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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16)] 당나라 태평성대 노래한 ‘태평송(太平頌)’의 진실 

나당동맹 이끈 김춘추, 왜 ‘독이 든 성배’ 들었을까 

백제군 공격에 딸 죽자 각성한 김춘추…외교 전면에 나서
심리전 능한 김유신, 순식간에 백제 성 20여 개 함락시켜


▎삼국통일 전쟁의 막을 올린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운데)의 모습. 그는 고구려, 왜국, 당나라를 오가며 천하의 구도를 읽고 나당동맹을 이끌어냈다.
"대당(大唐)이 위대한 왕업을 여니 / 높고 큰 황제의 포부 창성하여라 / 전쟁이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 문치를 닦으니 백왕(百王)이 잇는다 / (중략) / 나부끼는 깃발은 어찌 그리 빛나며 / 징과 북소리는 어찌 그리 웅장한가 / 황명을 거스른 변방 오랑캐는 / 베이고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 (중략) / 삼황오제가 이룬 한결같은 덕이 / 우리 당 황실을 비추리라” ([삼국유사] 기이 ‘진덕왕’)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노래한 신라 진덕여왕의 오언율시 ‘태평송(太平頌)’이다. 진덕여왕(재위 647~654)은 김춘추와 김유신이 주도한 정권에서 허수아비 노릇을 한 임금이다. 선덕과 진덕과 진성, 세 명의 신라 여왕 중에서도 존재감이 가장 미약하다. 그나마 알려진 게 당나라를 찬양하는 노래를 짓고 비단에 자수를 놓아 바친 일이었으니 굴욕감마저 준다.

백제·고구려 협공으로 존망 기로에 선 신라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노래한 신라 진덕여왕릉은 경주 동북쪽 구릉에 외지게 자리하고 있다. / 사진:경주시
이는 존망의 기로에 선 나라 사정과 무관치 않았다. ‘태평송’은 백제와 고구려의 거듭된 침공으로 풍전등화에 놓이고,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던 신라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진덕여왕은 몸소 당나라를 찬양하는 노래를 수놓아 구원의 손길을 간구한 것이다. 신라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도는 당나라와의 군사동맹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독이 든 성배’이기도 했다.

신라는 선덕여왕 11년(642)을 기점으로 심각한 국가적 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7월 백제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 서쪽 40여 개 성을 빼앗았다. 새로 즉위한 의자왕은 신라의 명줄을 끊겠다는 듯이 친히 출병해 군사를 독려했다. 554년 관산성(옥천) 싸움 도중에 붙잡혀 참수당한 성왕의 원수를 갚자며 전의를 불태웠다. 흩어져 성을 수비하던 신라군은 백제 대군의 총공세에 무력하기만 했다.

8월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손잡고 당항성(화성)을 함락시켰다. 당나라와의 해상 교역로를 봉쇄해 신라를 고사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이 때문에 몇 년 후 당태종을 만나고 돌아오던 신라 사신 김춘추가 고구려 순라군과 맞닥뜨려 목숨을 잃을 뻔했다. 종사관 온군해가 의관을 바꿔 입고 대신 칼을 맞은 덕분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어쩌면 삼국통일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급박한 순간이었다.

신라에 가장 뼈아픈 타격은 대야성(합천) 함락이었다. 대야성은 서쪽 국경 지역을 아우르는 전략 요충지였다. 이곳을 빼앗기면 수도 서라벌이 적의 사정권에 들어가게 된다. 조정에서는 김춘추의 사위인 이찬 품석을 도독으로 앉혀 대야성을 지켰다. 642년 가을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공격했지만 쉽게 내줄 리가 없는 성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기어코 대야성의 급소를 찾아냈다. 신라 도독 품석이 바로 화를 부르는 문이었다. 품석은 수하에 둔 사지 검일의 아리따운 아내를 탐해 빼앗았다. 원한을 품은 검일은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첩자 모척과 내통하고 성내 창고에 불을 질렀다. 식량과 군수물자가 몽땅 불에 탔으니 신라군이 농성하며 버틸 여력이 사라진 셈이다.

대야성은 사기가 떨어지고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에 도독을 보필하던 아찬 서천이 백제 장군 윤충에게 “살려준다면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윤충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한다”며 이를 받아들였다. 그 말을 믿은 품석은 성문을 열어 장수와 군사들을 내보냈다. 그러나 백제군은 약속을 저버리고 항복한 신라군을 급습해 모두 죽여 버렸다.

