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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43)] 일제 강점기 만주 벌판의 ‘여자 안중근’ 남자현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의병 남편 전투에서 잃은 뒤 기독교로 귀의해 독립운동에 매진
사이토 총독·무토 만주 대사 암살 시도하다 체포돼, 옥중 단식 등 비타협적 투쟁


▎이병철 광복회 영양분회장(왼쪽)이 영양군 석보면 남자현 지사의 생가에 새로 세워진 동상 앞에서 이영재 영양군 학예연구사와 함께 지사의 생애를 회고하고 있다.
1932년 3월 일제는 대륙에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운다. 조선이 나라를 빼앗긴 지 23년째 되는 해다. 나라를 되찾겠다며 만주로 건너간 항일지사들의 활동이 더 어려워졌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은 70세에 병을 얻어 그해 5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절망의 세월이다.

실의에 빠져 있던 만주의 한 독립운동 지사(志士)가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국제연맹이 만주로 중·일 분쟁조사단(단장 리튼)을 파견한다는 신문기사였다.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국제 여론이 조성되자 국제연맹이 현장에 대표단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지사는 이때야말로 우리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손가락을 잘라 혈서로 그 뜻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하얼빈의 중국인 음식점에 들러 왼쪽 넷째 손가락 두 마디를 잘랐다. 이어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 이란 다섯 글자를 쓴다. 독립을 원하는 민족의 열망을 붉은 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혈서와 자른 손가락을 흰 천에 싼 뒤 국제연맹 조사단에 전할 기회를 노렸다. 그는 바로 여성의 몸으로 의열 투쟁의 전면에 나섰던 남자현(南慈賢, 1872~1933) 지사다.

광복절 다음 날인 8월 16일 남자현 지사의 생가가 복원된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 들렀다. 911번 지방도에 인접한 생가는 조성된 지 올해로 20년째다. 도로 양쪽으로 길게 무궁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생가에는 지난해만 해도 보이지 않던 조형물이 들어섰다. 올 초 세워진 남 지사의 동상이다. 단지(斷指)한 왼손과 혈서가 쓰인 흰 천을 오른손에 든 바로 그 모습이다. 이병철(70) 광복회 영양분회장은 현장에서 “올해 생가 뒤에 새로 지을 기념관에 들어설 동상을 임시로 세웠다”고 설명했다.

혈서는 이후 어떻게 됐을까. 국제조사단이 파견되면서 경계가 삼엄해졌다. [남자현]이란 평전을 쓰고 20여 년간 그를 연구하는 강윤정 경북 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기회가 오지 않아 인력거꾼에게 1원을 주고 부탁했으나 혈서는 조사단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성패와 관계없이 혈서는 의(義)의 실천이었다.

체포된 김동삼 면회하고 구출작전 세워


의열 투쟁에 앞서 남 지사는 큰 임무를 수행한다. 5년 전인 1927년이다. 남성도 좀체 해내기 어려운 무장활동이다. 지사가 순국한 뒤 [조선중앙일보](1933년 8월 26일)에 기사가 실리면서 당시 그의 역할이 알려졌다.

“남자현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1927년 4월 박청산·김문거·이청수 등과 함께 길림성에서 계획을 세웠다. 4월 중순 드디어 남자현은 김문거로부터 권총 한 자루와 탄환 8발을 받아 직접 서울로 숨어들었다. 혜화동 28번지 고 아무개 집에 머물며, 교회 신자로 변장하고 총독 암살을 준비했다. 그러나 남자현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는 당시 만주지역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 정의부(正義府) 의용군 자격으로 이 임무를 맡은 것 같다는 게 강윤정 부장의 분석이다. 54세 여성이란 의외성을 활용했을 수 있다.

기사에서 보듯 거사는 실패했다. 관련 자료는 발견된 게 없다. 대원 중 누군가가 체포되면서 거사는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남 지사의 활동은 1931년 다시 드러난다. 그해 10월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의 최고 지도자 김동삼이 체포돼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구금되면서다. 누구도 그와 접촉할 수 없었다. 남 지사의 시댁은 김동삼과 같은 의성 김씨다. 그게 연결고리였다. 남자현은 위험을 무릅쓰고 친척으로 가장해 김동삼을 면회하고 바깥소식을 알렸다. 거기서 그가 곧 신의주로 이송된다는 기밀을 포착한다. 남 지사는 김동삼 구출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송 날짜가 갑자기 바뀌면서 작전은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한다. 실패의 연속이다. 남 지사는 시름이 깊어졌다. 그 무렵 일제가 만주국을 세웠다.

