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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입수 | ‘풍운아’ 최규선 회고록] 시대를 앞선 ‘경제 구루’ 이건희의 선견지명 

“자동차는 이제 전자제품이 됩니다. 네 바퀴 위에 컴퓨터가 올라앉게 될 겁니다” 

이건희 회장은 돈이 아닌 ‘불굴의 정신’을 유산으로 남긴 우리 시대의 영웅… 자동차를 반도체 이후의 미래산업으로 준비하며 빅딜 반대했지만 끝내 좌절

[월간중앙]은 최규선(61·썬코어 대표이사 회장) 씨가 집필 중인 회고록 일부를 단독 입수해 게재한다. 최씨는 1997년 IMF 사태를 전후로 이름을 알렸던 인물이다. 당시 국가적 위기 속에 치러진 대선에서 최씨는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세계적 팝스타 마이클 잭슨의 김대중 후보 지지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힘써 김대중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2002년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최씨는 자신이 운영하던 유아이에너지와 관련해 사기 및 횡령·배임 사건으로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최씨가 보내온 회고록에는 당시 급박했던 IMF 외환위기 사태의 정황은 물론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자동차를 살리고자 백방으로 애썼던 비화가 담겨 있다. 이건희 회장이 자동차에 왜 그렇게 애착을 가졌는지, 그리고 이 회장의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대한 선견지명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료라고 판단해 싣는다. [편집자 주]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자동차가 미래 전자산업의 총아가 될 것을 내다보고 삼성자동차에 애착을 가졌던 그는 시대를 앞서간 경제 구루였다.
나는 이 땅의 최고 부자이며 세계 일류 브랜드를 창조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사형수에서 세 차례 도전 끝에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에 오른 김대중 대통령, 그리고 영원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까지 부와 권력, 명성을 거머쥔 세계적 인물들과 만나고 교류하는 티케(Tyche, 행운이나 운명)를 누렸다. 그런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있기에 나 스스로를 감히 ‘풍운아 최규선’이라고 불러본다. 이제부터 사납고 거친, 그러면서도 한 편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최규선의 티케를 들여다보자.

이건희 회장과 삼성을 말하기에 앞서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김대중 전 대통령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DJ 어르신(이하 DJ)이 1982~1985년 미국에 망명하고 계실 때 처음 뵀다. 내가 위스콘신주립대에서 유학하면서 국제학생회 회장도 맡아 나름 리더십도 나타내고 있을 때였다. 미국 하원 10선 의원이며, 미 하원 외교위 산하 동·아태 위원장으로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도 면담했던 스티븐 솔라즈 의원도 DJ를 통해 만났다. 솔라즈 의원은 이후 나의 멘토(Mentor)가 되어주셨고 지난 2010년 작고하기까지 어언 20년간 내 회사들의 고문도 맡아주셨다. 그리고 나의 추천으로 삼성자동차가 문을 닫을 때까지 삼성자동차의 고문으로도 활약했다.

나는 미국에서 맺은 DJ와 인연을 바탕으로 DJ가 귀국한 뒤로도 예약 없이 ‘동교동 사저’를 방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방학 때면 여지없이 귀국해 DJ를 찾아뵀으며 1987년과 1992년 대선에 도전해 연거푸 실패한 것 또한 지켜보았다. 그사이 나는 1987년부터 인연을 맺어온 마이클 잭슨의 내한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힘썼다. 1996년 10월, 마침내 잠실 주경기장에서 한국 최초로 마이클 잭슨의 초호화 공연이 두 차례 열렸다. 국내 여러 기획사가 접촉해왔지만 나는 규모가 크고 경험이 많은 삼성의 제일기획을 선택했다. 공연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마이클 잭슨은 방한할 때마다 신라호텔을 이용했는데 이 또한 내가 선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 최고 호텔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내가 마이클 잭슨과 함께 TV 화면과 신문에 나온 것을 보고 DJ가 나를 호출했다. 이번에는 ‘동교동 사저’ 뒤에 있는 당신의 ‘안가’였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2층 양옥집의 2층 서재에서 그와 독대했다. DJ는 내년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마지막 도전을 할 것이니 이번에는 당신 캠프에 직접 관여해 달라고 했다. 이렇게 나는 만 36세에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국제담당 보좌역’으로 내 생애 첫 사회생활에 데뷔했다. 마이클 잭슨의 내한공연 성공으로 나는 당시 돈으로 수십억 원을 벌었다. 외제 차를 타고 다녔고 나 자신이 키가 작고 옷맵시가 나지 않았지만, 명품 브랜드였던 베르사체(Versace) 의상을 입고 다녔다. DJ의 몇몇 비서는 그런 나를 딴 세상 사람인 듯 쳐다보며 베르사체 옷에 빗대어 그들끼리 나를 ‘베르사쓰’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나는 한국 정치를 전혀 몰랐다. 오로지 DJ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는 신념만 있었을 뿐 주위 눈치를 본다거나 세력을 만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마이클 잭슨과 넬슨 만델라의 DJ 지지선언 이끌어내


▎1997년 5월 12일,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을 방문해 시험차량을 시승한 이건희 회장. / 사진:연합뉴스
1997년 5월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가 열렸다.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 후보는 대법관 출신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국무총리와 감사원장을 역임한 ‘대쪽’ 이회창 후보였다. 언론에서는 모두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했다. DJ는 IMF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준비된 대통령’, ‘세계가 인정하는 대통령’을 내세웠다. 하지만 슬로건에 그치지 않고 국민에게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최규선의 ‘홈런’이 연달아 터졌다. 나는 마이클 잭슨을 설득해 마이클 잭슨이 “아빠(Papa)”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웠던 인권투사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냈다. 시들했던 김대중 대통령 후보 전당대회장에 만델라 대통령의 자녀들이 직접 참석해 만델라 대통령이 20여 년 넘게 감옥에서도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DJ에게 전달했다. 나는 이후 마이클 잭슨이 직접 한국을 방문해 DJ 지지 선언을 하는 빅이벤트도 성공시켰다.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서울에 온 마이클 잭슨은 신라호텔 프레지던셜 스위트에 여장을 풀었고 수많은 내외신 기자 앞에서 나의 안내를 받으며 김대중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나는 마이클 잭슨을 통해 지난 1995년부터 인연을 맺고 교류해온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의 국내 대기업 투자도 성사시켰다. 알 왈리드 왕자는 당시 포브스 선정 세계 4위의 대부호이며 미국 월가의 외국인 투자자로서 가장 큰 투자자였다. 무엇보다도 IMF 사태를 맞은 한국의 채권은행 중 하나인 시티뱅크의 최대주주였다. 나는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DJ가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 회장, 그리고 이들의 인맥인 IMF 전직 총재와 미국 전 재무장관들과 함께 뉴욕과 서울을 연결해 화상회의를 개최해 한국에 투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시만 해도 대형스크린을 띄워 화상회의를 할 수 있는 장소는 신라호텔과 KT뿐이었다. 지금이야 줌(Zoom)으로 누구나 실시간 화상회의를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 정도로 IT 기술이 빈약했다. DJ는 처음에 회의 장소를 신라호텔로 정한 것을 못마땅해했다. 내게 왜 힐튼호텔은 안 되는지부터 물었다. 아마도 신라호텔이 삼성그룹 소유라는 점이 걸렸을 것이다. 사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의 주류세력들은 대부분 호남 출신으로 그들에겐 삼성에 대한 비호감 정서가 팽배했다. 실제로 당시 존재했던 실체적 정서였다. 삼성은 역대 선거에서 단 한 번도 DJ를 후원하지 않은 기업이라고 알려졌다. 나 역시 그것을 DJ로부터 직접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신라호텔을 고집했다. DJ에게 “제가 신라호텔의 VIP 멤버이고 또 신라호텔 최고경영진도 잘 알고 있으니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시 힐튼호텔은 장비 자체가 없었다.

