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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40)] 축구자료 수집가 이재형 

2002 월드컵 안정환·홍명보 ‘골든골’ 공 환수 당시 주심 쫓아 에콰도르·이집트 직접 찾아가 

FIFA 2002 20주년 다큐서 히딩크·안정환보다 길게 소개돼
40년간 4만여 점 모아… 펠레·축구 원로들도 인정한 수집광


▎축구자료 수집가 이재형씨가 2002 월드컵에서 안정환 선수가 착용했던 한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촬영에 임했다. 그가 들고 있는 공은 당시 대표팀의 연습구로 히딩크 감독, 박항서 코치를 비롯해 전 선수단이 사인했다. / 사진:정준희 기자
지난 4월, 국제축구연맹(FIFA)은 자체 디지털 플랫폼 서비스인 FIFA+를 론칭했다. 여기에 ‘2002 아시아 오디세이(2002: This is an Asian Odyssey)’라는 제목의 영상이 업로드됐다. 2002 한·일 월드컵 개최 20주년을 기념하고 추억하기 위한 다큐멘터리다.

이 영상에는 2002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었던 브라질의 주장 카푸, 한국과의 준결승에서 옐로카드를 받는 바람에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 출전이 좌절됐던 독일의 에이스 미하엘 발라크, 일본의 천재 미드필더 나카타 히데토시 등이 출연한다. 물론 대한민국의 4강 신화를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과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골든골을 터뜨린 안정환, 포르투갈전 영웅 박지성 등도 나온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비중 있게 나오는 인물은 축구 스타도 세계적인 명장도 아닌 한국의 축구자료 수집가 이재형씨다. 그는 48분짜리 영상에서 7분 넘게 등장하며 2002 한·일 월드컵 스토리의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월간 축구 잡지 [베스트일레븐]의 기획이사를 맡고 있는 그는 2002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이 터뜨린 골든골 공과 대한민국의 4강을 확정 지은 홍명보의 스페인전 마지막 승부차기 공을 모두 갖고 있다. 이 이사는 두 경기의 주심을 맡았던 심판들을 직접 찾아가 ‘대한민국 국보’를 환수해오는 큰일을 해냈다.

이 이사는 세계적인 축구자료 수집가로 손색이 없다. 브라질 사람보다 펠레 관련 자료를 더 많이 갖고 있다. 북한에도 없는 북한 축구 관련 희귀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각종 축구자료와 기념품, 사진, 책과 잡지 등은 4만 점이 넘는다. 충남 천안에 들어설 대한민국 축구종합센터 내 축구박물관에도 그는 129점을 기증했다. 대한축구협회가 낸 물품의 두 배 이상을 개인 소장가가 제공한 것이다.

2002 한·일 월드컵 20주년을 맞아 이재형 이사를 인터뷰했다. 축구 선수가 되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축구 수집가가 된 그의 삶은 ‘기록과 자료의 중요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탈리아전 모레노 주심 설득, 안정환 골든볼 받아


▎이재형 이사가 사는 아파트 거실과 벽면을 가득 채운 각종 축구 관련 물품과 기념품. 그는 약 4만 점을 갖고 있다.
FIFA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찍게 된 건가요?

“지난해 1월, FIFA에서 제가 일하고 있는 [베스트일레븐] 잡지사로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저는 별일 아닌 것 같아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잡지사 후배들이 ‘FIFA래요, FIFA’라며 오히려 더 난리를 치는 겁니다. 2004년 3월에 [중앙일보] 정영재 기자가 ‘안정환 황금공 찾았다’는 제목으로 이탈리아전 골든골 볼을 에콰도르에서 찾아온 내용을 특종 보도한 이후 국내외 매체에서 제 스토리가 많이 다뤄졌고, FIFA가 이를 알고 제게 연락을 취한 거라고 합니다.”

촬영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코로나19 때문에 FIFA에서 직접 오지는 못하고 한국 내 촬영 대행 팀에 ‘이대로 찍어달라’고 구체적인 대본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제가 등장하는 첫 장면은 인천에 있는 대형 컨테이너 저장소인데, 실제로 제가 거기에 제 소장품들을 보관하고 있거든요. 거기서 시작해 에콰도르 가서 안정환 골든골 볼 찾아온 이야기, 이집트 가서 홍명보 4강 볼 찾아온 스토리로 이어집니다. 촬영하고 1년이 넘도록 영상이 안 나오기에 ‘통편집됐나’ 했는데 히딩크 감독, 안정환 선수보다 더 길게 나왔네요.”

