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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분석] 싱크탱크를 통해 본 미국 대선 

헤리티지(트럼프) 재단 대 루스벨트(힐러리) 연구소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트럼프, 공화당의 대부(代父) 에드윈 퓰너와 추종자들이 만든 재단의 엄호받아... 힐러리, 상원의원 기반이 됐던 뉴욕의 리버럴 싱크탱크를 경제정책 전위로 내세워

▎(왼쪽) 미국 보수주의 이념을 대표하는 싱크탱크의 하나인 헤리티지 재단 전경. / (오른쪽) 미국 자유주의 싱크탱크의 맏형 격인 브루킹스 연구소.
미국 대통령 선거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제1 슈퍼파워 지도자 선거 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 어떤 때보다도 중요한 2016년이라고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글로벌 이벤트로 자리 잡은 것이 미국 대선이다. 새로운 대통령이 어떤 정책을 쓸지에 따라 경제·외교·안보 모든 것이 글로벌 차원으로 변해간다.

황혼대국 미국이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의문을 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파워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적극적·소극적 파워다. 대부분의 사람은 눈에 드러나는, 적극적 파워에 민감하다. 하지만 힘을 빼는 소극적 파워는 적극적 파워에 비해 한층 더 파괴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

미국의 소극적 파워가 적용된 중동을 보자. 예외 없이 역내 모든 국가가 흔들리고 있다. 중국에 기대를 거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중동과 비슷한 불확실한 미래가 중국에 밀어닥치고 있다. 한국에서 간과하는 부분이지만, 중국의 추락은 미국이 인도로 눈을 돌리는 순간부터 시작됐다. 중국 경제는 내리막이지만, 미국이 지지하는 인도 경제는 상승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 없이 살 수 없지만, 미국은 중국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미국 대선은 미국만이 아니라, 중동·중국 나아가 유럽과 한반도에 곧바로 와 닿는 글로벌 정책 결승전에 해당된다.

2016년 선거는 처음부터 맥이 빠진, 뻔한 게임인 듯 비친다. 당장 신문·방송을 보면 ‘상황 끝’처럼 느껴진다. 인종차별, 음담패설, 세금포탈의 대명사인 공화당 후보 트럼프와 준비된 대통령인 민주당 후보 힐러리와의 대결이다.

힐러리 대세론만이 전부는 아니다


▎10월 9일 미국 대선후보 2차 TV토론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왼쪽)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오른쪽)가 날 선 공방을 주고받았다.
한국에서 다뤄지는 기사의 핵심은 ‘막장’ 트럼프다. 비난과 조롱이 2016년 선거의 주된 내용이다. 트럼프를 비난하면서 맛이 간 악당으로 조롱하는 것이 기사의 핵심이다. 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국 정치에 대한 한국 정치의 우월감을 확인 시켜줄 수 있는 증거로서도 활용된다. 당연히 가십성 기사로 흘러간다. 이 모든 기사의 출처는 물론 미국 미디어다. 80% 가까운 리버럴 성향의 미디어가 만들어낸 글들이 여과 없이 한국에 보도된다. 그 결과, 리버럴 미디어가 이미 단정했듯이, 한국도 힐러리를 대통령으로 뽑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트럼프에 대한 기사가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미 대통령 자리에 오른 듯한 힐러리의 생각을 듣거나 소개하기보다, 무시해도 될 만한 트럼프에 관한 보도가 줄을 잇는다. 막장 트럼프라고 비난하지만 힐러리를 칭찬하는 글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호불호와 상관없이 미국 내 뉴스메이커 자리에 들어선 것은 트럼프다. 필자 개인의 판단이지만, 힐러리와 비교할 때 대략 7대 3정도의 기사 비율이다.

필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힐러리 대세론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것이 필자의 답이다. 누가 될지 여부가 아니라, 한쪽만 보고 예단하지 말자는 의미다. 미국은 넓은 나라다. 도시에서나 통하는 리버럴 미디어의 판단이나 논조가 전부는 아니다. 수도 워싱턴에서 30㎞ 밖으로만 나가도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트럼프가 기존 정치인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가 반칙왕, 막장, 악당, 패배자는 아니다.


