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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바이든 시프트’ 걸림돌 트럼프의 유산] 보호주의 무역과 반이민 정책의 퇴장 

‘사회적 분노’ 못 잡으면 정치적 이단 다시 출현한다 

보호무역, 대기업 감세 등 트럼프 정책은 ‘엘리트 집단’ 혐오의 결과물
자유무역의 성과 취해 ‘승자독식’ 방관한 민주당의 반성이 선행돼야


▎미 대선 캠페인이 치러지던 2020년 9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플로리다 주 잭슨빌의 한 공항에서 연설하고 있다. / 사진:로이터/연합뉴스
미국 대선이 치러진 지 한 달이 넘게 지났음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지 않고 있다. 뒤늦게 조 바이든 당선인이 정권 이양 작업을 하고 있지만, 트럼프는 여전히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끝이 없어 보이는 트럼프의 뒤끝 때문에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 전체가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사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대부분의 여론조사기관은 트럼프의 참패를 예상했다. 세계 최악의 코로나19 감염 국가라는 오명, 인종 갈등과 의료 시스템의 붕괴, 그리고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 양극화가 겹치면서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트럼프는 지난 2016년 선거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승부처로 여겨졌던 애리조나와 조지아에서 불과 0.2~0.3%p 차로 졌다. 이는 트럼프의 그림자가 앞으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트럼프가 남긴 유산은 어떻게, 얼마나 미국과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게 될까? 답을 찾기 전에, 먼저 유산의 정체부터 밝혀야 한다. 정체를 밝히는 데 필요한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미국과 세계 경제에 드리우고 있는 트럼프의 유산이 트럼프라는 한 개인이 초래한 것인지 그 이전부터 누적돼온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 및 정치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의 결과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다시 말해 트럼프가 현재의 미국 정치·경제적 문제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미국의 정치·경제적 문제가 대통령 트럼프를 낳았는지 따져봐야 한다.

루스벨트 업적을 뭉개버린 이단아


▎미국 대선 직후인 11월 14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워싱턴 DC에서 대선 불복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사진:AFP/연합뉴스
이런 질문의 배경에는 트럼프 당선의 최대 공신이 미국 민주당이었다는 지적이 자리 잡고 있다. ‘승자독식’의 고삐 풀린 세계화 과정을 수수방관하면서 미국의 백인노동자뿐만 아니라 유색인종들에게도 민주당이 ‘이기적인 엘리트 집단’으로 비춰졌다는 점이다. 미국 유권자들이 2016년 트럼프를 선택한 것은 효율성의 이름으로 야만의 제도가 확산되는 과정을 그저 바라만 봤던 민주당을 포함한 이기적인 엘리트 집단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트럼프 레거시(Legacy)는 따지고 보면 80년대 이래 미국의 정치경제시스템을 주도해왔던 승자독식의 고삐 풀린 세계화 과정의 레거시로 봐야 한다.

트럼프는 표로 나타낸 민심을 보호무역주의와 반(反) 이민정책, 중국 때리기 등 선동주의적인 정책으로 보답했다. 눈여겨봐야 하는 사실은 2016년에 이어 이번 대선에서도 미국 유권자의 절반이 트럼프에게 ‘묻지마 몰표’를 줬다는 것이다. 이는 승자독식의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노와 불만이 여전하다는 의미다.

‘이단아’ 트럼프가 4년의 세월 동안 남긴 유산은 크게 네 가지다. ▷국제무역체제 및 국제금융체제의 무력화 ▷미국 내 친(親)기업 정책으로 대표되는 산업정책과 대기업 및 부자들에 대한 감세정책 ▷‘오바마케어’의 철회와 그에 따른 저소득층 의료체계 붕괴 ▷극단적인 인종갈등 등을 초래한 사회정책 등이다. 이들 유산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미국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트럼프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구호 하에서 2차대전 이후 세계 정치·경제 질서의 근간이 됐던 다자주의적 국제 규범을 송두리째 흔들었다는 점이다. 가장 심각한 사례는 세계무역기구(WTO)를 사실상 무력화시킨 것이다. WTO는 세계 경제성장을 지탱해 왔던 자유무역 체제의 제도적 틀이었다. 트럼프는 이를 힘의 논리에 의한,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무역 전쟁의 시대로 되돌려 놨다.

