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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인류의 영원한 낭만 

낙관적 인간심리의 요람, 몽마르트르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혁명, 동족상잔의 내전, 사람들에게 꿈을 안겨준 예술이 상존하는 극(極)과 극(劇)의 공간… 억눌린 공포로부터 한순간에 발산되는 해방감이 빚은 예술의 전당

▎2015년 초겨울의 물랭루주 주변 거리. 어수선한 파리의 분위기가 물랭루주에서도 물씬 묻어난다.
1년 만의 파리다. 도시 전체가 불타고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난민 행렬로 도심 곳곳이 엉망진창이란 의미다. 지난해에도 간헐적으로 볼 수는 있었지만, 한층 더 많아진 느낌이다. 사람이 모일 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흑인, 중동인들로 채워져 있다. 공원·역·교회·지하철·시장… 어딜 가도 난민들이다. 도심 외곽에는 아예 침대와 샤워 시설을 갖춘 대형버스가 늘어서 있다. 난민들을 위한 이동식 보금자리다. 동유럽에서 온 사람들로, 캠핑하듯 버스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살아간다. 이민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생활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필자의 눈에는 파리 나아가 유럽 전체가 카오스다.

19세기 식민지의 유산이 21세기 유럽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남의 나라를 힘으로 눌렀던 역사의 상흔이 런던·베를린·파리·로마·마드리드에 밀어닥치고 있다. 11월 14일 발생한 파리 유혈 테러는 바로 유럽에 닥친 차가운 현실을 증명한 것이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살벌한 숙명이 파리에 이어, 런던·로마·베를린을 엄습할 듯하다.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역사와 종교의 모순이 21세기 유럽을 뒤흔들고 있다.


▎몽마르트르 언덕 위에 위치한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1919년 완공됐다. / 사진·유민호
코스모스(Cosmos, 질서)의 가치는 카오스(Chaos, 혼돈) 속에서 더 한층 빛난다. 테러리스트는 물론 유럽의 난민이 몰려온다고 해서 파리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2015년 초겨울의 파리를 찾은 가장 큰 이유는 몽마르트르(Montmartre)다. 흔히들 몽마르트르라 하면, 언덕 위에 늘어선 수많은 예술가를 연상할 듯하다. 감미로운 샹송이 깔리고 춤과 와인이 넘치는 낭만으로서의 몽마르트르다.

그러나, 시심(詩心)을 자극할 듯한 그 같은 이미지는 몽마르트르 역사를 통틀어볼 때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19세기말 이후의 모습에 불과하다. 그 이전까지의 몽마르트르는 낭만은커녕, 압제와 가난 나아가 공포와 학살의 공간으로 이어져왔을 뿐이다. 1천 년 이상 어둠 속의 카오스로 지내오다가 140여 년 전부터 비로소 코스모스의 향을 발산한 곳이 몽마르트르다. 19세기말 몽마르트르는 가난한 예술가의 보고(寶庫)에 해당된다.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19세기말 펼쳐진 몽마르트르 내 예술활동은 요즘 유행하는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 즉 합동창작 활동의 원조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당시 예술가들의 출신이 유럽 전체였다는 점에서, 21세기형 글로벌 콜라보레이션의 전 단계쯤에 해당된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물랭루주, 캉캉…


▎1901년의 물랭루주의 모습. 파리 관광객이라면 꼭 찾는 명소의 하나다. / 사진·유민호
몽마르트르를 예술의 보고라 할 때, 왜 유럽의 예술가들이 다른 곳도 아닌 몽마르트르에 몰려들었는지가 궁금해진다. 비엔나·런던·베를린·마드리드 같은 다른 도시도 있고, 파리 안에서도 다른 지역들이 있는데 왜 몽마르트르가 19세기말 이후 유럽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었을까? 모네·르누아르·피사로·드가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에서부터, 로트렉·고흐·피카소·모딜리아니·달리·마티스 같은 예술가가 왜 몽마르트르 언덕에 모여 독창적인 창작열을 불살랐을까? 왜 몽마르트르가 ‘벨 에포크(Belle Epoque: 19세기말부터 1914년 1차대전 발발까지의 기간을 일컫는 이른바 아름다운 시대)’로 불린 프랑스 예술의 황금기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사실, ‘왜 몽마르트르?’에 관한 답은 수많은 예술가의 동기를 살펴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낭만과 미의 공간 이전의 모습인, 카오스로서의 몽마르트르를 이해하는 첩경에 해당되기도 한다. 그 같은 답은 몽마르트르 언덕 최고봉에 위치한 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 사크레쾨르 대성당(Basilica of the Sacred Heart of Paris)이다. 1919년에 완공된, 높이 85m에다 전체가 대리석으로 장식된 초대형 건물이다.