▎위스콘신주 고속도로 주변에서 나부끼는 남부군 깃발(왼쪽)은 연방정권에 반대하는 백인의 정서를 반영한다. 이들은 트럼프 지지층에 해당한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인, 나아가 힐러리에 반대하는 미국인도 결코 적지 않다. 미국의 리버럴 미디어는 그 같은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무시한다. 결국 한국에서는 편향된 보도만이 대세로 자리잡는다. 주의할 부분은 미국인들은 리버럴 미디어의 편견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눈앞에 나타난다고 덥석 물지 않는다. 가려서 듣고 보고 이해한다. 한국과 다른 부분이다. ‘새누리당이, 혹시나 하며 트럼프 공부 시작’. 지난 9월 22일 한국의 한 신문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미국 대선 ‘불과’ 50여 일 전에 후보자에 대한 공부에 들어간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여름철 트럼프 관계자를 찾아 워싱턴을 헤매던 일본 정치인들과는 너무도 비교가 된다.

녹음 테이프, 민사소송, 비디오 유출, e메일 리크, 인종·종교 차별, 러시아 해킹….

선거 관련 보도에서 자주 접하는 단어들이지만, 공통점은 가십이란 말로 압축될 수 있다. 당연하지만, 미국 대통령에 관한 보도가 가십으로 한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대통령 선거의 핵심은 정책이다. 두 후보자가 어떤 세계를 미국민에게 보여줄지에 관한 갖가지 정책 토론이 미국 대통령 선거의 ‘진짜’ 하이라이트다. 작가라는 이름을 걸치고 있다면 글로써 승부를 내야 한다. 아무리 잘해도, 노래와 춤이 작가의 주종은 아니다. 들어도, 안 들어도 그만인 것이 가십이다.

정책은 다르다. 나의 이익·이해에 직결된다. 세금, 복지에 관련된 문제에서부터 국방, 외교에 이르기까지 두 후보자가 내세우는 정책을 통해 미국 국민들의 4년, 아니 8년이 결정된다. 한국 신문을 보면 정책에 관한 보도가 극히 드물다. 미국의 경우 막장 트럼프에 관한 기사도 많지만, 정책에 관한 분석도 적지 않다.

‘카더라’가 통하지 않는 미국 선거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강연하는 중국 출신 농구 선수 야오밍(오른쪽).
물론 대부분 리버럴 미디어는 트럼프 정책을 비난한다. 그러나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은 유권자다. 트럼프에 대한 공격과는 별개로 힐러리의 정책과 비교해서 선거에 임한다. 어떻게 서로를 비교하는가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만들고 수출하는 나라다. 둔한 것처럼 보이지만, 돈이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 어릴 때부터 유권자 교육, 즉 정책을 읽고 이해하는 눈을 키워준다. 누가 나에게 유리한지 금방 판단이 선다. 출처 불명의 사진 한 장, ‘카더라’ 유언비어에 흔들리는 판단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민주주의 표상처럼 받아들여지는 말로 ‘민심’이란 단어가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란 단어가 떠오르지만, 사실 미국에서는 민심에 해당되는 말이 없다. 판단은 각자 한다. 뭔가 하나로 묶어, 좋다 나쁘다로 이분화하는 민심이란 말은 한국 정치문화의 산물에 불과하다. 세상을 흑백으로 양분하기보다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각자의 이익·이해관계에 의해 개별적으로 판단하는, 백인백색 선거가 미국 정치의 특징이다.

정책이란 단어를 키워드로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정책전문가, 즉 싱크탱크다. 최근 한국에서도 차기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싱크탱크 개설소식이 활발하지만, 후보자를 위한 정책의 산실에 해당되는 곳이 바로 싱크탱크다.