트럼프는 집권 초기부터 WTO의 핵심 원칙인 차별금지 원칙과 그에 따르는 최혜국 대우 조항에 정면으로 맞섰다. 트럼프 개인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중국 등 특정 국가를 지목해 임의로 보복관세를 부과하거나 긴급 수입제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WTO의 무역분쟁 해결 기능도 정지시켰다. 국제 무역분쟁의 최종심 역할을 하는 세계무역기구(WTO) 상소 기구의 상소 위원 후임 선출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심리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트럼프의 행적은 안정적인 국제무역질서와 국제금융시스템, 그리고 세계 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통해 국제분쟁 소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역할을 해왔던 ‘브레턴우즈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더 큰 아이러니는 이 브레턴우즈 체제를 제안하고 설립한 주역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는 점이다.

300조 매출 아마존이 내는 법인세는 ‘0달러’


▎2017년 9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노스다코타 주의 한 정유공장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세계 지도자들은 깨달은 점이 있었다. 핵무기 개발로 인해 정치권력의 유지를 위해 반복적으로 확대했던 무역 전쟁과 그에 수반하는 물리적 전쟁은 인류와 지구의 공멸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2차 대전 승전국은 물론 패전국들조차 인류의 절멸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국제질서를 찾고자 했다. 그 고민의 산물이 다자간 자유무역체제 유지를 위한 국제기구인 오늘날의 WTO와 무역 전쟁을 초래하는 환율전쟁을 막기 위한 국제통화기금(IMF), 전쟁방지를 위한 세계 경제의 균형발전을 위한 세계은행(World Bank)를 중심으로 한 브레턴우즈 체제였다.

이후 모든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소속 정당에 상관없이 전후 국제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브레턴우즈 체제를 근본 질서로 발전시켜왔다. 미국이 주도한 안정적인 세계질서의 레거시였던 셈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미국의 업적이자 자랑인 브레턴우즈 체제를 개인의 정치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가차 없이 흔들고 무력화시켰다.

이런 이유로 브레턴우즈 체제와 그 핵심인 WTO를 개인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붕괴시키려 했던 트럼프의 시도와 그 결과 무력화된 오늘날의 WTO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 트럼프의 유산이 될 수는 없다. WTO 체제의 붕괴는 무역 전쟁과 그에 따른 물리적 충돌을 확산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벌써 미·중간 무역 전쟁은 남중국해에서의 미·중간 군사갈등 및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트럼프의 퇴장과 함께 가장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WTO 체제의 복원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사안임을 지난세기의 반복된 무역 전쟁과 그 이후의 세계대전 경험이 분명히 보여준다.

트럼프가 남긴 두 번째 유산은 각종 친(親)기업 정책이다. 경제 활성화 명목으로 기업 법인세를 인하하고 부자 감세 정책을 펼쳤으며, 기업경영에 제약을 주는 환경 규제를 철폐했다. 다자간 환경협약인 파리기후변화협약도 탈퇴했다.

구체적으로 법인세율을 35%에서 21%로 낮추었다. 각종 세액공제 후 실제로 부담하는 실효세율(effective tax rate)은 17.2%에서 8.8%로 낮아졌다. 그 결과 미국 잡지 [포춘]이 선정하는 미국의 500대 기업 중 5분의 1이 법인세를 단 한 푼도 내지 않게 됐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을 비롯해 미국 최대 물류업체인 페덱스(FedEx), 세계 5대 석유회사인 셰브런(Chevron), 세계 최대 커피 체인점인 스타벅스 등이 ‘법인세 0달러’ 그룹에 들어갔다. 세금은 안 내도 주주배당금은 성실하게 지급했다.

트럼프의 감세정책은 미국 다국적 기업들의 해외소득에 대한 조세포탈을 합법화시켰다. 그 결과 대다수의 미국 디지털 서비스 기업들이 미국 내에서 발생한 이익까지 해외이익으로 이전, 최소 1조 달러의 조세포탈이 이루어지는 결과가 초래됐다. 트럼프는 이를 자신의 친기업정책의 치적으로 공공연히 자랑해왔다.

부자만 더 부(富)를 쥐게 한 감세정책


▎외곽의 무인도에서 인부들이 코로나19 사망자의 관을 매장하고 있다. / 사진:로이터/연합뉴스
더불어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400가구의 실효세율은 트럼프의 감세정책에 힘입어 23%(2018년 기준)로 떨어졌다. 소득 하위 50%에 속하는 가구들의 평균세율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또 자산을 증여·상속할 때 2316만 달러(약 260억원·부부합산 기준)까지는 면세하도록 했다. 과거 정부보다 면세 한도를 두 배 높였다. 그 이상 금액의 증여에 대해서도 세율을 크게 낮췄다. 트럼프는 이런 감세 정책이 미국경제의 부활을 가져올 것이라고 지금까지 강변하고 있다.

