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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87)] ‘어부사시사’의 풍류객 고산(孤山) 윤선도 

정쟁의 격랑 속에서 우리 문학을 꽃피우다 

국정 농단 이이첨 일파 성토하는 상소 올린 뒤로 3차례에 걸쳐 16년 동안 유배
봉림대군 사부 지내기도… 병자호란 겪고 나서는 보길도서 시작(詩作)하며 은둔


▎윤선도가 유배 생활 6년을 보낸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일대의 황학대. 기장문화원 심현호 연구원이 동상과 시비 앞에서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혹새로운 길이 있다 해도 가로막는 산 또한 얼마나 많으랴/ 세파(世波)를 따르자니 낯 뜨거움이 이는 것을 어찌할까/ 헤어짐에 임해 오직 눈물만이 어지러이 흘러/ 네 옷자락에 흩어져 점점이 아롱지는구나.”

청년 유생은 속전(贖錢)을 바치고 유배에서 풀려나려 하니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는 한양에서 해배(解配)의 길을 열기 위해 내려온 이복아우의 설득을 끝내 거절한다. 결국 그는 경상도 동남단 바닷가 기장에 쓸쓸히 남는다. 30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거침없던 성균관 유생 시절이다. 고산은 유배지에서 이렇게 아픔을 읊었고, 훗날 조선의 3대 가인(歌人)이 된다.

4월 14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황학대와 삼성대를 찾아갔다. 일대는 윤선도가 귀양살이한 적거지(謫居地)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해안에 자리한 천부교 공동체 신앙촌 인근이다. 황학대는 그 시기 고산이 자주 들렀을 바닷가 높은 언덕이다. 기장문화원 심현호 연구원이 길을 안내했다. 황학대는 본래 뭍과 떨어진 바위섬이었다고 한다. 앞으로 동해와 남해가 보인다. 황학대는 주변 소나무가 일품이다. 해송 6그루가 모여 한 그루 큰 나무처럼 보인다. 큰 바윗돌에 고산이 유배 시절 지은 시 ‘닭을 노래하다[詠鷄]’가 새겨져 있다. “물성이 치우치고 막혔다 하더라도/ 타고난 것 중에 밝은 면도 있나니/ 우리 사람이 물론 가장 영명하다지만/ 시야(時夜, 밤 시간을 알려주는 것)야 어떻게 너에게 미치리오…” 새벽 기운이 이르면 절로 우는 닭의 영명함을 중국 고사와 연결했다.

바윗돌 앞에 고산이 도포를 입고 두 팔을 낀 채 바다를 응시하며 앉은 전신상이 있다. 고산은 일생이 유배로 점철됐다. 무려 16년 동안 귀양을 살았다. 유배 3곳에 이배(移配) 2곳 등 다섯 지역을 전전했다. 그 가운데 기장은 고산이 가장 오랜 6년을 칩거한 곳이다. 심 연구원은 “지역에 그 사실이 알려진 건 오래지 않다”며 유배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주민들에게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제 유배지는 답사 코스가 됐다.

그는 31세인 1617년(광해군 9) 함경도 경원으로 첫 유배를 떠났다. 그가 쓴 상소문이 발단이었다. 당시는 정치가 어지러웠다. 선조가 승하한 뒤 광해군 옹립에 공을 세운 이이첨은 권세를 잡고 국정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이첨은 자기 당파 사람을 널리 심어 심복으로 만들고,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귀양 보내거나 추방했다.

“국정 농단 이이첨을 목 베라”


혈기 왕성한 고산은 국정 농단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대대로 녹을 받는 집안에서 태어나 나라가 위태로운데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생은 예조판서 이이첨 일파의 전횡과 이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한 영의정 박승종, 왕후의 오라버니 류희분 등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샅샅이 써 내렸다. 유명한 병진소(丙辰疏) 상소문이다. [광해군일기]에 전하는 임금에게 올리는 병진소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이 보건대 근래 팔다리 노릇을 하고 귀와 눈 노릇을 하며 목구멍과 혀 노릇을 하는 관리들이나 임금을 위해 토론하고 생각하며 규율과 질서를 세우고 관리를 선발하는 사람들은 죄다 이이첨의 심복입니다. 간혹 그의 무리가 아닌 사람이 한두 명 끼어 있지만 보나마나 그런 사람은 나약해 남이 하는 대로 처신하고 때를 보아 행동하며 뒤따라 하는 사람입니다. 이 때문에 대간의 모든 제의를 전하께서는 아마 대간에서 나온 것으로 여기겠지만 사실은 이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홍문관의 차자를 전하께서는 필경 홍문관에서 나온 것으로 여기겠지만 사실은 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이조나 병조의 후보자 추천을 전하께서는 필경 이조나 병조에서 나온 것으로 여기겠지만 사실은 이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기도 하고 그의 지휘를 받기도 하는데,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반드시 그에게 물은 다음에야 합니다….”

