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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슈] ‘시즌제 막장드라마’ 신기원 연 김순옥 작가의 힘 

“내 드라마엔 밥 먹는 장면 없다, 밥상은 엎어도” 

출세작 [아내의 유혹]부터 [펜트하우스]까지 흥행 불패… 파격적 스토리 전개와 신파 담긴 권선징악 메시지가 비결

▎2017년 SBS 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 극본을 맡은 김순옥 작가가 제작발표회에 참석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김순옥 작가의 신작 [펜트하우스] 돌풍이 거세다. 2월 19일 19.1%로 출발한 시즌2 시청률은 3주 만에 26.9%로 치솟았다. 간접광고와 아이돌 캐스팅으로 버티던 지상파 방송가에 생태교란종이 나타난 모양새다. 동시간대 프로그램들은 이 돌풍의 파편에 신음하고 있다.

특히 관심을 모은 날은 2월 20일. 임성한 작가의 복귀작 [결혼작사 이혼작곡]과 처음 맞붙는 날이었다. 임성한이 누군가. 2002년 [인어 아가씨]로 막장드라마 시대를 연 작가다. 임성한은 매번 거센 비난을 받으면서도 ‘시청률 보증수표’로 통했다. 그에 비해 [펜트하우스]의 김순옥 작가는 후발주자다. 2008년 [아내의 유혹]을 시작으로 [왔다! 장보리](2014) [황후의 품격](2018~2019)을 흥행시키며 막장드라마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결과는 싱겁게 끝났다. 김순옥의 완승. 시청률에서 [펜트하우스]는 20.4%(이하 닐슨코리아 기준), [결혼작사 이혼작곡]은 7.7%였다. 방영 한 달 만에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화제성 지표로 여겨지는 포털 사이트 검색량에서도 [펜트하우스]는 더블 스코어(네이버 트렌드 기준)를 냈다.

예능 프로그램도 유탄을 피하지 못했다. 나영석 PD와 ‘대세 배우’ 윤여정의 합작으로 승승장구하던 [윤스테이]의 시청률이 3분의 2 수준으로 줄었다. ‘금요일 밤의 왕’으로 군림했던 TV조선의 [신청곡을 불러드립니다―사랑의 콜센타]도 명성에 금이 갔다. 20%를 웃돌던 시청률은 2월 26일 12.1%까지 내려왔다. 지난해 9월 첫 방영 이후 최저치다.

김순옥은 2000년 MBC 단막극 [사랑에 대한 예의]로 데뷔했다. 지상파 4개 채널이 전부인 것 같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언젠가 본 듯한 평일 아침 드라마부터 수백억원 제작비를 들인 넷플릭스 드라마까지 플랫폼과 장르 모두 다종다양해졌다. 이런 와중에도 김순옥은 자기만의 중력을 잃지 않고 있다. 그의 힘을 제대로 알려면 먼저 막장드라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 드라마의 시초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조선 후기 등장한 [춘향전] [심청전] 등 판소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판소리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수일과 심순애] [홍도야 울지 마라] 같은 신파극으로 발전했다. [이수일과 심순애]는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연재된 오자키 코우요(尾崎紅葉, 1868~1903)의 [금색야차(金色夜叉)]를 번안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의 정서에 잘 들어맞았기에 대히트를 쳤다.

그런데 이 신파극들의 서사를 잘 보면 비슷한 점이 있다. 그것은 남성의 성공을 위해 철저하게 희생되는 여성의 인생을 보며 느끼는,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신파의 굵은 줄기는 여성수난사의 신파다.

태초에 ‘신파’가 있었다


▎SBS 금토 드리마 [펜트하우스]는 부동산 전쟁과 입시 지옥의 한복판에 있는 한국 사회를 직설적으로 그려내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 사진:SBS
이런 본바탕에 한국 근현대사가 덧입혀지자 멜로드라마가 유행했다. 도시민 상당수가 중산층에 진입하고 시가(媤家)에서 독립하면서 핵가족이 보편화될 때였다. [고개 숙인 남자](MBC·1991) [사랑의 굴레](KBS·1989) [배반의 장미](MBC·1990) [애인](MBC·1996)처럼 안정적인 중산층 가정이 불륜이나 갑작스런 사고 등으로 균열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포착하면서 주부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더는 남성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닥까지 던지는 심순애나 홍도는 없다. 다만 누구나 한 번쯤 빠질 법한 아슬아슬한 유혹 또는 갑작스런 시련 등을 보여주면서 공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1990년대 후반 다시 변곡점을 맞이한다.

“보통 사람의 상식과 도덕적 기준으로는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의 드라마. 억지스러운 상황 설정, 얽히고설킨 인물 관계, 불륜, 출생의 비밀 등 자극적인 소재로 구성된다.”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막장드라마다. 여기에 각종 불치병이나 기억 상실증, 팜므 파탈의 악녀, 처절한 복수 등의 코드가 더해지면 비로소 막장드라마의 조건을 모두 갖춘다.

