어갈수록 귀청을 울리는 록음악의 주파수는 더 높아진다.

예루살렘의 경건한 유대교 성직자의 잣대로 본다면, 텔아비브는 21세기의 소돔과 고모라다. 물론 텔아비브 시민 모두가 이런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진 않을 것이다. 서울만 해도 큰 도시의 다양함을 지니지 않는가. 이태원과 압구정동, 홍대앞만 둘러보고 서울이 모두 어떻다고 잘라 말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에도 이른바 나이트 라이프(night life)라는 것이 없지는 않다. 나이트클럽도 있고 카페나바(bar)라는 이름의 술집도 있다. 시내 중심가의 바는 12시나 1시면 대충 문을 닫는다. 하지만 일부 업소는 밤늦게까지 손님을 받는다. ‘벨 우드’, ‘바르드’, ‘토이’, ‘우간다’ 같은 바는 신용카드 하나만 들고 잘 논다는 예루살렘 멋쟁이가 드나드는 곳이다. 유대인 친구의 초대를 받아 ‘벨 우드’에 가보니 분위기가 뜨겁다. 한쪽 벽면에 붙은 대형 스크린에선 가수 비욘세의 화려한 율동이 눈을 사로잡고, 사람들은 그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댄다. 주변을 둘러보며 은근한 눈맞춤을 즐긴다. 이른바 ‘원 나잇 스탠드’가 이뤄지려는 순간이다.

하지만 텔아비브의 열기나 환락을 예루살렘에서 쉽게 찾아보기는 어렵다. 어딜 가나 나이트클럽이 흔한 텔아비브와는 달리 신시가지를 찾아가야 보이고 은밀하기까지 하다. 매니아가 알아서 가는 곳이지 지나가다가 기웃거릴 만한 곳에 자리 잡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노는 물도 조금은 다르다. 텔아비브가 노는 데 거칠 것이 없다면, 예루살렘에선 자기 돈 내고 노는데도 어딘지 눈치를 보고 조심스럽다. 텔아비브가 좋게 말해 리버럴한 현대도시라면, 예루살렘은 차분하고 예스런 문화의 도시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환락과는 거리를 두게 할까. 그 중심엔 역시 종교와 역사의 무게가 자리 잡는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예루살렘을 신성한 종교의 도시라고 일컫지만 예루살렘 시민 모두가 종교적 신성이 몸에 배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흔히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을 유대인 국가라 여기지만, 이스라엘 시민 모두가 유대교를 아주 열심히 믿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에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정부 예산으로 후원금을 지급하는 종교가 모두 14개에 이른다.(유대교·이슬람교·드루즈·바하이, 그리고 10개의 다양한 기독교 종파) 머릿수에서 다수인 유대교는 14개 종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물론 다수는 유대인이 믿는 유대종교다.(이스라엘 정부의 공식 통계로는 유대교도 75.6%, 무슬림 16.9%, 기독교도 2%, 드루즈 1.7%, 기타 3.8%) 이스라엘 법에는 유대교가 ‘국교’로 지정돼 있지 않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유대교가 이스라엘의 국교로 통한다. 유대교의 종교적 축일은 이스라엘의 국경일로 지정돼 있다. 이스라엘 인구의 25%를 차지하는 아랍계가 주로 믿는 이슬람교의 주요 축일은 국경절로 지정돼 있지 않다.

여기서 유대인과 유대교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통계를 보면 유대인 가운데 그 스스로를 ‘종교적’이라 여기는 사람은 17%에 지나지 않는다. 80%가 넘는 절대 다수는 생활 속에서 유대교 전통 관습을 따르긴 하지만 토요일에 반드시 유대교 회당(시너고그)에서 밤새 기도를 드리진 않는다. 특히 5% 정도의 유대인 가운데 상당수는 유대교에 적대감마저 품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이 흔히 말하는 ‘세속적인’ 유대인이다.

세속적 예루살렘 시민은 유대종교의 엄격함에 불만


▎예루살렘의 엄격한 생활과 권태감은 인접 도시 텔아비브의 ‘해방구’에서 풀 수 있다. 텔아비브 올드 자파(Old Jaffa) 지역에서 댄스 쇼가 공연되는 모습.
예루살렘 시민 가운데에도 세속적인 사람이 많다. 이들은 유대종교가 휴일인 토요일에 예루살렘의 대형 쇼핑센터 문을 닫도록 하는 국가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자신의 일상생활이 유대종교 때문에 제약을 받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유대교적인 관습은 마치 우리 한국인이 유교적 관습을 생활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세속적인 유대인도 이스라엘이 유대교와는 상관없이 유대 민족국가로 정체성을 이어나가길 바라는 시오니즘(Zionism)에는 대체적으로 강한 지지를 보낸다. 통계적으로 유대인 10명 가운데 8명은 아랍인과 섞여 사는 이른바 ‘다민족(multi-ethnic)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바라지 않는다.

