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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②] 과학이 답해주지 못하는 생명의 기원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기보존의 결정체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과학적 가설은 시대마다 변하지만 생명의 질서는 변하지 않는 진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순간들이 생명의 신비이자 존재의 증거

▎드넓은 우주에서 생명체가 사는 곳은 오직 지구뿐이라는 믿음은 과학이라기보다 신앙에 가깝다. 이는 과학으로 포장한 자기기만이다. 생명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우주의 어디까지 존재하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생명은 자기 생명력을 보존해 스스로 존재하는 결정체라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오른쪽)와 갈릴레이는 당시 과학계의 이단아였다. / 사진·중앙포토
#1. 과학은 미지의 세계를 알려는 최선의 과정


▎‘과학의 신’으로 불렸던 아이작 뉴턴(사진)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불과 200년이 채 되지 않아 등장한 새로운 과학이론에 밀려 ‘과거의 지식’으로 도태됐다. / 사진·중앙포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미래의 시점에서 본다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과정이다. 자신이 발견한 과학적 지식이 영원한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과학주의’를 신봉하는 근본주의자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의 호기심과 탐구정신을 부단히 자극하여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든다. 인간은 동물의 일원이며, 더 나아가 동식물이 속한 생물의 일부다. 생물을 가능하게 하는 작동원리인 ‘생명’은 어떻게 탄생하였을까? 우리는 첫 생명의 탄생 순간을 과학적으로 밝혀낼 수 있을까? 이 광활한 우주 안에서 지구에서만 생명이 존재하는가? 우리가 다른 생명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익숙한 생명의 모습들, 영화 ET에 등장하는 인간과 닮은 ‘외계인’들만 찾으려 들기 때문에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생명들을 관찰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아직 다른 행성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과학자들은 생명이 존재하는 유일한 행성이 지구뿐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항공우주국이 개발한 허블우주만원경이 관측한 결과, 우주에는 2천억 개 정도의 별이 존재하며, 지금까지 생명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행성은 우리가 땅을 딛고 있는 이 지구뿐이다. 이 ‘과학적인 사실’은 진리라기보다는 ‘믿음’이며 혹은 ‘자기기만’이다. 유대-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은 서양인들은 신은 우주를 만들고 오직 지구에만 생명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혹은 무신론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확인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부정하거나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어, 다른 행성에서의 생명존재의 가능성을 일축한다. 그래서 이들은 지구만이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유일무이한 행성으로 ‘믿는다’.

동시에 이런 지식은 ‘과학적인’ 자기기만이다. 우리의 과학은 방대한 우주의 극히 일부분만 관찰하고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자신이 경험한 세계만이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한한 우주에 인간이 생각할 수도 없는 형태의 ‘지적인 사고’를 하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우주적인 소통’을 하고 있는 지적인 존재들이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은 높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과학적으로 그것을 증명할 혹은 관찰할 능력이 없다.

#2. 과학이란 ‘과정’의 학문이다

과학이란 항상 스스로 만든 편견이라는 세계관을 깨고 나와 새로운 진리로 가기 위한 과정(科程)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인 ‘진실’은 내일의 ‘거짓’이나 ‘실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유럽에서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던 신앙인들은 16세기까지만 해도, 우주가 7일 만에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도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과학(科學)이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당시로서는 ‘황당한’ 과학이 수용되기 전까지,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 전까지 천동설을 믿었다. 그 천동설도 그때까지 ‘첨단과학(尖端科學)’이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인간은 우주를 자신이 이해한 이성 안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데카르트는 우주를 커다란 기계로 해석하였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출발하여, ‘심신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정신세계는 독립적인 영역을 지닌 독자적인 실체지만, 물질세계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물리학 법칙을 따른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방법서설>이란 책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약관화한 요소를 자신의 생각 외의 외부공간을 ‘외연’이라 불렀다. 외부세계는 외연인 ‘물질’과 그것이 신이 부여한 법칙에 따라 ‘운동’한다는 ‘기계적 철학’을 주장하였다.

