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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21)] 신하를 왕처럼 찬양한 고려 마지막 왕 

“시중(이성계)이 사직한다면 나도(공양왕) 어찌 감히 이 왕위에 있겠는가?”  

위화도회군과 옥사 문제 타협으로 고려 수호파와 역성 혁명파 휴전
근본적 신뢰는 결여… 정국 주도권 장악한 정몽주는 세자 승계에 총력


▎상소는 성리학자들이 왕을 견제하는 정치 수단이었다. 성균관대 유생문화기획단 주최로 열린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상소문의 답을 기다리는 기원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1390년에는 천도와 풍수지리, 1391년에는 연복사 공사와 불교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고려 역사에서 이념논쟁은 다소 낯설다. 사실 14세기 말 이전 한국 역사에서는 사상이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국가는 불교나 풍수지리, 무속신앙을 포섭했다. 종교집단 또한 국가에 매우 순종적이었고,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정치도 종교적이거나 이념적이지 않았다. 중세 유럽 정치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고려 정치는 매우 세속적이었다.

14세기 중엽 이후 한국 정치는 이념화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성리학을 새로운 세계관으로 받아들인 신진 학자들이 불교의 형이상학을 강력히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교가 인간의 정신적, 정치적 삶 자체를 오염시켰다고 생각했다. 특히 가족과 국가 안에서의 삶을 부차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본 불교의 가르침에 강력히 반발했다. 인륜을 파괴한다고 본 것이다. 부모에 대한 효와 군주에 대한 충을 근본적 의무로 여긴 유학의 가르침에서 보면 당연하다. 조선 건국은 한국인의 정신은 물론 가족과 국가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조선 건국이 정치적 사건이자 문명적 사건인 이유이다.

공양왕, 혁명파의 숙청 시도를 차단하다


▎이성계가 면박을 주면 공양왕이 울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사진은 이성계를 연기한 드라마의 한 장면. / 사진:SBS
1391년 척불논쟁에는 정치적 의도도 깊이 숨어 있었다. 공양왕은 4월의 구언교서를 통해 회군 이후 집요하게 이뤄진 혁명파의 숙청작업을 차단하고자 했다. 이 시도는 정몽주와의 협의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쟁에 지친 이성계도 여기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자 그동안 배후에 숨어있던 정도전이 투쟁의 전면에 나서서 극렬한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정몽주는 이를 제압하고 정국을 반전시켰다.

5월, 정도전은 이색과 우현보의 처형을 주장하는 상소를 도당에 올렸다. 6월에 척불과 호불 논쟁이 불붙은 가운데, 사헌부는 이색을 탄핵해 유배시켰다. 간관들 또한 세 차례나 상소를 올려 우현보도 유배시켰다. 그러나 이것도 극형을 주장한 정도전의 바람과는 거리가 있었다. 공양왕은 정도전을 다시 정당문학에 임명했다. 그를 달래려는 조치였지만, 정도전은 칭병 사직했다. 불만의 표시였다. 공양왕은 대언 안원을 보내 정도전을 입궐토록 했다. 간절하게 청했다고 한다. 공양왕은 이색과 우현보의 죄가 무엇인지 물었다. 정도전은 5월 상소의 주장을 자세히 개진했다. “폭포처럼 거침이 없었다”고 한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7월)

그러자 왕은 “이색은 죄상이 조금 드러났지만 우현보의 죄는 아직 명백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색을 양보하고, 우현보는 끝까지 지키려고 한 것이다. 우현보의 손자 우성범은 공양왕의 둘째 사위였다. 정도전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색의 죄는 이미 드러났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 불충한 죄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우현보는 귀양으로 족하다고 답했다. 우선 이색이라도 처형시키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공양왕은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색과 우현보의 일은 정지시킨 지가 이미 오래인데 지금도 상소를 올리는 자가 있으니, 반드시 경의 상소에 따라 하는 것이다.” 공양왕은 1년 전 1390년 7월 대사면령을 내렸다. 아버지·조부·증조·고조 4대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이를 기념해 내린 것이다. 정몽주의 요청이었다. 그때도 사헌부와 형조는 윤이·이초사건 관련자의 처벌을 계속 요구했다. 그러나 정몽주는 “사면을 받았으니 다시 논죄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사면령은 혁명파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4개월 뒤인 11월에는 우현보와 이색을 사면했다.

