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9)] 맹자는 왜 삼림파괴를 걱정했나 

농업이 친환경 산업이라고? 황하(黃河)는 원래 하(河)였다 

황하 중상류에 수도 세운 중국 왕조, 궁(宮) 만들려 나무 수없이 베어내
조선의 대대적인 개간 사업으로 백두산으로 밀려난 호랑이, 멸종 위기


▎중국 황하(黃河)강의 후커우(壺口) 폭포를 관람하는 관광객들. / 사진:신화통신
"우산(牛山)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그것이 큰 나라의 근교에 있어서 도끼와 자귀로 베어내니, 어떻게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낮과 밤에 자라나는 것이 비와 이슬이 적셔주어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소와 양을 또 방목하므로 이 때문에 저와 같이 벌거벗게 된 것인데, 사람들은 그 벌거벗은 것만을 보고는 일찍이 재목이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어찌 산의 본래 성질이겠는가?”

[맹자]에 나오는 ‘우산지목(牛山之木)’의 내용이다. 여기서 맹자가 이 말을 한 것은 실제로는 인간의 본성을 다루기 위해 꺼낸 비유적 예시였다. 하지만 맹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현대 기후환경학에서는 맹자의 ‘우산지목’이 고대 중국의 자연환경 상황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 자료로 인용되곤 한다. 벌목으로 인해 주변 산이 민둥산으로 변해버렸다는 점이나, 싹이 자라나도 그 일대에서 방목되는 소와 양이 이를 싹 뜯어먹어 버려 산이 회복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국 문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황하 일대가 어떻게 바뀌어 갔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단서가 된다.

농경과 도시 건설로 하(河)가 황하(黃河)로


▎현대 기후환경학에서는 맹자의 ‘우산지목’이 고대 중국의 자연환경 상황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 자료로써 인용되곤 한다. / 사진:Wikimedia Commons
황하(黃河), 중국 쿤룬산맥에서 발원해 칭하이성·쓰촨성·간쑤성·닝샤후이족자치구·네이멍구자치구·산시성(陕西省)·산시성(山西省)·허난성·산둥성 등 많은 지역을 지나 발해만으로 빠져나가는 5464㎞의 강으로 중국 문명의 요람으로 불린다. 하(夏)·상(商)·주(周) 등 중국의 초기 왕조가 황하 유역에서 일어났고, 장안·낙양 같은 유서 깊은 왕도가 이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황하는 글자 그대로 황색의 강이다. 강에 흙이 워낙 많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1세기 한(漢)나라 때 간행된 [한서(漢書)]에도 ‘물 1말에 진흙 6되’ 즉 황하의 60%가량이 진흙이라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그런데 그 이전만 해도 황하는 단순히 ‘하(河)’라고 만 불렸을 뿐 ‘황하’라고 기록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진흙투성이의 강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학자들에 따르면 황하의 색깔이 바뀌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진(秦)·한(漢) 시대에 황하 중상류인 중국 북서 지역에서 농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때 황하 유역에 있던 거대한 초지가 경작지가 되면서 나무를 보기 어려워졌다. 또한 황하 중상류는 주(周)와 진(秦)나라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지난호(2022년 12월호 ‘초한지’, ‘삼국지연의’로 본 장안-낙양 흥망성쇠)에서도 조금 언급했지만, 이 지역에는 장안·낙양을 비롯해 호경(鎬京)·옹(雍)·약양(櫟陽) 등 각 왕조의 여러 수도가 건설됐고, 이때마다 많은 궁이 들어섰다. 그때마다 건설사업에 필요한 수많은 나무가 베어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숲이 중요한 이유는 바람이나 물 때문에 표토가 깎이는 침식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농경과 건설을 위해서 숲이 사라지자 흙이 강으로 밀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토양의 응집력이 감소하면서 비가 내리면 모래, 작은 돌, 흙 등이 산과 언덕 아래로 빗물과 함께 흘러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산에 있는 골짜기를 먼저 메우기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저지대의 강까지 밀려 내려온다. 이런 현상이 천 년 가까이 반복되면서 맹자가 말한 우산(牛山)이 수 천 개는 사라졌다. 그렇기 때문에 진(秦)나라가 망하고 기원전 206년 한(漢)나라가 들어설 무렵에 황하 중 상류는 숲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는 황토 고원처럼 바뀌어 있었고 단순히 ‘하’라고 부르던 강은 ‘황하’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되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 화북 지역의 이런 환경은 역사학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정사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한반도 진한(辰韓)에 살면서 낙랑군에 귀화하려던 염사치(廉斯鑡)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낙랑으로 가던 도중 호래(戶來)라는 중국인(漢人)을 만났는데, 호래는 3년 전 벌목하기 위해 진한에 왔다가 노예로 붙잡힌 상황. 거기엔 1500명의 중국인 노예가 더 있었다. 염사치는 호래를 데리고 낙랑군에 가서 이 사실을 알려 큰 포상을 받았다. 학자들은 이때 1500명의 중국인이 벌목을 하러 왔다가 노예로 붙잡힌 사실에 주목한다. 중국 화북 지역에 부족한 목재를 한반도에서 공급하려 했던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상식’ 중 하나가 농업을 친환경 산업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로 역사를 돌아보면 농업은 지구 환경을 가장 파괴한 산업이다. 논과 밭을 만들기 위해 각지에서 ‘개간’이라는 명목으로 숲이 사라졌으며, 나중에는 이조차도 부족해서 숲을 태워 화전(火田)을 일구기도 했다. 동양뿐만이 아니다. 물을 끌어들이는 관개농업(灌漑農業)은 땅을 산성화시켜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더는 농업이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사탕수수를 심는 플랜테이션 농업은 카리브해와 대서양 일대 우림을 파괴했다.

