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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88)] 직언 불사한 ‘절의의 선비’ 충재(冲齋) 권벌 

사화 속에서도 강직함과 격조를 지키다 

사림과 훈구 중재하다 기묘사화로 파직, 봉화 닭실서 10여 년 은거
윤원형·문정왕후 등 살아있는 권력과 맞서다 삭주 유배지서 생 마감


▎권용철 종손이 ‘청암수석’이라 쓴 미수 허목의 전서 편액 앞에서 닭실마을 청암정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그의 계사(啓辭)에 ‘대비는 일개 부인이며 주상은 어린아이다. 선왕조의 대신을 유배하는데 그 죄가 불분명하니 하늘의 진노하심이 반드시 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윤임이 두 마음을 품었다면 어찌 입시(入侍)한 5~6일에 하지 않고 천위(天位)가 이미 결정된 뒤 감히 다른 계책을 내었겠는가’ 등의 말이 있었다. 이때 이언적이 원상(院相)으로 정원에 있다가 계사를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시기를 생각하지 않으시오. 윤임은 구제할 수 없다. 도움은 되지 않고 해만 있을 뿐’이라며 붓을 들어 지워버렸다.”

1545년 조선 명종이 즉위한 해 8월의 [명종실록] 기록이다. 여기서 죄를 논하기 위해 임금에게 올리는 글, 계사를 쓴 이는 당시 병조판서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었다. 그 무렵 정세는 요동친다. 1544년 중종이 승하했다. 이어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윤임(인종의 외삼촌)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대윤이 득세했다. 그런데 병약했던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다시 이복 아우 명종이 왕위를 잇는다. 당시 명종의 나이는 열한 살.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선다. 이를 계기로 실권은 이른바 소윤인 윤원형에게로 넘어갔다.

나라는 7년째 흉년이 들고 명종 즉위 이후도 비바람 재해가 그치지 않았다. 민심은 흉흉한데 윤원형은 윤임 일파의 제거에 골몰했다. 문정왕후가 중신 회의를 소집한다. 대신들이 감히 나서지 못할 때 충재는 민심 안정을 위해서도 인종 시기 삼(三) 대신을 처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좌의정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 형조판서 윤임이다. 권벌은 “만약 죄가 있다면 그 죄가 확실한지 충분히 따져본 후 처벌해도 늦지 않다”고 항변했다. 정권을 잡은 세력과 맞서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다. 예순여덟 충재는 진지하고 비장했다.

영남의 4대 길지 봉화 닭실마을


사관(史官)은 충재를 지켜본 감회를 실록에 덧붙였다. “간신들이 늘어서서 으르렁거리며 눈을 흘겨도 전혀 개의치 않고 늠름한 기상이 추상같았으니 절의를 굳게 지키는 대장부라 이를 만했다.” 소윤 일파의 기세가 등등해지자 충재는 며칠 뒤 다시 계사를 쓴 것이다. 그러나 끝내 윤임 등은 귀양 가고 언관 백인걸은 하옥된다. 소윤과 대윤의 권력 다툼인 을 사사화의 서막이었다. 회재 이언적이 계사의 민감한 부분을 붓으로 지우자 충재가 말한다. “윤임이 죄가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다면 아뢰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소.”

5월 17일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을 찾았다. 영남의 4대 길지로 불리는 닭실마을은 읍내와 인접한 전통마을이다. 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 지형으로도 알려져 있다. 사화에 맞선 충재 선생이 입향한 이후 후손들이 500여 년을 세거한 바로 그 마을이다. 보물만 400여 점인 마을 충재박물관에서 권용철 종손을 만났다. 그는 봉화문화원 사무국장이기도 하다. “이게 선조의 과거시험 답안지인 시권입니다.” 박물관에는 각종 고문서와 고서 등 5000여 점이 전시돼 있었다. 박물관을 둘러본 뒤 종손이 종택을 차례로 안내했다.

문신이자 학자인 충재가 문과에 급제한 것은 1507년(중종 2). 그는 승문원 부정자에 보임된 뒤 예문관 검열, 홍문관 수찬 등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기묘년이 됐다. 조광조를 비롯한 등용된 기호 사림은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개혁을 서둘러 추진했다. 예조참판 권벌은 사림파와 훈구파를 중재하며 정국의 안정을 이루려 애썼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 무렵 아버지가 풍병에 들자 권벌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자청한다. 삼척부사 자리다.

충재는 부임 길에 닭실을 지나갔다. 어렸을 적 자신을 시양자(侍養子)로 삼은 교수 숙부가 충재가 급제하자 인근 토지를 넘겨준 곳이다. “당시 충재 선조는 벼슬에서 물러나면 길지인 이곳에서 살겠다고 결심하셨답니다.” 결국 그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권벌은 파직되고 닭실로 들어와 집을 짓고 은거에 들어간다.

