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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16)] 레닌의 소비에트 러시아, 외교적 책략으로 열세 뒤집다 

최대 파벌 된 한국공산당, 독립운동 자금을 공산당 확장에 이용하다 

레닌에 경도된 상해임정 지도자들, 이동휘의 한국공산당에 가입
모스크바 차관 횡령 문제, 상해와 이르쿠츠크에서 심각한 후폭풍


▎레닌(가운데)과 트로츠키(가운데 우측) 등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자들은 일본 군대와의 전면전쟁을 피하는 대신 외교 책략과 공산주의 선전선동을 통해 일본 군대를 철수시키고자 했다.
총리 이동휘가 웨이하이(威海)에서 상해로 귀환하던 1920년 8월 즈음, 동북아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극동공화국 수립이었다. 그와 함께 치타에 주둔한 일본 군대의 후퇴와 백군 장군 세묘노프(Semyonov) 몰락 역시 중요한 정세 변화였다.

E.H. 카의 <볼셰비키 혁명사1>에 의하면, 극동공화국 수립의 직접적인 배경은 콜차크(Kolchak) 제독의 패전이었다. 1919년 11월 4일 본거지 옴스크를 빼앗긴 콜차크 제독은 이르쿠츠크로 후퇴했다. 하지만 콜차크 제독을 축출하려는 반란이 1919년 12월 24일 발생했다. 이 반란으로 이르쿠츠크의 콜차크 정부는 1920년 1월 4일 붕괴했고, 콜차크 제독은 1920년 2월 6일 체포돼 총살당했다.

콜차크 제독을 축출하고 이르쿠츠크를 장악한 ‘정치센터’는 소비에트 군대와 일본 군대가 이르쿠츠크에서 정면충돌할 것을 우려했다. 정치센터는 톰스크의 소비에트 군대 사령관에게 대표단을 파견해 이르쿠츠크에 볼셰비키가 참여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극동공화국을 수립해 소비에트 군대와 일본 군대의 정면충돌을 막자고 제안했다. 정치센터는 사회혁명당 등 자유민주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잡았기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제안할 수 있었다.

극동공화국에 볼셰비키를 참여시키자는 정치센터의 제안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반면 국가 체제를 자유민주주의로 하자는 제안은 일본과 서구열강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처럼 양측의 요구를 절충함으로써 양측의 정면충돌을 피하고자 했기에 이르쿠츠크 극동공화국은 완충국(緩衝國)이라 불렸지만, 사실상 소비에트 러시아의 괴뢰국(傀儡國)과 같았다.

레닌과 트로츠키 등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자들은 완충국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무엇보다도 일본 군대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진장철 교수의 [러시아혁명과 아시아]에 의하면, 당시 레닌은 “미국이 수송을 지원한다면 일본이 단 몇 주일 만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패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레닌은 완충국을 이용해 일본과의 전면 전쟁을 회피하는 동시에 미국을 완충국에 끌어들임으로써 미국 자본을 흡수하는 한편 일본과 미국 사이의 갈등을 부채질하고자 했다. 일본과 미국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면 시베리아의 일본 군대는 스스로 철병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면에서 극동공화국 수립은 1920년대 일본을 대상으로 하는 레닌의 외교 책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르쿠츠크 극동공화국을 승인한 레닌


▎일본이 극동공화국을 인정하면서 1920년 7월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이에 따라 일본 군대는 같은 해 8월부터 치타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레닌의 외교적 책략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1920년 1월 21일, 레닌과 트로츠키는 이르쿠츠크 극동공화국 수립 문서에 서명했다. 조건은 크라스노쇼코프(Krasnoshchyokov)를 극동공화국 수반으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크라스노쇼코프는 러시아 유대계 인물로서 이르쿠츠크 볼셰비키 지도자이자 러시아 공산당 간부였다.

크라스노쇼코프는 정치센터 대표단의 일원으로 톰스크에 파견됐다. 그가 이르쿠츠크를 비운 사이, 이르쿠츠크 볼셰비키는 1920년 1월 22일 정치센터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뒤이어 소비에트 군대가 진군해 이르쿠츠크를 점령했다. 그 결과 이르쿠츠크 극동공화국은 저절로 무효가 됐다.

하지만 소비에트 군대가 이르쿠츠크를 점령했다고 해서 일본 군대와의 정면충돌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 군대는 여전히 치타, 하바롭스크 등 극동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군대가 철병하지 않는 한 완충국 필요는 여전했다.