나는 뉴욕으로 날아가 내 든든한 후원자인 마이클 잭슨을 설득했다. 그는 흔쾌히 동의하며 특유의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끈질긴 열정으로 그 자신과 조지 소로스, 사우디의 알 왈리드 왕자까지 참석하는 화상회의 이벤트를 성사시켰다. IMF 전 총재, 그리고 미국 전 재무장관들까지 망라한 세계적 거물들이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영어로 화상회의를 한 것이다. ‘홈런’이었다.

김대중 당선인의 청와대 인수팀 5명에 들다


▎1998년 1월 4일, 정부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김대중 당선인 측 위원들이 한국을 찾은 세계적 투자가 조지 소로스(가운데)를 만나 위기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1997년 12월 18일 개표함이 열렸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생긴 이래 50년 만에 진정한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1997년 12월 19일 새벽 5시가 못 되어 일산 DJ 사저에서 근무하고 있던 장옥추 비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선인께서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산 사저로 달려갔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DJ가 반갑게 맞이하며 수고 많았다고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당시 장소가 비좁아 화장실에서 머리 손질과 화장을 하고 계시던 이희호 여사가 뒤를 돌아보며 “오셨어요?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바로 그다음 날 대통령 당선인 비서관들이 발표되었다. 고재방·이강래·박금옥·장성민 그리고 최규선이었다. 이 다섯 명이 ‘청와대 인수팀’이라고 발표된 인수위원회 인수위원으로 임명되었고, 당선인 비서실장으로는 노태우 정권에서 정무수석을 하였던 김중권이 임명되었다. 인수위원장으로는 이종찬 의원이, 인수위원회 대변인은 박지원 의원(현 국정원장)이 맡게 됐다. 얼마 뒤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있던 권노갑 고문이 나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권 고문은 “당신은 외계인으로 우리 동교동으로 들어온 사람”이라며 “당신이 우리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일등공신”이라고 격려해주었다. 나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그렇게 1997년 12월 19일부터 대한민국 대통령은 김대중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IMF 사태로 레임덕(권력 누수)을 넘어 식물 대통령으로 청와대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임창열 경제부총리를 포함해 국정원, 검찰, 경찰, 권력기관들의 보고는 곧바로 대통령 당선인에게 이뤄졌다.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매일 아침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에게 외화보유액·환율·주식시장 상황 그리고 외국 투자자들의 투자유입 상황들을 보고했다. 대기업들은 바짝 긴장했다. DJ는 수십 년에 걸쳐 ‘대중경제론’을 주창했다. 대기업 중심에서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로, 또한 노동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특히 정경유착의 산물인 문어발식 경영에 대하여 계속 비판했다. 그 당사자가 IMF 사태라는 국가적 경제위기에서 통치권자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초긴장했고 위축되었다. ‘삼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12월 23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가 방한했다. 알 왈리드는 선거결과가 발표되기 전부터 한국투자를 결정했으며 이를 나에게도 통보하고 수차례 연락을 해왔다. 그는 원래 삼성전자에 투자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 위기를 맞은 대우는 필사적이었다. 알 왈리드 왕자 방한에 앞서 12월 20일 새벽에 내 집으로 김우중 회장이 직접 전화를 해왔다. 왕자 밑에서 PB(Private Banker)로 있는 마이클 잰슨이 그의 동아줄이었다. 알고 봤더니 마이클 잰슨은 1970년대 그가 시티뱅크 국내 지점장으로 있을 때부터 김 회장과 친분이 두터웠다. 김 회장은 마이클 잰슨이 알 왈리드 왕자에게 주식회사 대우에 투자할 것을 추천했고 대우 회장 비서실에서도 각종 자료를 이미 제출했으니 최 보좌역이 대우로 투자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역할을 해달라고 말했다. 알 왈리드 왕자가 김대중 당선인을 면담하고 난 뒤 바로 대우 본사와 왈리드 왕자의 면담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했다. 결정됐으니 나는 그렇게 따르라는 식의 그런 뉘앙스였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우보다 삼성전자에 투자 원한 알 왈리드 왕자


▎1998년 1월 13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국회 귀빈식당에서 당시 4대그룹 회장과 조찬 모임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구본무 LG그룹 회장, 박태준 자민련 총재,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 김대중 당선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최종현 전경련 회장.
그날 나는 DJ에게 왕자의 방한 소식을 보고하며 왕자는 삼성전자에 투자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DJ는 생각이 달랐다. DJ는 삼청동 안가에서 직접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성이 이제까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지난 1992년에도 삼성은 YS(김영삼 대통령)를 밀었네. 이번에도 마찬가지네” 하시며 “김우중 회장이 왕자와 친분이 있다는데 이미 대우로 투자하기로 결정을 했다는데 자네의 보고와는 차이가 있구먼” 하셨다. 나는 왕자와 나눈 그간의 대화 내용을 설명하면서 “왕자의 해외 투자를 돕고 있는 투자분석관이 아마도 김 회장님과 과거 친분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당선인의 뜻은 단호했다. “대우가 얼마나 나를 이번 선거에서 도왔는가.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리고 김우중 회장은 차기 전경련 회장이 될 걸세.” 아울러 대기업의 빅딜(Big Deal), 즉 상호 겹치는 문어발식 사업들을 정리하여 각자 주력사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강력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마침내 12월 23일, 알 왈리드 왕자가 서울에 왔다. 김 회장의 수행비서가 대우 소유의 힐튼호텔 펜트하우스로 예약해놓았다고 연락해왔지만 나는 이미 주한 사우디아라비아 대사와 의논해 신라호텔에 예약을 끝냈다고 전했다. 왕자는 방한 기간 내내 신라호텔에 머물렀다. 알 왈리드 왕자는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처음 만난 해외투자자였다. 당시 김대중 당선인의 영어 통역관이 바로 현재 문재인 정부 외교부 장관인 강경화 씨였다. 연세대를 나오고 미국에서 유학한 재원이었다. 참으로 우아하고 멋지게 영어를 구사했다.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이제까지 내가 만난, 한국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미국 유학을 한 한국인 중에서 강 장관처럼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의 영어 구사력은 정말이지 내가 보아도 최고였다.