세속적인 유대인의 눈길로 보면, 유대교 랍비(성직자)가 거리를 활보하는 예루살렘은 숨이 막히는 도시로 비쳐지기 마련이다. 이들의 출구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 텔아비브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텔아비브는 놀고 먹고 마시고 춤추며 즐기기엔 그야말로 파라다이스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많은 시민이 저녁이면 차를 몰고 아예 텔아비브로 이동한다. 욕망의 배출구를 찾아나서는 예루살렘 시민의 차량 행렬로 주말 저녁이면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로 향하는 국도가 붐빈다.

누가 예루살렘을 차지할 것인가


▎이스라엘 정부가 동예루살렘 지역에 건설 중인 뉴타운. 예루살렘 전체를 이스라엘 영토로 삼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예루살렘 지역은 크게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으로 나뉜다. 예루살렘을 가리켜 ‘역사의 도시’라 하는 것은 동예루살렘을 두고 하는 말이다. 구시가지와 성곽으로 이어지는 동예루살렘 거리를 걷다 보면 곳곳에 얽힌 옛이야기가 엄청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 종일 들어도 끝이 없는 이야기가 쌓여 있는 곳이다. 높이 10m의 높다란 성벽을 이루는 벽돌 하나하나마다 무엇인가에 얽힌 역사의 말없는 증언이 녹아 있다.

면적이 0.9㎢로 가로 둘레 4km, 높이 12m의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동예루살렘 성곽 안은 크게 4구역으로 나뉘어진다. 유대인 구역, 기독교도 구역, 아르메니아인 구역, 그리고 이슬람교도 구역이다. 이슬람교의 성지인 바위돔 사원(황금돔 사원)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이슬람교도 구역의 중심부다. 모스크 바로 밑의 높다란 돌담이 유대인의 성지인 ‘통곡의 벽’이다. 서기 1세기 무렵, 3차에 걸친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로마군은 유대교 성전을 철저히 파괴했고, 그 터 위에 서기 7~8세기에 이슬람 사원들이 세워졌다. 유대인들로선 통곡할 만한 역사의 기억을 지운 것은 1967년이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동예루살렘 성곽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통곡의 벽 주변의 집을 모두 헐어내고 널찍한 광장을 만들었다. 승자의 특권이라면 특권인 셈이다.

예루살렘의 8개 성문 가운데 가장 크고 잘 보존된 것이 동예루살렘 구시가지 북쪽문인 다마스쿠스 문이다. 멀리 시리아 다마스쿠스 쪽을 바라본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따르면, 기독교도로 개종해 사도 바울로 거듭나기 전 사울(사도 바울의 전 이름)은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다마스쿠스 문을 지나 다녔다. 바로 가까이에 시장과 시외버스터미널이 자리 잡고 있기에, 오늘날 팔레스타인 아랍계 사람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문이다.

이스라엘이 1948년 독립을 선언할 당시 행정수도는 텔아비브였으나, 1950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서예루살렘)을 수도로 삼는다고 선포했다. 이스라엘의 주요 국가기관, 이를테면 ‘크네세트(Knesset)’란 이름의 의회, 대법원, 대통령궁, 그리고 정부 주요 기관이 모두 예루살렘에 집중돼 있다.

국제사회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는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 <결의안 181>는 예루살렘을 ‘유엔 신탁통치 아래 두는 국제도시’로 선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을 비롯,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맺은 대부분의 국가가 예루살렘이 아닌 텔아비브에 대사관을 두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스라엘의 최대동맹국인 미국의 대사관조차 텔아비브에 있다. 일부 국가가 예루살렘에 대사관을 두고 있지만, 그 장소는 서예루살렘 중심부가 아닌 메바세레트 시온 같은 도시 변두리 지역이다.