업무 내용 면에서 한·미 양국의 싱크탱크는 비슷하다. 그러나 크게 다른 부분이 하나 있다. 미국의 경우 정책 연구 하나에 주목해온 수십 년 전통의 전문연구소가 후보자를 도와주는 식으로 이뤄진다. 중후장대형(重厚長大型)이다. 한국은 대통령 후보자로 나선 사람을 위해 한순간 설립됐다가 이후 선거가 끝나면 사라지는, 단기 이슬형 단체다. 질적·양적 차원의 정책이란 측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중후장대형 미국식 싱크탱크는 선거운동 기간 중만이 아닌, 집권 이후 나아가 정권이 바뀐 뒤에도 미국 정치의 상수(常數)로 남는다. 정책을 제공했던 싱크탱크 내 연구원이 직접 백악관이나 정부기관에 들어가 활동하기 때문이다. 공무(公務)에 직접 관여한 이들 정책전문가들은 자신이 일했던 싱크탱크를 정부로 연결시켜나간다. 이른바 권력의 제5부(府)로서의 싱크탱크다.

아무리 막장 트럼프라고 하지만, 싱크탱크가 뒤를 받쳐주는 것은 당연하다. 1992년부터 미국 정치의 이스테블리시먼트(Establishment)로 군림해온 힐러리의 경우 그 누구보다도 막강한 싱크탱크가 호위하고 있다. 싱크탱크의 연구범위는 정치에 관한 모든 것을 포괄한다. 국내만이 아닌, 외교·국방·안보에서부터 심지어 우주와 해양까지 지구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문제가 대상이다. 숫자와 통계는 정책 내용의 핵심에 속한다. 사실, 대통령 후보 혼자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자료를 만들어 낼 수가 없다. 불가능하다. 대통령 출마의 필수조건이 싱크탱크다.

후보자는 국민 개개인에게 피부로 느껴질 정책을 디지털 데이터로 공표한다. 따라서 대통령이 되려면 통계와 숫자에 능숙해야 한다. 가끔씩 잘못된 숫자를 입에 올리기도 하지만, 기자들의 펙트체크(Fact check) 기능에 의해 재조정된다.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엉터리 숫자로 일관하지 않는 한 거짓말은 아니다.

공화·민주 두 후보를 미는 싱크탱크들은 자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정책도 분석한다. 대통령 선거는 후보자 사이의 대결인 동시에, 정책전문가 싱크탱크끼리의 전쟁인 셈이다. 정책은 싱크탱크라는 집단차원만이 아닌, 후보자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정책전문가 개개인을 통해서도 확보된다. 후보자가 갖고 있던 평소의 지론을 받쳐주는 수준의 조언이다. 총론에 기초한 각론의 대부분은 싱크탱크가 담당한다.

김대중 정치 컬러를 순백색으로 만든 퓰너


▎헤리티지 재단을 세운 에드윈 퓰너(왼쪽)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지난 6월 초 워싱턴 싱크탱크에서는 공화당 부통령 후보자와 관련해 한 차례 소동이 벌어졌다. 트럼프가 평소 알고 지내던 존 헌츠먼(Jon Huntsman)을 지목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헌츠먼은 2012년 대통령선거 때 공화당 후보로도 나선, 유타(Utah)주 주지사 출신의 정치가다. 버락 오바마 정권 1기 때는 ‘홍보페이(洪博培)’라는 이름의 중국 대사로 3년간 근무했다. 당시 인권과 종교 문제에 관한 반중 정책을 취해 중국 정부가 비자를 발급하지 않은 기피인물로도 유명하다. 헌츠먼이 부통령 티켓을 갖는다는 것은 반중 정책이 트럼프의 주된 외교 방침이 될 것이란 의미다.

그러나 당시 싱크탱크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헌츠먼이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Atlantic Council: www.atlanticcouncil.org)의 대표라는 점이다. 당시 트럼프는 자신의 정책을 구체화할 특정 싱크탱크를 지목하지 않은 상태였다. 헌츠먼이 입성할 경우 애틀랜틱 카운슬이 트럼프의 브레인이 될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냉전 당시 핵문제에 주목한 곳이 애틀랜틱이다. 반중과 더불어 군사문제가 트럼프의 핫 이슈가 된다는 의미다.