DJ는 알 왈리드 왕자에게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보여준 지지와 성원에 감사를 표했다. 특히 DJ는 “왕자는 세계 4대 부호이며 시티뱅크의 최대주주이기도 한데 우리의 채권은행 중 하나가 미국의 시티뱅크”라고 하면서 “우리는 저력이 있는 국민이고 나의 지도력 아래 이 외환위기는 조속히 극복될 것”이라며 “곧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채권단 회의에서 순조롭게 상환연기가 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요청했다. 왕자는 당선인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자기는 지금의 한국 상황을 일시적인 외환위기로 보며 그렇기에 최적의 투자 타이밍이라며 한국에 투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DJ는 대우를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 “또 이다음 면담이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왕자는 “대우를 방문해 김우중 회장을 뵐 것”이라고 답했다. DJ는 “대우는 신화를 창조한 기업”이라며 “그 창업자인 김우중 회장을 나는 무척 신뢰한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면담이 끝난 뒤 나와 알 왈리드 왕자 일행은 예정대로 서울역 건너편에 있는 대우 본사로 향했다. 김우중 회장과 알 왈리드 왕자의 면담이 있었다. 대우그룹 산하의 주요 사장단 모두가 모인 것 같았다. 약 1시간 동안 이어진 대우그룹 브리핑은 장밋빛 그대로였다. 그리고 숙소인 신라호텔로 돌아와 나는 왕자와 마주 앉았다. 왕자는 미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타고난 천재적인 투자 감각을 지닌 세련되고 멋진, 그리고 젊은 투자자였다. 나는 그를 1995년 마이클 잭슨이 소유하고 있는 LA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호텔에서 마이클 잭슨 소개로 처음 만났다. 그러다가 IMF 사태 뒤로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왕자는 대우가 제시하는 수치들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삼성전자 투자에 의욕을 보이며 내게 삼성그룹 회장과의 면담 주선을 요청하였다.

“이건희 회장께서 최 보좌역을 만나보길 원하십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대우 김우중 회장이 1998년 1월 21일, 삼성 영빈관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 승지원에서 빅딜과 관련해 회동했다.
당시 나는 이건희 회장은 물론 그의 비서실 그 누구와도 친분이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그때까지 내가 아는 유일한 삼성 계열사 사장은 신라호텔 사장이었다. 그래서 면담이 빨리 이뤄지기는 힘들 것이라고 전해주었다. 나는 삼성에 대해 DJ가 말했던 것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알 왈리드 왕자에게 앞으로 계속해서 연락하자고 말한 뒤 삼성전자에도 연락해서 삼성팀이 사우디 리야드를 방문할 수 있도록 주선해보겠다고 했다.

이듬해 1998년 1월 3일, 글로벌 헤지펀드인 퀀텀펀드 회장 조지 소로스(George Soros)가 방한했다. 그 또한 나와는 계속하여 선거운동 기간에도 연락했고 뉴욕에서 열린 화상회의 장소 또한 퀀텀펀드 회의실이었다. 당시 마이클 잭슨과 함께 화상회의를 마치고 다음 날 아침식사를 소로스 회장의 뉴욕 맨해튼 펜트하우스에서 했는데, 거실에 걸려 있던 렘브란트와 피카소 등 거장들의 그림이 10여 점은 되었다. 조지 소로스는 DJ를 만나 최소 5억 달러를 한국시장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약속은 실현됐다. 서울증권을 인수했고, 삼성을 비롯한 국내 주요 기업의 주식을 사들였다. 외신에서도 소로스와 알 왈리드 왕자의 방한 소식들을 전하였고 한국시장에 대한 해외투자자들의 관심을 이끄는 촉매제가 되었다. 나는 그 무렵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얕았기에 세계 경제 작동원리에 대한 지식과 경제 전문용어들을 배워보고자 당시 KDI 수석연구원으로 있던 유승민 박사와 교류하고 있었다. 이에 소로스 회장이 방한했을 때 KDI를 방문해 KDI 원장과 면담했는데 당시 유 박사도 동석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삼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의 지승림 부사장(2013년 작고)이라고 했다. 용건은 회장께서 최 보좌역을 뵙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먼저 나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당시 태평로 삼성 본사 옆 빌딩에 위치한 VIP 접견실에서 지승림 부사장과 비서실 임원들을 만났다.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은 이학수 사장(후에 부회장으로 승진해 삼성 비서실을 이끌었다)과 기획통인 지승림 부사장이 핵심이었다. 나는 대통령 당선인의 일개 보좌역에 불과한데 이 땅의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께서 나를 만나자고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권력이 없다고 했다. 지 부사장과 임원들은 웃으면서 이 회장님께서는 대선 때부터 최 보좌역을 지켜봐왔고 높이 평가하고 계시며 직접 만나보길 원한다고 하셨다. 나는 이런저런 구설에 휘말리기가 싫었고 특히 삼성에 대한 DJ의 생각과 대통령 주위 인사들의 삼성에 대한 비호감 정서를 알고 있었기에 신중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알 왈리드 왕자가 삼성자동차에 투자하게 해달라”


▎1998년 3월 15일, 사우디아라비아 알 왈리드 왕자(가운데)가 한국 투자와 관련해 입국했을 때 김포공항에 마중 나간 최규선 씨(왼쪽).
마침 1월 중순경 조지 소로스가 약속했던 소로스의 퀀텀펀드 투자팀이 방한할 것이며 그 팀장으로 아르미니오 프라가(Arminio Fraga) 전 브라질 중앙은행 부총재가 방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 부사장에게 팀장을 만나는 조건으로 내가 먼저 회장님을 뵙는 대신 보도는 조지 소로스 투자팀을 면담한 것으로 해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해가 빨랐다. 하지만 조지 소로스 회장도 아니고 그 아래 투자분석가를 회장님과 면담했다고 언론에 알리는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재차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이 내가 이건희 회장을 뵙고 싶은 마음과 대통령 당선인과 그 주변 인사들의 삼성에 대한 인식 때문에 핑계를 댈 수 있는 방책이기도 했다.

