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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4)] 우리 금속활자, 세계 최고(最古)면서 최고 아닌 이유 

최초로 만들고도 인쇄 혁명으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 

서울 종로 공평동에서 조선 금속활자의 백미 ‘갑인자’ 발굴되기도
활자 원료 부족과 특권층의 한글 보급 거부로 인쇄술도 뒷걸음질


▎서울 종로는 땅을 파면 조선시대 유물·유적이 쏟아져 나와 ‘한국의 폼페이’라 불린다. 2021년 공평동 재개발지구에서 갑인자로 보이는 금속활자 1632점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사진은 2015년 조선 수도 한성의 골목길과 건물 성터가 온전하게 발굴된 서울 공평동 유적지. / 사진:이훈범
2021년 6월 서울의 도심 문화 거리인 종로구 공평동 재개발 지구에서 유적을 발굴하던 수도문물연구원 조사팀의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16세기 건물 터에서 범상치 않은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조선시대 수도 한성 4대문 안에 들어 있는 지역이다 보니 팠다 하면 유물이 쏟아져 나와 ‘한국의 폼페이’라 불리는 종로였기에 기대한 바 있었지만, 결과는 그야말로 입을 다물 수 없는 것이었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도기 항아리였다. 윗동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도자기로서 가치는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항아리를 가득 메운 흙 속에 잘린 금속판 조각들과 함께 자갈처럼 생긴 것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오랜 세월 뭉치고 굳은 흙뭉치였다. 조사팀은 이 흙뭉치 표면을 조심스럽게 세척해 불순물을 제거해 나갔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장방형 금속조각이 남았다. 다름 아닌 금속활자였다.

‘한국의 폼페이’ 종로에서 발견된 갑인자


▎서울 공평동 유적에서 출토된 금속활자. 국립고궁박물관은 이것이 1434년(세종 16) 주조한 ‘갑인자’라고 발표했다. 뒷면이 장방형의 됫박 형태를 띠고 있다. / 사진:문화재청
흥분을 감추지 못한 조사팀은 항아리 안에 가득 들어 있던 흙덩이들을 조금씩 덜어내며 조심스럽게 굳은 흙을 씻어냈다. 수백 년의 때를 벗고 작은 금속 조각들이 하나하나 고유의 누런 빛깔을 드러낼 때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나온 금속활자가 무려 1632점이었다.

그 수도 수지만 범상치 않은 것은 일부 활자의 모양이었다. 자체가 세련된 것은 물론이고 뒷부분이 장방형으로 움푹 파인 됫박 형태였던 것이다. 연구자들 머리에 [세종실록]의 한 구절이 스쳤다. “후에 고친 주자는 네 모퉁이가 평평하고 바른 데다(後改鑄字四隅平正)…”([세종실록] 1435년 8월 24일 기사)

지금까지는 없었던 획기적인 발굴이었다. 조선이 1403년 태종 때 계미자를 만든 이후 수십 차례 금속활자를 주조했던 터라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금속활자는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속활자만 해도 수십만 점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조선 중기 이후 주조된 것들이다. 계미자는 말할 것도 없고 세종 2년인 1420년 주조한 경자자, 1434년 만들어져 조선을 대표하는 금속활자로 자리매김한 갑인자는 한 점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것들로 인쇄한 금속활자본만 존재할 뿐이었다.

공평동에서 발견된 금속활자에 시선이 쏠린 이유다. ‘후에 고친 네 모퉁이가 평평하고 바른’ 활자란 다름 아닌 갑인자를 일컫는 것이었다. 물론 장방형 됫박 형태만으로 갑인자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당한 시간을 들여 정밀한 비교 분석 작업을 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함께 발굴된 유물들이 그런 기대감을 높였다. 우선 이번에 발굴된 금속활자 중에는 다수의 한글 활자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ㅭ’, ‘ㆆ’, ‘ㅸ’ 등 동국정운식 표기를 한 활자가 있었던 것이다. [동국정운(東國正韻)]은 1448년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이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간행한 운서(韻書)다. 동국정운식 표기란 한자를 우리 말로 표기할 때 표준음에 가깝게 표기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동국정운식 쌍자음들은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에만 잠시 사용됐고 이후에는 쓰이지 않았다. 그것들과 함께 발굴된 금속활자들이 15세기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 밖에 한글 금속활자를 이루는 대자(大字), 중자(中字), 주석 등에 사용된 소자(小字), 특소자가 모두 출토됐다. ‘이며’ ‘이고’ 등 한문 다음에 자주 쓰이는 한글 토씨들을 편의상 하나로 주조한 연주활자(連鑄活字)도 10여 점이나 나왔다.

