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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⑮] 튀니지 튀니스|세상에서 가장 개방적인 이슬람 도시 

머리는 유럽, 가슴은 아시아, 몸은 아프리카에! 

글·사진 김명주 기획재정부 감사담당관
2010년 12월 이슬람 세계 뒤흔든 자스민 혁명의 진앙지… 이슬람 신앙과 교리에 기계적으로 얽매이지 않는 관용적 라이프스타일 돋보여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 발원지인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의 역사는 3000년에 가깝다. 오랫동안 지중해에서 가장 잘나가는 도시였다. 카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튀니스 시민들.
튀니스는 정치·경제·교육체제는 유럽식이며, 종교(이슬람교)와 언어(아랍어)는 아시아에서 유래했고, 땅은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해 있다. 가난하지만 미래를 낙관하는 시민들이 많은 이유는 재스민 혁명에서 폭발한 자유의 정신이 아직 도도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최북단에 위치한 한니발의 도시 튀니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National Geographic Traveler)>에 의해 2015년 최고의 관광지 20곳 중의 하나로 선정된 곳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가 그랬다. 햇빛이 아낌없이 내리쬐는 여름날, 하얀 벽과 파란 대문으로 치장된 시디부사이드의 카페에 앉아 찐한 에스프레소 한잔을 느긋하게 마신다. 거기에 에메랄드색 지중해 위로 저물어가는 석양을 보고 있노라면 환상이라고.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 등 유럽의 수많은 예술인이 시디부사이드에서 아름다운 지중해를 바라보며 작품을 구상했다. 해가 져도 아름답다. 하늘이 낮고 공기가 신선해 별이 선명하게 보인다. 지중해에 떠 있는 배의 불빛을 관조하면 명상에 잠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된다.


▎비르사 언덕에 위치한 카르타고 박물관. 카르타고의 건국설화가 서려있는 곳이지만 대부분 로마 시대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튀니스(튀니스 메트로폴리탄에 속해 있는 카르타고, 시디부사이드 등 포함)의 역사는 3000년에 가깝다. BC 9세기 페니키아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오랫동안 지중해에서 가장 잘나가는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BC 146년 로마제국과의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후 2000년이 넘게 로마인, 반달족, 사우디에서 온 아랍족, 터키의 오토만족, 프랑스인 등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자국민이 지배하게 된 건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56년부터다. 유럽·중동·아프리카의 영향을 받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튀니스에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문화가 섞여 있다. 정치·경제·교육체제는 유럽식이며, 종교(이슬람교)와 언어(아랍어)는 아시아에서 유래했고, 땅은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해 있다. 튀니스인들 스스로도 3분의 1은 유럽, 3분의 1은 아시아, 3분의 1은 아프리카인이라고 한다. 머리는 유럽에, 가슴은 아시아에, 몸은 아프리카에 있는 것이다.

태양이 준 신의 선물, 올리브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 등 유럽의 수많은 예술인이 시디부사이드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며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사진은 시디부사이드 상점가.
튀니스는 지중해성 기후에 속해 있다. 6월부터 9월까지는 한 여름인데 낮 최고기온이 40도를 넘는 기간이 3달가량 된다. 3일 정도는 50도를 넘기기도 한다. 이렇게 태양이 강렬해도 여름에는 비가 거의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다. 강도 모두 메말라 버리는데 움푹 팬 흔적만이 강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신기한 건 이렇게 비가 오지 않아도 식물이 말라 죽지 않고 꿋꿋이 버틴다는 것이다. 강인한 튀니스 사람들처럼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박과 복숭아 같은 튀니스의 과일은 기가 막히게 맛있다.