1920년 2월,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일본과 충돌 예방의 필연성”을 결정했다. 일본 군대와의 전면전쟁을 피하기로 결정했다는 의미이자 완충국 수립을 결정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일본 군대와의 전면전쟁을 피하는 대신 외교 책략과 공산주의 선전선동을 통해 일본 군대를 철수시키고자 했다.

그 목적을 위해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극동담당 전권위원 빌렌스키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르쿠츠크 볼셰비키 지도자 크라스노쇼코프를 베르흐네우진스크로 가게 했다. 베르흐네우진스크는 이르쿠츠크와 치타 사이에 위치한 도시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빌렌스키는 한국인, 중국인, 몽골인들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선전선동 활동을 벌였고, 1920년 5월 초 보이친스키와 김만겸 등 공작원들을 상해로 파견했다. 반면 베르흐네우진스키의 크라스노쇼코프는 극동공화국 수립을 추진했다. 그는 바이칼 호수 동쪽 극동지역의 인민대표를 소집해 제헌의회를 구성했다. 이 제헌의회가 1920년 4월 6일 극동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뒤이어 1920년 5월 14일,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가 승인함으로써 베르흐네우진스크의 극동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수립됐다. 크라스노쇼코프는 수상 겸 외상이 됨으로써 극동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레닌의 외교적 책략을 성공시킨 극동공화국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에 참여한 지 1년도 안 돼서 레닌을 잇는 2인자로 거듭난다.
자유민주주의를 천명한 극동공화국은 미국과의 동맹을 추구하는 등 미국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했다. 미국은 극동공화국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것은 일본 군대의 철병 요구로 나타났다. 결국 시베리아의 일본군 사령관은 “일본 군대와 동방에 진출하고 있는 볼셰비키 사이에 양군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는 중립지대”를 설치하자고 제안하게 됐다. 베르흐네우진스크에 수립된 극동공화국을 인정한다는 뜻이나 같았는데, 이는 레닌의 외교적 책략이 성공했음을 의미했다.

일본이 극동공화국을 인정함에 따라 일본 군대와 극동공화국 사이에 공식적인 교섭이 시작됐고, 1920년 7월 17일 치타 서쪽의 곤고타 역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이 평화협정은 곤고타 역에서 체결됐기에 ‘곤고타 평화협정’이라 불렸다. 평화협정의 핵심은 소비에트 군대와 일본 군대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소비에트 정부는 극동공화국에 군대를 진주시키지 않고, 이에 상응해 일본 군대는 자바이칼 주의 치타에서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곤고타 평화협정에 따라 일본 군대는 8월 1일부터 치타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10월 21일에 극동공화국 군대가 치타를 점령했는데, 그 여파로 치타에 근거지를 둔 백군 장군 세묘노프가 몰락하게 됐다. 치타를 점령함으로써 극동공화국은 자바이칼 지역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1920년 10월, 크라스노쇼코프는 극동공화국 수도를 치타로 옮겼다.

이처럼 1919년 연말부터 1920년 연말까지 나타난 동북아 정세의 급변은 외형적으로 볼 때 소비에트 러시아의 승리와 일본 군대의 패배로 보일 수 있었다. 이르쿠츠크와 치타까지 진출했던 일본 군대가 그 지역들을 스스로 포기하고 후퇴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0년 5월 러시아 공산당의 공작원 보이친스키가 상해에 나타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 투쟁’을 선전하자 상해임정의 수많은 지도자가 레닌 공산주의에 경도됐던 것이다.

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승리를 기대하며 레닌 공산주의에 경도됐다. 그 기대는 일면 타당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대는 당시 동북아 정세의 급변을 표면적으로 판단한 결과이기도 했다. 내면적으로 볼 때, 극동공화국 수립과 일본 군대 후퇴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우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열세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만약 레닌의 소비에트 러시아가 우세했다면 전면전을 통해 시베리아의 일본 군대를 몰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열세였기에 ‘일본과 충돌 예방의 필연성’을 결정했고, ‘곤고타 평화협정’도 체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친스키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라는 선전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열세를 은폐하기 위한 공작이자 극동 피압박민족들을 내세워 일본 군대를 철병시키려는 레닌의 외교적 책략이라 평가할 수 있으며, 치타의 일본 군대 철수는 레닌의 외교적 책략이 성공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코민테른 공작금을 한국공산당에 전달한 이한영