▎캉캉은 물랭루주의 대명사인 동시에 세기말의 욕망과 욕구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 사진·유민호
대성당은 세 개의 초대형 돔형 지붕을 중심으로 한, 19세기말 완성됐다고 보기 어려운 비잔틴풍의 고전적인 건축이다. 많은 종류의 음식을 먹어보는 것은 미식 탐구의 지름길에 해당된다. 가리지 않고 즐기는 과정에서 서로를 비교하면서 맛의 의미를 분석할 수 있게 된다. 서양 건축물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스·로마·비잔틴·중세의 건축물들을 자세히 살펴볼 경우 일반적인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에서부터, 비잔틴·고딕·르네상스·바로크로 이어지는 건축사를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 중 하나는 문이나 창문에 있다. 문 머리에 삼각형 형상을 하고 아래에 사각형으로 이뤄져 있을 경우 그리스로마 스타일이다. 아치형일 경우 비잔틴풍이다. 문의 머리나 옆구리 부분이 연꽃처럼 오므라든 형상으로 이뤄진 것은 고딕 스타일이다. 르네상스는 비잔틴풍을 주로 하면서 고딕 스타일을 보충한 것이라 보면 된다. 바로크는 기존의 모든 건축 스타일을 합쳐놓은 합작품에 해당된다.

문의 형상과 더불어 지붕의 모습도 건축물의 흐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좌표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지붕은 정확히 반으로 잘려진 것이 아니라, 반보다 조금 더 큰 투구형 돔에 해당된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볼 수 있는 고대 기독교 건축물 스타일의 지붕이다. 대성당은 공모에 의해 완성된 건축물이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가능하면 기독교의 원류에 충실하려 한 디자인으로 판단된다. 원래 유럽을 풍미한 건축물의 주류는 하늘을 찌르는 고딕이나 화려한 바로크 스타일에 있다. 장엄한 비잔틴과 소박한 예루살렘 스타일에 주목한 것이 사크레쾨르 대성당이다.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해방구의 중심


▎19세기말 사크레쾨르 대성당 건립 당시의 모습. 파리코뮌에서 숨진 5만여 명의 희생자를 기리는 건축물이다. / 사진·유민호
대성당으로 향한 것은 오전 10시. 파리지엥 도우미가 안내하는 무료 몽마르트르 탐색을 즐기기 위해 출발지인 블랑쉬(Blanche)역 앞으로 향했다. 역을 빠져나와 밖으로 나온 순간 눈에 익은 건물이 나타났다. 물랭루주(Moulin Rouge)다. 몽마르트르 상징 중 하나인 캉캉춤의 진원지기도 하다. 파리에 들르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찾는 ‘나이트 라이프’의 하이라이트가 물랭루주다. 필자는 15년 전쯤 물랭루주에 들러 잠만 자다 돌아간 적이 있다. 와인 한 잔을 마시자 시차를 이기지 못해, 캉캉에 맞춰 내내 졸다가 일어선 기억이 전부다. 말짱한 정신으로 다시 한 번 찾아가고 싶지만 가격이 천정부지라고 한다. 15년 전에는 식사를 포함한 관람이 60달러 선이었던 것을 기억하지만, 지금은 200달러를 넘어선 상태다. 그나마 중국인 관광객들의 ‘티켓 싹쓸이’로 좌석 잡기도 어렵다고 한다.