트럼프가 경제 활성화를 감세 명분으로 삼았지만, 성적표는 신통치 않다. 임기 동안 GDP 성장률은 2%대 중반이었다.(2017년 2.4%, 2018년 2.9%, 2019년 2.3%) 오바마 행정부 8년 평균 성장률(2.1%)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욱이 트럼프는 2017년 취임 당시 성장률 3% 달성을 공언했었다. 임금 상승 폭도 크지 않았다. 2018년 미국 임금상승률은 2.9%로, 금융위기 이전 7년간(2000~2007년) 평균치인 3.3%보다 낮았다.

반면 소득 상위계층은 확실한 혜택을 누렸다. 2019년 미국의 소득 상위 10% 가구가 주식 투자로 늘린 평균소득은 260만 달러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소득증가액 25만 달러의 10배가 넘는다. 트럼프 행정부가 법인세 인하와 부자 감세를 통한 경제 부활을 외치면서도 구체적인 통계수치를 언급하기 꺼렸던 이유다.

감세를 통한 경기회복 정책은 레이건과 부시 등 과거 공화당 행정부에서 숱하게 반복했던 정책이었다. 그러나 한 차례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회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사회경제적 양극화만 키우면서 사회적 갈등 고착화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늘리는 결과만을 초래했다는 것이 통계적 분석의 결과다. 이처럼 감세가 곧 경제 활성화로 이어진다는 단순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은 트럼프의 유산이 분명하다.

트럼프는 ‘자신의 목숨은 자신의 총으로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카우보이 문화를 진작하는 것이 미국적 가치라 말해왔다. 그런 맥락에서 ‘오바마케어(차상위계층을 대상으로 한 공공의료보험)’와 같이 정부 재정으로 빈곤계층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저소득층에 제공되던 기존의 각종 사회보장조치를 철폐하는 것이 미국적 가치에 부합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이런 적자생존, 각자도생의 카우보이 문화에 기반해 트럼프가 취임하면서 취한 최초의 정책이 오바마케어 철폐로 트럼프의 세 번째 유산으로 볼 수 있다. 오바마케어가 철폐되면서 미국의 저소득층 노동자들은 의료보험의 사각지대로 되돌려 보내졌다.

트럼프의 유산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민낯을 보였다. 미국은 세계에서 코로나19 사망자가 가장 많은 국가로 전락했다. 2020년 12월 12일(현지시각) 기준으로 미국의 코로나19 누적 사망자는 30만 명을 넘어섰다. 2차대전에서 전사한 미군 수(29만1500명)보다 많다.

부메랑으로 돌아온 트럼프의 오바마케어 철폐


▎2020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국경지대에서 인부들이 장벽 건설 작업을 하고 있다. 대선 이후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장벽 건설을 강행하고 있다. / 사진:AFP/연합뉴스
미국 내 코로나19 희생자의 상당수는 트럼프에 의해 의료보험으로부터 소외된 저소득층 유색인종이었다. 코로나19와 함께 인종갈등이 확산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이들이 느끼던 소외감은 2020년 5월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하면서 분노로 바뀌었다. 조지 플로이드는 당시 경찰로부터 위조지폐 사용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책임은 당국에도 있다. 그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일자리를 잃은 상태였다. 사후 부검에서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기도 했다. 코로나19 이후 유색인종이 처했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사건 발생 다음 날인 5월 26일 미국 미네소타 주에서 시작된 차별 반대 시위는 2개월 동안 미 전역 2400곳에서 벌어졌다.

오바마케어의 철폐로 인해 코로나19 확산에 무방비로 노출된 저소득층 유색인종들이 주로 희생됐다는 사회적 공분이 확산되면서 그 시위가 폭력성을 띄기도 했다. 트럼프는 이런 시위대를 향해 “이것은 평화적 시위 행동이 아니고, 정말로 국내 테러”라며 폭력성을 부각하며 다시금 저소득층 유색인종들에 대한 폭력적 억압 체제를 합리화시켰다. 이처럼 트럼프의 세 번째 유산은 미국을 1861년 남북전쟁 이전으로 돌리는 퇴행적 유산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트럼프의 마지막 유산은 일자리다. 일각에선 트럼프의 감세정책과 환경규제철폐 등 친기업정책이 적어도 일자리 창출에는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2020년 9월 미국의 신규 취업자가 66만1000명에 달했다는 통계를 든다. 사실 지난 수년 동안 1개월 만에 신규 고용이 이만큼 많이 늘어난 적은 없기에 놀라운 수치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2020년 9월 약 66만명이라는 고용이 이뤄지기 전인 같은 해 3·4월에 걸쳐 총 2200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다시 말해 지난봄에 실직한 사람 중 3%만 일자리를 되찾은 셈이다. 나머지 2100만 명의 노동자는 여전히 실업상태임을 보여준다.