정도전의 상소, 이성계의 사직 압박


▎고려사 열전의 정몽주 편. 정몽주는 고려의 중흥을 꿈꿨다.
1391년 5월 이래 이색, 우현보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가 거세졌다. 공양왕은 그 까닭이 정도전의 5월 상소에 있다고 봤다. 그리고 정도전의 배후 조종을 완곡하게 비판했다. 또한 “경이 요즈음 과인을 보지 않는 것도 또한 이 일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신하로서 불경죄에 해당한다는 지적이었다. 공양왕의 화법이 다소 단호해졌다. 그는 이성계파의 핵심 인물인 정도전에게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고 경고했다. 정도전은 곤란한 상황을 격식 있는 말로 치장해 무마하고자 했다.

“군신의 의는 정의가 부자와 같으니, 비유하건대, 아버지가 아들의 불효한 것을 꾸짖고도 그 이튿날 또 사랑하기를 그전과 같이하는 것은, 천리는 가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에 무슨 부자의 정이 있겠는가. 왕의 경고를 아버지가 아들을 꾸짖는 사랑으로 얼버무려, 실상을 감추려 한 것이다. 핵심은 다음 내용이다.

“혹시 간당이 교지를 거짓으로 꾸며서 신을 죄주더라도 신은 면대하여 아뢴 후에야 죄를 받겠습니다.” 정도전은 자신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이에 앞서 6월 28일 이성계가 사직 전문을 올렸다. “정치의 조화는 명군이 재상을 택하는 데 있습니다. 자리만 지키는 신하는 모든 책임이 모이는 자리를 마땅히 현인에게 넘겨줘야 합니다.” 자질 부족을 이유로 3월 28일 제수된 문하시중을 사퇴하는 글이었다.

공양왕은 즉시 불허의 답을 내리고, 좌대언 이첨에게 이성계 자택을 방문하게 했다. “경은 산천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으로 일월 같은 충절을 지녔다. 의리에 따라 회군하여 나라를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며, 명분을 바로잡고 계책을 정하니 신인(神人)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에 나라를 새로 만드는 때에 신하로서의 경의 재능을 번거롭게 하여 바야흐로 함께 정치를 하여 태평을 이루려고 하는데, 어찌 사직을 청탁하며 면하기를 도모하는가?”([고려사])

산천간기(山川間氣)란 산천의 기운을 타고나, 세상에 좀처럼 태어나기 어려운 위인을 뜻한다. 자질로만 보면, 왕이 되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극존의 찬사로서, 신하에 대한 평가로는 지나쳤다. 장의회군(仗義回軍)과 정명정책(正名定策)이란 문구도 위화도회군과 우왕·창왕의 처형을 정당화한 것이었다. 이성계를 과분하게 찬양하고, 그 명분에도 전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게 공양왕의 처지였다.

이런 극진한 비답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출사하지 않았다. 이튿날인 6월 29일, 우현보는 철원에 유배됐다. 공양왕은 이색을 포기했지만 우현보는 끝까지 버텼다.

6월 30일, 왕은 다시 사순(司楯) 황운기를 시켜 이성계를 불렀다. 우현보의 유배로 일단 이성계의 뜻은 관철된 것으로 본 것이다. 황운기가 출사를 강권했다. 이성계는 여전히 응하지 않았다. 이방원을 시켜 다시 사직소를 올렸다. 이성계를 화나게 한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핵심 내용은 두 가지였다. 첫째, “창왕을 세우고 우왕을 맞이해오려고 윤이·이초와 함께 도모한 사람들은 공술과 증거가 이미 명백”하다는 것이다. 둘째, 이 때문에 이색, 우현보의 처벌을 “대간이 스스로 상소하여 죄를 청한 것뿐”이다. 그런데 “이제 신에게 대간을 중지시키라 명하시니 이것은 신이 사주한 것이라 의심하는 것”이다.