튀니스 주변은 대부분 밀밭과 올리브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에는 산림이 우거진 곳이었는데 로마가 튀니지(국가 이름)를 식민지화한 후 배후 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밀밭으로 만들었다. 로마의 빵 바구니(bread basket)라고 불릴 정도로 곡창지대가 되었다. 지금도 밀이 많이 난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받고 익은 튀니지 올리브는 아마 지중해에서 최고일 것이다. 중동 사람들이 석유를 신의 선물이라고 하는데 튀니스 사람들은 올리브를 신의 선물이라고 한다. 올리브는 열매로 기름, 장아찌 등을 만드는 것은 물론 나무도 중요한 목재로 사용된다. 올리브는 거의 모든 음식에 사용되며 감기가 걸렸을 때 한 종지 먹으면 낫는다고 한다. 올리브는 튀니지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 중의 하나다.

튀니스 사람들의 행동은 예측 불가능하다. 길가에 주차해 있던 차가 신호도 없이 출발하고, 방향등도 켜지 않고 갑자기 차선을 바꾸기도 한다. 골목에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하며 급정거는 기본이다. 출퇴근 시간에 튀니스의 도로는 아비규환이 된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경적과 번쩍거리는 전조등은 물론 역주행도 다반사다. 특히 퇴근 시간대가 되면 왕복 4차선(2+2차선) 도로가 1+3차선으로 바뀌어버린다. 교통량이 많은 쪽에서 반대쪽 차선 하나를 차지해버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변차로와 같다. 차선도 무시되는데 신호등이 있는 곳이면 3차선 도로에 차들이 보통 5줄로 서 있다. 우리 시각으로는 무질서해 보이겠지만 어쨌든 교통체증이 빨리 풀리니 이곳 사람들은 좁은 도로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튀니스 사람들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과 무질서는 건축에서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메디나(Medina)다. 메디나는 옛 이슬람식 시가지를 말한다. 성벽이 시가지 전체를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 모스크(이슬람 사원), 주거지, 시장 등이 있다. 튀니스의 메디나는 7세기에 지어졌으며 동서로 800m, 남북으로 1600m 정도의 규모다. 서울로 치면 4대문 안과 비슷하다. 메디나에 갈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소매치기가 아니라 바로 좁고 꾸불꾸불하고 복잡한 골목길이다.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한 번 길을 잘못 접어들면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찾아오기가 쉽지 않다. 이방인의 침략에 대비해서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메디나에 직접 가보면 어디로 나와야 할지 헷갈린다. 이렇게 이방인들이 헤매는 동안 여기 거주민들은 도망칠 시간을 벌었을 것이다.

튀니스 사람들의 이러한 특징은 시위할 때도 나타난다. 튀니지에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났을 때다.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시위하는 모습을 보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사불란하게 줄지어 앉아서 마이크를 잡은 사람의 구호에 따라 모두가 복창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위대 앞의 몇 사람만 집중할 뿐 대부분 사방팔방을 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핸드폰으로 문자 확인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담배를 피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하품도 하고 있었다. 진압하러 오는 경찰도 열을 지어서 오는 게 아니라 각개전투식으로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시위대들도 한쪽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사방 팔방으로 튀었다. 도망가다가도 아는 경찰이 있으면 악수까지 하였다. 이러다가 군중들 틈에 섞이게 되는데 이때쯤 되면 누가 시위대이고 누가 경찰인지 구분이 안 간다.