이스라엘의 강경파 정치인들은 “예루살렘은 결코 분할되거나 공유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라고 주장한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기회 있을 때마다 공개적으로 그런 발언을 해왔다. 그는 “통합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다. 예루살렘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우리의 것이고, 결코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동예루살렘을 아랍어로 ‘알 쿠즈’라 부른다. 앞으로 언젠가는 세워질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가 바로 알 쿠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되길 전혀 바라지 않는다. 많은 유대인은 “예루살렘은 영원히 이스라엘의 중심도시로 남아야 한다”는 믿음을 지녔다. 따라서 지금처럼 도시 전체가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는 2009년 ‘예루살렘의 경계를 변경하기 위해서는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규정을 담은 법률을 통과시켰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에 영원히 묶어두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팔레스타인 쪽에서 동예루살렘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에게도 동예루살렘은 목숨처럼 소중한 곳이다. 역사의 도시 예루살렘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둘러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동예루살렘 일대 뉴타운에 절망하는 사람들

2015년 현재 예루살렘 인구는 약 90만 명. 이 가운데 63%가 유대인이고 37%가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이다. 큰 그림으로 보면 유대인 6 대 아랍인 4로 유대인이 머릿수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주거민 수는 동예루살렘 쪽이 더 많다. 서예루살렘 주거민은 40만 명을 약간 밑돌고 동예루살렘은 50만 명을 약간 웃돈다. 서예루살렘은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동예루살렘은 아랍인 6 대 4 비율로 유대인보다 많이 산다. 문제는 이스라엘 정부가 동예루살렘의 아랍인 비율을 줄이기 위해 아랍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여러 가지 정책, 이를테면 강제철거, 주택신축 불허 등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아랍인의 비율이 줄어드는 흐름이다. 아랍인의 높은 출산율도 이스라엘 정부의 ‘동예루살렘 점령정책’을 이겨내지 못하는 모습이다.

동예루살렘의 인구지도에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 이른바 뉴타운이란 이름 아래 동예루살렘 주변을 삥 둘러싸고 세워지는 대규모 아파트단지다. 이름이 뉴타운이지, 팔레스타인 사람의 눈에는 유대인 정착촌이나 다름없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유대인 정착촌은 사실상 팔레스타인 영토 안에 파고든 이스라엘 식민지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지도를 펴보면, 유대인 정착촌은 무수한 점처럼 곳곳에 터를 잡은 모습이다. 서안지구 50만 유대인 정착민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 요인 중 하나이며, 중동평화를 가로막은 암초와 같은 존재로 꼽힌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팔레스타인 사람이 언젠가 들어설 독립국가의 수도로 꼽아온 동예루살렘 일대에 들어서는 뉴타운이다.

이미 동예루살렘 주변은 유대인 뉴타운으로 포위된 상태다. 북쪽의 기바트 제브와 네베 야아콘, 동쪽은 마알레 아두민과 미쇼르 아두민, 남쪽은 베타르와 구쉬 에치온 뉴타운이 자리 잡았다. 현재 20만여 명이 입주했고, 뉴타운 건설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중동지역 취재를 갈 때마다 동예루살렘 동쪽의 스카이라인이 바뀌는 것을 보아야 했다. 동예루살렘을 포위하듯 삥 둘러싼 이들 대규모 뉴타운은 이스라엘 정부가 금융지원(건설사엔 건설비 융자, 입주자에겐 낮은 이자율의 주택자금 대부)으로 밀어붙인 결과다.

이스라엘 정부가 동예루살렘 너머 동쪽에 꾸준히 대규모 유대인 뉴타운 건설 프로젝트를 밀어붙이는 까닭은 뻔하다. 예루살렘 전체를 이스라엘 영토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들 뉴타운은 “언제가 들어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도로는 동예루살렘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여겨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동예루살렘을 포위하듯이 들어서는 뉴타운을 바라볼 때마다 깊은 좌절감과 분노를 느끼기 마련이다.

하늘에서 본 예루살렘의 모습은 동과 서가 크게 차이가 난다. 서예루살렘엔 현대적인 고층 빌딩과 고급 아파트가 보이지만, 동예루살렘 주거지엔 작은 단독주택이 다수를 이룬다. 서예루살렘이 부자와 중산층의 거주지라면, 동예루살렘은 기껏해야 중산층 또는 빈민이 살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예루살렘 시민이라고 다 같은 시민이 아니다. 아랍인은 스스로 “우리는 2등 시민”이라고 자조적인 푸념을 한다. 남녀 모두 병역의무를 지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200만 아랍계는 군에 안 가는 대신 억압적 차별구도 아래 2등 시민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동예루살렘 다마스쿠스 문 앞의 작은 광장 돌계단에 앉아 쉬는 한 무리의 청년을 만났다. 이들을 아랍어로는 ‘셰바브(젊은이)’라 부른다. 이스라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셰바브가 털어놓은 한결같은 고민은 ‘이스라엘인도 아닌, 그렇다고 법적으로 팔레스타인 인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에서 오는 불이익’이었다.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어렵사리 취업을 한다 해도 똑같은 일을 하는 유대인 입사동기와 갈수록 임금 차이가 벌어지고 승진에서도 차별을 받는다. 아랍계 젊은이가 제아무리 똑똑하고 열심히 일해도 이른바 이스라엘 주류사회에 진입하기는 어렵다. 그날 만난 셰바브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공정하지 못한 현실을 어쩌지 못해 답답해 하는 모습이었다.