이제 이성계의 뜻이 분명해졌다. 첫째는 윤이·이초사건은 조작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공양왕은 의견이 달랐다. “창왕을 세우고 우왕을 맞이하여 윤이·이초와 함께 도모한 사람들은 이미 전해에 의논하였는데, 정황이 아직 분명치 않아서 특별히 사면한 것이었다. 시중도 역시 옳다고 여겼다.”([고려사] 공양왕 3년 6월 30일)

그런데 만약 윤이·이초사건이 창왕을 세우고 우왕을 맞이하기 위한 음모였다면, 그것은 공양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성계보다 공양왕이 더 앞장서 처벌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왜 공양왕은 윤이·이초사건 관련자를 옹호하고 있는 걸까? 윤이·이초사건의 진상을 다르게 봤기 때문이다. 그 관련자들이란 실상 고려 수호파였다. 윤이·이초사건이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한 혁명파의 음모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성계와 정도전이 간관을 사주해 이색, 우현보의 처벌을 집요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게 공양왕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문제는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간관들의 상소를 그만두도록 해달라고 솔직하게 부탁한 것이다. 그 부탁을 받은 이성계의 기분이 어땠을까? 그 말은 공양왕이 이성계의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장의회군이니 정명정책이니, 모든 명분이 다 거짓말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성계가 음흉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거나 다를 바 없다. 공양왕의 의심은 사실이었다. 역사가 증명한다. 그러니 공양왕은 순진한 것이다. “시중의 사직하는 글에서 말한 바는 모두 내 뜻밖의 일에서 나왔다.”

사냥꾼 손에 잡혀 떨고 있는 참새


▎경기도 양주 회암사 전경. 이곳에서 공양왕은 세자와 철야 예불을 올렸다.
그는 이성계에게 간청하면,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고 대간에 대한 사주를 그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강하게 면박하자 겁에 질린 공양왕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능력도 없이 왕위에 있는 것은 시중이 추대한 힘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중을 아버지처럼 우러러보고 있는데, 시중은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는가? … 만약 시중이 사직한다면, 나도 어찌 감히 이 왕위에 있겠는가?”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하니 말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이성계가 끝내 출사를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공양왕의 죽음을 의미했다. 신하의 눈치를 보며 생명을 부지해야 하는 공양왕의 처지는 비참한 것이었다. 사냥꾼의 손에 잡혀 떨고 있는 작고 연약한 참새. 공양왕은 그와 같았다.

이성계는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의 말을 전한 이방원에게 “너는 어찌하여 나를 위해 사직을 청하지 않았느냐?”라고 질책했다. 여기까지 이성계는 정도전과 정확히 보조를 맞췄다. 공양왕이 겁에 질려 울 정도로 강하게 압박한 것이다. 그런데 이성계의 입장은 곧 극적으로 바뀌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7월 5일, 정몽주가 상소를 올렸다. 내용은 창왕 옹립, 김저사건, 윤이·이초사건, 김종연사건, 왕익부사건 등 5개의 죄상에 관한 옥사의 문안을 사헌부와 형조에서 다시 자세히 검토해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야말로 4월 공양왕의 구언교서에 담긴 진정한 의도였다.

