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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비정신의 미학(3)] 학봉 김성일 13대 종손 독립지사 김용환 

“독립운동은 선비가 해야 할 도리”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노름판에서 파락호 행세하며 판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 난세에 나라 구하고도 마지막까지 누명 벗지 않고 눈감아

▎김용환 독립지사는 학봉종택을 세 차례나 팔아 노름판에서 날렸다. 당시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부러 파락호 행세를 했다고 한다.
경북 안동에서는 지금 ‘임란역사문화공원’ 조성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안동 출신으로 임진왜란을 수습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을 기리는 공원을 만드는 일이다. 경북도와 안동시가 2013년 국비 등 200억원으로 계획을 세웠다. 이후 풍천면 경북도청 신도시에 ‘서애기념공원’(3만7802㎡), 서후면 금계리에 ‘학봉기념공원’(5만3723㎡)이 들어설 땅을 확보했다.

사업은 지난해 고비를 맞았다. 특정 문중에 특혜를 주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지난해 3월 안동시의회는 예산안을 전액 삭감했다. 안동시도 사업을 중단했다. 설상가상으로 9월에는 한 단체가 사업에 반대하는 주민투표를 안동시에 청구했다. 반대 이유 중에는 학봉이 임란과 관련해 학계에서 논란 중이라는 점이 언급됐다. 주민투표는 그 뒤 투표권자의 10% 서명을 받지 못해 폐기됐다. 사업은 이후 재개됐다. 안동시 관계자는 “환경영향평가 등이 마무리되는 하반기쯤 착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동에는 수백 년씩 이어지는 종택이 유난히 많다. 주민투표 해프닝은 종택·종가를 바라보는 시민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종택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까?

4월 29일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학봉종택을 찾았다. 내려오는 정신이 궁금해서다.

야트막한 산 아래 ‘학봉선생구택(鶴峯先生舊宅)’이 자리 잡고 있다. 종손은 출타 중이고 종택을 20년째 관리하는 학봉의 16대손 김용수(77) 씨가 손님을 맞았다. 학봉기념공원 예정부지를 둘러보았다. 종택으로 들어오는 도로 건너편 논밭과 야산이다. 그는 “문중이 일부 논을 사들이고 부지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예정부지 뒷산에는 학봉의 11대 종손으로 한말 의병대장을 지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선생의 묘소가 있다.

10세 소년이 “할배 살려주이소” 일경에 애원


사흘 뒤 다시 학봉종택을 방문했다. 두루마기를 입은 김종길(金鍾吉·76) 종손이 사랑채로 안내했다. 맞절을 나눈 뒤 방안을 둘러보았다. 벽면에 훈장증이 걸려 있다. 나란히 두 개다. 1995년 광복절에 종손의 고조부인 서산과 조부인 김용환(金龍煥, 1887∼1946) 독립지사가 동시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의무)’를 다한 징표라고나 할까. 학봉종택을 지키는 종손들이 역사의 고비에서 발벗고 나섰다는 것이다.

대화는 학봉의 13대 종손으로 70년 전 세상을 떠난 김용환 지사에게로 맞춰졌다. 그의 삶은 대부분 소문으로 전한다. 그나마 한두 토막 남은 건 일본 경찰의 알듯 말듯한 기록뿐이다.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더 많다. 종택에도 남은 흔적은 거의 없다.

독립기념관 인터넷 홈페이지의 독립유공자 정보란에는 김 지사의 공적이 석 줄로 정리돼 있다.

‘1911년 김상태(金尙台) 의진(義陣)에서 활동한 이래 만주에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했다 하며 활동 내용은 미상이나 세 차례 체포된 사실이 있고 1922년 10월경에는 의용단(義勇團)에 입단하여 경북 서기로 임명된 후 경상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과 동지 포섭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된 사실이 확인됨.’

이 공적을 근거로 애족장이 추서됐다.

김 지사는 안동지역 의병의 지도자인 서산의 손자다. 그는 어린 시절 수많은 제자를 둔 할아버지 덕분에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열 살 때 국운이 기울고 서산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집안엔 긴장감이 돌았다. 열두 살 때는 의병장을 지내다 순절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선생의 손녀와 혼인했다. 독립지사 이중업의 맏딸이기도 하다. 또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아버지 고모의 손자였다. 김 지사는 이런 환경에서 자랐다.