나는 이건희 회장을 만난다는 사실에 설레었다. 삼성은 내가 좋아하는 기업이었다. 여러 호텔을 다녀보았지만, 신라호텔이 최고였고 삼성의 가전제품도 최고였다.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약속한 날, 한남동 승지원으로 갔다. 승지원은 이건희 회장이 VIP 인사들을 만나는 접견 장소였다. 약 1500평 규모 부지에 왼쪽으로는 삼성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께서 직접 머물던 한옥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신축한 2층 양옥이 있었다. 나는 2층 양옥으로 안내되었다. 이건희 회장은 나를 보고는 “최 특보, 반갑습니다” 하였다. 나는 “회장님, 저는 특보가 아니라 보좌역입니다.” 첫 대화였다. 이 회장은 웃으시며 “호칭이 무엇이면 어떻습니까” 하면서 대선 선거 기간에도 눈여겨보았고 어떻게 마이클 잭슨을 한국 대선에 끼어들게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고 말했다.

그의 어법은 일반인의 어법이 아니었고 수사(레토릭) 또한 아주 특이했다. 그는 나에게 한국이 현재 겪고 있는 위기는 외환위기일 뿐이며, 정말이지 한국경제의 펀더멘털(fundamental)은 견고하다고 했다. “우리 삼성 또한 해외에서 국내로 유입되고 있는 외화가 계속 늘어날 것이며 문제의 핵심은 김영삼 정부에서 종금사들을 우후죽순으로 허가해주고 금융권들도 무서운 줄 모르고 단기로 빌려 장기투자를 했으니 외화 부족 사태가 일어났지만 우리 삼성은 건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도 구조조정을 해야 하며 나 또한 항상 임직원들에게 위기의식을 가지라고 늘 이야기해왔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그러면서 ‘삼성자동차’를 언급했다. “나는 말(horse)과 자동차를 좋아하는데, 스포츠카도 좋아합니다. 나는 카레이서(Car Racer)이기도 합니다.”

나는 사우디아라비아 알 왈리드 왕자 또한 삼성전자에 투자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반색했다. 나더러 왕자에게 삼성전자와 함께 우리 삼성자동차에도 투자해 달라고 말해달라고 했다. 나는 당시 삼성에 대한 DJ의 인식과 당선인을 둘러싼 권력 주변의 정서를 도저히 말해줄 수 없었다. 나는 추측건대 삼성 또한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력으로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으로 짐작만 했다. 나는 이 회장께 “새 정부에 아시는 인사가 있느냐”고 여쭈었다. 이 회장은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어요. 삼성 내에는 있겠지요. 그런데 지금 정부(김영삼 정부) 안에 내 친구가 있습니다. 죽마고우! 사덕이 있습니다. 무슨 장관이지?” 하고 비서들에게 물었다. 당시 옆에 있던 이학수 사장이 “정무장관이십니다” 하였다. “나하고는 ‘건희’, ‘사덕’ 이렇게 이름 부르는 막역한 사이고 좋은 친구입니다. 한번 만나보실래요?”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대한민국 관료들은 거의 ‘유학자’ 수준입니다”


▎삼성의 영빈관이자 이건희 회장이 집무실로 썼던 승지원. 삼성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머물던 한옥이 있다. / 사진:삼성전자
실제 이 회장을 만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홍사덕 당시 정무장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는데 “건희가 흥분한 목소리로 ‘괴짜’라며 최 보좌역을 꼭 만나보라고 직접 연락이 왔다”고 말문을 열었다. “웬만해선 그런 전화가 없는데 ‘건희’(그는 실제로 이건희 회장을 ‘건희’라고 호칭했다)가 목소리 톤을 높이는 건 흔치 않거든요.” 그 뒤로 나와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과의 인연 또한 깊어지고 특별해진다. 후일담이지만 내가 뒤에 2002년 정치스캔들에 휩싸여 힘들어할 때도 당시 SBS TV에 직접 얼굴을 비치시며 “내가 아는 한 최규선 씨만큼 미국 내 인맥이 훌륭한 사람은 보지를 못했다”며 나를 치켜세우셨던 분인데 이제는 지구별을 떠나셨다. 지금쯤 그가 ‘건희’라고 불렀던 이 회장과 만나고 있을 것이다.

다시 한남동 승지원으로 돌아가보자. 이건희 회장과의 면담이 30여 분 흐른 후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 투자팀장 프라가가 팀원들과 함께 들어왔다. 이 회장은 프라가 일행을 만나면서 담배를 태우셨다. 나는 놀랐다. 그러면서 프라가에게 담배까지 권했다. 프라가는 자기는 금연가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의 말씀 중 지금도 내 머리에 기억되고 있는 대목이 있다. “한국은 참으로 용광로 같은 나라입니다. 미국은 너무나 큰 땅이고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인데도 파악하는 데 그리 힘들지 않지만 땅이 좁고 유일 민족이라는 이 땅을 파악하는 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라고 하시며 “특히 대한민국 관료들은 거의 ‘유학자’ 수준입니다. 그들은 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과거 조선시대의 유학자로 돌변하는지 그게 궁금해요” 하였다.

한국 사정에 어두운 프라가로서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소리였을 것이다. 당시 이건희 회장의 이 말씀은 아마도 나보고 들으라는 말씀이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이 회장은 내게 “이 나라의 문제는 어렸을 때 일류들을 학습을 통하여 삼류로 만듭니다. 그것은 아주 똑똑하고 영리한 우리 인재들을 교육을 통해 그리고 사법시험·행정고시·대학시험 이런 것들로 삼류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나라를 움직입니다. 나는 대한민국은 대통령중심제가 아니라 관료 중심제이며, 그 관료들이 정치인들을 다루고 있고 이것이 이 땅의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프라가를 만난 자리에서도 이 같은 그의 지론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이 회장이 프라가 일행 배웅을 나와 내 팔목을 잡으면서 말했다. “우리 또 봐요.”