시대에 따라 ‘거짓’과 ‘진실’의 경계 오간 과학


▎지구가 형성된 후 가장 먼저 등장한 생물은 삼엽충(사진)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전자현미경이 개발된 이후 지구 최초의 거주 생물은 ‘박테리아’로 밝혀졌다. / 사진·중앙포토
18세기 영국의 아이작 뉴턴을 필두로 시작된 과학혁명(科學革命)은, 인류는 행성들의 작동원리뿐만 아니라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단위들과 생명의 작동원리를 발견하고, 19세기엔 찰스 다윈에 의해 인류의 발생에 대한 획기적인 시각을 지니게 되었다. 지구는 그 흔적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 점점 자기중심에서 바깥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사물과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 결과를 과학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 과학의 신이라고 여겨졌던 뉴턴의 만유인력이 도전을 받는다. 아인슈타인,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슈뢰딩거 등 많은 물리학자가 뉴턴이 주장한 기존 고전적 과학지식을 뒤집는 새로운 우주 이해방식을 제안하였다. 그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원리로 대표되는 양자역학이다. 특히 양자역학은 인간의 과학적 지식을 다시 제로에 가까운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이전 과학이 현재의 상태를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희망적인 결정론이라면, 양자역학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는 확률론이다. 이 이론으로 우리가 아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 수정되었고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이론으로 인류가 주장한 과학적 지식은 블랙홀이란 거대한 심연에 빨려 들어가 다시 카오스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모든 것을 다시 의심하게 되었다.

#3. 미지의 세계

과학자들은, 사물은 동시에 여러 곳에서 존재할 수 있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끝없이 펼쳐져 서로 연결될 수 없는 것들이 하나의 강력한 파동의 지배를 받아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마치 무슨 종교의 교리와 같은 양자역학 이론으로 인간은 무엇이 진리이고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보고 살아야 하는지 오리무중이다. 오늘날 우리가 눈앞에서 보는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것을 명확하게 답하는 과학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천체물리학자라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말할 것이고 자신도 그것을 찾기 위해 첫걸음을 뗀 갓난아이라고 고백할 것이다.


▎뜨거운 물웅덩이에서 번개를 맞아 생겨난 유기화합물이 끝없이 분화와 진화를 거듭해 인간에 이르렀다는 이론은 지금은 과학일지 모르나 후대에는 신화로 불릴지도 모른다. 우주와 생명의 신비는 탐구할수록 더 정교하고 복잡하게 탄생의 기원을 감춘다. / 사진·중앙포토
우리가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 중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다른 동식물도 거주하고 있다는 명제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는 세계도 실제로는 거짓인 경우가 허다하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얼마 후 저만치 멀어져 간다. 태양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중력과 지구 중심이 지상의 만물들을 끌어당기는 중력 사이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하루에 한 번 자전을 하고 태양 주위를 1년에 한 번 공전한다. 지구의 자전속도는 시속 1600㎞ 정도이며 공전속도는 시속 10만7천㎞ 정도다. 지구 밖 어떤 존재가 지구를 본다면 지구는 시속 100㎞로 달리는 자동차보다 16배 빠르게 자전하면서, 그 자동차보다 1천 배 빨리 태양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300㎞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그 움직임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태양과 천체들이 우리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관찰하고 진리로 받아들이는 과학적인 사실로 수용되어왔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구가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 절묘한 중력의 신비한 마술로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다.