“주상께서 왕위에 오른 이후로 성헌(省憲)과 법사(法司)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논핵하기를, ‘아무개는 왕씨를 세우려는 의논을 저지시키고 아들 창을 추대하여 세운 사람이며, 아무개는 역적 김종연의 모의에 참여하여 행재소에서 내응한 사람이며, 아무개는 여러 장수가 천자의 명을 받들어 신우 부자가 왕씨가 아니다 하여 왕씨를 다시 세우기를 의논할 때에,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를 영구히 끊으려고 한 사람이며, 아무개는 윤이와 이초를 중국에 보내어 친왕이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주기를 청한 사람이며, 아무개는 선왕의 얼손을 몰래 길러서 반역을 꾀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여, 장소(章疏)가 여러 번 올라가 비록 주상의 생각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명백한 증거를 드러내지 못하여, 반드시 그 중간에 죄가 있는 자가 부당하게 사면을 입거나, 죄가 없는 자가 누명을 씻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니, 공도로 볼 때 양쪽이 다 잘못인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말하는 자들이 시끄럽게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마땅히 성헌과 법사가 함께 의논하게 하여, 서로 관련된 사람의 옥사(獄詞)와 문안을 다시 자세히 살펴서, 아무개는 죄가 용서할 수 없으니 마땅히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하고, 아무개는 정상이 의심스러우니 마땅히 가벼운 형에 처해야 하며, 아무개는 죄가 없는 데도 모함을 받은 것이니 마땅히 명백히 분변해야 될 것이라는 옥장(獄章)을 올리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상께서 재상들을 불러서 친히 자리에 나아가 심사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없게 한 연후에, 내쫓기도 하고 석방하기도 한다면, 인심이 복종하고 공도가 행해질 것입니다.”

정몽주의 상소는 척불논쟁이 종료된 직후 올려졌다. 공양왕은 척불상소를 올린 성균박사 김초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정몽주는 척불은 유생의 통례임을 지적하고, 관대한 처분을 간청했다. 그로써 척불논쟁은 맥없이 끝났다. 그 논쟁을 주도한 것은 정도전이었다. 척불논쟁으로 공양왕을 곤란에 빠트리고, 정몽주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노림수는 간단히 제지됐다. 정몽주는 곧바로 고려 수호파를 옭아매온 옥사문제로 방향을 바꿨다. 국면을 확실히 전환하고자 한 것이다. 정몽주의 상소가 재상들과 함께 올라간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정몽주가 마침내 도당을 장악한 것이다.

이성계와 공양왕의 과거사 타협


▎경기도 연천의 심덕부 묘역. / 사진:두피디아
9월에 사헌부와 형조가 다섯 가지 죄상에 대해 논핵했다. 당시 사헌부와 형조는 정몽주파가 장악했다. 이 논핵은 사태를 마무리하기 위한 절차였다. 논핵이 올라오자 왕은 정몽주·윤호·유만수·김주 등을 불러 이를 논의하게 했다. 김주는 이색이 창왕 옹립을 제기했으므로, “이색의 죄가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몽주 등은 창왕의 근친인 조민수가 옹립을 주도했으며, 이색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색의 죄는 응당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해야 될 것”이다. 왕이 최종 판결을 내렸다. 조민수·변안열은 가산을 적몰하고, 이을진은 법대로 죄를 처단하고, 지용기와 박가흥은 예전의 처벌 그대로 하고, 우인열·왕안덕·박위는 지방에서 편리한 대로 살게 하며, 나머지는 모두 서울이나 지방에서 편리한 대로 살게 했다.

그리고 정몽주가 왕에게 아뢰어 명령을 만들었다. “앞으로 다시 이 일을 논핵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죄로 논할 것이다.” 마지막 조치가 가장 중요했다. 이로써 위회도회군 이후의 모든 옥사를 종결시킨 것이다.

7월 정몽주 상소 직후 도당도 중요한 상소를 올렸다. 고발을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였다.