2020년 9월 기준 전체 취업자 수도 지난 2월에 비해 7% 줄었다. 과거 대공황 때보다 큰 감소 폭이다. 또한 2019년의 미국 취업률은 61%이었으나, 2020년에는 56.6%로 하락했다. 물론 코로나19 탓이 컸다. 그러나 2018·2019년에도 트럼프가 약속했던 전통 제조업에서의 일자리 창출은 일어나지 않았다. 디지털(유통) 부문 신규 일자리는 보호무역정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트럼프의 유산으로 보기 어렵다. 보호무역주의의 혜택을 받아 성장한 산업이 아니라서다. 결국 보호무역 정책과 반이민 정책으로 미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되찾아주겠다던 트럼프의 약속은 실현되지 못한 헛된 유산으로 남았다.

우리가 유산을 따지는 경우는 두 가지다. 첫째는 유산 자체가 가지는 자산효과이다. 즉 유산은 지금뿐만 아니라 미래에 걸쳐 일정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의 가치를 가지는 유산에 대해서는 상속인들이 서로 더 많이 물려받으려고 다툼까지 벌인다. 둘째는 유산이 마이너스 가치를 가지는 경우다. 마이너스 유산은 결국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빚인 만큼 상속인들은 서로 부모와의 관계가 없음을 주장하면서 유산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부든 빚이든 결과로서의 유산에 집착했던 상속자와 유산이 만들어졌던 과정과 배경을 깨달은 상속자의 운명은 180도 다르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가족사와 기업사에서 반복해서 관찰할 수 있다.

미국인이 아메리칸 드림 이룰 수 있어야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숨진 조지 플로이드의 동생 테렌스 플로이드가 2020년 6월 1일(현지시간) 추모 벽에서 추모하고 있다. / 사진:로이터/연합뉴스
마찬가지로 한 국가와 문명의 흥망은 물려받은 유산 그 자체의 가치보다 그 유산이 만들어진 과정과 배경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돼왔다. 이런 역사적 교훈은 대다수의 자원 부국이 경제적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혁신국가 상당수는 자원 빈국에서 이뤄져 왔다는 점에 의해서도 반증된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 4년의 트럼프로 물려받은 유산의 현재가치는 서글프기 짝이 없고, 미국 문명의 몰락과정이라고 서술하는 역사학자까지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렇게 미국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탐욕의 무정부 상태로까지 몰고 간 트럼프의 유산이 발생한 과정과 연유를 돌이킨다면, 트럼프의 초라한 유산은 오히려 미국과 인류사의 미래에 새로운 추동력으로 작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 얘기한 트럼프의 유산은 크게 ▷다자간 국제질서의 근간인 브레턴우즈 체제를 붕괴시켜 놓았다는 점 ▷경기회복과 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했던 감세정책과 환경규제 등 기업규제철폐 정책들이 경기회복보다는 양극화와 재정구조 부실화만 초래하였다는 점 ▷보편적 의료보험체계인 오바마케어 철폐 등 사회안전망을 약화시킨 정책이 사회적 갈등구조를 증폭시켰을 뿐이었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트럼프의 슬픈 유산에 대한 진정한 대안은 이를 초래한 구조적 원인을 꿰뚫어보는 노력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2016년 트럼프 당선의 주요 배경은 중국 때리기와 같은 보호무역 정책과 국경장벽 설치 등의 반이민정책을 통해 미국이 이미 경쟁력을 상실해버린 전통 제조업 부문의 일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공약(空約)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패자부활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제거해버린 승자독식의 고삐 풀린 세계화 과정을 미국의 기성정치권이 수수방관했다는 사실이다. 즉 승자독식의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와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누적된 사회적 분노가 ‘이단아’로서의 트럼프가 저지른 각종 국제질서와 사회체제의 붕괴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초라한 트럼프의 유산이 주는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4년 뒤 트럼프가 다시 출마해 다시금 미국과 세계역사를 퇴행시키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트럼프 집권의 가장 큰 추동력이었던 거대한 ‘사회적 분노’를 녹이는 정책들이 집중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민주당을 포함해 전통적인 공화당도 소수 엘리트 집단의 이익만 대변하는 정치조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은 멈춰 서버린 듯한 세계화가 다시 시작되더라도 패자에게 부활의 기회와 꿈을 심어줄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회복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국가 전체의 성장동력을 찾는 것만큼이나 시급한 정책 현안이라는 점을 트럼프의 유산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 김영한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202101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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