부통령 티켓이 인디아나 주지사 출신의 마이크 펜스(Mike Pence)에게 돌아간 것은 7월 14일이다. 애틀랜틱 카운슬에 관한 얘기는 사라지지만, 다른 싱크탱크에 관한 얘기가 곧바로 워싱턴에 퍼져나간다. 미국 보수계 싱크탱크의 대명사인 헤리티지 재단(www.heritage.org)이다.


▎헤리티지 재단은 1년에 50권 정도의 정책 관련 서적을 출간한다.
이유는 펜스 부통령 후보에 있다. 펜스는 두 차례의 하원의원을 거쳐 주지사에 오른 인물이다. 하원의원으로 활동하기 전, ‘인디애나 정책평가 재단(Indiana Policy Review Foundation)’이란 싱크탱크를 직접 운영했다. 펜스 스스로가 밝혔듯이 ‘워싱턴의 헤리티지 재단이 뿌린 씨앗’을 기반으로 한 지방의 작은 싱크탱크다. 헤리티지 정책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것은 물론, 헤리티지에 직접 들러 정책 발표를 행하기도 했다. 2015년 헤리티지는 ‘2016년 대통령 선거를 보는 펜스의 생각’이란 글을 실었다. 펜스 그 자신이 싱크탱크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헤리티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워싱턴의 정책전문가들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는 8월 24일 나타난다. 헤리티지 재단 전 대표인 에드윈 퓰너(Edwin J. Feulner)가 트럼프 캠프의 정권인수팀(Transition Team)에 들어간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퓰너는 미국 공화당 싱크탱크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사실 미국에서 싱크탱크가 활성화된 것도 전부 퓰너 덕분이라 볼 수 있다. 레이건 행정부 당시 백악관의 정책참모 역할을 한 곳이 바로 퓰너가 만든 헤리티지 재단이다. 2년 전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75세의 퓰너는 워싱턴 보수정치와 싱크탱크의 대부(代父) 격에 해당된다. 퓰너를 통하지 않는 한 공화당 주류에 올라서기 어렵다.

퓰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컬러를 순백색으로 만들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대중의 ‘빨갱이 딱지’를 없애기 위해 공화당 관계자를 설득한 인물이 바로 퓰너다. 헤리티지 건물 안에 가면 김대중과 퓰너가 함께 찍은 사진이 곳곳에 있다. 이미 사문화됐지만, 헤리티지는 햇볕정책을 지지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생전의 김대중과 퓰너 사이의 돈독한 관계는 워싱턴에서 잘 알려져 있다.

트럼프의 바이블 ‘국정개혁 청사진’


▎백악관 바로 뒤 연방노동자연합 건물에 걸린 일자리 창출 구호 현수막. 노조도 트럼프 쪽으로 기운다.
퓰너와 트럼프의 접점은, 추측컨대 펜스 부통령 후보를 통해 연결됐다고 볼 수 있다. 우연이겠지만, 헤리티지 재단은 퓰너가 트럼프 캠프에 참가하기 직전, ‘국정개혁 청사진 (Blueprint for Reform)’을 발표한다. ‘2017년 새 정권을 위한 통괄 정책 어젠다(A Comprehensive Policy Agenda for a New Administration in 2017)’라는 부제(副題)를 단 리포트로 의회 내 공화당 관계자에게 전부 배포됐다. 퓰너가 트럼프 캠프에 들어가면서 정책 관련 바이블이 된 것은 물론이다. 필자는 헤리티지발 국정개혁 청사진이야말로 트럼프 연구의 기본 교과서라고 확신한다.