1933년 3월 1일.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5년째이자 만주국이 첫돌을 맞는 날이다. 만주국 1주년 행사에 일본 육군 대장으로 관동군 사령관이자 만주국 대사인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가 참석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실의를 딛고 혈서까지 썼던 남 지사는 다시 동지들과 적장 암살 계획을 세운다. 2015년 배우 전지현이 주연한 영화 [암살]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다. 그 영화로 남 지사의 존재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33년 1월 20일 남 지사는 조직원 등과 무기 조달방법을 논의한다. 권총 한 자루와 탄환, 그리고 폭탄 2개. 2월 27일 오후 4시 남강 길림가 4호 문 앞의 붉은 천을 신호로 무기든 과일 상자를 전달하는 것이 임무 중 하나다. 2월 22일 남 지사는 인근 사진관에서 최후가 될지도 모를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음 날 오전 10시 노인 행색을 한 남 지사는 거사 장소를 확인하고 무기 운반에 들어갔다. 그러나 운은 이번에도 따르지 않았다. 남 지사는 거사 직전인 2월 27일 밀정의 고발로 하얼빈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잡지 [부흥](1934)에 그 무렵 또 다른 일화가 소개돼 있다. 적의 추격을 받던 남자현이 조선인 순사에게 붙들린다. 지사는 어이가 없어 책망 반 설득 반으로 말한다. “내가 여자의 몸으로 이같이 수천 리 타국에서 애쓰는 것은 그대와 나의 조국을 위함이거늘, 나를 체포하는 것은 조선인 자네 스스로를 체포하는 것과 다름이 없소.” 폐부를 찔린 순사가 그를 놓아주지만 남자현은 결국 붙잡힌다.

남 지사는 체포된 뒤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여섯 달 동안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그는 결단을 내린다. 이렇게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항거한다며 단식에 들어간다. 그는 음식을 끊고 사경을 헤매자 병보석이 내려져 풀려났다. 남 지사는 한 여관에서 아들과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풀려난 지 닷새 만인 8월 22일 60세로 순국한다. 그는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유해는 하얼빈 공동묘지에 묻혔다. ‘여자 안중근’으로도 불리는 독립투사의 삶은 이렇게 끝났다. 남 지사는 어떤 길을 걸었기에 여성으로서 이토록 담대할 수 있었을까.

“장계향이 사표(師表)가 됐을 것”


▎남자현 지사의 마지막 모습.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이 임종을 지키고 있다. / 사진:독립혈사]
이영재 영양군 학예연구사가 자료를 들고 현장에 왔다. 남자현은 1872년 영양에서 1남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출생지와 관련해 가까운 후손인 안동의 남태승(67)씨는 “송리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사는 대대로 살았던 안동시 일직면 송리에서 태어나 5~6세 무렵 영양으로 이사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아버지 남정한은 석학 이수영의 문하에서 10년 동안 수학하고 일대에 70여 명의 제자를 기른 이름난 학자였다. 이수영은 한글 고(古)조리서 [음식디미방]을 남긴 장계향의 8대손이기도 하다.

남자현이 살았던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와 장계향(1598~1680)이 살았던 석보면 두들마을의 거리는 불과 2.8㎞ 지척이다. 장계향은 학문이며 자녀 교육, 효와 충 등이 선비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퇴계학을 실천한 여중군자다. 남자현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남자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부친 남정한이 일찍부터 글을 가르쳤는데 7세에 한글을, 8세에 한문을 터득했고 12세에 [소학]과 [대학]을 읽었으며, 14에는 사서(四書)를 독파하고 한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소녀 시절에 선비 공부를 한 것이다. 아쉽게도 남긴 글이 없어 그 깊이를 확인할 길은 없다.