“모든 국가의 이해와 군기의 중대한 사무나 간인의 죄상을 고발하는 자는 마땅히 날짜와 달을 명백히 기록하고 실제의 일(實事)을 지적하여 진술토록 하십시오. 몰래 익명서를 보내거나 말을 만들어 비방을 일으켜 국정을 교란하는 자는 사헌부와 법사가 엄하게 살피게 하십시오. 사실이 드러나서 탄핵을 당한 자는 종친과 귀척을 불문하고, 위에 아룀을 기다리지 말고 바로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하여 논죄해야 할 것입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7월)

위회도회군 이후 발생한 모든 정치적 사건은 진위가 불분명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이 유배당하고, 고문받고, 목숨을 잃었다. 그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근원부터 봉쇄하자는 것이다. 5개의 죄상을 명백히 확정하자는 건의에 이은 후속 조치였다. 그러나 공양왕은 주저했다. 사실이 드러나면 누구든 왕의 허락 없이도 논죄하자는 내용 때문일 것이다. “왕이 한참이나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다가 그제야 이를 허락하였다.” 나름대로 계산을 깊이 한 것이다.

이에 앞서 7월 9일, 이성계는 돌연 궁궐에 입궐해 왕에게 사은했다. 공양왕은 이성계의 노고를 매우 정성스럽게 위로했다. 다 죽은 것으로 생각했을 공양왕으로서는 감지덕지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왕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인주의 일신에 만기가 모이니, 사람들을 응접할 때에 가벼이 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요체는 오직 마음을 비우고 뜻을 바르게 하여, 간언을 받아들이는 데 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이렇게 마음먹으신다면, 신들 또한 어진 이를 들이고, 불초한 이를 물리치는 것을 죽임으로 삼아 함께 다스리는 도를 이루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고집부리지 말고 대신의 말을 잘 들으면 협조하겠다는 것이었다. “왕이 깊이 옳게 여겼다”고 한다. 이제 끝난 것처럼 보였던 이성계와 공양왕은 이렇게 화해했다.

이튿날, 왕은 이성계의 저택에 행차해, 도움을 간청했다. “내가 경험도 없이 외람되이 보위에 앉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또한 이제 법제를 갱신하려고 하니, 경은 물러나 쉬지 말고, 나의 부족한 부분을 바로잡아 달라.” 술자리가 베풀어지고 곡이 연주됐다. 모임은 밤늦게 끝났다. 두 사람의 위태로운 관계는 일단 이렇게 회복됐다.

이틀 뒤인 7월 12일, 순녕군 왕담과 성균사예 유백순이 유배됐다. 이들은 위화도회군, 창왕 옹립에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정도전 등이 제2의 무신 난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 전제 개혁에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판전의시사 유백유도 광주에 유배됐다.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진정성을 보여준 것이다.

고려왕조의 중흥과 역성혁명의 간극

나흘 후인 7월 14일, 이성계와 둘째 부인 강씨가 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양력 8월 14일이니, 여름 더위가 한창일 때였다. 왕은 이성계에게 옷·갓·보석으로 만든 갓끈·안장 갖춘 말을 하사했다. 이성계는 바로 옷을 입고 은혜에 감사드렸다. 두 사람의 화해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밤이 깊어지자, 문하평리 유만수가 궁궐 문을 잠갔다. 이를 알아챈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밖으로 나오도록 전하고, 궁문 열쇠를 관장하는 관리 금직(金直)에게 문을 열도록 했다. 왕에게 알리지도 않고 주연 자리를 떠나 궁궐을 빠져나온 것이다. 신하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귀가 중 이성계는 말 위에서 이방원을 돌아보며 “갓끈이 실로 진기한 물품이니, 내가 너에게 전해 주겠다”고 말했다. 이방원의 민첩한 조치를 평가한 것이다. 이튿날 왕은 노하여 금직을 가뒀다. 그러나 이성계가 입궐해 술을 못 이겨서 문을 열게 하였다고 사죄했다. 두 사람은 신뢰의 분위기를 한껏 연출했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전혀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대궐문을 잠근 유만수는 무장 출신이다. 그는 대체로 이성계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이방원은 이성계의 안전에 극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유만수는 위화도회군에 참여해 회군공신에 책봉됐다. 정몽주가 죽었을 때는 이성계 휘하의 군관 270여 명을 거느리고 정몽주의 처벌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직후 불효를 이유로 유배됐다가, 조선 건국 후 원종공신에 책봉됐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의 무리로 몰려 이방원에 의해 참살당했다.