#4. 생명은 ‘자기보존체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살아있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 지구에 생명이 살기 시작했을까? 지구를 제외한 다른 행성에서 아직 생물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물질과 에너지가 중용(中庸)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너무 고체화되어 차갑게 되거나 기체화되어 뜨겁게 되지 않도록 그 균형을 잡고 있다. 지구는 태양과의 절묘한 거리와 달과의 신비한 공생관계로 역동적으로 변화하면서도 자기 스스로 제어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질문은 지혜의 원천이다. 소크라테스의 지혜는 그가 쉬지 않고 질문을 하는 과정에서 축적됐다. 과학에서 질문은 인류의 지식을 진일보하게 만드는 지혜의 샘이다. / 사진·중앙포토
과학자들은 이 능동적인 자기보존체제를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라고 부른다. 칠레 생물학자인 마뚜라나(Humberto Maturana)와 바렐라(Francisco Varela)는 생물의 생존방식을 ‘오토포이에시스’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주인공 돈키호테가 당면한 실존적인 딜레마에서 이 용어를 만들었다. 돈키호테는 무기를 들고 행동해야 할지(프락시스, 행동), 혹은 그런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창작의 길에 들어서야 할지(포이에시스, 창작) 망설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 딜레마에서 ‘포이에시스’가 담고 있는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여 스스로 자급자족하여 생존하는 ‘오토포이에시스’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생물은 자신이 변화하면서도 자신만의 특징, 즉 안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1970년대에 등장한 가이아 이론에 의하면, 지구는 하나의 생명체로 자기를 보존한다. 초기에는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이론과 상충하는 부분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지속가능한 이론으로 수용되고 있다. 지구 자체가 스스로 제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구 전체의 기후, 바다의 염분, 그리고 산소와 같은 핵심적인 요소들이 지구를 생명이 생존할 수 있도록 스스로 조정해왔다. 자신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생물들이 살아남고 그 자족적인 생물들이 다른 생물들과 창조적인 결합을 통해 진화하였다. 이 창조적인 다른 생물과의 결합을 ‘알로포이에시스(allopoiesis)’라고 부른다. ‘알로포이에시스’를 번역하자면 ‘타자결합생성’이다.


▎밤하늘을 밝히는 수많은 별은 지금도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우주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는지 모른다. 인간의 기원도 별들의 숭고한 희생에서 비롯됐다. 인간은 우주의 일부이며, 우주는 인간의 모태다. / 사진·아이클릭아트
지구가 형성된 후 생물이 스스로 번식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든 후, 가장 먼저 등장한 생물은 삼엽충으로 알려져 왔다. 삼엽충은 딱딱한 몸 세 부분으로 구성된 생물로 바다 밑바닥에서 화석으로 발견된 삼엽충은 약 5억7천만년 전에 바다를 지배하던 생물이다. 그러나 1943년 전자현미경이 발견된 이후, 화석화된 세균의 세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구 최초의 거주생물은 박테리아의 세포였다.

#5. 세포의 등장

어떻게 지구에서 생명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그 순간을 본 사람도 없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화석도 불충분하여 우리는 그 숭고한 순간을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주는 46억년 전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새로운 별, 태양이 그 파편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우리가 이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이유는 달에서 가져온 돌이나 유성으로 떨어진 돌들을 동이원소 연대측정을 통해 45억6천만년으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그 후 커다란 유성이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과 부딪쳤다. 이때 만들어진 두 개의 행성이 달과 지구다.

지구는 그 후 거의 5천만년 동안 서서히 식어 내부는 뜨거운 용암으로 되어있지만 표면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육지를 만들었다. 학자들은 최초의 박테리아 화석을 35억년 전으로 추정한다. 생명이 어떻게 그리고 왜 만들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반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개가 바다를 쳐서 생물이 등장할 수 있는 원시적인 화학성분들의 결합물이 창조되었다. 특히 미국 옐로우스톤과 같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지열웅덩이의 뜨거운 물방울에서 원형세포가 등장했다는 것이 최근 가설이다. 이 방울은 탄소, 수소, 산소, 인, 유황 그리고 질소로 이루어졌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동일한 유전정보, 즉 똑같은 생화학 원소를 공유하기 때문에 하나의 공동조상으로부터 유래했다. 그 후 단백질, 핵산, 그리고 유전암호를 통해 한 개의 막 안에 5천개의 단백질, 그리고 DNA와 RNA를 지닌 눈으로 볼 수 없는 지극히 작은 자기보존체제가 되었다.