항아리 주변에서 함께 발굴된 유물 중에는 총통도 있었다. 복원된 크기가 대략 50~60㎝인 승자총통 1점과 소승자총통 7점이었다. 총통은 총구에 화약과 쇠구슬(총알)을 장전하고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소형 화기다. 총통에 새겨진 명문을 판독해보니 승자총통은 계미년(1583년), 소승자총통은 만력(萬曆) 무자년(1588년)에 만든 것이었다.

이들 총통이 처음 발견된 것은 아니다. 무자년 소승자총통은 전남 진도군 명량대첩로 해역에서도 발굴된 적이 있다. 다만 이들 총통이 갖는 더 큰 의미는 그것이 공평동 유물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다른 유물들의 제작 시기는 아무리 늦어도 1588년 이전 것들이라는 뜻인 까닭이다.

전란 맞아 땅에 묻고 피란 간 것으로 추정


▎서울 공평동 유적지는 종로구 센트로폴리스 건물 지하에 도시유적전시관으로 조성돼 있다. 금속활자가 출토된 유적지는 이보다 더 큰 규모이며 역시 전시관으로 보존될 계획이다. / 사진:이훈범
만력이란 명나라 신종의 연호로, 선조 6년(1573)에서 광해군 12년(1620)까지 쓰였다. 알다시피 무자년 총통이 만들어진 지 4년 뒤인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장은 “임진왜란과 시기적으로 가까운 것으로 미뤄 당시 전란을 맞으면서 유물들을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어두고 피란을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이처럼 근거가 될 수 있는 자료가 넘쳐서일까? 공평동에서 금속활자를 발굴한 지 6개월도 안 된 시점에 한국은 물론 세계 인쇄 문화사에 일획을 긋는 발표가 나온다. 국립고궁박물관이 공평동에서 발굴된 1632점의 금속활자 가운데 48자를 ‘갑인자’로 확정하고 공개 전시회를 연 것이다.

고궁박물관 측에 따르면 발굴된 금속활자를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갑인자본 [근사록(近思錄·1436년)]과 대조한 결과, 작은 글씨(가로 0.8㎝, 세로 1.5㎝)의 ‘화(火)’자, ‘음(陰)’자와 정확히 일치하는 활자를 발견했다. 이어 이 두 글자와 형태와 모양이 같은 활자 48점을 찾아내 갑인자로 결론 내린 것이다. 고궁박물관 측은 이 밖에도 공평동에서 발굴된 금속활자 중 8점을 갑인자 큰 글씨(가로 1.6㎝, 세로 1.5㎝)로 추정했다. 형태와 서체가 유사해 갑인자로 보이지만 소장한 갑인자본 서책에 같은 글자가 없어 대조를 하지 못했을 뿐이다. 갑인자로 확정하지 못하고 추정으로 발표한 이유다. 고궁박물관 관계자는 “성분 분석을 제대로 하려면 유물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에 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 가능한 연구 방법을 총동원해 분석한 결과 갑인자가 분명했다”며 “향후 조사에 따라 공평동 유물에서 갑인자가 더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공평동에서 발굴된 금속활자가 갑인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흘러나오자 현재 금속활자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도 덩달아 부산해졌다. 사실 중앙박물관으로서는 자존심이 조금 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금속활자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인데, 정작 ‘국가대표 금속활자’는 고궁박물관에 빼앗기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

공평동 발굴 소식이 전해진 뒤 3개월쯤 됐을 때 중앙박물관은 소장품 중 갑인자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52점을 찾아내 전시한다고 발표했다. ‘추정’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고궁박물관의 전시회보다 한 달가량 앞서 전시회를 개최한 것이다.

고고려 때 만든 현존 세계 최초 금속활자


▎서울 공평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깨진 도기 항아리에 금속활자들이 구리 조각들과 함께 담겨 있는 발굴 당시 사진. 구리 조각들은 세종~중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자동 물시계 자격루의 부품이다. / 사진:문화재청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수십만 점의 금속활자는 대부분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을 인수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갑인자로 추정된 활자는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일본인에게서 구매한 것이었다. 당시 등록할 때는 단순히 ‘청동활자’로 분류됐지만, 이 활자들이 공평동에서 출토된 활자와 크기·모양이 유사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박물관 측이 정밀 분석한 결과 갑인자 인쇄본인 [근사록]과 [자치통감] 글자와 크기·서체가 일치했다. 그중 33점을 대상으로 성분 분석을 해봤더니 구리·주석·납 함량이 1455년 무렵 만든 한글 금속활자 소장품과 비슷했다.