1896년 6월 일본 경찰이 학봉종택을 급습한다. 김회락 의병 포대장은 안방 다락에서 체포된다. 일경은 그걸 빌미로 서산을 결박하고 마당에 꿇어앉혔다. 가재도구를 내동댕이치고 귀중품을 빼앗았다. 손자는 치욕스런 현장을 목격했다. 평소 선생으로 존경받아 임금 이외에는 위대한 이가 없다고 생각한 할아버지였다. 열 살 소년은 일경을 따라다니며 울면서 “우리 할배 살려주이소”라고 애원했다. 김종길 종손은 “이 사건이 조부를 의병으로 만들고 모진 고문을 견디게 한 원동력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1907년 김 지사는 이강년 의진(義陣)에 들어가고 1908년에는 김상태 의병대장진으로 봉화 서벽전투에 참가한다. 1920년 의용단(義勇團)이 조직된다. 김 지사는 서기 직책을 맡아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나선다. 항일운동이 독립군의 자금 모금으로 이어진 것이다. 독립운동을 연구한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김용환 등은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 기지를 지원했다”고 정리했다. 1922년 12월 김 지사는 독립운동자금 37만원 모금 활동 중 신태식·이응수 등과 함께 체포돼 의용단원 36명이 대구감옥에 수감된다. 그의 네 번째 구속이다. 사건은 당시 <매일신보> 등에 보도됐다. 당시 일경이 작성한 ‘고등경찰요사’에도 ‘김용환(36세) 등이 자산가에 돈을 내도록 협박했다’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이 나온다. 김 지사는 이후 ‘요시찰 인물’이 된다.

사방 십 리 땅 10년 만에 팔아 독립자금화


▎학봉 15대 종손 김종길 씨가 종택 옆에 건립된 학봉기념관에서 학봉이 걸어온 길을 설명하고 있다.
그 무렵 김 지사의 기행(奇行)이 이어진다. 그는 학봉종택에 내려오던 전답과 임천서원에 딸린 땅 등 43만㎡(13만 평)를 처분했다. 요즘 화폐 가치로 보면 대략 300억원 어치다. 또 300년을 내려온 학봉종택을 세 차례나 팔았다. 종손이 종택을 팔면 문중은 위신 때문에 돈을 내고 되찾는다. 모두 노름판에 날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지방에는 작은 박람회 같은 별시(別市)가 열흘 정도씩 열렸다. 그러면 전국의 한량과 노름꾼이 모여들어 여기저기 판이 벌어진다. 행사 마지막 날 새벽에는 큰 판이 선다. 각 노름판에서 돈을 딴 이들이 모여 딴 돈 전부를 거는 싹쓸이 판이다. 여기에 김 지사와 동지들이 나타난다. 이 판에서 그는 언제나 돈을 땄다. 여기서 “내가 이겼다”고 우기는 말을 듣지 않고 패를 확인하려 들면 그때 김 지사는 “첫닭 운 뒤 갑오(9)는 따라지 만도 못하다”며 판돈을 몽땅 끌어 모아 동지에게 줘버린다. 만약 이때 버티는 노름꾼이 있으면 김 지사가 “새벽 몽둥이야!” 소리치면 수행하던 10여 명이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두르며 판돈 전부를 강제로 빼앗아 자루에 넣은 뒤 사라졌다.(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자료)

사람들은 김 지사를 파락호(破落戶)라며 수군거렸다. 행세하는 집 자손으로 난봉이 나서 결딴났다는 것이다. 김종길 종손은 “당시 우리 집은 사방 십 리를 가도 남의 땅을 밟지 않을 만큼 재산이 넉넉했다”며 “조부가 그 재산을 10년 지간에 다 팔아 치워 멸문(滅門)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외동딸은 파락호 아버지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다. 어딜 가나 들리는 건 아버지 얘기였다. 겨우 혼처가 정해졌는데 혼수가 문제였다. 사정을 듣고 시집에서 장롱 살 돈을 보냈는데 그것마저 없어졌다. 고민 끝에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져가고 3년 동안 태기가 없자 시집에선 귀신이 붙었다며 장롱에 불을 질러 태웠다고 한다.

노름 판돈은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 그 돈은 며칠 뒤 독립군 자금으로 탈바꿈한다. 노름판은 한량이나 노름꾼의 돈을 따서 모으고 자산가들이 거금을 날렸다는 소문을 돌게 해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역할을 했다. 김 지사는 일경의 눈을 속이기 위해 이렇게 노름꾼 행세를 한 것이다.

일본에서 기자·교수를 지낸 윤학준은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에서 “김용환 씨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기록했다. 그의 공적이 밝혀지기 전에 쓴 글이다. 봉건적인 질서나 관습을 거리낌없이 깨버리는 그의 파격적인 행동에 서민들이 갈채를 보냈기 때문이란 것이다.

김 지사는 사랑방에 혼자 있을 때는 항상 주판을 놓으며 셈을 했다고 한다. 또 접은 쪽지를 보다가도 방에 누군가 들어오면 곧바로 화롯불에 넣어 태웠다. 비밀 연락이나 군자금 메모였을 것이다. 화롯불은 여름에도 있었다. 그는 요시찰 인물이 되면서 메모지 한 장, 사진 한 장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유품이라고는 외부의 소식을 듣느라 서재 구석에 둔 진공관 라디오 한 대뿐이다. 종택의 유물이 보관된 운장각(雲章閣)에 그 고급 라디오가 보관돼 있었다.