절망에 빠진 품석은 먼저 처와 자식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야성은 백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도독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빚은 최악의 결과였다. 이로써 신라의 대백제 방어선은 압량주(경산)까지 후퇴했다. 서라벌이 적의 위협에 노출된 것이다. 여왕의 정치적 입지도 크게 흔들렸다. 신라는 내우외환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간 진짜 이유


▎백제군의 공격에 성을 함락당한 품석은 처와 자식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죽은 품석의 처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 사진:KBS 교양 프로그램 [한국사전] 캡처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국사의 결정적 순간들이 증명해준다. 신라는 망국의 위기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다가 삼국통일의 호기를 맞았다. 주역은 김유신과 김춘추였다.

대야성 함락은 숨은 실력자 김춘추를 각성시켰다. 죽은 품석의 처가 바로 애지중지하던 딸 고타소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상심은 컸다.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이나 물건이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다. 깊은 상심은 뜨거운 분노로 이어졌다. 백제 의자왕이 애통하게 죽은 딸자식의 시신을 감옥에 파묻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기만해 죽이고서 옥살이까지 시키다니! 김춘추는 굳게 다짐했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병탄하지 못할쏘냐.”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11년)

김춘추의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고,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다. 성골은 아니지만, 신라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이자 왕실과 가장 가까운 혈육이었다. 그가 이모 선덕여왕을 받드는 친왕세력의 구심점이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여왕을 못마땅하게 여겨온 진골 귀족들은 백제의 침공을 빌미 삼아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선덕여왕을 몰아내기 위해 그들은 김춘추를 표적으로 삼았다. 대야성 함락 원인을 제공한 품석의 장인이었기에 김춘추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수세국면을 뒤집을 반전 카드가 절실했다. 그해 겨울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국사기]는 그가 백제에 복수할 군사를 청하겠다며 고구려 사행을 자원한 것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백제 못지않게 신라를 적대하고 있었다. 612년 수나라 양제가 침공한 틈을 타 신라가 죽령 서북쪽 땅을 훔쳐 갔다고 해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고 백성들을 잡아갔다. 그 땅을 돌려주지 않는 한 고구려가 신라에 군사를 내줄 리가 없었다. 이를 김춘추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원해 적국에 들어간 까닭은 무엇일까?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가기 직전 고구려에 큰 정변이 일어났다. 연개소문이 열병식에 초대한 귀족 100여 명을 처단하고 왕궁에 들어가 영류왕마저 시해한 사건이다. 국제 정세에 밝은 김춘추는 그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이 정변은 당나라 중심의 천하질서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수나라 멸망기에 창궐한 군웅들을 무찌르고 중국을 통일했다. 주변 종족과 국가들도 잇따라 제압했다. 북쪽으로는 돌궐과 거란을 평정하고, 서쪽으로는 토욕혼과 고창을 정복하고, 남쪽으로도 여러 이민족과 변읍을 복속시켰다. 신라, 백제 등 멀고 가까운 나라들 또한 당나라에 조공하고 국왕 책봉을 받았다.

동북의 고구려와 서남의 토번은 독자적인 위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두 나라도 당나라에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다. 토번의 군주 송첸캄포는 당나라 종실의 문성공주를 왕비로 맞았고, 고구려 영류왕은 태자를 당나라에 보내 조공했다. 당태종의 위세가 드높으니 일단 그가 구축한 천하질서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연개소문의 정변은 단순한 내란이 아니라 천하질서에 균열을 낸 사건이었다. 당태종은 영류왕 시해를 묵과하지 않고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럼 연개소문은 어떻게 나올까? 김춘추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청병(請兵)을 구실로 호랑이굴에 들어간 것이다. 연개소문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향후 천하의 지각변동을 읽어내 신라가 살길을 모색할 속셈이었다.