상소는 길다. 내용은 대체로 권력이 아래로 옮겨가 임금이 위태롭고 민심이 일그러지며 인재 등용은 불공평하고 과거시험은 부정이 있으니 먼저 권세를 휘두르는 이이첨을 목 베라는 것이다. 또 임금을 배반한 류희분과 박승종 등은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목숨을 건 상소다.

불굴의 투혼이 고산 문학의 토양


▎효종이 사부였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건물인 해남 녹우당 전경. / 사진:해남군
광해군은 대신들에게 이 상소에 대한 논의를 맡긴다. 그들이 바른말을 할 리 없었다. 조정은 이이첨의 뜻에 따라 고산을 김제남 반역사건에 엮어 넣는다. 그에게 북단 경원 유배형이 떨어진다. 첫 유배다. 양아버지 윤유기도 강원도 관찰사 직에서 파직된다.

고산은 유배지에서 벽촌의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 하나 그르다 하나/ 내 몸의 할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밖의 여남은 일이야 분별할 줄 있으랴.” 그는 경원 유배 시절 마음을 달래는 ‘견회요(遣懷謠)’ 5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유배지에서 시조와 만난 것이다.

이듬해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이 떨어진다. 조정이 오랑캐 땅 가까운 곳에 선비들이 모여드니 여진족 등과 무슨 흉계나 꾸미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래서 옮긴 곳이 국토 남단 기장현이었다. 그곳 생활은 구전으로 남아 있다. “마을 뒤 봉대산에 올라 약초를 캐 병든 주민을 보살펴 당시 이곳 사람들은 고산을 한양에서 온 의원님으로 불렀답니다.” 그는 의약에 밝아 실제로 민간요법을 다룬 책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다.

이배 이듬해 고산은 양아버지의 부고를 듣는다. 그는 큰 슬픔에 빠졌다. 상을 치를 수 없는 점 말고도 양아버지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제수를 마련하고 제문을 지어 비통함을 드러냈다. 제문에는 ‘소자가 아버님 영위를 모셔야 할 일이지만 귀양살이하는 이곳은 궁핍하기 짝이 없는 어촌이라 모셔 와도 향도 올릴 수 없는 형편’이라고 적었다.

한양에서 이복동생 선양이 내려왔다. 고산은 속전을 거절했고 적거지 죽성리에서 일광면 삼성대까지 아우를 전송하며 이별 시 2수를 지었다. 고산은 상소를 올릴 때의 기개를 거두지 않은 것이다. [윤선도 평전]을 쓴 고미숙은 “이러한 불굴의 투혼이 고산 문학의 토양”이라고 평했다. 기장군은 황학대에서 멀지 않은 삼성대에도 고산의 시비와 초상화를 세워 유배 흔적을 남겨 놓았다. 고산은 30대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37세인 1623년 인조반정 직후 대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된다. 기장 유배 기간 확인된 것만 시 11수와 편지 7편, 제문 1편을 남겼다.

봉림대군의 사부로 뜻을 펴다


▎윤선도가 기장 유배 시절 아우와 헤어진 기장군 일광읍 삼성리에 조성된 삼성대. / 사진:송의호
고산은 해배한 뒤 4월 의금부도사 금오랑에 임명됐으나 7월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가 남인(南人)으로 생활한다. 이어 8월 별시 초시에 응시해 합격한 뒤 39세 되던 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그 뒤에도 몇몇 자리에 제수됐으나 해배 이후 5년여 간 중앙 정계로 나서는 것을 단념한다.

정계는 서인(西人)이 득세했다. 그가 병진소에서 인목대비 아버지 김제남을 비난한 대목은 서인의 공격 빌미가 된다. 그러나 고산은 주저앉지 않았다. 과거시험을 통해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시도한다. 42세 되던 1628년(인조 6) 고산은 마침내 별시초시에서 장원급제한다. 시험관 이조판서 장유는 고산의 답안지를 ‘동국 제일의 책문(策文)’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당파는 달랐지만 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고산은 장유의 추천으로 봉림·인평 두 대군의 사부로 임명된다. 당시 봉림대군의 나이는 10세. 고산은 약 6년간 사부로 지내며 각별한 사제의 정을 나눈다. 훗날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왕위에 오른 다음 “자신이 글자를 깨우친 것은 오직 윤선도 덕분이라 항상 잊지 못했노라”며 애틋한 정을 표현했다. 인조의 신임도 두터워 전례를 깨고 사부를 겸하면서 공조좌랑·공조정랑·사복시첨정·한성서윤에 임명된다.

달이 차면 기우는가. 고산은 화려한 40대가 끝나갈 무렵 반대파의 공격에 부닥친다. 1634년(인조 12) 그는 끝내 성산현감으로 좌천된다. 다시 실의의 나날이다. 이듬해 성산현감을 사임하고 고향 해남으로 돌아온다. 1636년 5월 고향에 은거하던 중 큰 불행을 겪는다. 차남 의미가 죽은 데 이어 며느리도 뒤따라 자결한 것이다.