예측 불가능한 행동과 ‘효율적인’ 무질서


▎튀니지 국민은 23년간 독재를 이어온 지네 엘아비디네 벤알리 대통령을 퇴진시키고 2014년 민주정부를 수립했다. 벤알리 대통령이 다녔다는 지투나 모스크.
튀니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고 무질서한 도시시스템을 만들었을까? 종교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외부인의 침입에 대한 생존방식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운동경기에는 아무리 상대방이 강해도 예측만 잘하면 이길 수 있다. 전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적이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할 때 나의 군사 규모는 훨씬 더 커야 한다.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튀니스 사람들은 이러한 무질서를 이용해 방위를 해왔다. 외국인의 눈으로 볼 때 튀니스는 무질서하고 예측 불가능한 곳이지만 튀니스 사람들에게 무질서와 예측 불가능은 가장 효율적인 생존의 수단이자 방어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튀니스 사람들의 종교는 수니파 이슬람교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는 달리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고, 학교에서 히잡 착용이 금지되어 있다. 튀니스 여성들에게 히잡은 종교적인 목적이 아니라 일종의 패션이다. 빨강색, 파랑색, 노랑색, 보라색 등 다양한 색상의 히잡으로 멋을 부린다. 이슬람교의 휴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금요일이다. 그러나 튀니지는 기독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금요일 대신 일요일이 휴일이다. 경제 사이클을 유럽 국가들과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술은 이슬람에서 돼지고기와 함께 금기시되는 대표 품목이다.

그런데 튀니스에서는 웬만한 술은 쉽게 살 수 있고, 까르푸에 가면 돼지고기도 살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와인, 대추야자 술(40도, 부하라고 함) 등을 생산까지 하고 있다. 튀니지 와인의 역사는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3세기의 카르타쥐에 마공(Magon)이라는 농학자가 있었는데 와인을 만드는 법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그의 와인 만드는 기법은 이후 로마인들도 채택했다고 할 정도로 뛰어났는데 현재 튀니지에는 그의 이름을 딴 마공이라는 와인이 있다. 맛과 가격에서 가성비가 최고다.

나는 튀니스에서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말라>라는 책을 썼는데 글이 막힐 때마다 마공을 한 잔씩 하곤 했다. 튀니스 시내의 까르타쥐 골프장에서 파는 맥주는 맛이 일품이다. 밍밍한 한국맥주와는 달리 물이 섞이지 않아 보리 특유의 고소한 맛이 느껴진다. 한국처럼 4도가 아니라 10도 정도 되는데 멋모르고 마셨다간 금방 취한다. 튀니스 사람들은 술을 쉽게 접할 수 있으나 실제로 마시는 사람은 드물다. 그대신 담배를 많이 피운다. 마르스(Mars)라는 현대식 담배와 시샤(Shisha)라는 물담배를 좋아한다. 물담배는 연초를 숯으로 태울 때 나오는 연기가 물을 통해 한번 걸러진 후 목까지 전달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필터가 없어서 매우 독하다. 마르스는 니코틴 함량이 국산담배의 10~20배는 된다. 이렇게 강한 담배를 튀니스 사람들은 쉬지 않고 피워댄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반면 여기 사람들은 담배로 푸는 것 같다. 튀니스 거리에 늘어져 있는 카페에서 남자들이 쓴 에스프레소 한 잔 시켜 놓고 물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 중의 하나다.

튀니스 시내에는 프랑스 성당이 있고 유대교 교회도 있다. 프랑스 식민지시대의 성당 건물을 허물지 않고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카르타쥐 유적지에 가면 로마제국 시대의 참회록으로 유명한 성 오거스틴 동상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한 십자가를 가슴에 안은 이름 모를 성자의 조각상도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공개되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튀니스인 특유의 개방성과 종교적 관용이 느껴진다.

이슬람교 신자들은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 한 달 동안 일출부터 일몰까지 단식을 해야 한다. 라마단은 아랍어로 ‘더운 달’을 의미하는데 한 달 정도 지속되며 이 기간 동안 낮에는 물을 포함하여 모든 음식을 못 먹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8세 미만 어린이와 학생, 산모, 병자, 외국으로의 여행객 등은 단식에서 예외다. 단식 중에는 담배도 안 되고, 성생활, 악한 일 등도 금지된다. 라마단 기간 동안 근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로 단축되는데 퇴근 시간인 오후 2시를 전후해 차가 많이 막힌다. 오후 5시쯤 되면 택시기사가 물 한 방울 못 먹어서 기진맥진하는데 이때 교통사고가 자주 난다.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시간대인 저녁 7시경에는 도로에 차가 거의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금식 해제를 알리는 무에진(이슬람 사원에서 예배 시간을 알리는 사람)의 소리가 모스크에서 들리면 바로 먹으려고 미리 밥상을 차려놓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튀니스 사람은 낮에 안 먹는 대신 밤에 3끼를 모두 챙겨먹고 거기에 추가적으로 술과 고기를 더 먹는다. 많이 먹기 위해서 저녁 먹기 직전에 위를 달래 줄 수 있는 가벼운 수프부터 시작하는데 우리나라 남자들이 술 마시기 전에 우유를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거의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놀다 보니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건 당연지사! 아침에 출근은 겨우 하더라도 하루 종일 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같은 현상 때문에 튀니지 초대 대통령이었던 하비브 부르기바는 라마단을 없애자고 주장했으나 무슬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낮에는 굶고 밤에 포식하는 기간, 라마단