‘나당동맹’으로 ‘삼국연대’에 맞서는 전략


▎김유신과 김춘추는 존망의 기로에 선 신라를 구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 사진:KBS 드라마 [대왕의 꿈] 캡처
[삼국사기]에선 김춘추가 죽령 서북쪽 땅을 돌려달라는 보장왕의 요구를 완강히 거절해 별관에 구금됐다고 했다. 연개소문의 뜻이었을 것이다. 신라에 군사를 내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김춘추는 뇌물을 써서 왕의 총신 선도해 등을 만나며 고구려의 실정을 알아냈다. 연개소문의 기질상 당나라와의 전쟁은 불가피해 보였다. 천하의 구도가 그려지고 신라가 나아갈 길이 보였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사전에 약조한 대로) 대장군 김유신이 움직였다. 어진 재상을 구해오라는 왕명을 받아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넌 것이다. 신라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보장왕은 사신을 풀어줬다. 아직은 정변으로 내정이 불안해 신라군과 크게 싸울 형편이 못 됐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일찍이 혼인으로 한 집안을 이뤘다.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김춘추와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김춘추와 몰래 만난 문희가 혼전 임신을 하자, 김유신이 여동생을 불태워 죽이겠다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보내 구해주고 특별히 결혼을 허락했다. 여왕은 정치가 김춘추와 무장 김유신, 지략과 담력을 갖춘 두 인재가 환상의 복식조가 돼 취약한 왕권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길 바랐다.

고구려에서 돌아온 김춘추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연개소문이 누구인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시신을 토막 내 구덩이에 버린 인물이다. 그 무시무시한 자가 겁박하는데도 죽령 서북쪽 땅의 반환을 완강하게 거절하고, 구금돼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오히려 고구려의 실정을 파악해 돌아왔다. 민심이 붙좇으며 그의 발언권이 커졌다.

김춘추는 당태종의 천하질서가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봤다. 고구려, 백제, 왜국이 연대해 당나라에 맞서고 신라를 고사시키려 하고 있었다. 신라가 살길은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는 것뿐이었다. ‘나당(羅唐)동맹’으로 ‘삼국연대’를 부수겠다는 구상이었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에 꼬박꼬박 조공하며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에 시달리는 사정을 계속 호소했다.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은 신라를 침공하지 말라는 황제의 명을 연개소문이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막을 올렸다. 당군은 요동성, 개모성 등 핵심 성들을 깨뜨리고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에 대승을 거뒀으나, 안시성에서 치명적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이때 신라는 없는 살림에 군사 3만 명을 징발해 당태종의 정벌을 도왔다. 그러나 이전 해까지만 해도 당나라에 조공하던 백제는 당군을 지원하려고 병력을 뺀 신라를 습격해 곤경에 빠뜨렸다.

압량주 군주가 된 대장군 김유신은 백제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며 신라의 구세주로 떠올랐다. 선덕여왕은 백제군이 쳐들어와 위급할 때마다 그를 찾았다. 김유신 군단은 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을 혼자 감당하기는 버거웠다. 악전고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여왕이 병석에 눕자 진골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김춘추 외교전을 뒷받침한 김유신의 존재감


▎명활산성은 647년 1월 비담의 반란군이 주둔한 곳이다. 신라 시대에 왕경을 방어하는 나성의 구실을 했다. / 사진:권경률
647년 1월 이찬 비담 등이 군사를 일으켜 왕궁으로 쳐들어왔다.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여왕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이 거사의 명분이었다. 선덕여왕은 이미 오늘내일하는 상태였다. 성골로서 다음 국왕에 내정된 승만공주를 겨냥했을 것이다. 반란군은 성골 남자의 씨가 말랐으면 이제 진골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유신은 친위군을 모아 맞서 싸웠다. 양군은 각각 월성과 명활성에 진을 치고 열흘간 공방전을 벌였다. 그동안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났지만, 친위군은 끝내 반란군을 무찌르고 비담 등의 목을 베었다. 곧 이어 선왕의 사촌 승만공주가 보위에 오르니 신라의 마지막 성골 임금, 진덕여왕이다. 나라 사람들의 시선은 막후 실세 김춘추에게 쏠렸다.

김춘추는 그해 왜국에 직접 다녀왔다. [일본서기] 647년 초에 그의 방문 기록이 나온다.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를 잘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왜국에서 권신 소가씨가 몰락하고 다이카개신이 이뤄졌을 때다. 당나라 율령제를 본뜬 정치개혁 속에서 친백제파와 친신라파가 힘겨루기를 했다. 김춘추는 신라와 왜국의 관계를 조율하고 당나라 와도 연결하려 했을 것이다. 삼국연대의 고리를 끊어내고 나당동맹으로 끌어당기려는 노력이었다.