물랭루주 앞 맞은편 작은 공간에는 몽마르트르 탐색 도우미들로 복잡하다. 영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독일·이탈리아·스페인 심지어 중국에 이르는 다양한 언어권의 도우미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현장에서 알게 됐지만, 무료로 이뤄지는 물랭루주 탐색은 사실상 반강제 투어의 눈가림에 불과했다. 팁은 물론, 도우미가 데려가는 장소에서 먹고 쇼핑하는 것이 ‘의무’다. 팁이야 당연하겠지만, ‘피카소가 자주 들른 레스토랑’이란 믿거나 말거나 정보에 근거해 이곳저곳을 헤맨다는 것이 시간낭비처럼 느껴졌다. 날씨도 다소 쌀쌀한 상태에서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간다는 것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때마침 열차버스가 물랭루주 앞을 통과한다. 몽마르트르 언덕 여기저기를 오가며 탐색하는, 앙증맞은 열차버스다. 6유로를 내고 탔다. 언덕 위로 올라가면서 샹송과 함께 건물이나 주변환경에 대한 설명이 시작됐다. 너무도 짧고 무성의한,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설명이다. 고맙게도 몽마르트르 정점인 사크레쾨르 대성당 앞에서 사진 촬영을 위한 10분 정차가 이뤄졌다. 뒤이어 오는 열차버스에 재탑승해도 되는지 물어보자, ‘좋다’라는 답이 돌아 왔다. 마음 놓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몽마르트르 언덕은 파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천연 전망대에 해당된다. 대성당 바로 앞 광장에서 바라본 파리는 낮은 건축물로 길게 이어진, 다이어트로 단련된 균형 잡힌 몸매처럼 느껴진다. 높이 규제로 인해 건축물의 스카이라인이 수평선처럼 끝없이 뻗어나간 모습이다.

몽마르트르는 ‘순교자의 산(Mountain of Martyr)’이란 의미의 프랑스어 Mons와 Martis를 합친 말이다. 전 세계 어딜 가도 그러하듯 도시의 북쪽은 어둡고 피하는 지역이다. 서울의 북쪽, 베니스의 북쪽이 그러하듯 발전과 거리가 먼 곳이 북향 공간이다. 몽마르트르는 왕이 소유한 와인밭이나 석고개발용 탄광이 들어선, 파리의 변방(邊方) 정도에 불과했다. 문화나 역사와 무관한 하층민의 공간이라 보면 된다. 파리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지형이기에 1134년 루이 6세가 교회(Saint Pierre de Montmartre)를 세운 것이 몽마르트르 역사의 출발점에 해당된다.

이후 몽마르트르가 세계적 차원의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871년 3월 28일이다. 칼 마르크스에 한 번이라도 빠진 사람이라면 주문처럼 외우는, 파리코뮌이 탄생된 날이다. 같은 해 5월 20일까지 전부 70일간의 자치구로 끝난,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해방구인 파리코뮌의 중심이 바로 몽마르트르다.

프랑스혁명과 내부의 적, 외부의 적


▎사크레쾨르 대성당 안의 벽화. 양팔을 벌린 예수가 던지는 메시지는 하나가 되는 프랑스다. / 사진·유민호
파리코뮌은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전쟁 후유증에서 발생한 무력 해방구다. 1871년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항복을 하면서 몽마르트르에 몰려 있던 비정규 시민군에게 무장해제가 요구된다. 시민군은 항복할 수 없다면서 대포를 압수하러 온 프랑스 정규군 장군 두 명을 살해한다. 파리코뮌은 무산대중, 도시빈민으로 구성된, 반(反)부르주아 혁명정부에 해당된다. 코뮌 안에는 사회주의자만이 아니라 무정부주의자도 있다. 프로이센에 패한 뒤 프랑스 정규군은 자체 내 프롤레타리아와의 내전에 빠지게 된다. 어제의 적인 프로이센과 영국의 도움을 받아 파리코뮌 공략에 나선다. 정규군의 화력 앞에 시민군 5만 명 이상이 몰살당한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착공에 들어간 것은 1876년. 파리코뮌이 사라진 5년 뒤에 건설이 시작됐다. 대성당 건설의 가장 큰 동기는 파리코뮌 희생자에 있다. 5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소가 바로 몽마르트르 최정상의 대성당이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때 숨진 프랑스군을 위로하자는 것도 동기이긴 하지만, 같은 국민으로서 서로 총부리를 맞댄 비극에 대한 위로가 대성당 건립의 가장 큰 이유다. 프랑스인에게 몽마르트르는 낭만 이전에 동족상잔(同族相殘) 비극의 현장에 해당된다.

역사와 영상 그리고 슬로건만으로도 피를 끓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혁명이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자신의 왕과 왕비를 기요틴으로 살해하면서 시작된다. 모두가 돌아설 수 없는 강으로 내몰린다. 혁명의 광기(狂氣)가 프랑스 전역을 뒤덮으면서 혁명 주체세력인 마라·당통·로베스피에르도 살해되거나 참수대상으로 변해간다. 혁명-반혁명 논쟁을 통해 모두가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살벌한 시대가 나타난다. 나폴레옹은 바로 그 같은 ‘혁명의 광기’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평화와 안정의 화신에 해당된다. 어디서,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르는 내부로부터의 공포정치에서 벗어나 나폴레옹이 제시한 바깥을 향한 프랑스의 영광에 국민 모두가 매료된다.