그리고 여지없이 며칠 후 지승림 부사장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지 부사장은 이건희 회장과의 첫 만남 때도 동석했는데 두 번째 만남에는 이학수 사장도 동석했다. 그들은 삼성자동차를 살리기 위해 매달렸다. 회장께서 자동차 사업에 집념이 강하시며 현재 삼성자동차는 거의 자본잠식이 되었지만, 삼성 계열사들이 삼성자동차에 투자하는 상호출자를 새 정부에서 강력하게 막고 있고 이건희 회장 개인이 투자하는 것도 막고 있으니 해외투자를 받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삼성은 조지 소로스의 투자보다는 알 왈리드 왕자가 투자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하였다. 나 또한 이미 이건희 회장과의 첫 면담에서 그가 삼성자동차를 언급한 것을 들은 바가 있었다. 특히 이 회장은 말과 자동차에 대한 특별한 애착까지 설명했지 않았던가.

“마이클 잭슨이 이건희 회장을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


▎삼성 계열사 사장단회의에서 21세기에 대비해 기술개발과 인재양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 그는 대한민국 관료들이 거의 ‘유학자’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 사진:삼성전자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1998년 2월 25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마이클 잭슨이 참석했고 전 세계 언론에 방송되었다. 취임식 날 마이클 잭슨과 청와대를 방문했다. 관저에도 들렀다. 이삿짐들이 마저 들어오지 못해 어수선했다. 관저 내부를 둘러보고 이희호 여사님과 티타임을 했다. 그리고 청와대 경내를 산책했다. 그러고 나서 대통령 집무실로 향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의 주인이 된 후 맞이한 최초의 주빈이 마이클 잭슨이다. 마이클 잭슨은 대통령께 한반도의 평화와 특히 남북한의 가난하고 병약한 아이들을 위한 자선공연을 DMZ에서 개최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것은 이미 나와도 조율된 프로젝트였다. 대통령께서는 시간을 두고 검토해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면담이 끝나갈 무렵 나는 대통령께 “마이클 잭슨이 에버랜드를 방문하고 싶어 하며 방문 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을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그것은 사전에 이건희 회장 비서실과 이미 조율이 된 사안이었다. 대통령께서는 마이클이 그렇게 원하니 그리하라고 승낙하셨다.

에버랜드를 방문한 마이클은 에버랜드 내의 동물들을 보더니 자기가 사는 ‘네버랜드’와 비교해서 어느 곳이 더 훌륭하냐고 나에게 물었다. 당시 내가 보기에 마이클이 사는 네버랜드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는 아이, 즉 마이클 잭슨이 사는 동화 속 땅이었다. 네버랜드에는 기차 레일도 깔려있고 거의 수십만 평 되는 경내를 소형기차로 이동할 수 있었다. 가까운 곳은 골프 카트로 다녔으며 동물원과 영화관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가 사는 본관 집 내부에는 백악관의 서재를 본떠 만든 대형 서재가 있었는데 마이클이 읽었거나 읽고 싶은 책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거의 매일 창작 활동을 했는데, 네버랜드 안에는 그가 실제로 공연하는 무대 크기의 광대한 스튜디오가 있었다. 그는 그렇게 세계적인 팝의 황제로 군림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안에는 또 다른 황제가 있었으니 바로 그가 ‘이건희 회장’이었다. 그가 다이어트를 하면 시중에서는 황제 다이어트라고 했고 그의 경영은 황제경영이라고 했다.

그 두 황제가 만났다. 승지원 한옥에서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여사도 참석한 만찬이었다. 마이클은 그날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 회장은 에버랜드를 방문한 소감을 물어보았다. 마이클은 솔직한 대답을 원하시는지 아니면 외교적인 대답을 원하시는지를 물었다. 이 회장은 웃으며 솔직한 대답을 원한다고 하였다. 마이클은 디즈니랜드가 세계적인 테마파크가 된 것은 디즈니랜드 안에 미키마우스라는 테마가 있고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수많은 애니메이션 영화의 테마들이 디즈니랜드와 디즈니월드 안에 있기 때문인데, 에버랜드는 세계적인 테마가 없어서 “놀이동산(Local amusement Park)”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나에게도 소감을 물었다. 나는 똑같이 여쭈었다. “회장님 외교적인 대답을 원하십니까?” “사실대로 말하세요.” 나는 “마이클이 사는 네버랜드는 에버랜드처럼 동물원도 있고 놀이기구도 있으며 기차 레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피터 팬이 살고 있습니다. 바로 마이클 잭슨이 피터 팬입니다. 그래서 마이클이 내게 에버랜드에 대한 소감을 물었을 때 당연히 네버랜드의 가치가 에버랜드보다 더 크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회장은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했다.

마이클 잭슨과 이건희 회장, 두 ‘황제’의 만남


▎이건희 회장은 카레이서였다. 그는 “나는 말과 자동차를 좋아하는데, 스포츠카도 좋아합니다. 나는 카레이서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 사진:삼성전자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저녁식사가 준비되었다. 모두 신라호텔에서 준비해온 것이었다. 만찬장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세계 무대에서 진행한 공연 영상자료와 해외 저명인사들과의 만남이 담긴 장면을 삼성 TV 대형화면에 띄웠다. 이것은 나의 아이디어였다. 마이클이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과 특히 그가 노래까지 작사·작곡한 다이애나 왕세자빈을 비롯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오드리 헵번 등 전설적인 영화배우들과 말론 브랜도 등 할리우드 스타들과 만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레이건,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등 미국의 대통령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생일파티를 마이클이 주관하여 축하해주는 장면도 있었다.