▎튀니스에서 자동차로 1시간30분 거리에 있는 두가에는 로마시대의 도시 유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튀니지 정부가 이슬람 이전의 역사를 방치한 탓에 유적지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라마단이 끝난 다음날인 이슬람력 10월1일부터 3일간은 ‘이드-알 피트르(Eid-al Fitr)’라는 명절이다. 이 기간에 무슬림들은 가까운 모스크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친척들을 방문하여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추석이나 설과 비슷하다. 이드-알 아드하는 이드-알 피트르로부터 약 두 달 뒤인 이슬람력 12월에 성지순례를 끝내고 양을 알라께 바치는 축제다. 무슬림들에게 가장 큰 축제날이다. 이 축제 때는 보름 전부터 시장뿐만 아니라 공터가 있는 곳이면 우후죽순으로 양시장이 생긴다. 시골에서 차로 양을 운송하기도 하고, 목동들이 직접 몰고 오기도 한다. 성인 남자는 누구나 양을 1마리씩 잡아서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양을 7등분하여 6개의 큰 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주고 본인은 가장 작은 것을 선택한다. 곧 죽게 될 운명이라는 것도 모른 채 끔벅거리는 양들의 선한 눈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 축제를 통하여 농촌경제는 큰 활력을 얻는다.

긴 역사 동안 수많은 외부 세력과 섞이다 보니 튀니스의 음식도 다양하다. 대표적인 음식은 꾸스꾸스(Couscous)다. 꾸스꾸스는 튀니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알제리, 모르코, 이집트에서도 대표적인 음식이다. 꾸스꾸스는 좁쌀이나 밀을 작은 알갱이로 만들어 찐 다음 배추, 무, 당근, 양파 등과 같은 야채와 고기, 생선 등을 얹어 먹는다. 고기는 소고기, 닭고기, 양고기 등이 사용된다. 꾸스꾸스와 더불어 대표적인 음식이 하리샤(Harissa)다. 하리샤는 음식이라기보다는 양념인데 얼핏 보기에는 고추장처럼 생겼다. 하리샤는 칠리고추를 주재료로 하여 미나리과의 고수, 커민, 토마토 등을 섞어서 만든다. 레스토랑에 가면 갓 구워낸 바게트를 전채처럼 주는데 올리브 오일을 섞은 하리샤에 찍어 먹으면 메인 요리가 필요없을 정도다. 튀니스 음식은 주변국에 비해 더 자극적인데 부인이 요리에 매운 고추를 넣는 정도에 따라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판별할 수 있다고 한다. 요리가 더 매울수록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 중에 ‘샤와르마(Shawarma)’라는 게 있다. 레바논에서 유래된 샤와르마는 양고기, 닭고기, 소고기, 칠면조 등을 빙빙 돌아가는 꼬챙이에 뭉텅뭉텅 잘라서 끼워 넣고 불로 굽는다. 이것을 잘게 썰어 토마토, 양파 등 각종 야채와 함께 밀가루로 납작하게 만든 피타(pita)에 말아서 먹는다. 가격이 우리 돈으로 2000~3000원 하는데 정체불명 고기의 햄버거보다는 훨씬 더 신선한 것 같다. 튀니지는 기다란 지중해 해안(1300㎞)을 끼고 있어 생선 요리도 발달했다. 보통 튀기거나 굽거나 하여 쌀밥과 같이 나오는데 양념에 찍어 먹는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지중해 물고기는 회로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중해라는 바다가 내해이고 물결이 잔잔하다 보니 물고기들의 활동성이 떨어져 살이 차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외에도 브릭(bric), 따진(tajine) 등 다양한 음식이 있는데 맛이 거의 비슷비슷하다. 심지어 바게트와 하리샤에서도 비슷한 맛이 나는데 이는 파슬리(parsley), 고수(cilantro), 민트, 바질(basil) 등 향이 강한 양념들이 음식 종류를 가리지 않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튀니지 음식을 먹을 때는 음식별로 맛 차이가 좀 나지만 오래 먹으면 맛이 비슷비슷해진다.