‘평화의 도시’는 꿈에 불과한가

이스라엘 시민권을 지닌 아랍계 예루살렘 시민으로 하여금 정체성에 더욱 깊은 회의를 느끼도록 만드는 계절이 있다. 바로 봄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독립국가임을 선포한 뒤 곧이어 벌어진 팔레스타인 토착민과 주변 아랍국과의 전쟁(제1차 중동전쟁)에서 이겼다. 거꾸로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5월은 치욕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랍어로 ‘나크바(Nakba, 대재앙)’의 날로 부를 정도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대규모 시가행진을 마련한다. 이 시가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곳곳에서 학생과 유대인 정착민이 단체로 버스를 타고 몰려온다. 그런 까닭에 예루살렘 시내는 하루 종일 들뜬 분위기다.

독립기념일의 하이라이트는 동예루살렘 옛 시가지에 자리 잡은 ‘통곡의 벽’ 광장에서 벌이는 야간 행사다.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유대인이 다마스쿠스 문 앞에 몰려든다. 그들은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고 춤춘다. 이들 가운데 자동소총을 어깨에 맨 정착민도 끼어 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의 마음은 불편하기 마련이다. 현지인의 따가운 눈길도 아랑곳없이 유대인은 노래와 춤으로서 승리자, 점령자로서의 기분을 한껏 즐길 뿐이다.

2000년대 전반기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티파다’(intifada: 우리말로는 ‘봉기’ 또는 ‘저항’) 과정에서 예루살렘도 폭력과 유혈을 겪었다. 아랍계 버스 운전기사가 유대인을 향해 차를 몰아 사상자를 내거나, 잇단 자살폭탄 공격으로 예루살렘 시가지를 피로 물들이곤 했다. 그런 뒤 한동안 그런대로 불안 속의 평화를 이어왔지만, 요즘 들어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다시 험악해졌다. 아랍계 청년들이 유대인을 공격하고 이스라엘군이 대응사격을 함으로써 사상자를 내는 상황이다. 이스라엘 정치권에선 동예루살렘 주민에게 주어진 ‘영주권’을 박탈하고 모두 밖으로 내몰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20세기 전반기에 우리 한민족이 독립을 꿈꾸었듯, 21세기 전반기에 독립국가를 이루고 유엔에 19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것이 팔레스타인 사람의 꿈이다. 문제는 그 꿈이 이뤄지려면 넘어야 할 높은 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가장 높은 장벽은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이 땅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믿음일 것이다. 대다수 유대인은 중동 평화의 기본 방향이라 할 ‘땅과 평화의 교환’(팔레스타인에게 독립국가의 물리적 토대인 땅을 돌려주고 이스라엘은 평화를 얻는 구도)을 반대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폭력적인 저항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예루살렘이 ‘분쟁의 도시’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예루살렘을 ‘평화의 도시’로 바꾸려면 그곳에서 유혈사태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적극적 평화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세 가지 변화가 따라야 한다. 첫째,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인정하는 평화지향적 온건정권이 들어서야 한다. 둘째, 팔레스타인에 대표성을 지닌 평화지향적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 셋째, 미국 중동정책이 친이스라엘 일방주의에서 비껴나고 보다 중도적인 정권이 워싱턴에 들어서야 한다. 안타깝게도 세 가지 가능성이 동시에 충족될 확률은 현재로선 매우 낮아 보인다.

김재명 - 국제분쟁전문기자로 중동, 동남아, 아프리카, 중남미, 발칸반도 등의 분쟁현장을 취재 보도해왔다. 서울대 철학과, 뉴욕시립대 정치학 박사과정을 마친 뒤 국민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레시안> 기획위원, 성공회대 겸임교수로 국제분쟁, 국제기구, 중동정치를 강의 중이다. 저서로 <오늘의 세계분쟁>(2015년 개정판),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2015년 개정판) 등이 있다.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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