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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25) 서울 가양동 궁산에 올라 

 

어떤 삶이 잘 살고 가치 있는 인생일까

입춘도 한참 지난, 겨울 끝 언저리 어느 날 점심 식사를 마친 후였다.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만물이 역동해 새봄이 우주의 새로운 주인님이라고 알리는 듯해, 풍덩 빠지고 싶은 파란 하늘에 새콤달콤 달달한 공기, 살포시 피어오르는 봄의 전령사들에 이끌려 발걸음이 서울 궁산(宮山)으로 향했다. 궁산 인근에는 서울식물원과 겸재 정선 미술관, 양천향교가 있고 회사에서 2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평소에도 산책 삼아 자주 가는 야트막한 산(76m)이다. 푹신한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아름다운 소나무 길을 지나서 산 서쪽 소나무 군락지의 피톤치드를 한 모금 가볍게 들이마신 듯한 기분인데, 벌써 궁산의 정상에 이르렀다. 눈앞에는 수묵화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전경이 펼쳐졌다. 아담한 마당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고, 외로이 소나무 몇 그루와 겨우 눈썹만 한 넓이의 억새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찬란한 새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궁산은 삼국시대에는 파산이라 불렀고, 산성이 있어 성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후 산자락에 있는 양천향교에서 인류의 스승 공자를 모시고 있어 귀하고 중하다는 의미를 담아 궁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궁산 산성에서 관군과 의병이 진을 치고 한강 건너편 행주산성에 주둔하는 권율 장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친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도성을 수비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지만 평시에는 바로 아래 한강에서 뱃놀이와 풍류를 즐기는 명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1737년 영조 시대에 궁산 인근에 소악루(小岳樓)가 지어졌고, 65세에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9)이 이 소악루에 올라 풍광에 취해 뛰어난 산수화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나도 잠시 정선의 마음을 느껴보고자 소악루에 앉았다. 유유자적 흐르는 한강과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쉼 없이 내 달리는 88도로와 강변북로, 아련한 북한산과 하늘공원, 그리고 조그마한 낭만을 싣고 인천공항을 향해 내달리는 마곡철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최근에 생가와 사당을 직접 찾아가 봤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홍성군 인물탐방여행에서 인상 깊게 본 김좌진(1889~1930) 장군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서해안고속도로 홍성IC에서 시내 방향으로 5분 정도 가자 김좌진 생가가 나왔다. 김좌진 생가는 아담한 산자락, 비교적 큰 냇가, 앞이 확 트인 전형적인 배산임수 명당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장군의 가문은 홍성에서 제일 부유하고 명문 집안으로, 비교적 자유스러운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일찍이 한학을 배우고 하얀 명마를 타고 무예와 호연지기를 길렀다고 한다. 한양에서 신교육을 받고 큰 깨우침을 얻은 김좌진은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형이 가까운 친척 집에 양자로 갈 무렵, 불과 17세 때 30명의 노비에게 재산을 나눠 주고, 노비 문서도 불태워 해방해줬다고 한다. 더불어 그 큰 저택을 호명학교(湖明學校)로 개조해 후학을 가르쳤다고 하니, 훌륭한 장군이기 이전에 조선 최고의 인문주의자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다고 봐야겠다.

그렇게 큰 인물로 성장한 김좌진은 광복군 대한군정서 사령관으로 임명돼 1920년 10월 21~25일 5일간 벌어진 청산리전투에서, 일제 강점기 무장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워 우리 가슴에 영원히 지지 않는 별이 된다. 그런데 너무나 젊은 나이 41세 때인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당 청년회원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장군은 “할 일이 너무나 많은 이때 죽어야 한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순국했다. 그의 죽음을 생각하니 참으로 허망하고 가슴이 아파왔다.


다음으로, 김좌진 생가에서 5.3km 떨어진 곳에 있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정신적 스승인 만해 한용운(1879~1944) 생가를 방문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낮은 산들로 둘러싸인, 한적하고 조용한 야산 중턱에 있었다. 한용운은 좋은 가문에서 부족하지 않게 태어나 일찍이 학문을 배웠고, 25살 때 아들 한보국을 낳은 후 평범하게 살다가 설악산에 있는 백담사 오세암으로 출가한다. 학문에 정진하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한용운은 혼자만의 열반을 넘어온 인류에게 살아있는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한 신념 속에 〈조선불교유신론〉과 〈님의 침묵〉 등을 집필하고, 민족 대표 33인에 나선다. 그의 시는 불교적인 의미의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해 고도의 은유법을 통해 독립정신과 민족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킨 바, ‘저항 문학의 백미’라고 칭송받는다. 하지만 그 위대한 인류의 스승도 1944년 6월 29일, 66세의 나이에 둘째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심우장에서 쓸쓸히 입적, 이슬로 사라진다.

이후 내 발걸음은 성삼문(1418~1456)이 태어난 곳이자 그를 기리는 사당으로 이어졌다. 한용운 생가에서 약 20km 떨어진, 정말 평범하고 작은 마을 어귀에 사당이 있었다. 홍성은 성삼문의 외가인데, 태어난 뒤로는 대부분 한양에서 자라고 생활했다고 한다. 성삼문은 어릴 때부터 영특해 과거에 응시해 장원급제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자로서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헌을 했다. 수양대군도 그를 큰 인물로 보고 아껴서 승진도 빨리 시켜줬다고 한다. 하지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유교 사상이 몸에 밴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이듬해 단종 복위를 계획한다. 하지만 혁명을 함께 하기로 한 김질이 모든 사실을 그의 장인에게 밀고하면서 단종 복위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후 성삼문을 포함한 사육신은 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멸문지화의 죽임을 당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부터 성삼문은 세상 사람들에게 만고의 충신으로 회자된다.