프랑스혁명의 적이 안에 있다면, 나폴레옹 시대의 적은 외부에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열정과 희망도 나폴레옹이 사라지면서 다시 혼란으로 치닫는다. 사회주의 사상이 불면서 프롤레타리아의 결집이 이뤄지고,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지면서 파리코뮌까지 나타나 계급의식도 비등한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바로 1789년 바스티유 감옥 공격에서 시작된 혁명과 혼란의 광기를 잠재우는 상징물이다. 무려 80여 년 가까이 지속된 죽음과 배신의 시대를 넘어선 새로운 이정표가 몽마르트르 최고봉에 서있다.

혁명 직후의 낭만, 그 묘한 대비


▎1. 르누아르의 <갈레트 무도회>. 1789년 프랑스혁명 후 80년에 걸친 억압과 공포에서 해방된,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2. 갈레트 무도회는 상상속의 세상이 아니라 19세기말 파리지엥의 일상에 해당된다. / 사진·유민호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멀리 큰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푸른 벽을 배경으로 한 예수의 모습이다. 양팔을 좌우로 벌려 모두를 감싸안고 있다. 정부군·시민군,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관계없이 모두에게 평화와 사랑을 약속한다는 예수의 메시지가 벽화를 통해 와 닿는다. 예수의 양팔 아래에는 천사·성직자·시민·군인 등이 보듬어져 있다. 프랑스를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지만, 서로간의 생각과 주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적이 된 사람들이다. 프랑스 교회건축물의 특징 중 하나지만,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대성당 안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태양 빛이 형형색색의 다양한 색으로 변해 교회 안으로 밀려든다. 파리코뮌 당시 흘린 선명한 피가 붉은 빛의 스테인드글라스 안에 드리워진 듯하다.

대성당에서는 때마침 오전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설교의 주제는 화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나아가 기독교·이슬람과의 화해가 신부의 중심 메시지다. 놀란 것은 신부가 무려 다섯 개 언어를 통해 설교를 한다는 점이다. 프랑스·영어·이탈리아·히브리어·아랍어다. 아무리 글로벌 시대라지만, 언어 5개를 섭렵한 신부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혁명 이후 파리코뮌에까지 이어진 프랑스 내의 화해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갈등과 공포를 치유하는 글로벌 위령제단에 선 듯하다.

르누아르의 대표작 중 하나로 <갈레트의 무도회(Bal du moulin de la Galette)>란 그림이 있다. 가로 175㎝, 세로 131㎝의 비교적 큰 그림으로, 인상파 화풍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잔뜩 멋을 부린 젊은 파리지앵들이 즐겁게 춤추고 있다. 샹젤리제 아래에서 춤을 추지만 무도회 장소는 태양이 내리쬐는 야외다. 현재도 남아 있지만, 몽마르트르를 대표하는 갈레트(Galette) 풍차란 상표의 카페 안에 들어선 야외 무도장이 그림의 배경이다. 빛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내려오는 모습을 인상파 특유의 흐릿한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누구나 어딘가에서 한번쯤 본,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필자는 <갈레트의 무도회>를 보면서 신기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제작 연도가 1876년이란 점이다. 르누아르가 35세 되던 때 그린, 1877년 제3회 인상파 특별전에 출품된 작품이기도 하다.

1876년은 파리코뮌이 해체된 지 불과 5년 뒤다. 대성당 건립이 시작된 해로, 5만 명에 이르는 시민군에 대한 기억이 채 아물지 않았던 시기다. 더구나 르누아르 그림의 배경은 몽마르트르다. 그런 상황·시기·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아름다운 곳이 갈레트 무도회인 듯 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불과 5년 만에 세상이 그렇게 ‘확’ 변할 수 있었을까?