남자현은 19세에 인근 김영주(金永周, 1871~1896)와 혼인한다. 불행히도 두 사람의 인연은 5년 만에 끝났다. 나라의 운명 때문이다. 1896년 7월 의병이 된 남편은 흥구리 전투에서 사망했다. 25세 꽃다운 청년이었다. 남자현은 아이를 배고 있었다. 사별 직후 그는 한동안 홀로 시어른을 모시며 유복자를 길렀다. 시어머니를 잘 봉양해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의병 지아비의 죽음은 남자현의 남은 삶을 ‘남편의 원수’를 갚는 의병으로, 또 독립투사로 바꿔 나간다.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버릴지언정 옳은 일을 하겠다는 의병 정신은 이제 자신의 길이 된다. 그 길은 전통 가치관인 여자가 따라야 할 삼종지도(三從之道)이기도 했다.

생가 한쪽에 세워진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쓴 ‘남자현지사항일순국비’에는 “1907년 친정아버지 남정한을 따라 의병전쟁에 투신했으니 지사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이것이 시작”이라고 돼 있다. 남자현은 죽은 남편의 피 적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이강훈이 정리한 [남자현 여사]에는 “남정한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자택을 임시 의병장 영소로 삼고 활약할 때 남 여사는 장정 소집과 정보 수집 책임을 지고, 적의 후방 교란 등 여성으로 대담무쌍한 활약을 했다”고 적혀 있다.

기독교에 귀의해 만주에 교회 12곳 세워


▎경북 영양의 남자현 지사 생가. 생가 뒤편으로 기념관이 조성된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남자현의 시댁 친척은 하나둘 만주로 떠났다. 그는 바로 동행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노모와 15세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5년 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다. 1917년 시모의 삼년상을 마친 남자현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아들 김성삼(金星三)을 먼저 만주로 보낸다. 미리 떠난 친척의 현지 사정 등을 살피기 위해서다.

1919년 2월 남자현은 드디어 아들 내외와 함께 만주로 가고자 영양을 떠났다. 3·1운동 직전, 50세를 바라보는 나이였다. 서울에 도착한 지사는 먼저 교회당에서 동지들을 접촉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한다. 그는 그 과정에 기독교 신자들의 희생정신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된다. 그러잖아도 자신과 조국을 생각하며 신앙이 절실하던 시기였다. 이후 남 지사는 길림성 통화현으로 들어간다.

영양군 남 지사의 생가에는 영정을 모신 추모각이 있다. 이병철 분회장의 안내로 묵념을 올렸다. 이 분회장은 “추모각을 세운 뒤 그동안 지역 유림이 중심이 돼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중단이 됐다”는 말을 했다. 남 지사가 교회를 다녔는데 자칫 유교식 제사가 누가 될 수 있다는 마을 어른의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3·1운동 뒤 일제 탄압을 피해 만주 망명은 늘어났다. 이상룡·김동삼 등은 신흥무관학교를 확대하는 등 독립전쟁을 준비한다. 군정부도 세운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정부는 산하 조직인 군정서로 개편됐다.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도 그중 하나다. 남자현은 이 조직에 몸을 담는다.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의 구술에 따르면 당시 여성들은 광목과 솜뭉치를 쌓아 놓고 대량으로 대원들의 옷을 만들고 먹을 것을 준비했다. 독립군을 건사하는 어머니의 역할이다. 1920년 남자현은 북간도로 옮겨간다. 길림성 액목현이다. 일본이 대대적으로 독립군 토벌에 나서면서 서로 군정서가 이동한 것이다.

남자현은 액목현을 중심으로 인근에서 교육활동과 여성 계몽에 주력한다. 여성도 글을 배워야 남편과 아들을 도와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망국의 설움을 벗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도처에 교육기관을 만들고 북만주 12곳에 교회를 세웠다.

남자현은 그 무렵 분열돼 있던 독립군단의 통합에도 힘을 보탠다. 이후 김동삼이 이끄는 통의부란 조직이 등장한다. 통의부는 1924년 정의부(正義府)로 재편된다. 남자현은 이상룡·김동삼 등 출중한 투사들과 함께 일하면서 강인한 지사로 변해갔다. 남 지사가 이후 사이토 총독 암살이란 임무를 수행할 때도 이 정의부에 소속돼 있었다. 이곳에는 오동진 등 기독교 인사가 많았다. 남 지사에게 기독교 신앙은 독립운동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하느님 나라의 의(義)는 곧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의를 구현하는 길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강윤정 부장은 “신앙은 남 지사가 신념을 밀고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며 “그가 독립운동 내조에 그친 허은 등 다른 여성 지사들과 다른 길을 걸어간 바탕”이라고 분석했다.