만찬 도중 마이클 잭슨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이 회장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가 곧 들어온다는데 언제 오느냐고 내게 물어보았다. 아마도 비서실로부터 보고를 받은 듯했다. 나는 3월경에 알 왈리드 왕자가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3월 초에는 이미 외국(출장)에 선약이 되어 있는데 아쉽군요.” 하면서 “이번에 무슨 투자발표가 이루어지나요? 하고 물었다. “아마 대우와 현대자동차에 투자가 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이 회장은 대우라는 말에 “대우요?” 하면서 놀라셨다. 내가 “왜 놀라십니까” 하고 여쭈니 이 회장은 “거기 대우는 수치를 잘 보아야 합니다. 그 숫자가 맞는지…. 왕자를 돕고 있는 분석가들도 있겠지요. 그런데 정말 대우로 결정이 되었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거의 99% 확정이 되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이 회장은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저으셨다. 그리고 1998년 3월 초 사우디아라비아 알 왈리드 왕자가 방한해 주식회사 대우에 1억 달러를 투자했다. 당시 환율이 1600원 수준이었으니 한 개인이 1600억을 투자한 것이다. 사실 당시 주식회사 대우는 지주회사라고 하지만 거의 페이퍼 컴퍼니 수준이었다. 여기에는 분명 내 책임도 있다. 하지만 최종 투자를 결정한 것은 왕자였다. 왕자 또한 자신의 PB인 마이클 잰슨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특히 한국 대통령이 대우를 신뢰하고 김우중 회장을 신뢰한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자는 호텔만은 내 고집대로 신라호텔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청와대 접견실에서 왕자와 왕자의 측근들과 함께 대통령을 뵈었다. 당시 김태동 청와대 경제수석도 참석했다. 대통령은 왕자를 대한민국을 살리는 구세주라고까지 표현하셨다. 나는 면담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면담 후에 약 5분간 대통령과 독대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달인 4월에 브루나이로 볼키아 국왕을 보러 가는데 여기에는 알 왈리드 왕자도 참석하기로 돼 있었다. 나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보좌역 자격으로 대통령 특사로 동행하기를 원했고 청와대에도 요청해놓은 상태였다. 거의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앉지도 않고 서서 내게 말씀하셨다. “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는데 자네 격이 대통령 특사로는 맞지 않는다는 의전관의 판단과 경제수석의 판단에 내가 결재를 않기로 했다”고 하셨다. 그 말씀에서 나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와 애정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토사구팽인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가마솥으로 들어간다’는 그 말인가.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지승림 부사장에 이어 계속해서 이건희 회장 비서실을 책임지고 있던 이학수 사장을 만났다. 신라호텔 스위트룸에서 만난 이학수 사장은 삼성의 2인자로 불렸다. 그는 “회장께서 그토록 자동차 사업에 전념하시니 외국에서 돌아오시면 회장님을 뵙고 말씀을 나눠주시고 알 왈리드 왕자로부터 삼성자동차에 꼭 투자를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왕자가 원하는 삼성전자 투자도 함께 이루어지게 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삼성전자 한 주 가격은 약 4만5000원이었다. 현재의 삼성전자 주가(9만원)를 액면분할 전 시세로 환산하면 한 주당 약 400만원 가까이 되니, 왕자가 투자를 했다면 100배에 달하는 이익을 얻었을 것이다. 왕자는 내가 2016년 11월 24일 서울구치소에 들어오기 전까지도 아이폰과 삼성 갤럭시 폰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면서 나에게 “삼성, 삼성”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마도 그것은 이러한 절묘한 투자 기회를 상실한 데 따른 나름의 회한일 터였다.

얼마 뒤 이건희 회장을 승지원이 아닌 한남동 자택에서 다시 뵈었다. 저녁식사 이후에 만나자고 했는데 거의 저녁 9시 무렵에 그의 서재이자 사랑채로 안내되었다. 이 회장 옆에는 케이크 한 판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디저트로 과일과 쿠키 등 여러 가지 차가 준비돼 있었다. 비서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여쭈어 가져다주었다. 면담은 거의 새벽 한 시가 되어 끝났다. 요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삼류 관료들이 무지한 정치인 상대로 장난”


▎공연차 내한한 마이클 잭슨의 김포공항 기자회견 자리에 최규선 씨가 동석해 있다. / 사진:연합뉴스
“최 특보, 내가 집념을 보이는 자동차는 변합니다. 현 정부에서는 왜 삼성전자가 삼성자동차를 만들려고 하느냐고, 전혀 다른 사업이라고 하는데 자동차는 이제 전자제품이 됩니다. 네 바퀴 위에 컴퓨터가 올라앉게 됩니다. 그래서 자동차 사업을 우리 삼성전자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삼성자동차를 현 정부는 빅딜의 표본으로 삼고 접으라고 하는데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현 정부는 건설이 주력사업인 현대그룹에 LG전자의 반도체를 주려고 합니까? 이것이 빅딜입니까? 나는 이 또한 삼류 관료들이 또다시 무지한 정치인들을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다고 봅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한 가지 오해가 있는데 나는 김대중이라는 사람을 평소 존경해왔습니다. 그 험한 역경을 이겨내고 정치인으로 재기하는 모습을 보며 대단한 사람이라고 항상 이야기해왔습니다. 최 특보께서 나를 도와줘야겠어요. 그리고 우리 삼성자동차를 도와주세요. 나는 모두가 반대하는 메모리 반도체를 세계 제일의 삼성반도체로 만들었습니다. 그때에도 얼마나 많은 반대와 저항이 심했는지 모릅니다. 은행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하며 대출을 꺼리고 대출 만기가 되어 연장해줄 때에는 우리 임원들이 은행원들 집 앞에서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 들고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세요. 세계 일류가 되었습니다. 이제 자동차는 내연기관차 시대가 지납니다. 두고 보세요. 나는 미래를 봅니다. 이 사람들은 (비서들을 가리키며) 잘 몰라요. 나를 아는 몇몇 사람은 나를 도사, 스승이라는 구루(Guru, 영적 스승)라고 합니다.”

당신은 미래를 본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진짜 맞았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나 미국의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 자동차를 발족시키며 이건희 회장이 지난 1998년 3월, 당신의 한남동 자택에서 최규선과 당신의 임원들 앞에서 선언했던, 그리고 예언했던 자동차 산업의 미래가 그대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일론 머스크는 미국의 헨리 포드가 내연기관 자동차의 왕이 되었듯이 일약 미래 자동차의 왕이 되고 민간 우주시대를 개척했다. 재산이 200조원이 넘는 세계적인 거부가 되었다. 이건희 회장이 최규선과 그의 임원들에게 말해주었던 그의 미래가 일론 머스크를 통해 미국에서 창조된 것이다. 나는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의 전기자동차들을 선보이며 스티브 잡스처럼 무대 위를 누비는 모습을 보면서 그때의 이건희 회장을 떠올리곤 전율했다. 그는 분명 미래를 보는 ‘구루’였다.

이건희 회장은 나에게 당신의 전용기를 내어줄 테니 이번에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출장에 우리 삼성자동차 임원들과 함께 그리고 내 비서실 임원들과 함께 알 왈리드 왕자를 만나 삼성전자와 삼성자동차에 투자해 달라고, 이 투자를 만들어주는 것이 최 특보에게도 나중에 나와 함께 역사를 새로 쓴 주인공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끊임없이 바로 옆에 놓여 있던 케이크 한 판을 다 드시고 우롱차를 계속해서 마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가 예언하는 미래 자동차 산업에 대해 감은 오지 않았지만, 그가 스포츠카 수집가이고 자동차에 대한 집념이 너무 강하여 삼성자동차를 계속하여 개발하고 싶은 신념을 보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회장은 심지어 “자동차는 나의 신앙”이라고까지 했다. 이건희 회장 사후 이런저런 말이 많지만, 그가 진정 꿈꾸었던 미래산업은, 그리고 도전하고자 했던 산업은 반도체 이후로는 바로 ‘자동차’였다고 나는 믿는다.