사실 파리코뮌 이후 나타난 엄청난 변신은 갈레트 무도회만이 아닌, 프랑스 구석구석에 나타난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당시 무기 수송시설로 활용됐던 철도는 도시 프랑스인의 레저용 운송수단으로 자리 잡는다. 프랑스 전국이 놀고 즐기는 휴식공간으로 변해간다. 열차·다리·공장이나, 바닷가나 들판을 배경으로 한 식사나 휴식 장면은 인상파 그림을 구성하는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다. 혁명이나 이념에서 벗어난, 도시민들의 새로운 가치관과 생활관을 제시한 그림들이다. 화가들이 그 같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구입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혁명·나폴레옹·교회도 필요 없는, 나와 너의 즐거운 인생에 올인하는, 벨 에포크에 맞는 가치관이 파리코뮌 이후 한순간에 퍼져나간다. 그 같은 상황이 나타난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19세기말 가난한 유럽 예술가들의 보금자리


▎1850년대 파리코뮌이 터지기 전의 몽마르트르 주변. 풍차를 제외하면 거의 허허벌판이다. / 사진·유민호
먼저, 공포에서 벗어난 직후의 인간의 심리다. 인간은 공포에 질릴수록 남녀간의 본능적 관계에 집착하게 된다. 본능적 관계의 남녀가 갑자기 평화에 직면하면 어떻게 될까? 환락의 세계에 그대로 빠져들게 된다. 몸과 마음이 풀리면서, 억눌렸던 공포로부터의 해방감이 한순간에 발산된다. 춤·술·마약·도박 같은 것은 위로제로 등장한다. 1871년 파리코뮌이 무너지면서 1789년 혁명 이후 80여 년간 지속된 공포와 압박도 사라지게 된다. 시대에 민감한 젊은이들은 육체적·심리적 기쁨을 만끽하는 데 정신이 팔린다. 태평양전쟁 직후 일본과 6·25전쟁 직후 한국에 불어닥친 댄스 붐은 바로 그 같은 상황을 증명하는 똑같은 예다. 출생률에 이어, 오락·쾌락·환락의 지수가 상승하는 것은 전쟁 후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캉캉으로 손님을 끈 물랭루주는 바로 인간의 욕망과 욕구를 정확하게 표현한 공간에 해당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물랭루주 주변거리는 파리 매춘의 중심지다.

둘째 이유는 식민지 경영에 의한 자본의 급팽창이다. 비록 전쟁에서 패하고 내전에 휘말린 프랑스지만, 알제리나 베트남 식민지 지배를 통해 초유의 부를 축척해나간다. 철도와 선박의 발전과 더불어 물자의 수송 속도가 빨라지고 사람들의 교류도 활발해진다. 안에서 싸울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 넓은 세계를 보면서 즐겁게 살자는 분위기가 확산된다. 북부 아프리카의 토속적인 모습을 주제로 한 들라크루와의 그림에서부터, 태평양 작은 섬 아이티에서 생을 마감한 고갱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이국적인 풍경이 프랑스로 밀려든다.

전혀 다른 사람들과 문화를 접하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시작된다. 식민지경영을 통해 들어온 자본은 그 같은 꿈을 충족시켜주는 탄약으로 자리잡는다. 세기말이란 말로 표현된 19세기말 20세기초 프랑스의 ‘마시고 먹고 즐기는’ 문화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식민지발 자본의 합작품인 셈이다.

모네·르누아르·피사로·드가·로트렉·고흐·피카소·모딜리아니·달리·마티스 같은 화가가 몽마르트르에 몰려든 이유는 바로 그 같은 배경 아래서 해석될 수 있다. 넘치는 돈을 기반으로 한, 꿈의 신천지가 몽마르트르다. 가난한 예술가를 위한 최적의 비즈니스 무대라 볼 수 있다. 작품의 소재나 주제도 얻을 수 있고, 물랭루주에 들른 남녀나 매춘부를 찾아온 부르주아를 상대로 자신의 작품을 팔 수도 있다. 세상 흐름에 무심한 고흐까지 이곳에 들른 것을 보면, 몽마르트르야말로 19세기말 유럽 예술가를 위한 최적의 보금자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마르트르에는 파리코뮌이 없다


▎스페인의 가난한 미술가 피카소가 몽마르트르 찾은 때는 20세기초다. / 사진·유민호
더불어 몽마르트르 주변이 파리에서 가장 싼 지역이었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다. 프랑스인이 풍수지리를 믿지는 않겠지만, 파리코뮌 당시 쏟아진 사망자로 인해 매력적인 주거환경이라 보기 힘든 곳이 몽마르트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집들이 경사가 급한 언덕 위에 들어서 있기 때문에 활동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파리코뮌과 같은 사회주의적 이념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몽마르트르만큼 성스러운 곳도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프랑스 생활을 몽마르트르에서 시작한 피카소는 사회주의에 매료된 공산주의자이기도 하다. 집세도 싸고 사회주의 이념의 성지로서의 몽마르트르가 유럽 전체의 가난한 예술가들을 불러모은 것이다.