헤리티지 재단 인터넷에도 공표돼 있기에 누구나 쉽게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전체 152쪽에 이르는 이 청사진은 헤리티지만이 아닌, 보수계 연구소 대부분이 참가한 초(超)싱크탱크 리포트다. 29명의 정책 전문가가 참가했다. 오바마 의료 개혁법 폐지, 연방대법원의 법관 인선, 국방력 강화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헤리티지 재단과 트럼프 캠프와의 공식적인 관계다. 싱크탱크는 세제 면제의 혜택을 받는 기관이다. 종교기관과 비슷한 이른바 501(C)조 세법에 의해, 공익을 위한 단체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공익기관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는 특정 정당이나 종파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헤리티지가 공화당의 전위 싱크탱크란 사실은 워싱턴의 상식에 해당된다. 어떻게 트럼프 지지 싱크탱크로 변신할 수 있을까? “공화당이나 트럼프를 지목해서 만든 정책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으로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트럼프가 그런 우리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으로 대만족이다.” 헤리티지의 설명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트럼프의 정책으로 반영될 뿐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공화당만을 위해 만든 것은 아니란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지만, 법률적, 논리적으로 볼 때 헤리티지의 설명은 틀리지 않다. 헤리티지만이 아니라, 민주당을 지지하는 다른 싱크탱크들도 똑같은 명분과 방식으로 정치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자주 활용하는 싱크탱크 중에는 경쟁자인 힐러리를 지지하는 단체도 있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경제정책기관(EPI: www.epi.org)으로,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인용한 경제 관련 통계나 숫자의 출처이기도 하다. 노동조합의 의견을 반영한 민주당세가 강한 싱크탱크로 집행부의 대부분은 일찍부터 힐러리 지지에 나섰다.

왜 트럼프가 힐러리 지지기반인 EPI를 인용 근거로 삼는 것일까? 이유는 국제통상무역조약에 관한 트럼프의 정책에 맞추기 위해서다. 트럼프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철회를 주장하는 반(反)통상 무역론자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반대다.

자유로운 통상과 무역은 공화당이 지속해온 전통적인 정책이다. 무역과 통상을 할수록 미국에게 좋다고 믿고 있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반대다. 노동조합을 배경으로 한 정당이기 때문에 외국과 무역을 할수록 국내 노동자의 지위나 처우가 낮아진다고 믿는다.

따라서 공화당 입장에서 볼 때 트럼프는 기존의 정책에 반하는, 민주당 정책에 가까운 인물이다. 트럼프가 박쥐 같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미국 노동자들에게는 먹힌다. 싸구려 중국산 수입으로 인해 당장 수입과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트럼프의 강성 발언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노동조합을 대변하는 EPI 통계를 통해 힐러리 지지층을 흔들고, 자신에 대한 찬성표를 늘리자는 의도다. 현재 미국 노동자는 공화, 민주 타령보다 코앞에 닥친 경제 문제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다. 트럼프에 대한 인기의 기반은 바로 폐쇄형 보호주의 무역 통상론에 있다.

트럼프와 비교할 때, 힐러리를 도와주는 싱크탱크는 너무 많아서 탈이다. 1992년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 이어져온 네트워크가 곳곳에 미친다. 트럼프가 상대가 안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감안한다면, ‘싱크탱크 연구원=백악관 참모, 정부 고위정책전문가’로 받아들여진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탈이지만, 많아도 엄선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힐러리의 선택은 기존의 정치인과 다르다. 워싱턴에서 통용되는 일상적인 정책보다, 뭔가 새로운 방향을 싱크탱크로부터 수혈하려 한다. 경제와 관련해 현재 힐러리가 믿는 가장 강력한 싱크탱크는 루스벨트 연구소(www.rooseveltinstitute.org)다. 1987년 창립된,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진보적 정책을 모델로 하는 곳이다. 워싱턴에 비해 비교적 소규모인 싱크탱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는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가 경제 정책 전반을 주도하고 있다.