여권 없이 프랑스로 가는 곳이 까르푸?


▎튀니스에는 유장한 역사에 걸맞은 유물과 유적이 많다. 카르타고의 로마 유적지 중 하나인 안토니우스 공동 목욕장.
튀니스에는 까르푸와 지앙(Giant)이라는 대형 쇼핑몰이 두 군데 있다. 까르푸는 도심에 있고, 지앙은 차로 20분 정도 가야 한다. 까르푸는 유럽의 다른 곳처럼 규모가 크다. 엘지와 삼성 제품도 인기가 많다. 튀니스에서는 주로 남자가 장을 본다. 부인이 같이 오는 경우도 많지만 계산을 주로 남편이 한다. 가정의 경제권이 남편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튀니지 여성들의 지위는 주위 아랍국들에 비해서 훨씬 높다. 여성장관도 몇 명 배출했으며, 여성의 사회적 활동도 활발한 편이다. 튀니지 초대 대통령의 부인이 프랑스 여성이었는데 이 사람이 튀니지가 프랑스 식민지로부터 독립할 때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해 많이 노력한 결과라고 한다. 튀니지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 국가였으나 튀니지 사람들이 프랑스에 갈 때에는 비자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불법 이민, 불법 취업 등을 이유로 비자발급에 매우 엄격하다. 그래서 튀니지 사람들은 비자 없이 프랑스에 가는 곳이 까르푸라고 자조적인 이야기를 하곤 한다.

튀니스에서는 2주에 한번 쑥(Souk)이라는 전통 시장이 열린다. 옷, 생선, 야채, 과일, 완구, 공산품 등 없는 물건이 없다. 흥정만 잘하면 좋은 물건을 값싸게 살 수 있다. 쑥 중에서 가장 큰 곳은 라마르사에 있다. 여기에는 1m가 훨씬 넘는 갈치가 네 마리에 1만원 정도 하며, 커다란 가오리도 잘라서 파는데 5000원어치만 사면 온 가족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장어도 가끔씩 파는데 우리나라 장어보다는 세 배 정도 더 큰데 비해 가격은 3분의 1이 채 안 된다. 튀니스 서쪽지역에 있는 바다와 강이 맞닿은 곳에서 잡히는 장어는 우리나라에 수출되기도 한다. 쑥에 가면 이곳 사람들의 밝은 표정과 활기를 느낄 수 있다. 나는 아프리카 9개국을 여행했는데 시간이 없을 때도 시장과 박물관만큼은 꼭 들러보았다. 어느 곳이나 시장은 그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튀니스 시민은 스킨십과 제스처의 달인

튀니스에는 유장한 역사에 걸맞게 유물과 유적이 많다. 포에니 전쟁의 잔해가 아직도 남아있는 비르샤 언덕을 비롯하여 안토니우스 목욕장, 원형극장, 바르도 박물관 등 로마제국의 유적지가 곳곳에 남아 있다. 튀니스에서 조금 벗어나면 엘젬의 원형경기장(영화 <글레디에이터> 촬영장), 두가의 로마도시 등의 유적지가 있다. 울타리도 치지 않고 증개축도 하지 않은 채 대부분 허물어진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심지어 로마시대의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기둥 일부분이 골프장 화분 밑받침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곳에 자리 잡아 전시될 정도인데도 말이다.