648년에는 아들 문왕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갔다. 당태종은 늠름하고 위엄 있는 김춘추의 모습에 반해 후하게 대우했다. 김춘추는 황제와 만나 백제의 침공을 거론하고 출병을 요청했다. 천하 구도를 논하며 고구려에 설욕하려면 백제를 먼저 쳐야 한다고 진언했을 것이다. 당태종에게 고구려 원정 실패는 회한이었다. 신라의 군사 지원을 방해한 백제의 행위도 떠올랐을 것이다. 김춘추의 집요한 설득에 황제는 당군의 출병을 약조했다.

하지만 당태종은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신라는 그의 아들 고종이 약조를 실행에 옮기도록 사대(事大)에 공을 들였다. 관리들의 의관을 당나라 복식으로 바꿨다. 고유 연호 ‘태화(太和)’ 대신 중국의 ‘영휘(永徽)’를 썼다. 진덕여왕은 오언율시 ‘태평송’을 짓고 손수 비단에 자수를 놓아 바쳤다. 시구처럼 ‘황명을 거스르는’ 백제와 고구려를 벌하라고 청했다. 살아남기 위한 신라의 몸부림이었다.

더욱 격렬해진 전선은 수호신 김유신에게 맡겼다. 그는 심리전에 능한 장수였다. 적군을 속이는 교묘한 전법뿐 아니라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수완도 출중했다. 진덕여왕 때 동잠성(김천) 등지에서 백제군과 맞붙었는데 몹시 고전했다. 이에 김유신 휘하의 비령자와 아들 거진, 종 합절이 차례로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를 지켜본 신라군은 격분해 단숨에 백제군을 무너뜨렸다.

김유신의 존재감은 김춘추의 외교전을 뒷받침하는 힘이었다. 스스로 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없으면 당나라는 승산을 낮게 보고 군사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김춘추가 당태종을 만나 외교전을 펼칠 무렵 김유신은 백제 땅으로 들어가 2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대야성에서는 성안의 백제군을 옥문관까지 유인해 복병으로 섬멸했다. 이때 적장 8명을 사로잡고 백제 측과 교섭을 벌여 감옥에 파묻은 품석·고타소 부부의 유해와 교환했다. 고타소의 넋은 뒤늦게 아버지 김춘추의 품에 안겼다.

654년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통일 전쟁의 막을 올린 태종 무열왕이다. 즉위 이듬해에 고구려, 백제, 말갈이 연합해 신라 북쪽 변경의 33개 성을 빼앗았다. 신라의 거듭된 구원 요청에 당나라는 마침내 백제로 출병한다.

“당나라와 결전한 뒤에 백제를 치리라”


▎당태종 이세민은 7세기 동아시아에 천하질서를 구축한 황제다. 648년 김춘추를 만나 당나라 군대의 출병을 약조했다.
660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기벌포로 들어왔다. 김유신이 지휘하는 신라군 5만 명은 육로를 따라 탄현을 넘어섰다. 나당연합군은 그해 7월 10일에 백제 사비성 남쪽에서 만나기로 하고 진군을 서둘렀다.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 장수 계백의 5000명 결사대에 가로막혀 고전하다가 화랑 관창의 투지와 희생 덕분에 간신히 뚫고 나왔다. 당군의 진영에 이르렀을 때는 약속 날짜가 지나 있었다. 당나라 대총관 소정방은 군령을 어겼다며 신라 감독관 김문영의 목을 베려고 했다. 김유신은 신라군의 기를 꺾으려는 소정방의 수작을 용납하지 않았다.

“황산 싸움을 보지도 않고 날짜 어긴 것만 죄를 삼다니 이런 모욕은 참을 수 없다.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치른 후에 백제를 치리라.”([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

김유신은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다. 성난 머리칼이 꼿꼿이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절로 튀어나왔다. 소정방의 오만한 태도와 당나라의 성대한 군세를 접한 김유신은 직감했다. 저들은 백제와 고구려는 물론 신라마저 집어삼키려고 할 것이다. 신라가 ‘독이 든 성배’를 받은 셈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독배를 받아 든 인물이 수호신 김유신이었다는 점이다. 나당동맹은 출발과 함께 나당전쟁의 불씨를 지폈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등을 썼다.

202307호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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