세조 때인 1455년 주조한 금속활자는 조선 전기 명필 강희안의 글씨를 바탕으로 만들어 일명 ‘강희안자’라고도 불리는 ‘을해자(乙亥字)’를 말한다. 이때 을해자 병용 한글 활자가 만들어졌는데, 그중 30여 점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공평동 발굴 이전까지 현존하는 최고(最古) 조선금속활자였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갑인자로 추정되는 활자는 뒷면이 입구(口)자 모양 또는 십자형 홈이 있지만 조선 후기 활자는 둥근 조각칼로 긁어낸 듯한 직선 형태 홈이 있어 구별된다”고 설명했다.

2021년 두 국립박물관이 경쟁이라도 하듯 한 달 간격으로 잇따라 갑인자 전시회를 여는 바람에 국민들은 모처럼 눈 호강을 했다. 비록 가로 세로 1㎝ 정도에 불과한 작은 구리 조각들이지만, 보다 우수한 책을 찍어내고 보급하려고 노력한 조상들의 자랑스러운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갑인자가 조선 시대 대표선수 격인 금속활자라 해도, 한국 최초(한국 최초가 곧 세계 최초) 금속활자는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비록 한 점뿐이기는 하지만 고려 때 제작된 금속활자까지 소장하고 있다(북한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도 다른 한 점이 소장돼 있음).

2015년에는 남·북한 공동 발굴 조사단이 고려 시대 왕궁터인 개성 만월대에서 세 번째 금속활자를 발굴하기도 했다. 이는 기존 남·북한 소장품 두 점과 달리 출토지와 발굴 이력이 명확한 것이어서 금속활자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활자의 제작 시기를 만월대가 소실된 1361년 이전으로 확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월대는 태조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이듬해인 919년 건설한 왕궁으로, 1361년 홍건적 침입 때 불타 없어지기 전까지 고려 중앙 권력의 핵심 통치 공간이었다. 이처럼 궁궐에서 출토된 데다 서체도 기존 활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고, 주조 기술도 훨씬 정교하기 이를 데 없어 국가 주도로 만든 우수한 활자로 평가받고 있다.

유럽에 비견할 ‘인쇄 혁명’은 못 이뤄


▎서울 공평동 유적지에서 출토된 한글 금속활자 소자(위)와 연주활자(아래). / 사진:문화재청
하지만 고려 금속활자는 현존하는 활자 수도 적은 데다 활자 주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만월대에서 출토된 활자 외에 나머지 두 점은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발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정확한 주조 시기나 주조 주체를 알기 어렵다. 만월대 활자 역시 궁궐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왕궁이 소실되기 전 국가 주도로 제작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활자는 다르다. 정확한 금속활자 제작 시기와 그 활자로 어떤 책들을 찍었는지 구체적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공평동에서처럼 대량으로 나오기만 한다면 제작 시기나 방식, 자체 등을 분석해 어떤 금속활자인지 특정할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발굴 5개월 만에 갑인자로 확정할 수 있었던 이유다.

물론 아직 공인된 것은 아니지만, 공평동 발굴 활자들이 갑인자라는 사실은 또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성경과의 비교다(그것이 핵심은 아닌데도 사람들이 그런 데서 공연한 애국심을 발휘하기를 좋아하니까). 구텐베르크는 1452년 시작해 1455년까지 180부의 성경을 인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현존하는 것으로 제작 연대가 알려진 최고(最古) 금속활자가 앞서 말했듯 을해자(1455년) 아닌가.

물론 한국은 [직지심체요절(1372년)]의 존재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쓴 나라라는 타이틀의 국제 공인을 받았다. [직지]를 소장하고 있는 프랑스 국립박물관은 4월 12일부터 석 달 동안 특별전을 열고 [직지]를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이라는 이름의 전시다. 비록 우리가 주인공은 아니지만 한국의 자랑스러운 인쇄 문화를 세계에 다시 한번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밖에도 지난 호에서 소개했듯 [남명증도가(1239년)]는 [직지]보다도 138년 앞서 금속활자로 인쇄됐을 가능성이 높다. 구텐베르크의 [42줄 성경]보다 2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하지만 금속활자 인쇄본과 금속활자 자체는 의미가 다르다. 지금까지는 금속활자 인쇄본만으로 최초라는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공평통 출토 금속활자가 진짜 갑인자로 공인될 경우 한국은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전에 만들어져 쓰인 금속활자를 실물로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세계 인쇄사에 굵은 일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쟁 아닌 경쟁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다만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아쉬움 또한 많은 게 사실이다. 그 아쉬움을 영문 위키피디아가 우리 대신 한 줄로 요약하고 있다. “한국이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했고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이 한국에서 인쇄된 것이지만, 한국은 결코 유럽에 비견할 만한 인쇄 혁명을 이뤄내지 못했다.”