한니발이 자기들의 조상일 텐데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 하나 없다. 내가 만난 한니발은 시내의 디스코텍 이름이었다. 튀니스에서 1시간30분 정도 운전하고 가면 두가라는 곳에 로마시대 도시 모습의 유적지가 있다. 연회장, 목욕탕, 콜로세움, 가정집, 제우스 제단 등등. 그러나 가끔씩 만나는 관광객들을 빼고는 한산하며, 소들이 유적지 위에서 놀고 있다. 귀중한 인류의 유산이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현지인 친구에게 물으니 이슬람교 이전의 튀니지 역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어떠랴. 터만 있고 기둥만 있는 유적이 오히려 상상의 나래를 더 펴준다. 어정쩡하게 복원하여 유적 같지 않은 유적을 만드는 것보다 방치된 그대로가 더 좋을 수도 있다.

삶은 어디에서나 치열하다. 튀니스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많이 배웠건 적게 배웠건, 직업이 무엇이건 간에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가기가 힘들다. 튀니지는 관광으로 먹고 사는 나라다. 국토 면적이 한반도의 4분의 3 정도 되지만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은 해안선에서 내륙 쪽으로 10㎞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사하라 사막이다. 하지만 지중해 해안과 상쾌한 날씨는 관광지로서, 휴양지로서 손색이 없다. 튀니스 사람들 중 외국인을 상대로 생계를 유지하는 택시 기사부터 메디나의 상인, 호텔 직원들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학교에서 배우기도 하지만 대부분 TV를 통해서 깨우쳤다고 한다. 위성방송이 많아 TV 채널만 900개가 넘는다. 언어 배우는 데에는 왕도가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절실한 필요’인 것 같다. 이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하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이다.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6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일개 택시 기사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물으니 튀니스 같은 곳에서 먹고 살려면 외국어 구사능력이 절실해서 배웠다고 한다.

튀니스의 제스처 문화는 유럽 못지않게 발달되어 있다. 그중에 운전과 관련한 제스처가 가장 재미있다. 택시를 타고 가다 보면 택시기사가 2~3분 간격으로 두 손을 운전대에서 떼고 ‘내가 뭘!’(두 손바닥을 허리 높이에서 하늘로 보임),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두 손을 올리고 어깨를 으쓱거림)’, ‘한판 붙어?(주먹을 쥐락펴락 함)’, ‘미친놈 아냐?(오른손을 머리 위쪽으로 휘휘 돌림)’ 등을 표현하는 제스처를 쓴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내가 뭘!’,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고 하면 바로 옆에서 당한 기분 나쁜 운전자는 ‘너 미친놈 아냐’하는 제스처로 응수한다.

튀니스 사람들의 인사하는 방법은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처음 만났을 때는 보통 악수를 하지만 친한 사람들끼리 만나면 서로 껴안고 양 볼을 교차하여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순으로 맞댄다. 때로는 ‘쪽’ 하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남자들끼리, 여자들끼리는 이렇게 인사하지만 남자와 여자 간에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이렇게 인사하지 않는다. 이와 거의 똑같은 인사법이 프랑스에도 있는데 이를 ‘비주(bisou)’라고 한다. 조금 더 친한 사람들은 한 번 내지 네 번까지 진한 포옹을 하는데 이성끼리 하면 오해받기 십상이다. 어쨌든 스킨십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혁명에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다