몽마르트르는 동족상잔의 내전과 사람들에게 꿈을 안겨준 예술이 상존하는 극(極)과 극(劇)의 공간이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좋아질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인간심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둠이 아닌, 밝음을 좇는 낙관적인 자세가 인간의 특징이다. 몽마르트르에는 파리코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도로 이름에서 파리코뮌을 연상케하는 곳이 있지만, 그날의 참상을 기억케 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대신, 르누아르·모네·피카소와 같은 예술가들의 궤적에 관련된 유물·유적들이 곳곳에 넘쳐난다.

100여 년 전 그러했듯이 거리의 예술가들이 수백 명 모여있는 곳도 몽마르트르 언덕이다. 괜찮은 그림을 만나기는 어렵지만, 정크푸드에 길들여진 글로벌 시민의 수준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하다. 그림과 관람자의 수준은 비례한다. 흥미로운 것은 얼굴 데생을 하는 화가들의 모습이다.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들고 그냥 선 상태에서 데생을 한다. 물론 데생을 하도록 내버려둘 경우 돈을 지불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냥 인사목적으로 그려줬다고 하지만, 팁으로 최소한 10유로는 준비해야 할 것이다. 몽마르트르에는 결코 공짜가 없다.

눈부신 태양을 찾아 떠나는 고흐의 여정


▎고흐가 그린 <탕귀 노인>. 일본 우키요에가 배경에 들어서 있다. / 사진·유민호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에 고흐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유화 튜브와 그림 도구를 구입하러 들렀다는 ‘탕귀(Pere Tanguy)’ 가게가 목적지다. 찾기까지 한참 걸렸지만, 블랑쉬 다음역인 피갈레(Pigalle)에서 남쪽으로 10분가량 걸어가자 나타났다. 탕귀는 고흐가 직접 그린 세 점의 인물화에도 등장하는 노인이다. 고흐는 1886년부터 2년간 파리에 살았다. 그림 거래상으로 일하던 동생 테오와 함께 살다가, 이후 혼자 생활한다. 당시의 흔적을 찾아봤지만, 대부분 사라지고 탕귀 가게만이 남아 있다. 탕귀 노인은 가난한 화가들을 위해 외상으로 그림 재료를 제공한 인물이다. 음식도 사주면서 예술가들과 함께 교류를 넓혔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 온 고흐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면서 시장에 판매할 것을 권한 인물이기도 하다. 내성적이고 친구도 없던 고흐가 탕귀 노인을 세 번이나 다룬 것은 개인적 친밀감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탕귀 가게는 일본 우키요에(浮世絵, 일본 전통 판화)를 파는 일본 그림 전문점으로 변해 있었다. 1천 유로가 넘는 19세기 그림에서부터, 10유로짜리 복사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고흐는 평생에 400여 장의 우키요에를 수집했다고 한다. 우키요에는 탕귀 노인 그림의 뒷배경으로 활용된다. 고흐는 우키요에가 가진 신비한 색상과 구도에 매료됐다고 한다. 좁은 골목길 속에 위치한 탕귀 가게는 몽마르트르 권역에 들어간다.

그러나 파리는 고흐를 영원히 붙잡아두지는 못했다. 우키요에에 인간의 그림자가 없는 점을 보고, 태양으로 불타는 프로방스 아를(Arles)로 옮겨간다. 눈부신 태양을 찾아, 네덜란드에서 파리, 아를로 이어지는 남진(南進) 행렬이 이뤄진다.

뉴욕 브루클린은 21세기 몽마르트르로 떠오른 글로벌 청년문화의 중심지다. 직접 확인했지만, 미국인만이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의 젊은이들도 모여들고 있다. 그렇지만 몽마르트르처럼 그림이나 예술을 파는 곳은 드물다. 21세기 예술은 남에게 팔거나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얼마나 즐기느냐를 원칙으로 하면서 남는 것을 나누는 식이다. 화가를 대신해 요가·채식주의자·환경주의자가 모이는 곳이 브루클린이다. 내용은 다르지만, 몽마르트르와 브루클린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변화·변신이다. 고흐나 피카소가 부활해 브루클린에 온다면, 아마도 요가선생·유기농사꾼·힙합댄서의 모습으로 등장할 듯하다. 새로운 것으로 향하는 꿈이 존재하는 한, 몽마르트르는 인류의 영원한 낭만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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