정몽주는 제2차 연립정권을 성공시켰다. 제1차 연립정권은 1389년 9월에 성립했다. 그 본질은 정치세력들의 공존에 있었다. 1차 때는 이색이 문신세력, 이림이 외척세력, 이성계가 무장세력을 각각 대표했다. 연립정권의 궁극적 목적은 왕조의 개혁과 안전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었다. 위화도회군을 역성혁명이 아닌 개혁으로 한정시켜, 고려왕조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자 했던 것이다. 1389년 창왕과 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식적 목표도 고려왕조의 ‘중흥’이었다. ‘중흥’이야말로 정몽주의 정치적 목표를 가장 잘 대변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세자 후계권 굳히기 프로젝트

정몽주는 전제 개혁에는 유보적이었다. 그러나 우왕과 창왕의 처형에는 참여했다. 왕조정치의 금기를 넘어선 것이다. 왕조 하에서 ‘중흥’의 정치적 한계는 그만큼 위태로운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왕조의 수호를 택했다. 개혁이 진행될수록 왕조의 보존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어떤 선의를 갖고 있든, 왕은 가여운 희생물에 불과했다. 정몽주는 그 점을 너무도 생생하게 목격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도 결국 이색의 길을 택한 것이다.

정몽주가 방향을 선회한 것은 1390년 7월부터였다. 그는 대사면령을 통해 일단 혁명파의 정치적 공세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 결과 이성계파 내에서도 큰 혼란이 발생했고, 이를 역전시키기 위해 정도전이 전면에 나섰다. 마지막 키는 이성계에게 있었다. 6월까지 이성계는 공양왕을 철저히 궁지에 몰아넣어 굴복시켰다. 하지만 7월 들어 이성계는 돌연 방향을 바꿔 공양왕과 공존하는 길을 택했다. 정몽주가 가장 바란 길이었다.

8월은 소강기였다. 9월부터 혁명파에 대한 공세가 본격화됐다. 가장 먼저 제거된 것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사헌부와 형조를 배후 조종한 한 혐의로 봉화에 유배됐다. 10월에는 직첩과 녹권이 박탈되고 나주로 이배됐다. 아들 정담과 정진도 삭탈 관직됐다. 윤이·이초사건의 공로자인 대사헌 조반도 유배되고, 남은은 사직했으며, 유원정도 유배됐다. 반면 11월부터 고려 수호파가 대거 복권돼 중앙정계로 돌아왔다. 이색과 이숭인도 소환됐고, 12월에는 이색과 우현보가 복권됐다.

이성계는 이 사태를 수수방관했다. 그 결과 혁명파는 거의 궤멸 상태에 빠져 목숨조차 위태로운 지경이 됐다. 이로써 고려 수호파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했다. 혁명파의 공세를 차단하고 그들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이성계를 포섭해 자파세력을 복권하고 중앙정계를 탈환했다. 정몽주의 정치적 구상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다음으로 고려 수호파가 힘을 쏟은 것은 세자의 후계권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궁극적 목적은 세자를 중국에 입조시켜 조현(朝見)하게 하고, 중국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는 것이었다. 중국의 공인은 왕조의 안전판이었다. 공양왕의 세자는 왕석(王奭)으로, 1389년 11월 16일 세자가 되었다. 1390년 2월 6일에는 세자를 위한 서연을 열었다. 문하평리 조준 등이 사부였다. 1391년 2월 4일, 남경 천도 길에 생일을 맞은 공양왕은 회암사에서 불사를 대대적으로 열고, 세자와 함께 철야 예불을 올렸다. 이튿날에는 세자와 함께 승려들에게 1200필의 베를 시주했다. 2월 20일에는 이원굉의 딸을 세자비로 맞았고, 23일에는 백관의 혼인 하례를 받았다. 그리고 2월 24일에는 신종의 능인 양릉에 참배하고, 공양왕의 아버지 정원군 왕균의 어진을 모신 효신전에 제사를 올려 환도를 고하게 했다. 고려 20대 왕 신종은 공양왕의 7대 조이다. 3월 3일에는 도당의 건의에 따라 세자 책봉례를 행하기로 결정했다. 8월 15일 세자에게 책서와 인장을 하사했다. 신하들은 세자의 책봉을 축하했고, 세자는 태묘에 책봉 사실을 고했다. 세자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모든 조치가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조선왕조 개국 1년 전의 구도