농업은 지구 환경을 가장 파괴한 산업이었다


▎근대 중국은 동북 지역에 개척단 명의로 대규모 노동이민을 권장했다.
그래서 황하 중상류가 가장 먼저 황폐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황하 중상류는 주(周)나라의 발상지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발달한 농업 문명을 갖춘 세력이었다. 주 왕조의 전설적인 시조는 후직(后稷)인데, 그는 농경의 신이자 오곡의 신이기도 하다. 중국 전설적 왕인 요(堯) 시대에 농사를 관장하는 장관에 오르기도 했다.

[맹자]는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차지한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성군 요와 순이 사망한 뒤에 성인의 도가 퇴락했다…(상나라의) 폭군이 경작지를 돌보지 않고 그곳을 정원과 사냥터로 만들어버렸던 탓에, 백성들은 의복과 식량을 얻을 수 없었다. 정원, 사냥터, 연못, 호수, 늪지가 많아지자 새와 짐승들이 그곳에 옮겨왔다. 주왕(紂王·상나라의 마지막 왕) 때 천하가 다시 한번 큰 혼란에 빠졌다. 주공(周公)이 무왕을 도와 주왕을 정벌했다. 주공이 호랑이, 표범, 코뿔소, 코끼리를 멀리 쫓아내자 천하가 크게 기뻐했다.”(한국어로는 발음이 같아 다소 헷갈릴 수 있는데 주왕(紂王)은 상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주나라와는 관련이 없으며, 주공(周公)은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 상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이 내용은 주나라의 천하 제패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상나라의 폭정을 비판하면서 “경작지를 돌보지 않고… 새와 짐승들이 그곳에 옮겨왔다”고 언급한 부분이다. 주나라는 전형적인 농경민족이었기 때문에 농업을 소홀히 하는 군주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천하를 제패하자마자 농경지 개간에 힘썼다. “주공이 호랑이, 표범, 코뿔소, 코끼리를 멀리 쫓아내자 천하가 크게 기뻐했다”는 내용은 주 왕조의 적극적인 농경지 개간으로 터전을 잃은 동물들이 남쪽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이때만 해도 황하 중상류에는 코뿔소나 코끼리처럼 열대 기후에서 사는 것으로 알려진 동물들이 살고 있었는데, 지금 볼 수 없는 것은 기후 변화와 더불어 주나라의 농업 우선 정책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주공은 유교에서도 성인으로 칭송받는 정치가인데, 유교의 학자들은 주공이 야생동물들을 몰아내고 농경지를 확대한 과정을 국왕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삼곤 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군주에게 가장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었다.