1998년 3월, 나는 김포공항에서 이건희 회장이 서명해준 친서를 들고 그의 전용기를 타고 삼성자동차 대표이사 겸 부회장인 이대원 씨와 임원, 그리고 회장 비서실의 지승림 부사장과 함께 19일쯤 리야드에 도착했다. 킹덤홀딩스 회장실에서 회의가 열렸다. 알 왈리드 왕자가 직접 진행했으며 삼성전자와 삼성자동차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 투자를 진행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건희 회장이 가지고 있는 자동차 산업에 대한 비전과 열정을 왕자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왕자의 궁전에서 독대한 아침식사에서 나는 왕자에게 삼성에 대한 이번 투자는 왕자가 주도적으로 해주기 바란다며 대우에 대한 투자보다도 100배는 더 가치 있는 투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왕자 또한 자기는 원래부터 삼성에 대한 투자를 바라지 않았느냐고 나에게 화답했다.

이건희 회장 전용기 타고 사우디 찾아 투자유치 도와


▎1998년 2월, 이건희 회장이 승지원 한옥에서 팝스타 마이클 잭슨을 만나고 있다. / 사진:삼성전자
그리고 그의 PB인 마이클 잰슨이 있는 스위스 제네바로 삼성 투자팀을 이끌고 바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구체적으로 계약서를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리야드에서 이건희 회장 전용기로 제네바로 이동했다. 마이클 잰슨과 회담을 이어가며 삼성전자와 삼성자동차에 대한 투자는 전환사채(CB)로 진행하며 각각 1억 달러씩 투자하겠다고 확답해 주었다. 이건희 회장이 힘주어 강조한 새로운 역사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는 듯했다. 그러나 당시 CB 발행, 특히 대기업의 CB 발행은 기획재정부에서 승인해줘야 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귀국해 보니 혹시나 하고 우려했던 대로 나에 대해 엄청난 말들이 나돌고 있었다.

과거 김대중 총재 시절 보좌관을 지낸 3선 국회의원 A가 나를 보자고 했다. 하얏트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네가 어떻게 삼성 이건희 전용기를 타고 삼성 임원들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를 다녀올 수 있느냐. 지금 삼성은 구조조정 대상이고 손봐야 하는 기업인데 네가 앞장서서 삼성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소문이 파다하다.” 당시 그분과 호형호제하고 있던 나는 “형님, 나는 국가 소유 비행기로 다녀온 것이 아니고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삼성 비행기로 다녀왔고 그래서 세금을 축낸 것도 아닙니다. 투자자인 알 왈리드 왕자가 대우에 이제까지 큰 투자를 하였고 현대자동차에도 투자하였는데 이 모든 것이 현 정부와 대통령께서 원하셨던 투자처 아닌가요? 그런데 이번에는 투자자가 삼성전자와 삼성자동차에 투자하겠다고 합니다. 그걸 왜 정부가 막으려 합니까? 투자한다는데 왜 가려서 받습니까” 하고 이야기했다.


▎2012년, CES 2012를 참관하는 생전의 이건희 회장. 이 회장은 삼성자동차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삼성자동차를 살리고자 했다. / 사진:삼성전자
그는 그래도 무조건 빨리 접으라고 하였다. “네가 다시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 눈에 들고 국회의원 배지라도 달아야 할 것 아니냐!” 하셨다. 나는 정치에 꿈이 없고 청와대에 들어갈 생각도 없으며 국회의원이 될 뜻도 없다고 했다. 다만 나는 국가위기상황에서 도움을 주어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고 싶고 특히 ‘호남의 한(恨)’이었던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내 나름 일조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3월에 사우디아라비아 가기 전에 대통령과 집무실에서 앉지도 않고 서서 독대를 했는데 약 3분에 불과했고 대통령께서 나에 대한 시선이 총애에서 부담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잘 보았다고 하면서 그러니 앞으로 어찌할 것인지 잘 생각하라고 오금을 박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계속해서 삼성자동차 이대원 부회장과 임원들을 만났고 삼성전자 재무팀도 만났다. 삼성 비서실 수장인 이학수 사장을 만나서는 새 정부 주요 인사들을 만나 삼성자동차 문제를 설득하고 강력하게 호소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 사장은 대통령비서실 핵심 관계자로부터 “대통령 뜻이 너무나 완고하고 특히 삼성자동차는 반드시 빅딜에 포함되어야 하며 기아자동차도 현대에 주기로 이미 결정 난 것처럼 얘기한다며 대통령 뜻을 꺾기가 쉽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해주었다.

“대통령께서 최규선 총재 보좌역을 해임했습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그의 전기자동차. 1998년 3월 ‘경제 구루’ 이건희 회장의 예언은 십수 년이 지나 미국의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 자동차를 발족시키며 현실화됐다. / 사진:연합뉴스
나는 당시 자동차 산업을 총괄하고 있던, 지금은 작고한 박태영 산업자원부 장관을 내가 개인 사무실로 쓰고 있던 여의도 산업은행 내 공간에서 따로 만났다. 박 장관은 대통령은 삼성자동차가 빅딜에 참여하여 자동차 사업은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로 이어가는 것을 바라고 있지만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이미 대우에 거액을 투자해준 알 왈리드 왕자는 이 나라의 은인인데 그 투자자가 삼성자동차에 투자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말릴 수가 있겠느냐고 긍정적으로 말해주었다. 나는 박 장관에게 그 뜻을 접지 말아 주시고 계속 유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삼성에 대한 우리 정부 일각의 비호감에 대해서도 삼성을 진정으로 구조조정시키려면 적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제 살을 깎아 먹는 것이고 이 나라의 국가자산을 축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삼성이든 현대든 박정희 시대 정경유착의 산물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대기업이 되었고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 나라 경제에 중추가 되어버렸어요. 다 뜯어내고 무너뜨릴 수가 없어요.” 이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대기업 구조조정 또한 시장경제에 맞추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고 당시 유종근 대통령 경제고문 또한 똑같은 생각이었다.