▎고대 힌두교의 경전 <우파니샤드> (사진)는 우주와 생명의 관계를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구절로 정의한다. 생명의 신비가 곧 우주의 신비라는 뜻으로 읽힌다. / 사진·중앙포토
지구에서 최초의 생물이 이같이 등장했다니. 신화에 등장하는 생명의 등장 이야기만큼 황당하다. 이 내용도 우리가 지금은 과학이라고 말하지만 후대 인류는 더 정교한 설명으로 이 가설을 신화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이렇게 등장한 세포는 그 후 동물과 식물로 진화하여 6500만년 전에는 공룡에 이르렀다.

#6. 해답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질문들

과학은 분명이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생물에 정확하면서도 셀 수 없는 정보를 선사하였다. 컴퓨터가 등장한 이후, 인간이 획득한 지식의 양은 아마도 거의 매년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이다. 그럼에도 진화생물학은 이 지구상에서 무생물 물질이 어떻게 핵을 가진 진핵생물로 변화하여 고차원의 생물로 진화하는 발판이 되었는지 대답하지 못한다. 과학이란 특성상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그 과정을 유추할 뿐, 그 사물의 발생 이유에 대해선 침묵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자기보존체계를 가진 생물들로부터 어떻게 인간이 의식을 가지게 되었는지 아무도 답하지 못한다.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마음에 지나가는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는가? 인간의 상징적인 사고능력과 자의식은 어디서 왔을까? 인간이 숭고한 원칙을 위해 순교할 수 있는 거룩한 행동은 단순히 이기적 유전자에서 왔다고 주장하기에는 허접스러운 부분이 많다. 무엇이 인간에게 창의적인 영감을 부여하여 위대한 예술작품이나 건축 혹은 문학작품을 창작하게 하는가? 과학은 인간이 가장 흠모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간이 가진 신비한 능력에 대해 해줄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다.

이 기본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실망이 아니라 신비하고 경이롭게 만드는 이유는 따로 있다. 왜 우리 우주는 생명이 등장하도록 그토록 정교하고 정확하게 만들어졌는가? 인간은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해 영원히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깊이 탐구하면 할수록, 우주는 더욱더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일부 천재적인 수학자조차 지극히 작은 분자의 양자역학적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수십 쪽의 풀이를 필요로 한다. 왜 심지어 물질의 가장 작은 분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가? 자연의 가장 단순해 보이는 요소도 광대하고 심오한 ‘지혜’ 혹은 구조를 품고 있다. 우리가 우주 전체로 시선을 돌리면 더욱 그렇다.

#7. 지혜는 질문이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친구 카이로폰이 델피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에 신의 소리를 경청하러 갔다. 지혜로운 늙은 여인 시빌은 황홀경에 빠져 인생의 질문을 가져온 사람에게만 해답을 주는 신비로운 여인이다. 카이로폰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를 찾고 싶었고 친구 소크라테스가 그런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는 질문한다. “누가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가?” 시빌은 “그 어느 누구도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롭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카이로폰이 아테네로 돌아와 소크라테스에게 이 신탁을 전해주었다. 소크라테스는 믿지 못했다. 이 대답은 그를 혼돈스럽게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는가?”라고 혼동에 빠진다. 그는 자신보다 지혜로운 자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아테네에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수년 동안 질문하는 데 집중한다. 그는 마침내 그 신탁의 의미를 깨닫는다. 시빌의 신탁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들어 낸 단어가 철학(philosopher)이다. ‘필로소피’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지혜(philo)’와 ‘사랑(Sophia)’의 합성어다. 철학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지혜는 ‘질문하는 행위’다. 이 지혜는 어떤 존경받는 존재가 당신에게 그것이 진리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것을 믿지 않는다. 어려운 질문들을 던지고 이유와 증거들을 살피고 우리가 우리에게 물을 가장 어려운 질문들을 대답하려고 애쓴다. 소크라테스를 그렇게 지혜롭게 만든 것은 그가 쉬지 않고 질문을 했다는 점이다.