안정환 골든볼 찾아온 얘기부터 해주시죠.

“2003년 10월 메이저리그에서 시카고 컵스의 월드시리즈 진출을 좌절시킨 ‘바트만 파울볼’을 컵스 팬이 사서 폭파시켰다는 기사를 봤어요. 순간 ‘이탈리아 사람들이 안정환 골든볼을 입수한다면 폭파시킬 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때부터 안정환 골든볼의 행방을 수소문했고, 국내 방송에서 이탈리아전 주심 모레노가 ‘그 공을 내가 갖고 있다’는 인터뷰를 하는 걸 보고 그를 찾아가기로 결심했죠.”

그 뒤 어떻게 됐나요?

“모레노의 주소를 파악하고 그에게 줄 선물을 마련했죠. 모레노의 얼굴 동판을 만들었고, 월드컵 기념품과 축구용품도 준비했어요.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 도착했는데 ‘모레노가 급히 미국 마이애미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에콰도르 프로리그에서의 판정시비로 살해 위협을 받고 도피 중이라는 거죠. 낙심이 컸지만 모레노에게 보내는 선물 보따리와 ‘공을 꼭 기증해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현지 교민에게 남겼어요. 한 달 뒤 모레노가 기증을 결심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비자 기한이 만료돼서 갈 수가 없었죠. 인천국제공항에서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국보’를 만나게 됐습니다.”

“정부·협회였다면 거절했을 것… 집념에 감동”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북한 대표팀 유니폼에 골키퍼로 출전했던 이찬명이 2007년 4월에 방한해 사인했다.
그 공이 진품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모레노 심판은 에콰도르 주재 한국대사관(당시 대사 심국웅)에서 기증식을 열고 관련 사진을 보내줬습니다. 공에는 이탈리아전 부심과 대기심, FIFA 경기감독관의 사인이 들어 있습니다. 모레노는 당시 입었던 심판복 상의와 이탈리아 공격수 토티를 퇴장시킬 때 꺼냈던 레드카드와 옐로카드도 함께 한국에 보냈죠.”

모레노 심판은 당시 무슨 말을 했나요?

“‘만약 한국 정부나 대한축구협회에서 공을 달라는 요청이 왔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당시 한국 팀에 유리한 판정을 했느니 어쩌니 군말이 있었기에 더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재형씨는 순수한 축구자료 수집가이고, 직접 여러 경로를 통해 끈질기게 접촉해왔다. 멀리 에콰도르까지 찾아온 그의 집념에 감동했다. 이 공이 한국 축구 역사에 남을 자료로 쓰였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남겼다고 합니다.”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난 이재형은 집 뒤 공터에서 매일 공을 차며 놀았다. 집 인근에 축구 명문 경신중과 홍익중이 있었는데 당시 속칭 뺑뺑이(추첨)로 홍익중을 가는 바람에 축구 선수의 길과는 멀어졌다. 하교 땐 경신중 축구부 훈련 모습을 1시간 넘게 멍하니 지켜보기도 했다. 축구를 못하는 대신, 고등학교 때부터 축구자료를 수집하며 축구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처음엔 축구 저금통, 우표 등을 모았다.

그동안 전 세계 45개국을 돌아다니며 4만여 점을 모았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자료 구입비와 여행비에 썼다. 30년 넘게 축구자료 수집에 들인 돈이 20억원은 넘을 거라고 한다.

“한국 축구 국보 돌려준 은인이 될 것” 설득


▎2002년 9월 7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 통일축구 북한팀 유니폼에 이재형씨가 북한 전 선수의 사인을 받았다.
홍명보의 스페인전 4강 확정 공도 갖고 계시죠?