▎1998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를 방문했을 당시 이대원 삼성자동차 대표이사 부회장(왼쪽)과 최규선씨(오른쪽). / 사진:최규선
나는 삼성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1998년 5월 말에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를 다시 방문했다. 역시 같은 팀들이었다. 삼성자동차 대표이사와 임원들 그리고 비서실 임원들이 함께했다. 이때도 이건희 회장의 전용기를 이용했다. 앞서 대통령 특사로 동행하지 못했던 브루나이 또한 삼성 임원들과 함께 방문했다. 거기서 알 왈리드 왕자를 만났고 볼키아 국왕 또한 접견했다. 나는 왕자에게 현재 한국 정부에서 대기업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데 당신의 삼성전자와 삼성자동차에 대한 강력한 투자 의지가 실린 친서를 김대중 대통령께 올려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가 왕자를 만날 때마다 주사우디아라비아 한국대사는 매번 배석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국정원을 거쳐 청와대로 보고되었다.

나는 알 왈리드 왕자의 친서를 들고 박지원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을 만났다. 박 수석은 대통령께 바로 전달하겠으며 바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일주일을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1998년 6월 하순에 박 수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청와대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대화를 이어간다. 박 수석은 “대통령께서 최 보좌역을 총재 보좌역에서 해임했으며 이제 더는 총재 보좌역 명함도 쓰지 말 것을 명하셨고 조세형 당 총재 권한대행이 해임서를 작성하여 가져오겠다는 것을 내가 구두로 전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왜 그렇게 대통령 뜻에 어깃장을 놓으며 삼성자동차에 매달리느냐”고 말했다. 박 수석은 “삼성자동차는 삼성전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고, 대통령께서 직접 빅딜이 안 되면 스몰딜이라도 해야 된다며 밀어붙이는 것을, 왜 그토록 총애를 받는 분께서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시는 겁니까?” 역시 박 수석답게 나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대통령의 뜻을 말해주었다.

사직동팀, 최규선에 대한 내사에 들어가다


▎1998년 3월, 외국인 투자를 받기 위해 백방으로 힘썼던 당시 삼성자동차 임원단. 왼쪽에서 둘째가 당시 삼성비서실 지승림 부사장, 셋째는 이대원 삼성자동차 부회장. / 사진:최규선
이에 나는 “기꺼이 총재 보좌역에서 물러나겠으며 더는 명함도 쓰지 않고 대통령 뜻에 따라 자유인 최규선으로 살겠노라”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내 지갑에 있던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보좌역 명함을 모두 꺼내 찢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박 수석은 그런 나를 보고 웃으면서 “역시 최규선입니다”라고 말했다. 내 뜻을 대통령님께 그대로 전달 드리고 대통령님 뜻에 따라 ‘자유인 최규선’으로 살겠노라고 말씀해 달라고 하였다.

얼마 뒤 청와대 하명수사를 담당하는 일명 사직동팀 반장이 나를 보자고 하였다. 힐튼호텔 룸이었다. 그는 “내사과정에서 최 보좌역께서 대통령 특별보좌관이라는 직책을 쓰시며 대기업들로부터 거액을 수수해왔다는 정보를 접하고 지금 내사 중이다”고 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대통령 특별보좌관이라는 명함을 쓴 적이 없다고 말했다. 범법행위가 나오면 그대로 수사하여 처벌하라고 말했다. 이어 1998년 9월에 경찰청 특수수사과에서 나를 불렀다. 여러 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미끼로 자금을 수수해왔다는 혐의로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하겠다고 했다. 나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변호사를 부르겠다고 말했다.

청와대 지인을 통해 사정을 알아봤더니 민정수석이 최규선은 삼성으로부터 거액을 수수하여 대통령의 대기업 구조조정을 망치고 있는 사람이라며 처벌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대통령을 설득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결정한 수사란 말인가. 그토록 나를 총애하고 “규선이, 규선이” 하던 대통령께서 이제는 정말 토사구팽하는 것인가. 나는 알고 지내던 청와대 관계자에 전화해 빨리 구속시켜 달라고 했다. 법정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기꺼이 산화하겠다고 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특수수사과 총경이 내게 돌아가라고 했다. “구치소로 가는 겁니까?” 물어봤더니 “아니요. 댁으로 가십시오”라고 했다. 악수하고 특수수사과를 나왔다.

대통령께서 이제는 정말 토사구팽 하는 것인가


▎이건희 회장은 돈이 아닌 그의 불굴의 정신을 이 땅의 청춘들에게 유산으로 남긴 이 시대의 구루이자 영웅이다.
1998년 10월, 현대자동차가 기아자동차를 인수했다. 그리고 삼성자동차는 결국 문을 닫았다. 그것이 이 시대의 구루 이건희 회장과의 만남과 그의 생생한 예지력을 목격한 나의 회고이다. 나는 지난 2002년 세칭 ‘최규선 게이트’로 수감생활을 끝낸 뒤 2005년에는 민간기업인으로 이라크에 진출해 활약했다. 외화도 1억 달러 이상 벌어들였다. 국내 여러 대기업과 컨소시엄을 형성하여 이라크 쿠르드 유전개발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2008년 내가 운영하던 상장회사였던 주식회사 유아이에너지에 대한 횡령·배임 사건으로 10년이 지난 지금 법정구속되어 16년 만에 이곳 서울구치소에서 영어의 몸이 되었다. 참으로 거칠고 사나운, 그러면서도 한 편의 영화 같은 풍운아 최규선의 티케(운명)가 아닐 수 없다.

‘사브르’(Sabre)라는 말이 있다. ‘불굴의 용기’라는 뜻이다. 아랍어로 ‘신이 사랑하는 자’라고도 한다. 이건희 회장은 대한민국 최고 부호로 20조에 가까운 돈을 유산으로 남겼다. 하지만 나는 이건희 회장이 돈이 아닌 그의 불굴의 정신을 이 땅의 청춘들에게 유산으로 남겼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이 회장의 자녀들이 상속해 받는 돈보다도 훨씬 크고 값진 유산이다. 삼성그룹 회장에 오른 후 이건희 회장은 자기 말처럼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어야 우리 삼성이 산다는 새로운 삼성을 선언했고, 그의 지도로 그와 그의 팀원들은 꿈을 실천으로 옮겼으며, 거기에서 세계 일류 브랜드인 ‘SAMSUNG’을 만들어냈다. 이제 우리도 이웃 국가인 일본과 중국처럼 수많은 영웅이 나와야 한다. 인간이 어찌 흠 없는 자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러한 흠을 찾아내 지금까지 수많은 영웅을 끌어내려 왔다. 이제는 영웅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

202102호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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