첫째 원인은 주 원료인 구리의 부족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실물 금속활자 앞면.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됐다. ‘복(覆)’자인데 글꼴이 가지런하지 않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서양이 한국의 금속활자 발명을 인정하면서도 지난 밀레니엄 동안 가장 위대한 인류 발명품으로 한국 금속활자가 아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꼽은 이유도 그것이다. 금속활자라는 것이 분명 대량 인쇄라는 데 존재 의의가 있을진대, 한국의 자랑스러운 금속활자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금속활자의 주원료인 구리의 부족을 들 수 있다. 우리 역사상 동의 사용은 기원전 1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고려시대 청동은 질이 좋기로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지만, 매장량이 많지 않아 고려 말 이후 우리의 동광업은 쇠퇴일로를 걷는다. 조선 초가 되면 국내 동 산출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 이르며, 그러다 보니 구리 채굴과 제련·주조 기술까지 잊히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1808년 순조 때 나라의 군정과 재정을 파악해 만든 책인 [만기요람(萬機要覽)]의 설명은 이렇다.

“우리나라에서도 동이 산출되나 제련하는 방법을 몰라서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수요를 왜동(倭銅)으로 충당했다. 영종 신유년(1441년, 영종은 중국 명나라 황제)에 비로소 수안, 영월에서 동을 채취하고 이어 보은과 안변의 동을 채굴하였으나 제련한 것이 마침내 왜동만 못해 쓰이지 못했다.”

숙종 이후 구리와 주석을 섞은 동전인 ‘상평통보’가 널리 유통됐지만 구리는 일본, 주석은 중국에서 전량 수입해 사용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활자를 만들기 위해 구리를 충당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속활자 주조가 민간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왕실과 국가 주도로만 이뤄진 이유이기도 하다.

종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대로 종이는 만드는 데 품이 많이 드는 귀중품이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그랬다. 귀한 물건이다 보니 왕이 고관대작들에게 내리는 하사품으로 애용했다. 조선조에서는 각 지역별로 종이 제조 공납을 할당했는데, 이를 위해 각 지방에서 백성들에게 몇 달씩 부역을 시켰다. 부역을 진 백성들은 부역 기간 동안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는 데다 자신이 먹을 것까지 스스로 챙겨야 했으므로 어려움이 배가됐다. 이런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전 현감 이운경이 상서하기를, ‘책지는 도회소를 설치해 만드는데 닥나무와 군인을 각 고을에 할당해 도회소에 모아서 여러 달 입역시키니 부자·형제가 양식을 가지고 대신 입역하므로 왕래하는 데 매우 곤란을 겪습니다. 진상하는 책지를 수도의 조지소(造紙所)에서 만들게 하고 각 품에 하사하는 책지를 5~6년만이라도 줄여 민생을 편안케 하소서’라고 했다.”([문종실록] 1450년 10월 10일자 기사)

이에 의정부에서 했던 논의가 재미있다.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 시대에 종이 제조 비용을 대기가 수고롭고 번거로워 육견이 ‘나라에 무익하고 한갓 비용만 크니 이를 혁파하라’고 상주했는데, 이에 책을 만드는 관리인 수서사 장열이 말하기를, ‘예부터 제왕이 나라가 태평하고 일이 없을 때에는 궁실을 높이고 성색을 넓히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천자께서는 (그 대신에) 훌륭한 학자를 예우하시고 전적을 찍어 배포하시니 이익은 많고 손해는 적을 것’이라고 하니 황제가 장열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세종대왕께서도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숭상하는 아름다움이 백왕보다 뛰어나 뜻을 서적에 두고 찍어내 궁궐 안팎으로 널리 펴내지 않은 책이 없었으니 매우 훌륭한 거조였습니다. 이제 일개 범부가 지적한 조그마한 폐단 때문에 이를 없앤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인쇄에 반드시 필요한 종이도 태부족

이에 문종은 백성을 부역시키는 폐단을 없애고 종이 생산량을 반으로 줄이라는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지를 내린다. “1년에 진상하는 각종 책지는 경상도에서 6500권, 전라도에서 4500권, 충청·강원도에서 각각 2000권이었는데 이제부터는 매년 경상도에서 모절지와 유목지 각각 2000권, 전라도에서 호정지와 유목지 각각 2000권, 충청도에서 마골지 1000권, 강원도에서 유목지 1000권으로 하고 나머지도 아울러 모두 감면토록 하라.”

