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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의 핫피플 & 아트(11)] 화가 안창홍의 도전과 저항의 인생 

“세상의 바닥에서 낚아 올린 경험들이 내 예술의 원천” 

고등학교 졸업 후 반세기 동안 그림에 몰두하며 독창적인 화풍 구축
버려진 필름 등 다양한 소재 활용해 생명의 존엄과 인생의 굴곡 조명


▎화가 안창홍은 제도권의 틀 안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화풍으로 독창적인 경지를 이룬 작가로 꼽힌다.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의식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 사진:조정화
"예술은 전달과 소통이다.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끊임없이 실험하고 도전한다.” 화업(畫業) 50년 넘게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굵직한 작품을 선보인 화가 안창홍(70)의 말이다. 그는 1953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복잡한 가정사로 중학교 졸업 이후 집을 나와 독립한 뒤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제도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못 느껴 일찌감치 독자적인 길을 걷기 위해, 1989년 스스로 유배를 자처하며 당시에 오지나 다름없는 양평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에 몰두한다.

어린 시절의 환경적인 영향으로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처럼 저돌적이고 직선적인 기질은 훗날 부조리한 사회 현상의 저항 정신으로 표출되고, 현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야만의 문화, 나아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화두를 던지게 된다. 한때 ‘현실과 발언’의 작가들과 활동했으며, 1971년 [사루비아 꽃밭]을 시작으로 [가족사진], [얼굴], [베드 카우치], [이름도 없는] 등과, 가장 최근의 [유령패션]에 이르기까지 대상만 달라질 뿐 시대정신을 외면하지 않고 일관되게 부조리한 한국 현대사의 아픔에 대한 강렬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은 이래야 된다’는 어떤 틀 안에 갇혀 있기도 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안창홍은 이야기하고 싶은 것에 적합한 방법이 있다면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한다. 1981년 공간화랑 첫 개인전 이후, 회화와 사진뿐만 아니라 2016년부터 입체까지 매체를 확장해 46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가 발표한 작품은 무려 3000여 점에 달한다.

틀에 가두지 않은 시도, 발표한 작품만 3000여 점


▎창홍 작가는 폐업한 사진관에서 버려진 필름을 현상해 자르거나 오려 붙여 생명을 불어넣었다. / 사진:안창홍
안창홍의 작품에서 특히 주지되는 지점은 사진을 이용한 작업이다. 산업화로 와해된 한국 가족사를 어릴 때 찍은 자신의 가족사진에서 출발한 [가족사진] 연작(1979-1980)과, 폐업한 사진관에서 버린 필름을 스캔한 얼굴 사진 위에 눈을 감은 그림과 나비를 덧그려 비극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들을 그린 [49인의 명상](2004) 등의 여러 연작을 통해 사진 매체의 본질적인 특성을 회화적 요소와 탁월하게 접목시킨 점은 가히 독보적이다. 그가 시도한 표현 방법론이 한국 사진사에 미칠 영향력은 앞으로 주시해볼 일이다. 인터뷰 전날,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연 문제의 관심에서 시작한 [아마란스] 연작을 꼬박 16시간이나 그렸다는 안창홍 작가를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만났다.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온종일 마당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에 온갖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중학교 미술부 시절 학교 선생님들과 주변 사람들이 잘 그리고, 잘 만들고, 잘 쓴다고 일찍부터 알아봐 주셨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그림판에 뛰어들었다. 오갈 데가 없을 때, 친구가 자기 화실을 쓰게 해줬다. 먹고살아야 해서 그림을 가르쳤다. 취미로 학생을 가르치다 입시 미술을 했는데 점점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불안했다. 대학이 싫다고 안 간 사람이 입시생을 가르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자칫 돈의 늪에 빠질 수 있어 화실 문을 닫았다. 당시 결혼해 아이들도 있어 어려웠지만, 내 기질이 삶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만 했다. 지금의 양평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사진을 자르고 뚫고 덧그려 질곡의 시대상 반영


▎덤불을 뚫고 자란 아마란스의 붉은 색을 강조해 강인한 생명력을 화폭에 담았다. / 사진:안창홍
미술대학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잃은 것과, 얻은 것이 있다면?

“대학을 안 가봐서 내가 뭘 잃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나라 미술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통해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어느 대학을 나와서 그림이 더 훌륭하다든지, 아니면 훨씬 더 지성적이라든지 그런 사람은 아직 못 봤다. 그렇기 때문에 잃은 게 있을 리 없고, 대학이라는 곳에 큰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가의 삶을 세상 바닥에서 낚아 올리면서 무수히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안창홍 작가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첫 작품은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의 [가족사진] 연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배경이 궁금하다.