▎사진은 1920년 7월 개최된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한 박진순(오른쪽에서 셋째)의 모습. 박진순의 왼쪽에 앉은 레닌이 눈에 띈다. 박진순은 1920년 3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공작금 400만 루블을 수령, 이를 이한영과 박애에게 전달하고 모스크바에 남았다. / 사진:레닌 사진집
이동휘가 웨이하이에서 상해로 귀환하던 1920년 8월 즈음,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는 극동공화국이 수립됐고, 치타의 일본 군대는 철수 중이었다. 그 배경은 ‘일본과 충돌 예방의 필연성’과 ‘곤고타 평화협정’이었지만, 상해임정의 지도자들은 그 내막을 잘 몰랐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만 보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일본 군대를 압도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조만간 소비에트 러시아가 일본과 전면전을 벌일 것이라 기대하고, 전면전이 벌어지면 역사 법칙의 필연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 기대했다.

이런 판단과 기대에서 상해임정의 수많은 지도자들은 이동휘가 주도하는 한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결과 1920년 9월경 한국공산당은 상해임정의 최대 파벌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1920년 9월 초순에는 모스크바의 공작금까지 입수함으로써 한국공산당은 당세를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1921년 10월 16일자로 이동휘가 소비에트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에 보고한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비판과 소비에트 측이 제공한 혁명지원금의 사용내역 보고]에 의하면, 이동휘의 한국공산당이 코민테른 공작금을 입수한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1920년 3월, 모스크바에서 박진순과 이한영은 코민테른 공작금 400만 루블을 수령했다. 박진순은 1919년 7월 이한영, 박애와 함께 한인사회당의 모스크바 대표단으로 선발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1919년 11월 말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이한영과 박애는 신병으로 옴스크에서 탈락했다가 후에 모스크바로 갔다.

박진순의 활약으로 한인사회당은 1919년 12월 코민테른 가입이 허락됐다. 1920년 3월에는 400만 루블의 코민테른 공작금도 수령할 수 있었다. 박진순은 공작금을 이한영과 박애에 전달하고 모스크바에 남았다. 7월 개최 예정인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한영과 박애는 400만 루블이 든 상자를 가지고 192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출발했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해 포장을 개봉했는데, 차르 화폐 200만 루블, 두마 화폐 150만 루블, 소비에트 화폐 50만 루블 합 400만 루블이 들어 있었다. 차르 화폐는 제정 러시아 때 유통되던 화폐이고, 두마 화폐는 1917년 2월 혁명 이후 유통되던 화폐이며, 소비에트 화폐는 10월 혁명 이후 유통되던 화폐이다.

그런데 400만 루블의 공작금 중에서 절반인 200만 루블을 이르쿠츠크의 외무인민위원회 전권대표 가퐁이 압류했다. 가퐁은 이르쿠츠크의 한국인 공산주의 운동에도 공작금이 필요하다고 여겨 절반인 200만 루블을 압류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나머지 200만 루블은 이한영에 의해 운반됐다. 이한영은 1920년 8월 1일 이르쿠츠크에서 출발해 몽골고원을 고쳐 북경에 도착했다가 그곳에서 극동공화국 북경주재 전권대표 유린에게 또 50만 루블을 압류 당했다. 유린 역시 가퐁과 같은 생각으로 50만 루블을 압류했을 것이다. 그 결과 1920년 9월 초순 상해에 도착한 이한영이 한국공산당에 전달한 공작금은 50만 루블이었다. 이 50만 루블을 상해에서 통용되던 멕시코 달러로 환전했는데 7500달러였다.

코민테른에 한국공산당 대표 3명을 파견하다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요원들이 함께한 신년축하식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셋째가 김구, 둘째줄 왼쪽에서 셋째부터 차례로 신익희, 신규식,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손정도, 이동녕.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당시 상해임시정부의 1년 예산이 10만원 내외였다. 이한영이 가져온 50만 루블은 대략 1만5000원 정도로 환산되는 큰 규모였다. 이렇게 큰 공작금을 손에 넣은 한국공산당은 1920년 9월 15일 대표회의를 개최했다. 대표회의 결과, 중앙위원회 위원장에는 이동휘가 선출됐고, 그 외 중앙위원에는 김립, 이한영, 김만겸, 안병찬 등 4명이 선출됐다. 여운형은 번역위원, 조동호는 출판위원에 선출됐다.