이렇게 버무려 첫선을 보인 드라마가 바로 [인어 아가씨]다. 임성한 작가를 막장드라마의 원조로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 작가는 기존 드라마가 지녔던 덕목들을 깡그리 무시하며 플롯을 전개한다. 그 자리는 플롯의 비일관성, 인물의 성격파탄, 폭력적인 대사와 사건으로 채워져 있다. 또 이전까지의 드라마 등장인물은 성선설을 바탕으로 했다. 악당 한두 사람이 나오지만 어디까지나 주인공에 시련을 주기 위한 도구였다. 그러나 막장드라마에선 대부분의 인물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성악설 캐릭터다.

김순옥 작가의 출세작 [아내의 유혹](SBS)을 보자. 구은재(장서희)는 자신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을 되찾기 위해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철저한 복수를 계획해 실행에 옮긴다. 또 반대편에는 신애리(김서형)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인물이 있다. 이 작품에서 남편(변우민)이나 아버지는 우유부단한 방관자이거나 여인들의 욕망에 휘둘리는 주변 인물에 불과하다. 더는 심순애나 홍도 같은 여성은 없다.

[펜트하우스]도 마찬가지다. 각 캐릭터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싸운다. 모든 캐릭터가 적(敵)인 가운데, 일시적 동맹과 배신이 이어진다.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와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이유리)이 욕망을 위해 젖 먹던 힘을 쥐어 짜낸 것처럼 [펜트하우스]에서는 심수련·천서진·오윤희·주단태·로건리 등이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복수와 진압에 나선다.

이런 특징은 일단 김순옥의 개인적인 인간관과 무관하지 않다. 김 작가는 [펜트하우스] 시즌1이 끝난 뒤 한 언론 인터뷰에서 극중 캐릭터에 대해 “선악의 구분을 명확히 두지 않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악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고,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이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사람 본성이 이런데, 드라마에선 마냥 착하거나 나쁜 캐릭터만 나온다면 질릴 수밖에 없을 터. 2014년 [왔다! 장보리]를 끝낸 뒤 그의 모교인 이화여대 교내 언론사와 한 인터뷰에서 이런 생각을 밝힌다.

“악역을 캐스팅할 때, 무조건 못되고 독해 보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착한 이미지를 갖고 있거나 불쌍해 보이는 걸 중시한다. 그게 아니면 코믹해야 한다. (…) 그래야 시청자들이 악역 캐릭터를 50부작 동안 볼 때 부담스럽지 않게 캐릭터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김순옥 작품만의 특징이라곤 볼 순 없다. 앞서 짚었듯 [인어 아가씨]로 시작하는, 2000년대 이후 신파극 혹은 ‘막장드라마’ 일반의 특징이어서다. 이렇게 급격한 반전이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박숙자 경기대 융합교양학부 교수는 2017년 논문에서 막장드라마를 ‘신자유주의 시대의 부산물’이라고 해석한다(‘시기심과 고통: 자기계발 서사에 나타난 감정 연구―막장드라마 [아내의 유혹]을 중심으로’). 무한 경쟁이 미덕인 시대, 시기심은 악덕이 아닌 (생존을 위한) 열정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또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의 몰락과 가정 해체 등은 욕망과 복수의 주체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겨가게끔 하였다고도 말한다.

엉성한 개연성? 스피드로 메운다


▎평균 시청률 26.9%를 기록한 SBS 일일 드라마 [아내의 유혹](2008). / 사진:SBS
이렇게 시대가 만든 장르이지만, 막장드라마 문법을 그대로 따른다고 해서 흥행을 보증하진 않는다. 전문가들이 꼽는 김순옥 드라마의 차별지점은 파격과 속도다. 유선주 드라마 칼럼니스트는 [씨네21] 기고문에서 [아내의 유혹]의 플롯과 캐릭터를 “비록 날지는 못하나 시속 65㎞로 질주하는 타조”에 비유하며 설명한다.

“겁에 질린 타조가 빠른 다리를 버리고 모래에 고개를 처박아 버리듯, 이들은 위기에 몰리면 생각지도 못한 극단적인 행동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비밀을 밝히라 추궁당하면 다짜고짜 그릇을 깨고 그 조각 위에 딛고 서서 결백을 증명한다거나, 신분이 노출될 위기에 처하자 도망가는 대신 기습 키스로 위기를 넘기는 인물들…”

이 말처럼 김순옥 드라마는 사건의 개연성과 인과적 질서가 없다. 남녀가 불륜을 저질러도 그 관계가 왜 성립되는 것인지 전혀 설명이 없다. 어찌 보면 엉성하기 짝이 없는데, 이 결함을 메우는 것이 스피드다. 연극사 연구자인 이승희 박사는 “더 핵심적인 것은 이 모든 것의 속도가 타조의 것이 아니라 치타의 것이라는 데 있다”며 “인물의 캐릭터 구축과 사건의 전후맥락이 납득되는 데 소요되는 충분한 시간이란 필요 없다. 이는 작가의 의도”라고 설명했다.