“사진을 이용한 작업으로는 내가 어렸을 때 찍었던 우리 집 가족사진이 [가족사진] 연작에서 사용한 첫 사진이다. 아버지는 출장 가서 같이 못 찍고, 외숙모·외삼촌·이모와 함께 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으로 가족사진 시리즈를 처음 시작했다. 사진 표면 위에 그리거나, 물감을 뿌리는 등 사진에 담긴 어떤 시간의 역사 속에 상처를 그려 넣었다. 두 눈을 뚫기도 하면서 황폐하고 황량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라든지, 인간의 내면까지 표현하고 싶었다. 질곡의 역사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소시민들의 한국 가족사를 통해 내 나름대로는 대한민국의 시대상을 반영하고자 했다.”

사진을 활용한 작품이 많은데, 사진의 어떤 점 때문인가?

“사진만이 가지는 매력이 있다. 모든 사진은 시대를 기록한 것이고, 그 상황이 있었던 현실이다. 그래서 사진 속으로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 사진 자체는 일차원이지만 시간적인 역사성을 넣어 3차원의 공간 개념을 끄집어내기 위해 사진이라는 장르 혹은 사진이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사진이 발명되고 세계 미술사가 바뀌었다. 나는 사진 매체에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안 받은 척하지는 않는다. 노골적으로 솔직히 드러낸다. 모든 작품은 전달을 위한 최대치가 화면에 나타날 때 멈춰야 한다. 사진 리터치 작업도 마찬가지다.”

'49인의 명상' 작품에서 49라는 숫자의 의미가 있나?


▎안창홍 작가의 최신작인 [유령패션]은 화려한 패션이 상징하는 산업화 시대 인간의 사치와 욕망을 비판적으로 표현했다. / 사진:안창홍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7일마다 한번씩 일곱 번 행하는 의식이 49재다. 작품에서 49재라는 의식의 사실적 형태를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다. 폐업한 사진관에서 버린 필름을 현상했는데, 산동네 사진관에서 주로 빈민가 사람들이 찍은 위안과 휴식이 필요한 사진이었다. 스캔을 받아 크게 출력하고, 눈을 감고 있게 그린 다음 나비도 그려 넣었다. 그 사진이 처해 있던 상황 속으로 이끌게 표현하고, 죽음과 휴식에 대한 명상을 담았다.”

대표작 중 하나인 <유령 패션> 작품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사실, 유령 패션의 시작은 1979년도 작품에 이미 나온다. 당시에 ‘유령 패션’ 현상이 사회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조짐이 조금 보일 때였다. 그래서 유보해 놓고서 언젠가는 이런 시절이 올 것이고 그때 본격적으로 그릴 생각이었다. 패션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산업, 인간의 사치와 욕망에 대한 비판 등을 담아 오래전부터 유령의 도시를 그릴 생각이었고, [유령 패션] 연작이 유령 그리기의 첫 시작이다.”

작업실에 아직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아마란스’의 붉은색이 인상적이다.

“신이 내린 곡물이라고 하는데, 용문사 앞 노지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처음 봤다. 잡초하고 엉켜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그 에너지가 엄청났다. 붉은색이 마치 정육점에 있는 생고기(동물)처럼 다가왔다. 이걸 그려야지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봄이 되면 매년 아마란스를 마당에 심어 놓고 보면서 계속 그리고 있다.”

폐업한 빈민가 사진관에서 구한 필름에서 영감 얻기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한 장이 있다면?

“네댓 살쯤 되었을 때 밀양에서 추석 전날 찍은 사진이다. 손목에 가짜 시계도 차고, 구두도 신고… 옷을 잘 차려 입히기 좋아한 어머니 덕에 시골 아이치고는 제법 잘 입고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은 시점이 내가 기억하는 나의 삶 중에서 가장 행복한 찰나였다. 이후 ‘행복’은 무덤으로 들어가고, ‘불행’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지금도 만감이 교차한다.”

앞으로 계획 중인 작업 방향이나 특별한 계획이 있다면?

“얼마 전 목이 부러지고, 날개가 찢긴 채 버려진 박제 동물을 보고, 인간의 욕망 때문에 많은 생명들이 얼마나 하잘것없이 다뤄지고, 쉽게 버려지는가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됐다.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준비 중이다. 예술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에 대한 문제들을 좀 더 깊이 있게 다뤄보고 싶다.”

※ JOA(조정화) -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순수사진으로 석사 학위를, 조형예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고,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단국대, 상명대 등에서 20여 년간 강의하면서 [포토닷], [디지털카메라매거진], [미술세계], [월간중앙] 등에 예술 관련 연재와 기고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로는 [그래서 특별한 사진 읽기](2020년)가 있다.

202304호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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