한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대표 3명을 코민테른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대표단의 임무는 코민테른에 한국공산당 가입을 신청하는 것과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한인공산당과의 통합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김립 대신 이동휘의 사위 오영선이 비서장에 취임했다.

계봉우의 [꿈속의 꿈]에 의하면, 김립과 계봉우는 위의 임무 이외에도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해 공산주의 전략, 전술을 학습하는 것이 임무였다고 한다. 반면 이한영은 통역을 위해 참가하게 됐다고 한다. 김립과 계봉우가 러시아어를 잘 못하기 때문이었다.

1920년 9월 22일에 김립과 이한영은 먼저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갔다. 계봉우는 상해 주재 코민테른 공작원 유진스키가 이르쿠츠크로 보내는 서류를 받아 23일 새벽 상해를 출발했다. 기차를 이용한 계봉우는 23일 저녁 북경에 도착해 김립, 이한영과 합류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이한영은 상해로 귀환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9월 25일 오전 북경역에서 이한영과 헤어진 김립과 계봉우는 기차를 타고 장가구로 출발해 저녁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한국공산당의 연락요원 김현국의 도움으로 자동차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들은 9월 28일 자동차로 장가구를 출발해 10월 4일에는 울란바토르에 도착했고, 10월 초순에는 극동공화국 수도 베르흐네우진스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김립과 계봉우는 우연치 않게 한형권, 박진순을 만나게 됐다.

한형권의 [혁명가의 회상록]에 의하면, 그는 레닌에게 4개조를 제안해 승인을 받아냈다. 4개조의 첫째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이었다. 둘째는 한국독립군의 장비를 적위군(赤衛軍)과 일양(一樣)으로 충실하게 해 줄 것, 셋째는 서시베리아에 한국독립군지휘관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를 설치할 것, 넷째는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거액으로 원조해 줄 것이었다. 한형권의 4개조는 무기, 사관학교, 독립자금을 지원해달라는 제안이었고, 그 제안에 레닌이 동의했던 것이다.

특히 제4조의 마지막 제안인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거액으로 원조해줄 것’에 대해 레닌은 200만원을 약속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의 1년 예산이 10만원 내외임을 감안하면 장장 20년 예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레닌은 이처럼 거액을 상해임정에 원조함으로써 상해임정과 한국민족을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게 하고 나아가 동북아 공산혁명의 전위로 만들려 했다고 이해된다. 이 또한 레닌의 외교적 책략이라 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 차관을 공산당 확장에 이용한 김립

그런데 레닌이 약속한 돈은 금화였다. 200만원 상당의 금화는 몇 사람이 운반하기는 너무 무거웠다. 이에 우선 40만원어치의 금화를 7상자에 담아 운반하게 했는데, 그 무게가 500kg을 넘었다.

40만원을 준비한 한형권은 박진순과 함께 1920년 9월 초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옴스크를 거쳐 10월 24일 베르흐네우진스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한형권은 김립을 만났다. [혁명가의 회상록]에 의하면, 김립은 한형권에게 “이동휘, 안창호 등 다수의 인물이 정부를 탈퇴해 세칭 탈퇴파란 것이 생기고 또 원래의 진영(陣營)을 지키는 파가 있어 서로 정쟁이 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한형권은 “외교는 성공해 4개조의 요구는 다 관철됐다. 독립운동자금으로 이제는 200만원을 입수하게 됐으니 돈 있고, 무기 있고, 외국 원조 있는데 무엇을 근심하겠느냐? 내가 정부에 제출하는 보고서와 돈, 제1차로 내가 가지고 온 돈 40만원을 군에게 내줄 터이니 이 돈을 가지고 어서 상해에 가서 정부에 바쳐 달라. 나는 이 길로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서 나머지 160만원을 찾아 상해로 가리라”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모스크바 차관 40만원의 처분권은 김립에게 돌아갔다. 만약 원래의 약속대로 40만원 차관이 상해임정에 전달됐다면 상해임정 역사 그리고 동북아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립은 그 돈을 상해임정에 제출하지 않았다. 대신 한국공산당에 전달했고, 위원장 이동휘는 그 돈을 공산당 확장에 이용했다. 상해임정에 원조된 모스크바 차관을 한국공산당이 중간에서 횡령해 착복한셈과 같았다. 그 결과 모스크바 차관 문제는 모스크바는 물론 상해와 이르쿠츠크 그리고 치타 등에서 심각한 후폭풍을 일으키게 됐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307호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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