마지막 행선지로 고려 말 최영(1316~1388) 장군 사당을 찾았다. 신기하게도 성삼문 사당과 가깝게 있었다. 최영은 마지막까지 고려를 지킨 충신이자 영웅이었지만, 한순간의 오판으로 한때는 자기 휘하였던 이성계에게 500년 역사의 나라를 송두리째 바친 패배자가 돼버렸다. 최영은 수많은 왜적과 북방민족의 침입을 격파하고 반란군을 진압한, 그야말로 충직하고 용맹한 장군이었다. 당시 고려 백성들은 물론, 침입한 나라의 적장들도 그를 추앙하고 경외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최영은 요동 정벌 기치를 내걸고 나섰다가 부하 장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만다. “내가 평생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고려 백성들의 가슴 속 영원한 별이 돼 쓸쓸히 이슬로 사라진다.

나는 5명(정선, 김좌진, 한용운, 성삼문, 최영)의 인물들을 생각하면서 이들 가운데 ‘누가 가장 행복하고 잘 살았던 삶일까?’ 하는 상념에 빠졌다. 이들은 모두 중산층 이상의 양반들로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인간의 생각이란 것이 하루에 수십만 번 마음이 바뀔 수 있지만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았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그러한 능력과 성품들이 그들을 만고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그들도 세속적인 욕심에 흔들리는 마음이 없진 않았을까 싶다. 그들도 불완전한 인간이었고, 옥에 티처럼 그늘도 있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김좌진은 아나키즘(파괴, 암살)적인 성격이 강했고, 사람들에게 너무 엄격했다고 한다. 성삼문은 고집스럽고 완벽을 추구하는 그 성격 때문에, 혹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임기응변이 부족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그가 모진 고문 끝에 단종을 혁명가담자로 발설해 결국 단종의 죽음을 촉진했다는 설도 있다. 최영은 용맹한 장군이었지만, 자신의 능력만 믿고 요동 정벌을 밀어붙인 것은 과욕이었을 수 있다.

한용운은 스님이지만, 결혼을 두 번이나 한 사람이기도 했다. 때로는 파계승을 옹호하기도 했고 그 당위성을 위해 많은 상소문을 썼다는 등 그에 관한 여러 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의 신념과 성공의 잣대는 때에 따라,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결국 그 평가는 각자의 생각에 달렸다. 정답은 없는 것이다. 남들이 인정하고 우러러보는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도 훌륭한 삶이지만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가치관에 따라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이 잘사는 삶일 수도 있다. 그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73세 천수를 누리는 날까지 현감 벼슬을 지내면서, 온 세상을 구경하고 멋진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덤으로 작품도 길이길이 남아 칭송받는 겸재 정선의 삶이 최고로 맛있고 멋진 삶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출중한 능력과 환경을 갖추지 못한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멋진 삶은 어떤 삶일까? 어쩌면 모든 파고를 슬기롭게 뛰어넘어 이제는 거울 앞에 예쁘게 선, 내 둘째 누님의 삶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깊은 산골에 사는 농부의 3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누님은 초등학교를 마친 뒤 상급학교 진학을 갈망했지만, 가정 형편상 어린 나이에 방직 공장에 취업해야 했다. 밤을 새우며 피땀 흘려 번 돈으로 가난한 산골에 TV 등 세간을 사서 보내며 신문명을 보급하고, 논밭을 사는데도 아낌없이 헌신한다. 더불어 두 동생을 도시에 유학시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토양이 돼주었고, 세계문학전집 등 여러 책을 통해 지식과 지혜의 광명을 눈뜨게 해주었다.

날씬한 미모여서 좋은 자리도 많았지만, 가난해도 성실하고 인품 좋은 남편을 만나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 1남 3녀를 기르고 가르치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도회지까지 버스를 타고 오갔다. 다리가 퉁퉁 부을 정도로 수십 킬로미터를 걷고 또 걸어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화장품을 팔았고, 또 밤늦게까지 식당에서 부업도 마다치 않았다. 부모님 생신이나 명절 때에는 작은 선물에 미안해하면서, 또 그것을 만회하려는 듯 쓸고 닦고, 궂은일을 도맡아 부부가 쉬지 않고 정성을 다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지만,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누님은 수십 번 병원 신세를 졌고, 매형은 암 판정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누님은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언제나 잘될 것이라는 신념과 기도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드디어 2주 전 큰딸을 끝으로 1남 3녀 모두를 대학까지 가르치고 출가시켰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누님은 항상 바르셨고 당당했고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이웃에 살갑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어쩌면 이런 내 누님의 삶이 진정으로 성공한 삶이고, 최고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새삼, 멀리 있는 누님에게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춘래불사춘이라 했던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순리임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겨울 전사들이 가만히 앉아서 우주의 왕관을 새봄에 넘겨줄 수 없다는 듯, 한강에서 부는 찬바람들을 마구 동원해 내 얼굴을 매섭게 공격해온다. 그래도 이제는 그것마저 달콤하고 부드러운 꿀맛이다. 늘 푸른 새봄이 사랑하는 누님에게 언제나 가득하길 기원하며 궁산을 가뿐히 내려왔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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