튀니스 사람들은 잘 아는 사람과 악수하기에는 다소 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한두 번 가슴을 가볍게 치기도 함) 미소를 띠면서 작은 소리로 ‘함둘레라’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국기에 대한 경례하고 비슷하다. 함둘레라는 ‘신의 가호가 있기를’이라는 의미다. 허리나 머리를 굽혀 인사를 하지는 않는데 이는 알라 외에는 허리나 머리를 굽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는 오른쪽은 좋은 것, 왼쪽은 나쁜 것이라는 관념이 있었는데 튀니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른쪽은 선, 행운 등을 의미하고 왼쪽은 악, 불행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튀니지를 포함한 이슬람 국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아마도 ‘인샬라’가 아닐까 한다. 인샬라는 ‘신이 원하신다면’이라는 뜻인데 우리의 ‘복불복’이라는 말과 비슷하다. 튀니스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과 약속 개념이 미약한데 시간을 어기거나 약속을 못 지키거나 할 때 핑계거리로 ‘인샬라~’를 많이 사용한다. 자기는 최선을 다했는데 신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현대에 와서 그 본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원래 인샬라는 불확실한 미래의 일을 알라가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소망의 표현이다. 하지만 튀니스에서 오래 살다 보면 인샬라가 편할 때도 있다.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경우인샬라를 사용하여 핑계를 댈 수 있으니까…. 하긴 우리나라도 한때 ‘코리언타임’이라는 게 있었다. 규칙적으로 도는 톱니바퀴처럼 시간과 약속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다. 삶의 여유를 위해 가끔씩은 인샬라를 외치면서 느슨하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2010년 12월, 어떤 청년의 분신자살을 계기로 튀니지 혁명이 시작되었다. 튀니지 혁명을 재스민 혁명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재스민이 튀니지의 국화이고 튀니스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꽃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꽃이 피는 계절이 되면 튀니스 전역이 재스민 향기로 가득하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재스민 혁명은 이웃 국가인 이집트, 리비아를 강타하여 중동국가 전체로 퍼졌다. 재스민 혁명의 원인에 대해서 분석들이 많지만 나는 청년실업이라고 본다. 분신한 청년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자리를 구하려고 발버둥쳤으나 취업이 안 되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점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단속경찰이 이를 못하게 했다. 생계의 마지막 수단이었던 노점상을 못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항의했다고 뺨을 맞았을 때 그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남았을까? 죽어라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는 사회, 희망이 없는 사회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분신을 택했던 것이다. 재스민 혁명은 또한 SNS혁명이었다. 대부분의 젊은이가 SNS를 하고 있는데 이들은 재스민 혁명을 실시간 중계했다. 언제 어디에 모여서 시위를 하자며 SNS로 서로 독려했고 경찰의 발포로 사람이 죽어가는 광경을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SNS로 전 세계에 호소했다. SNS가 없었으면 과연 재스민 혁명이 성공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혁명이 시작된 지 5년이 지났지만 혁명의 결과는 나라마다 차이가 크다. 시리아는 내전이 지속되어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이집트에서는 수천 명이 사망했으며 무슬림형제단이 집권했지만 곧바로 군부쿠데타가 일어났다. 리비아는 종족 간에 전쟁이 벌어져 아직까지 국가의 기능을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의 발원지인 튀니지에서는 300여 명만 사망했다. 그리고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을 선출하는 등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면서 안정을 찾고 있다. 높은 교육수준과 국민들의 개방적인 마인드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그 결과 2015년 노벨위원회는 프란체스코 교황과 메르켈 총리를 제치고 튀니지의 ‘국민4자대화기구’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수준 높은 튀니지 국민에게 준 것이다.

혁명에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다. 튀니지는 높은 실업률, 여전히 불안정한 정세 등 갈 길이 멀다.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오늘도 튀니지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위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김명주 - 1967년생.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현재 기획재정부 감사담당관으로 재직하고 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아프리카개발은행에 파견되어 튀니지에서 4년간을 지냈다. 그는 아프리카 9개국을 다녀오는 등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말라 1, 2>를 펴내기도 했다.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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