열한 살 명종 보필하는 원상으로


▎거북 형상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진 청암정의 모습. / 사진:송의호
박물관을 나와 오른쪽 충재(冲齋)라는 작은 서재와 청암정(靑巖亭)으로 갔다. 종손이 내력을 설명한다. “충재를 먼저 지었어요. 충(冲)은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건너편 거북 형상 너럭바위 위에 청암정을 짓고 10여 년을 고뇌하고 힐링하셨지요.”

연못 위로 난 돌다리를 건너 청암정에 올랐다. 허목이 쓴 ‘靑巖水石(청암수석)’ 전서 편액과 퇴계 이황 등의 시판이 정자에 걸려 있다. 또 한쪽에는 [근사록(近思錄)]을 즐겨 읽은 충재를 상찬한 영조의 교서가 판각돼 있다. 청암정을 지나 동쪽으로 종택의 주거공간이 들어서 있다. 높은 위치에 불천위 충재와 종손의 4대 신주를 모신 사당이 있었다. 나흘 전 불천위 제사엔 제관 30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종택 너머로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 뒤로 산이 보이지요. 문필봉인데 제가 초등학교 시절 꼭대기가 잘렸어요. 나라에서 레이더를 설치한다며 군청 관계자가 할아버지를 찾아와 협조를 요청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할아버지는 생각 끝에 나랏일이니 반대해선 안 된다며 허락했습니다.” 선공후사(先公後私) 충재 정신 때문이었다.

1533년(중종 28) 권벌은 닭실 은거를 끝내고, 용양위부호군으로 14년 만에 다시 조정에 복귀했다. 이후 밀양부사, 한성좌윤, 경상도 관찰사, 형조참판, 병조참판, 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1539년에는 태조 이성계의 조상이 명나라에 잘못 기록돼있는 것을 사신을 보내 고쳐 달라고 주청하는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북경을 방문했다가 이듬해 2월 돌아왔다.

이후 권벌은 병조판서와 예조판서,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다. 인종 시기인 1545년 권벌은 정1품 의정부 우찬성에 올랐다. 찬성은 판서와 정승의 중간 벼슬이다. 그해 7월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11살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는 어린 임금을 보필하는 원상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은 앞에서 본 대로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소윤 일파는 대윤 일파를 대대적으로 탄핵한다. 을사사화였다.

소윤 일파는 하늘 무서운 줄을 몰랐다. 선비의 의리나 명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대윤 일파는 대부분 숙청됐으며 1545년 10월 권벌도 소윤의 미움을 받아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면된다. 설상가상. 을사사화 직후인 1547년(명종 2) 9월 경기 양재역에 대자보가 나붙었다. “여주(女主, 문정왕후)가 위에서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밑에서 권력을 농단하니 나라가 망하는 것은 서서 기다릴 수 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 8월 그믐.”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이다. 문정왕후와 그를 지원하는 윤원형·이기·정순붕 등 집권층의 권력 독점과 비리를 폭로한 것이다.

윤원형 등 소윤 일파는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 사건을 그들에게 비판적인 선비를 일망타진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 사건으로 송인수가 사형을 당하고 권벌을 비롯해 이언적·노수신·유희춘 등 20여 명은 귀양갔다.

충재는 전라도 구례로 유배 갔다가 평안도 태천으로 이배됐으며 다시 평안도 삭주로 옮겨졌다. 그와 뜻을 같이한 이언적도 당시 평안도 강계로 유배형이 떨어졌다. 귀양을 떠나면서 두 사람은 비슷한 시간 벽제역에 도착했으나 서로 만나지는 못했다. 당시 충재는 농담 삼아 말하기를 “이이상(李貳相, 이상은 贊成 벼슬)과 권이상의 행차가 어찌 이리도 빛나는가?”라고 했다.

이후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율곡 이이는 임금에게 강론하는 경연에서 두 사람을 비교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먼저 그 사람의 큰 절도를 판단한 뒤 세세한 행위를 논하는 게 좋습니다. 권벌과 이언적 두 분은 평소 행실을 반듯하게 하는 데는 권벌이 이언적을 따르지 못하나 화란을 당했을 때 절개를 꿋꿋이 지키는 데는 이언적이 권벌에게 양보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도 소신 발언