빠른 속도에 더해 파격적인 전개는 시청자의 시선을 다른데 돌릴 수 없도록 만든다. 김순옥의 작품은 다른 드라마에선 3~4회쯤 등장할 작품의 핵심 열쇠를 첫 회에 던져버린다. 그런데 어렵게 열쇠를 찾았더니 다른 곳에서 열쇠가 또 발견된다. 하나만 열면 되는 줄 알았더니 문이 여러 개다. 다시 말해 김순옥의 작품 속에는 여러 편의 막장드라마가 들어가 있다. 이것이 빠른 전개로 숨 쉴 틈 없이 쏟아지면서 시청자는 지루한 틈을 갖지 못한 채 계속해서 침을 꼴깍 삼킬 수밖에 없다.

[펜트하우스] 시즌1을 보자. 첫 회의 시작은 민설아(조수민)의 죽음이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 중 한 명을 과감하게 죽인 뒤, 이를 뒤쫓는 방식으로 전개해 나간다. 그런데 사건을 파고들어 가면 천서진(김소연)-오윤희(유진)의 악연, 심수련(이지아)-주단태(엄기준)의 비극적 결혼, 천서진-주단태의 불륜, 로건리(박은석)-민설아 남매의 과거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이윽고 각 관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거대한 복수극이 완성된다.

실제로 김순옥은 과거 인터뷰에서 “내게 드라마는 정말 재미있고 극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 드라마엔 밥 먹는 장면이 안 나온다. 싸워서 밥상 엎는 장면은 나와도(웃음). 내겐 강박관념이 있다. 쉬면서 보는 드라마가 아니라 보는 내내 다음 장면이 궁금한 드라마를 쓰고 싶은 거다. 한번은 제 드라마 소리를 들었는데 모든 장면에서 다 싸우고 있더라. 나도 놀랐다.”

그는 이런 강박관념의 뿌리를 소싯적 즐겼던 만화와 탐정소설에서 찾았다. 김 작가는 “중학생 때 볼 만화가 없을 정도로 만화방에서 살았다”며 “그 경험이 작품 활동의 자양분이 됐죠. 탐정 소설도 반전 있고, 극적인 것들이 많다”고 돌이켰다.

시청자는 이제 ‘왜’라고 묻지 않는다


▎2018~2019년 방영한 SBS 수목 드라마 [황후의 품격]. 젊은 층으로부터 인기를 모으며 ‘월화순옥금토일’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 사진:SBS
이렇게 드라마의 전개방식은 전격적이지만, 결국 전하는 메시지는 통속으로 돌아간다. 권선징악이다. 심청이는 다시 살아나 황후가 되고, 심 봉사는 눈을 뜨며, 야반도주한 뺑덕어멈은 처벌받는 식의 ‘사이다’ 이야기다. 징벌 받는 대상은 달라지지만, 권선징악이라는 메시지는 김순옥 작품세계를 하나로 꿰뚫는다. [펜트하우스]에서 철퇴를 맞는 것은 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탐욕을 통해 부를 거머쥔 자들이다.

[펜트하우스] 시즌2에서는 어머니의 비극이 자식들에게 이어지는 서사까지 덧붙여진다. 천서진과 경쟁하다가 억울하게 1등을 빼앗긴 뒤 육체적 상처까지 입은 오윤희의 비극은 천서진의 딸 하은별에 의해 딸 배로나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또 계단에서 아버지를 밀쳐내 죽게 한 천서진의 과오는 딸 하은별이 배로나를 계단에서 밀쳐내 죽게 하는 방식으로 겹쳐진다. 그런 점에서 [펜트하우스]는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신화적 플롯을 갖고 있기도 하다.

김순옥 그 자신도 과거 인터뷰에서 “드라마 작가로서 대단한 가치를 전달하고 싶다거나 온 국민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한다”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보다는 “드라마를 통해 슬픔을 잊고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드라마를 쓰고 싶다”고 말한다. 장대하고 복잡한 복수극을 빠르고 경쾌한 리듬으로 풀어내면서 결국은 권선징악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바로 ‘김순옥 사가’(saga, 영웅 전설)의 정체다. 김순옥이 막장드라마 지적에도 십수 년간 건재한 비결이다. 그에 대한 비판은 극의 흐름이 더뎌지거나 반전이 식상해지거나, 혹은 소화하지 못할 메시지를 넣을 때만 유효할 테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김순옥의 드라마를 보며 ‘왜’라고 묻지 않고 그 자체로 즐기고 있다”며 “김순옥의 세계는 막장드라마에서 가장 세련되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 유성운 중앙일보 문화팀 기자 pirate@joongang.co.kr

202104호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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