“당시 경기 주심은 이집트 출신 가말 알 간두르였습니다. 안정환의 골든골 볼과 홍명보의 4강 확정 볼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이 골네트를 가르는 순간 경기가 끝났고, 주심이 그 공을 갖고 나갔다는 점입니다. A매치에서는 공 13개가 사용됩니다. 주심이 킥오프할 공을 갖고 들어가고 볼보이 12명이 하나씩 볼을 갖고 있죠. 따라서 경기 중에 아무리 역사적인 골이 들어갔다고 해도 경기가 끝난 뒤에는 정확하게 어떤 공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가말 알 간두르를 만나러 이집트까지 가셨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간두르 심판은 한국-스페인전이 국제 심판으로서 A매치 마지막 경기였대요. 그래서 기념으로 홍명보의 4강 공을 갖겠다고 해서 이집트로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돈을 좀 준비해 갔는데 섣불리 돈 얘기를 꺼내는 게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카이로까지 가서 간절하게 설득했죠. ‘당신이 이 공을 아이에게 물려주겠다는 마음은 참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공이 당신 집안에 있으면 대대손손 가보가 될 수 있겠지만, 이 공을 한국으로 보내주면 대한민국의 국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 가문은 축구 국보를 돌려준 집안으로 한국 국민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라고요. 결국 공을 넘겨받는 데 성공했죠.”

그 공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안정환 골든볼은 하나은행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수원월드컵기념관에 기증했습니다. 수원월드컵경기장 1층에 제가 기증한 희귀자료 300여 점으로 200평 규모 축구박물관을 꾸몄습니다. 1920년대 새끼줄을 뭉쳐 만든 축구공, 30년대 돼지 오줌보로 만든 축구공과 한국 최초의 축구공 제작 기계, 1882년 인천에서 처음으로 축구를 했던 영국 수병이 신었던 축구화 등이 전시돼 있죠. 홍명보 4강 공도 지금은 하나은행 금고에 있는데 가장 많은 사람이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곳으로 시집을 보내야죠.”

이재형 이사는 북한에도 없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관련 자료도 갖고 있다. 2007년 4월, 북한 청소년(17세 이하) 대표팀이 남쪽으로 전지훈련을 왔다.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골키퍼로 뛰며 8강 신화를 일궜던 이찬명이 팀의 단장을 맡고 있었다. 이 이사는 자신이 2004년 영국에서 구입한 등번호 10번 유니폼 상의를 갖고 북한 팀 숙소인 수원 캐슬호텔을 찾았다. 공격수 강용운 선수가 입었던 유니폼이었다.

“맞아요, 맞습네다. 틀림없이 우리가 입고 뛴 유니폼입네다. 북쪽에도 없는 걸 남쪽에서 볼 줄이야.”

이 단장은 깜짝 놀라며 이 이사를 쳐다봤다. 당시 유니폼은 지금 북한에 단 한 벌도 없다고 한다. 이 단장은 “우리 선수들에게 반한 영국 사람들이 애들부터 노인까지 찾아와 유니폼, 축구화, 양말까지 완전히 깝데기를 벗겨 갔지요”라고 말했다.

이 이사는 북한이 1980년대 생산한 평양 축구화, 2002년 통일축구와 부산아시안게임에 출전했던 북한 선수들 전원이 사인한 북한 대표팀 유니폼 등도 입수해서 갖고 있다가 수원월드컵기념관에 내놨다.

북한 관련 물품은 주로 중국 톈진의 고물상을 통해 구입했다. 1960년대 북한 대표팀 축구화는 한 켤레에 5백 달러를 줬다. 국내에서는 축구 원로들의 집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펠레 이발할 때 쓴 보자기도 브라질서 사들여


▎‘아시아의 황금 다리’로 유명했던 고 최정민 선생이 애지중지했던 1920년대 북한에서 만든 쇠가죽 축구화.
100년 된 쇠가죽 축구화도 있다면서요?

“맞습니다. 1950∼1960년대 ‘아시아의 황금 다리’로 불렸던 스트라이커 최정민(1983년 작고) 선생이 애지중지하던 보물 1호지요. 발목까지 올라오는 두툼한 쇠가죽, 군화의 앞부분처럼 생긴 코, 가죽으로 만든 스터드(봉)는 192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제가 2000년대 초반 영국에서 구입했습니다. 최정민 선생은 1926년 평양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 친지로부터 쇠가죽 축구화를 선물 받았다고 해요. 당시 국내에 한 곳뿐인 축구화 제조업체 서선양화점에서 만든 수제품이죠. 최 선생은 축구화 양쪽 밑창에 ‘崔貞敏’이라는 이름을 써놓고 한 번도 신고 뛰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그게 왜 영국까지 갔을까요?