지사의 면모는 생의 마지막까지도 비범했다.

1946년 여름 김 지사는 병세가 위중해졌다. 동지인 하중환(河中煥) 지사가 문병을 하면서 “여현(汝見, 지사의 字)! 정말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눈을 감으실 건가. 이제 그동안의 독립운동 내용을 아들에게는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했다. 기진맥진하던 김 지사가 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활동 끝내 입 다물고 숨 거둬


▎의용단 사건’을 보도한 1922년 12월 30일자 <매일신보>. 지면 오른쪽 맨 아래에 김용환의 이름이 나온다.
“안 되네! 내가 지금 지난 일을 말하면 남들이 믿지 않을 걸세. 새삼 그럴 필요 없네. 이제는 독립도 됐고… 내가 좋아서 한 일이고… 선비의 후손으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뿐…. 말하지 말게… 끝까지 비밀로….”

김 지사는 입을 다물었고 이틀 뒤 운명한다. 이 말은 유언이 됐다. 하 지사는 김 지사가 자신의 활동을 함구한 뒤 세상을 떠나자 1948년 7월 3년상을 마치는 날 제문에 그 내용을 적었다. 김 지사의 독립운동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까닭과 군자금 모금 등을 남긴 것이다.

김 지사는 평생 노름꾼 파락호라며 가족과 문중, 뭇 사람의 오해와 비난을 받았다. 그러고도 마지막까지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외동딸 김후웅 여사는 아버지가 서훈으로 누명을 벗게 되자 한 많은 소회를 장문의 가사로 적어 조카인 김종길 종손에게 보냈다. ‘…당시는 왜놈 등살에다 온 집안 문중이 종손 원망하는 원성뿐이었으니/ 철없는 외동딸 무식한 이 여식이 누구 앞에서도 떳떳이 우리 아배 변명 한번할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럽고 후회스럽다.’(‘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편에는 ‘영무자 방유도칙지방무도칙우 기지 가급야 기우 불가급야(寧武子 邦有道則知邦無道則愚 其知 可及也 其愚 不可及也)’란 말이 나온다.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지혜롭게 행동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우직한 충성을 다했으니 지혜는 미칠 수 있으나 그 우직한 충성은 아무도 미칠 수 없다는 뜻이다. 공자는 난세(亂世)에 우직하게 충성을 다한 영무자를 자신도 따르기 어렵다며 높이 평가했다. 파락호 행세는 난세에 나라를 구하는 우직한 수단이었다.

학봉종택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인 금정골에 김 지사의 묘가 있다. 애족장 서훈 뒤 1997년 세워진 비석에는 ‘이 영무자에 비견되는 인물이 바로 김 지사’라며 ‘재물을 가벼이 보고 의리를 중히 여김은 견줄 자가 드물었다’고 새겨져 있다.

학봉종택에는 운장각에 503점의 보물이 보관돼 있다. 개인이 소장한 보물로는 최대 규모다. 이 가운데 종택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유품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학봉 나이 29세에 내린 80자 병풍 글씨다. 여기엔 ‘연원정맥(淵源正脈)’ 등의 내용이 적혀 있어 학봉이 퇴계학의 정통을 이었다고 받아들인다. 실제 퇴계 학맥의 절대 다수는 학봉의 제자들이다.

1590년 학봉이 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뒤의 정세 보고는 아직도 논란으로 남아 있다. 후손들은 말을 아낀다. 자칫 변명으로 비칠 것 같아서다. 그러나 학봉의 우국 충정은 <수정선조실록> 등이 말하고 있다.

학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관찰사 초유사(招誘使)로 임명돼 진주성으로 내려가 백성의 힘을 모으는 데 주력한다. 당시 전국 의병의 절반은 학봉 휘하에 있었다. 관군은 의병과 협력했다. 3만여 왜군에 맞서서 승리한 진주대첩은 학봉이 주도한 민관 협력으로 이뤄진 성과였다. 학봉은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던 중 병사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그런 학봉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후손과 제자들 중에 의병과 독립지사가 유난히 많았다. 김 지사의 조부인 서산은 안동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70세 스승이 의병을 지휘하자 제자 수백 명이 속속 참여했다. 이들은 이후 광복 때까지 50여 년간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서산의 제자들 중 독립유공자만 이상룡·김동삼·송기식 등 70여 명이 나왔다. 학봉 후손 중에도 독립유공자가 17명이나 된다. 서산은 “독립운동은 선비가 당연히 해야 할 도리”라고 말했다.