1391년 7월 14일, 예조판서 한리는 처음으로 세자의 중국 입조 문제를 언급했다. 명이 1만 필의 말을 요구했는데 공양왕 즉위 후 2000필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명의 문책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8월 19일 말 2500필을, 12월에는 말 1000필을 바치게 했다. 9월 2일에는 안노생을 세자의 입조 시 서장관으로 삼았다. 9월 22일, 마침내 세자 왕석이 중국에 입조하기 위해 출발했다. 신년 하례식에 파견되는 하정사였다. 외교문서인 “표전(表箋)과 주계(奏啓)에는 모두 ‘장남 정성군(定城君) 석(奭)’이라고 칭하였다.” 명나라로부터 아직 세자 책봉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행원은 시중 심덕부, 찬성사 설장수, 밀직부사 민개였다. 심덕부는 사면된 직후였다. 이성계에 이어 무장 서열 2위였다.

설장수는 부친 설손 때 홍건적의 난을 피해 1358년 중국에서 귀화한 위구르인이다. 중국어에 능통해 고려 말 조선 초 대명 외교를 담당한 핵심 인물이다. 심덕부와 함께 그는 공양왕을 추대한 9공신의 일원이었다. 이성계 진영의 거물들이 세자의 입조를 동행한 것이다. 민개는 이성계 휘하 인사들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때 찬성하지 않은 인물이다. 당시 명나라 수도 남경까지 사행이 길을 왕복하는 데는 약 6개월이 걸렸다. 세자는 이듬해 3월 24일 개경에 돌아왔다. 그런데 그를 영접하려 이성계가 황주에 갔다가 큰 낙마 사고를 당했다.

1391년 12월, 주원장은 환자 강완자독(康完者篤) 등을 보내 조서를 내렸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되고 고려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이 국경에서 피살된 이래, 명나라는 끝없이 고려에 위협을 가했다. 신하가 왕을 시해했으며, 책임 있는 집정대신이 입조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구체적으로는 이인임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때의 조서는 당시 고려의 내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었다. 황제는 선물로 비단 2백 필도 보냈다.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비로소 정상화된 것이다.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 이래 고려의 대외관계는 격변을 겪어왔다.

어쨌든 1391년은 왕조 수호파에게 득의의 해였다. 정몽주가 왕실 수호의 의지를 분명히 굳히고, 이성계도 역성혁명을 유보하고 정몽주와 제휴했다. 또한 이색 등 왕조 수호파가 모두 복권됐고 세자의 정통성까지 공고해졌다. 이성계가 다시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왕조가 무너질 위험은 일단 사라졌다.

한 해가 끝날 무렵 11월 말 좌대언 이첨이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요점은 ‘어떻게 하면 왕업을 이룰 것인가’였다. 그는 9가지 항목으로 나눠 공양왕의 정치를 차례로 논평했다. 아홉째 항목은 ‘왕업을 보전하는 것’(保業)이었다. “국가란 것은 중한 기물이니, 얻기도 지극히 어렵고 지키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 요점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매우 조심하며 덕을 닦고 인을 행하여, 선왕의 업을 보전할 뿐입니다.” 고려의 왕업을 조심조심, 큰 집을 지키는 것처럼 행하라는 고언이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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