“최 선생은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올 때도 그 축구화를 가장 먼저 챙겼다고 합니다. 1956년 홍콩에서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아시안컵)가 열려 한국이 우승을 차지했지요. 최 선생은 그때 만난 영국인 팬에게 그 축구화를 선물로 줬다고 합니다. 2001년 이탈리아의 수집가 클라우디오 파스쿠알린이 발간하는 축구 수집 잡지 [오프사이드(offside)]에 최 선생 사진과 기사 스크랩 그리고 그 축구화를 영국의 한 소장가가 갖고 있다는 내용이 실렸어요. 수소문 끝에 영국인 소장가를 만나 축구화와 스크랩 등을 모두 사 왔죠.”

축구황제 펠레의 자료도 많이 갖고 있다면서요?

“아마 제가 지구상에서 펠레 관련 자료를 가장 많이 소장한 수집가일 겁니다. 펠레가 산토스(브라질) 시절 단골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을 때 쓴 보자기까지 갖고 있으니까요(웃음). 펠레의 맨발 사진도 제가 처음 국내에 공개했죠. 1981년 애니 레이보비츠라는 사진작가가 찍은 것인데, 제가 브라질에서 입수해 보관하고 있었죠. 펠레가 어릴 적부터 숱하게 맨발로 슈팅과 드리블 연습을 하는 바람에 양발 모두 두꺼운 굳은살이 박혀 있고 오른발은 더 심합니다. 2006년에는 제 소장품 100여 점을 모아 ‘펠레 전시회’를 열기도 했죠.”

북한 축구자료 모을 땐 첩보영화처럼


▎이재형 이사가 40년간 전 세계를 돌며 모은 수집품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그는 “축구와 결혼했다”고 말했다.
희귀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죠?

“드라마를 찍어도 될 만한 장면들이 많았죠. 특히 북한 축구자료를 모으는 건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어요. 2002년 9월 서울에서 열린 남북 통일축구 전날, 친분이 있는 조성환(당시 수원 삼성) 선수에게 ‘경기 끝나면 꼭 북한 선수와 유니폼을 바꿔 입어라. 그리고 바꾼 유니폼을 경기장 떠나기 전에 나한테 전달해달라’고 미션을 줬어요. 유니폼을 받고 다음 날 아침 북한 선수단이 묵고 있는 호텔로 무작정 찾아갔죠. 경비가 삼엄한 호텔 입구에서 한 시간 동안 들여보내달라고 통사정을 했지만 경호 요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경호담당자 한 명이 ‘축구자료 전시회를 연 사람이 아니냐. TV에서 본 적이 있다’며 다리를 놓아줬어요. 그 덕에 조성환 선수가 받아온 유니폼에 북한 선수단 전원의 사인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때 국정원의 요시찰 대상이었다면서요?

“맞습니다. 국정원 요원과 몇 차례 만나기도 했지요. ‘저는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북한 축구를 좋아하고, 역사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이 일을 합니다’라고 했더니 이후 그 요원이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언젠가 통일이 되면 우리가 남북한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던 시절이 아련한 역사가 될 겁니다. 그때의 기록과 자료를 남겨놓는 것이 우리 역사를 이어가는 소중한 작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재형 이사는 “제가 FIFA에 큰돈을 벌어다준 사람”이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 묻자 그는 “제가 환수해온 2002 월드컵 안정환의 골든골 공 스토리가 외신을 통해 알려지면서 FIFA가 공의 가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월드컵 경기에서 골 못지않게 골이 된 공의 가치도 크다는 걸 알게 된 거죠. 2006 독일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만났죠. 지단의 박치기 사건이 일어났던 그 경기의 승부차기 결승골(이탈리아 그로소) 공을 FIFA가 확보해 경매에 내놨는데 카타르 왕족이 240만 달러(약 26억원)에 사갔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재는 과거가 되고, 과거는 역사가 된다. 역사에 스토리를 입히면 훌륭한 문화 콘텐트와 상품이 된다. 스토리를 만드는 실마리가 바로 하찮아 보이는 입장권 한 장, 양말 한 짝이다. 축구 레전드의 흔적을 모으다 보니 그도 어느덧 ‘축구 수집가 레전드’가 되어 있었다.

이재형 이사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어떤 분야든 미치지 않으면 최고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는 뜻이죠. 저는 축구에 미쳤고, 축구자료 수집에 미쳐 청춘과 재산과 시간을 바쳤습니다.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미치다 보면 어느덧 세상이 나를 알아주고, 부와 명예도 따라온다고 믿습니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 정영재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튜브 방송국인 중앙UCN의 대표를 겸하고 있다.

202206호 (20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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