#8. 모든 생물은 우주다

인간은 누구인가? 미국의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은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질소는 우리 DNA 속에, 칼슘은 우리 치아에, 철은 우리 피에, 탄소는 우리가 먹는 애플파이에 있다. 이것들은 모두 우주가 붕괴할 때 그 안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별 먼지로 구성되었다.” 전자현미경을 동원해야 생명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원자는 우주에서 별이 폭발할 때 형성되었다. 내 왼손과 오른손을 구성하는 원자들은 아마도 다른 행성에서 왔을 것이다. 내 몸이 우주에서 왔다니! 나는 별이다. 까마득한 옛날,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한 후, 별들이 폭발하면서 우리 몸을 구성하는 기본 원자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해 대신 돌아가셨다는 가르침이 핵심교리인데, 사실 그 옛날, 별들이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탄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켜 죽은 것이다. 그 거룩한 죽음의 흔적이 모든 생명의 원자 속에 남아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극도로 높은 온도와 압력으로 폭발할 때 등장하였다. 폭발하면서 등장한 별들이 불안정하게 되자 다시 붕괴되고 폭발하면서 탄소, 질소, 산소와 같은 생명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자들을 은하수에 뿌렸다. 이것들이 집약되고 붕괴하면서 행성 주위를 도는 가스 구름이 되었고 오랜 기간을 거쳐 별이 되었다. 밤하늘의 별을 보라. 인간은 이 광활한 우주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우주가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비록 우주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점에 불과한 존재이지만, 나를 구성하는 원자가 모두 우주에서 왔다는 사실은 신비하다.

#9. 스스로 존재하는 자

스스로 자족할 수 있고 자신의 존재를 시간과 공간을 통해 전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가 생명이라면,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신(神)도 바로 생명이다. 성서 <출애굽기>에서 신은 자신의 속성을 모세를 통해 드러낸다. 모세는 오랫동안 묵상과 관찰을 통해 눈에 보이는 자연을 넘은 신비의 세계를 감지하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불이 붙었는데도 타버리지 않는 가시덤불을 보고 다가가자, 그 안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목소리로만 들려오는 신을 만난 모세는 신에게 신의 이름을 묻는다. 이름이란 그 이름을 지닌 존재를 규명하는 언표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신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한다. ‘스스로 있는 자’를 원래 이 이야기가 기록된 고전 히브리어로 되돌리면, ‘에흐에’다. ‘에흐에’는 ‘존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 ‘하야’의 1인칭 단수 미완료형 동사다. ‘에흐에’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를 풀어 번역하면, “나는 스스로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그리고 미래에서 존재하는 자’ 정도가 될 것이다. ‘에흐에’는 생명의 본질인 자기보존체제를 가장 간략하고 심오하게 설명한 이름이다.

생명의 기원이나 과정에 대해 우리는 과학적으로 추측할 뿐이다. 우리가 시도한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시도는 신화적인 수준을 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이 무슨 의미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함으로 생명에 숨겨진 진리를 조금씩 알아간다. ‘생명’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거의 없지만, 인간이 빅뱅 순간에 만들어진 우주의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우리 몸에 살고 있는 셀 수 없는 자기보존체인 박테리아가 존재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생명’이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의연하게 존재하는 능력이다.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 종속되거나 어떤 도그마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고, 설령 어려움과 외로움이 엄습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견디는 인내다.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다면, 우주로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고대 힌두경전 우파니샤드에 삶과 생명을 이해하려는 구도자를 위한 구절이 있다. 현인 우달라카가 자신의 아들 스베타케투에게 고대 인도영성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트 트밤 아시.” 이 산스크리트 구절을 번역하자면 “네가 바로 그것이다”이다. 여기서 ‘그것’(타트)이란 우주와 우주의 숨겨진 원칙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내가 생명을 유지하고 그 위대한 삶의 신비를 찾아 나선 이 지상에서의 여정’이 곧 진리라는 말이다. 내가 현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내가 살아있음의 증거이며, 이 의식적이며 구도적인 삶이 바로 생명의 신비가 아닐까?

배철현 -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고전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원전 6세기 다리우스 대왕이 남긴 비시툰비문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2003년부터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를 가르치고 있다. 창의 인재 혁신프로그램인 ‘건명원’을 기획하고, KBS ‘궁금한 일요일 장영실쇼’ 진행을 맡고 있다.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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