그해 12월엔 병자호란을 당한다. 고산은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의병을 꾸려 뱃길로 강화도를 향해 떠난다. 도착하니 강화도는 이미 함락된 뒤였다. 인조가 남쪽으로 향했다는 소문을 듣고 왕을 호위한다는 일념으로 남하한다. 다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로서는 굴욕적인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산은 그 길로 제주도로 뱃머리를 돌린다. 그렇게 제주도를 향해 남하하다가 남해 고도에서 절경의 섬 보길도와 마주친다. 고산은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는 제주도에 은둔하려던 꿈을 접고 보길도 부용동에 정착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유배가 다시 그를 옥죈다. 1637년 호란이 평정된 뒤 고산은 한양까지 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영덕으로 또다시 귀양 간다. 그는 이듬해 풀려났다.

이후 고산은 부용동에 낙서재(樂書齋) 등을 짓고 자연 속에서 문학을 꽃피우는 신선 같은 은둔을 했다. 1651년(효종 2) 65세 윤선도는 정신적 안정을 찾아 보길도를 배경으로 불후의 ‘어부사시사’를 짓는다. “날이 덥도다 물 위에 고기 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고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낚대는 쥐여 있다 탁주인병 실었느냐”(춘사 24수)

이듬해 그는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에 오른다. 윤선도는 그러나 서인의 모략으로 결국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고산에 은거해야 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고산은 기년복을 입느냐 삼년복을 입느냐 예송(禮訟) 논쟁으로 서인에 맞서다 패배한다. 1660년(현종 1) 다시 첩첩산중 함경도 삼수로 네 번째 유배된다. 집권 서인 세력은 그를 이런 곳에 보내고도 안심하지 못해 5년 뒤 전남 광양으로 이배한다. 그의 나이 79세. 마지막 유배였다. 고산은 3월 삼수를 출발해 8월 광양 땅에 도착해 백운산 아래 거처를 마련했다. 2년 뒤 유배에서 풀려난다. 그의 나이는 이제 81세에 이르렀다.

보길도에서 꽃피운 강호미학


▎보길도의 낙서재 건너 산 중턱에 들어선 동천석실.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세상으로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다. / 사진:해남군
고산은 이렇게 열세인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 집권 세력인 서인에 맞서 왕권 강화를 내세웠다. 오랜 세월 유배지를 전전한 배경이다. 산전수전을 겪은 그는 광양에서 풀려난 뒤 보길도로 돌아가 여생을 보낸다. 고산은 조상이 물려준 재산으로 보길도에 세연정(洗然亭)·석실(石室) 등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다가 격자봉 아래 낙서재에서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윤선도는 증조부·조부·양아버지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명문대가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해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했고 의약, 음양·지리에 정통하고 시조에 뛰어났다. 고산은 14세에 시를 쓰기 시작해 83세에 붓을 놓아 시력(詩歷)만 70년에 이른다. 그는 빼어난 문재를 바탕으로 일생 시조 75수, 한시 259편을 남겼다. 성품은 가풍을 따라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았다. 예조정랑을 지낸 증조부는 22년 귀양살이를 했고, 양아버지는 자신의 삭탈관직을 짐작하고도 고산의 병진 상소를 허락했다. 윤선도는 소신을 굽히지 않으며 16년 유배생활을 했다.

고산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언어의 연금술사이자 격정에 찬 정치적 논객이었다. 고산의 면모는 언뜻 모순돼 보일 정도로 복합적이다. 그는 정쟁의 격랑 속에서 우리 문학을 꽃피운 풍류객으로 한 시대를 살았다.

[박스기사] 고산과 송강, 조선 시가 문학의 양대 산맥 - 각각 남인과 서인의 핵심 인물로서 정치에도 관여

고산 윤선도와 송강 정철(1536~1593)은 조선 시가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볼 수 있다. 모두 우리말의 연금술사였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고, 정치 현실에도 깊숙이 뛰어든 공통점이 있다.

송강은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창평으로 물러나 선조 임금을 그리워하며 지은 ‘사미인곡’이 대표작이다.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서 동인 세력의 미움을 받아 파직과 유배 생활을 반복했다. 송강은 사미인곡을 지은 이듬해 선조의 부름을 받아 권력을 잡자 수많은 동인을 처형했다. 그러다 1591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이 일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송강은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유배를 떠났다. 그는 임진왜란 시기 다시 복직했고 이후 동인의 요구로 사직한 뒤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50년 후배인 고산은 서인과 맞섰던 남인이었다. 그도 송강처럼 당쟁의 전면에 나섰다. 고산은 당시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과 각종 논쟁을 벌였다. 1659년 효종이 승하했을 때는 상복 입는 기간을 놓고 주장이 엇갈렸다. 고산은 여기서 밀려나 탄핵을 받고 72세에 유배를 떠난다. 그는 ‘오우가’ 등 아름다운 한글 시조를 남겼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306호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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