모절지는 갈보리 줄기를 원료로 만든 종이이고, 유목지는 버드나무 줄기로 만든 것이다. 호정지는 다북쑥으로 만들었는데 전라도에서 많이 났고, 마골지는 껍질을 벗긴 삼대로 만드는 종이로 충청도가 주산지였다.

종이 제조의 폐단에 관한 상소와 이에 대한 왕의 비답 내용을 장황하게 기술한 것은 그것이 함의하는 바가 큰 까닭이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 무릅써야 하는 백성들의 고역도 사실이고, 그렇다고 종이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는 의정부의 주장도 옳은 얘기이며, 그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을 이뤄야 하는 왕의 선택도 불가피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모두 아전인수식 해석에 기반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학문 발전을 위해 책을 널리 펴내고 이를 위해 종이를 많이 만드는 것은 분명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학문이며 누구를 위한 책이고 누구를 위한 종이인가? 지식을 독점한 소수 특권층만을 위한 것 아니었던가. 일반 백성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없이 부역 의무만 짊어지게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만약 백성들도 관심이 있고 읽을 수 있는, 그래서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면 여러 가지 다른 결과가 나타났을 것이다. 종이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나 수고야 마찬가지였겠지만,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백성이 많았을 것이다. 모든 계층에 골고루 혜택이 돌아간다면 그만큼 수요가 늘어나니 한계비용을 최소화하는 수준으로 공급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종이 제작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져 비용은 줄이고 품질은 향상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값싼 종이를 대량으로 만들어 서적 보급을 확대하는 선순환 구조를 이룰 수 있다는 얘기다. 앞서 구리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특권층의 비협조와 거부가 가장 큰 걸림돌

이런 생각을 한 것이 바로 세종이었다. 그는 많은 책을 펴낸 만큼 그 책들의 혜택이 모든 백성에게 두루 돌아가기를 바랐다. 백성의 절대 다수인 농민의 생활 향상을 위해 [농사직설] 같은 농업서를 펴냈고, 무엇보다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있도록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만약 세종의 뜻대로 한글이 제대로 쓰였다면 일반 백성들이 보다 쉽게 책에 접근할 수 있고, 따라서 경학이나 역사학은 물론 농업, 천문학 등 과학 기술까지 훨씬 더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글 서적의 대량 보급으로 활자는 물론 인쇄술도 획기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인쇄 혁명을 기대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한자는 하나의 문자가 하나의 말이나 형태소를 의미하는 표어문자(表語文字)이기 때문에 금속활자 인쇄에 어려움이 많다. 로마자처럼 대문자와 소문자, 특수문자를 합쳐도 100개 남짓한 음소를 나열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한 글자 한 글자를 모두 따로 새겨야 하므로 수만 종의 활자를 주조해야 한다. 중국에서 금속활자 인쇄가 활성화하지 못한 이유다.

한자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한글 역시 금속활자 인쇄가 쉽지만은 않다. 한글이 음소문자임에도 초성과 중성, 종성이 모여 한 글자를 이루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소로 주조할 경우 활자 종류는 줄어들지만 음소를 조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조선 초 병용한글자의 경우 오늘날 유니코드처럼 완성형 글자를 하나하나 따로 만드는 방식을 채택했다.

한글은 유니코드에서 1만1172자를 차지한다. 하지만 10만6023자(2004년 대만 교육부)에 달하는 한자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수다. 한글이 활성화했다면 감당하지 못할 숫자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세 벌식 타자기의 글꼴처럼 직결식 글꼴 형태로 음소 분리 인쇄 방식이 획기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그런 만약이 없었다는 게 불행이다. 불행의 원인은 당대 지식을 독점했던 특권층의 비협조와 조직적 거부다. 세종대왕 같은 현군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세종의 후대 임금들 역시 세조 말고는 세종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시기적으로나 기술적으로 가장 앞섰던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 기술은 그렇게 뒷걸음질하고 말았다.

※ 이훈범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지난해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 책을 몇 권 펴냈다.

202304호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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