주나라를 이상적 모델로 삼았던 조선은 건국 초부터 적극적인 개간을 추진했다. 대대적인 개간 사업 결과 조선의 경작지는 건국 직전 79만8000결에서 171만결(조선 세종)까지 2배 가까이 늘었다. 평안도는 태종 때 경작 면적이 6648결에 불과했는데, 17세기엔 15만결이 됐을 정도로 폭발적인 개간이 진행됐다.

대대적 개간에 밀려난 호랑이, 인가에 출몰


▎조선 시대 농지 개발이 계속 진행됐고, 인간에 밀려 거주지를 잃은 호랑이는 백두산 등 깊숙한 산악지대로 후퇴해야 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야생 동물의 입장에서는 거주 공간을 빼앗기는 일이었다. 호랑이는 초목이 무성하고 물가가 가까운 낮은 구릉 지대에 즐겨 살았는데, 이곳은 농토로 개간하기에 좋은 땅이었다. 생활공간을 빼앗긴 호랑이는 자주 인가로 출몰했고, 조선 태종 때는 궁궐에 호랑이가 뛰어들 정도로 호환이 잦아졌다. 결국 조선은 대대적인 호랑이 소탕에 나섰다.

“범을 잡으소서…만일 동왜(東倭)와 북적(北狄)이 우리 경계를 침범하여 노약(老弱) 2, 3구(口)를 노략질하여도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국위를 보이는데, 하물며 이러한 악한 범이 인물을 상해하여 그침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옛적에 주공(周公)이 호표서상(虎豹犀象)을 몰아낸 것은 백성의 해로움을 제거한 것입니다.”([성종실록] 5년 윤6월 25일)

이처럼 주나라 주공을 본받으라는 요청에 조선의 임금은 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전국 군현에 매년 호랑이를 잡아 그 가죽을 진상하도록 했고,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호랑이 사냥 전문 부대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편성했다. 이들은 조선의 정예 병력인 갑사(甲士) 중에서도 최정예로 꼽혔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착호갑사 440명을 포함해 각 주(州)·부(府)·군(郡)·현(縣)에서 20~50인의 착호인(捉虎人)을 선발해 운영했는데 총 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은 호랑이 사냥의 대가로 세금을 면제 받았다. 호랑이 전문 연구가인 김동진 전 교원대 교수는 전국 330여개 군현에서 매년 호랑이를 440~740마리가량 잡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수령이 1년에 호랑이 10마리 이상을 잡으면 계급을 더하는데, 도둑을 잡는 것은 논상하는 법이 없습니다”([성종실록] 20년 3월 15일)는 기록은 당시 조선이 얼마나 호랑이 잡기에 혈안이 돼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와 함께 각 고을에는 매년 호랑이 가죽을 일정량씩 바치게 했다. 결국 17세기가 되면 호랑이 가죽을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인조 11년(1633년) 전라도 무안현감이던 신즙은 “매년 겨울 석 달 동안 잡은 게 겨우 1~2마리”라고 하소연했다.

이렇게 되자 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호랑이 잡는 일은 중단했으나, 흐름은 되돌리기 어려웠다. 인구 압박으로 인한 농지 개발은 계속 진행됐고, 인간에 밀려 거주지를 잃은 호랑이는 백두산 등 깊숙한 산악지대로 후퇴해야 했다. 이미 구한말이 되면 호랑이는 보기 어려운 동물이 됐다. 그리고 일본 부호들의 과시용 사냥은 호랑이 멸종에 마침표를 찍었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304호 (2023.03.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