첫 여성 대통령 꿈꾸는 힐러리의 결의


▎루스벨트 연구소의 대표 펠리시어 웡. 힐러리가 당선될 경우 제1 참모가 될 전망이다.
흥미로운 것은 루스벨트 연구소의 위치다. 뉴욕이다.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워싱턴이 아닌 다른 지역의 싱크탱크를 활용한 인물은 극히 드물다. 연방정부 차원의 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워싱턴을 무대로 할 수밖에 없다. 힐러리는 다르다. 자신의 집과 상원의원으로서의 기반이 됐던 뉴욕의 리버럴 싱크탱크를 경제정책 전위병으로 내세운다. 뉴욕을 기반으로 한, 대학생과의 관계가 활발한 싱크탱크란 점도 워싱턴과 구별된다. 워싱턴 싱크탱크는 장로들의 살롱과 같은 곳이다. 루스벨트 연구소는 힐러리만이 아닌, 2020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떠오르는 빌 데 블라시오(Bill de Blasio) 현 뉴욕시장의 정책 자문 싱크탱크로도 활용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루스벨트 연구소 대표에 관한 부분이다. 중국계로 여성인 펠리시어 웡(Felicia Wong)이란 인물이다. 버클리 대학 정치학 박사 출신이다. 워싱턴 싱크탱크에서 마이너리티가, 그것도 여성이 대표로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권력의 제 5부 싱크탱크는 백인 남성이 독차지하는 미국 지성의 핵에 해당된다. 여성 최초 대통령을 목표로 하는 힐러리의 결의와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선택이다. 당선될 경우 2001년 부시 행정부 당시 마이너리티 여성파워의 대표주자인 콘돌리자 라이스와 같은 역할을 맡을 것으로 전망된다.

루스벨트 연구소는 정책만이 아니라 힐러리 당선 후 정책 관료의 보급처도 활용될 것이란 분석도 일고 있다. <보스턴 글러브> 7월 5일자에 따르면, 루스벨트 연구소가 수백 명의 리버럴 경제전문가를 인터뷰했다고 한다. 힐러리 집권이 이뤄질 경우 적절한 후보자들을 발굴해 송출하기 위한 것이다. 힐러리의 생각을 받쳐주는 경제전문가 리쿠르트 센터인 동시에, 정책연구기관으로서의 싱크탱크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힐러리가 대통령이 될 경우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경제정책 기관이다.

힐러리 지지 싱크탱크는 크게 볼 때 두 개로 나눠진다. 가장 중요한 경제는 루스벨트 연구소가, 정치는 워싱턴의 ‘센터 포 아메리카 프로그레스(CFAP: www.c4fap.org)’가 중심이다. CFAP는 사실상 클린턴 전 대통령을 위해 만들어진 정책연구소다. 클린턴 당시 비서실장을 지내고, 2009년 오바마가 대통령에 오를 당시 정권이양팀 책임자로 일한 존 포데스타(John Podesta)가 CFAP의 창시자다. 현재 힐러리 캠페인 본부 최고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CFAP는 민주당 기존의 정책과 달리 국제 무역과 통상을 적극 추진한 곳이다. 1992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글로벌리즘(세계주의)과 글로벌 라이제이션(세계화)의 산실인 셈이다. 클린턴, 오바마를 잇는 민주당의 핵으로서의CFAP, 포데스타인 셈이다.

11월 8일,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한국에도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칠 것이다. 안보·통상·무역 그 어떤 것도 쉽지 않다. 힐러리가 당선될 경우 안심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트럼프는 개인이 아니라, 2016년 불기 시작한 트럼프 현상의 하나로 봐야 한다. 트럼프가 패배한다고 해도 트럼프 현상은 한층 더 강력해질 것이다. 트럼프 이상의 정치가가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다. 힐러리라고 해서 그 같은 트럼프 현상에 초연할 수가 없다. 황혼대국 여부 이전에, 1인 카우보이로 나서기를 주저하는 곳이 미국이다.

1989년 소비에트 붕괴 후 이미 한 세대 가까이 흘러가는 시점에서 미국의 세계관도 급변하고 있다. 미국의 2030세대들이 무상복지에 근거한 사회주의자로 변신한 것도 포스트 냉전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싱크탱크의 정책을 살펴보면 트럼프와 힐러리의 내일을 읽을 수 있다. 미리 준비하는 것이 늦게 나서는 것보다 싸고 빠르고 능률적이다. 가십이 아닌 정책을 통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201611호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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