돈은 아끼고 절약하여 쓸 곳에 써야 한다


▎학봉종택 사랑채에 걸려 있는 건국훈장 애족장. 1995년 광복절을 맞아 학봉의 11대 종손 김흥락, 13대 종손 김용환 지사에게 추서됐다
종택 사랑방에는 서산과 김 지사의 훈장증과 함께 어록이 액자에 담겨 있다. 서산은 <주역(周易)>에 나오는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란 말을 평생 실천했다. 김 지사는 “돈은 아끼고 절약하여 쓸 곳에 써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파락호 소리를 들으며 가산을 탕진했지만 추수 뒤 벼이삭을 줍는 등 근검과 절약이 몸에 배었다고 한다.

광복 직후인 1948년 2월 인근 마을 청년 40여 명이 양반계급 타도를 외치며 농기구를 들고 학봉종택으로 돌진했다. 소식을 듣고 마을 노인들이 따라와 “학봉종택은 해치면 안 된다”며 만류했다. 6·25 전후의 극심한 좌우 갈등도 학봉종택을 비켜갔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백성들과 함께 기꺼이 몸을 던지는 충의를 실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지난해 주민 투표 논란 속에서도 다수 시민이 학봉기념공원을 반대하지 않은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박스기사] 인터뷰 | 학봉종택 15대 종손 김종길 씨 - “3년상 치르고 나서 종택 구심점 강해져”


“종손은 해선 안 되는 일이 많아 힘든 자리…전통문화 현실에 맞게 전승하는 것이 책무”

김종길(76)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3년상을 마치고 2010년 길사를 지낸 뒤 학봉의 15대 종손이 됐다. 사회에선 LG전자의 사업부장을 거쳐 삼보컴퓨터 사장 등을 지냈다. 학봉종택은 손이 귀하단 말을 듣는다. 자주 대가 끊겨 양자를 들인다. 13대 김용환 지사가 양자를 들였고 지금 종손도 딸만 넷을 두어 다시 양자(36)를 들였다. 종손은 “가풍을 잇는 것이 책무”라고 말했다.

이 집에 내려오는 정신이 있다면?

“벽에 걸린 글씨 그대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일 것이다. 어버이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나라에 충성하며 벗과 신의를 지키는 일이다. 선비정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정신이 드러나는 일화를 든다면?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대장 고경명 장군이 넷째 아들에게 ‘너는 가통을 이어야 한다’며 천리 길 영남 땅 집을 찾아가라고 했다. 학봉의 맏아들(김집)이 고용후와 가솔 50여 명을 받아들여 4년 넘게 한솥밥을 먹었다. 장군과 다른 아들은 전사했다. 학봉의 손자와 고용후는 공부에 힘써 동반 급제한다. 고용후는 안동부사로 부임해 지난 날을 생각하며 눈물의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인연은 이어져 장군의 13대손이 2004년 다시 안동지역 충효부대장이 돼 종택 앞에 기념식수를 했다.”

임란역사문화공원 조성을 두고 지난해 지역에서 논란이 있었다.

“지금 돌아보니 서애기념공원과 학봉기념공원을 합쳐 한 곳에 계획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한말 의병은 90%가 퇴계 학맥이라고 한다. 학봉기념공원에는 학봉 할아버지와 함께 지역 의병의 기록을 담게 된다. 또 제자들 업적도 진열하는 교육장이자 시민 휴식공간이 될 것이다.”

충의 정신을 잇기 위해 후손들이 하는 사업이 있다면?

“광문회(光門會)라는 게 있다. 문중을 빛낸 후손들의 모임이다. 후손들 가운데 고시에 합격하거나 박사학위를 받거나 기업인, 국가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이 회원이 된다. 새로 회원이 되면 학봉 할아버지 제사에 앞서 사당에 고유제를 올린다. 역사가 50년 쯤 되는데 회원이 100명이 넘는다.”

최근 종손으로서 전통을 반영한 3년상을 치렀는데.

“벌써 7∼8년 전 이야기다. 당시 문중 어른들 생각이 중요했다. 전통을 잘 보존해 후세에 전수하는 것은 당연했다. 내 대(代)에 와서 안 할 수는 없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문중에서 무려 1400여 명이 참석했다. 큰일을 치르고 나니 종택이 더 강한 구심점이 됐다. 전통문화를 현실에 맞게 전승하는 것이 내 책무가 아니겠는가.”

종손으로서 힘든 일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종손은 명예와 함께 상당히 외로운 자리다. 문중의 제재와 기대가 혼재한다. 종손에 거는 기대는 한이 없다. 무엇보다 종손은 해선 안 되는 게 많다. 그런 것이 힘든 일이다.”

201606호 (20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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