조소앙, 남 지사 기백에 ‘여협사’ 칭송


▎생가의 추모각. 영정 사진은 [독립혈사]에 전한다.
남 지사의 무장활동이 드러나는 것은 사이토 총독 암살 시도와 관련한 활동부터다. 그는 그때부터 만주 벌판을 무대로 나라 위해 온몸을 바친다. 독립운동가 조소앙은 일찍이 그의 기백을 보고 ‘여협사(女俠士)’로 지칭했다.

정부는 지사의 독립정신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서훈 2등급. 한국 여성으로 유일한 최고 훈격이었다. 그 지위는 안타깝게도 올해 달라졌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정부가 유관순 열사를 3등급 독립장에서 1등급 대한민국장으로 2계단 승격시켰기 때문이다. 천안시의회의 훈격 상향 추진 서명과 열사의 3·1운동 상징성 등을 살린 것이다. 남자현 지사 성역화 사업을 주도해 온 이병철 광복회 분회장은 “이건 아닌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다행이라면 올해 영양군 생가 뒤에 남 지사를 기리는 유물전시관 등 기념관이 삽질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생가를 돌아보던 날 쏟아지던 소나기가 그치고 하늘에 무지개가 선명했다.

[박스기사] ‘독립 축하금’으로 남겨진 유산 248원 - 남 지사의 외아들 김성삼 비망록에 담긴 독립의지

남자현 지사의 외아들 김성삼은 1975년 [나의 생애]라는 비망록을 남긴다. 80세를 맞아서다. 거기에 어머니의 최후와 유언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독립운동가 모자(母子)의 정신이 느껴진다. 일부를 소개한다.

“1933년 모친 남자현 여사는 하얼빈에서 왜경에 체포됐다. 그 후 3차에 걸쳐 모친을 면회하고 나는 그해 8월 안동현과 신의주에 가서 소식 없이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모친이 보고 싶어 하얼빈으로 달려갔다. 집에 당도하니 어머니는 8월 6일부터 옥중 단식으로 ‘命在(명재)경각이라, 病急卽來(병급즉래)’라는 전보가 46장이나 쌓여 있었다. 하얼빈 감옥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모친을 뵌 지 6시간. 모친은 그때 유언을 하셨으니, ‘너의 원수는 네가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 우리 독립은 정신이다’라고 하면서 옷깃을 뜯어 하얼빈 화폐 248원을 끄집어내 내게 주셨다. ‘이 돈을 우리나라 독립 축하금으로 바쳐라. 만일 너의 대(代)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도 유언하여 실행하라’ 하셨다. 그리고 이어 ‘손자를 대학 공부시켜라. 친정 문호(門戶)를 이어 달라’는 말씀을 끝으로 이날 정오 순국하셨다. 나는 모친 유언을 다음과 같이 실행했다.

첫째, 독립축하금은 1946년 3·1절 기념식 때 만주화폐 200원과 조선은행권 200엔을 설명서와 동봉, 김구 선생에게 드리고 모든 사유를 말씀드렸다.

둘째, 손자(김시련) 대학 공부시키는 문제는 그 당시 그곳에 대학은 없었지만 우선 소학교를 마치고 간이학교를 거쳐 중국 신문광고에 내몽고 부여현 농업고등학교 학생모집을 보고 찾아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생 80명 가운데 5등으로 졸업한 후 하얼빈에 농과대학이 설립돼 무난히 합격, 대학을 졸업했다. 현재 대한민국 경북 김천농고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셋째, 친정 문호를 이어 달라 하신 말씀은 내가 모친 묘에 비석을 세우고 우리나라로 들어와 친정 종손 남재각을 찾아 만주로 데리고 가부자 상면시키고 공부를 시켰다. 그는 용정사범학교를 마치고 한국에 와 영주초등학교 교감을 지내고 가족이 10여 명, 대학생이 2명이나 된다.”

김성삼은 이후 육군사관학교 특채 8기로 6·25에 참전한다. 아들 중 김시복은 신문기자를 거쳐 국가보훈처 차장을 지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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