▎영조가 [근사록]을 탐독한 권벌을 후대에 상찬한 교서. / 사진:송의호
1565년(명종 20) 소윤 일파가 몰락하고 선조가 즉위한 이후 사림이 다시 중앙 정계를 장악하자 양재역벽서사건은 무고로 공인된다. 이에 따라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도 사면과 복권이 이뤄졌다. 명분과 의리를 중시했던 권벌은 개혁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처음 관직에 나갔을 때부터 삼척부사로 부임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개혁정치를 지지하고 동참했다. 경연관으로 있을 때는 임금이 덕을 쌓고 외환에 대비하고 인재등용 등 왕도정치를 실현할 것을 건의하는 등 바른말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생모였던 현덕왕후 권씨의 능인 소릉을 복위해야 하며, 정몽주를 현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소신 발언을 꺼리지 않았다. 1512년(중종 7) 권벌은 단종 복위운동에 현덕왕후의 동생인 권자신이 연루됐다는 이유로 소릉의 지위를 박탈한 것은 잘못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현덕왕후는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기 16년 전 단종이 태어날 때 세상을 떠났으므로 상관이 없다는 논리를 폈다. 그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받아들여져 1513년 소릉의 지위는 회복됐다.

권벌이 이렇게 의리와 명분에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폭넓은 독서가 그 바탕이었다. 퇴계는 충재 행장(行狀)에 책을 대하는 권벌의 자세를 이렇게 적었다. “평소 글을 좋아해 숙직하면서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또 성현의 언행이 절실하고 요긴한 대목을 만나면 아들과 조카를 불러 반복해 가르쳤다. 늘 ‘학문은 자기 자신의 수양을 위해 하는 것이며 과거시험은 부수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병석에 누워서도 손에서 책 떼지 않아


▎우복 정경세가 글을 지은 권벌의 두 번째 신도비. / 사진:송의호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삭주로 유배 간 충재는 병이 나서 누워 있을 때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그는 유배된 지 1년 만인 1548년(명종 3) 3월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며 지내다가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5월 유해는 봉화 닭실로 옮겨져 11월 장례가 치러졌다.

종택을 나와 자동차로 5분 거리의 마을 뒤쪽 큰재 궁골 추원재(追遠齋)에 들렀다. “묘제를 올릴 때 여기서 준비하고 또 비가 오면 망제를 지내는 곳입니다.” 그렇게 규모가 큰 재실을 보기는 처음이다. 충재의 묘소는 추원재에서 바라보이는 가파른 산마루에 있었다. 비석에는 ‘충정공충재권선생지묘(忠定公冲齋權先生之墓)’라 새겨져 있다. 이곳엔 충재의 부모, 숙부인 교수공 부부, 아들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묘소 아래 산자락에 신도비가 비각 안에 500년 전 모습을 간직한 채 세워져 있다. 1591년(선조 24) 충재가 영의정으로 증직됐을 때 정경세가 글을 지었다. 박순이 쓴 신도비에 이은 두 번째 신도비다. 붉은 글씨가 생생하다.

1555년 남명 조식은 명종에게 을묘사직소를 올린다. 단성현감을 임명받고 사절하는 상소다. 이 상소문 중 “자전(慈殿, 문정왕후)은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선 어리시어 선왕의 한낱 고아일 뿐”이라는 표현은 최고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표적인 직언으로 회자된다. 이 문구는 권벌이 10년 전인 1545년 계사에서 쓴 “대비는 일개 부인이며 주상은 어린아이”라는 비유와 닿아 있다. 글을 쓸 당시 남명은 재야의 대학자였고 충재는 조정에 몸을 담은 고위 관리였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은 예스맨에게 둘러싸이기 마련이다. 그래도 사관은 살아 있어 [명종실록]은 임금과 대비를 겁내지 않고 할 말을 한 충재의 자세를 기록으로 남겼다. 권벌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강직함과 격조를 간직했던 관료이자 의로운 선비였다. 책임 있는 공직자와 지식인의 직언은 시대를 초월해서 절실할 따름이다.

[박스기사] 임금도 알고 있던 권벌의 '근사록' 탐독 - 도포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어

충재 권벌은 경서인 [소학] [대학] [논어]는 물론 유학의 생활과 학문 지침서인 [근사록(近思錄)]을 애독했다. 공무나 숙직을 하면서도 작게 만든 [근사록]을 도포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을 정도였다.

1540년 중종이 대신들을 경회루로 불러 꽃구경을 하며 연회를 베푼 적이 있었다. 연회가 끝나고 뒤를 정리하던 내관이 작은 [근사록]을 주웠다. 이를 본 중종은 바로 말했다. “권벌이 떨어뜨렸을 것이다. 나중에 돌려주거라.”

훗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영조는 1746년 권벌의 6대손 정랑 권만에게 유품[근사록]을 가져오라고 해 친히 살펴본 뒤 새로 간행한 [근사록] 한 질을 하사하며 경의를 표했다. 봉화 청암정에는 당시 내력을 새긴 편액이 걸려 있다.

[근사록]은 북송시대 유학자 주돈이·정호·정이·장재의 저작 중 학문의 요점과 일상에서 절실한 것을 뽑아 편찬한 책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소학]과 함께 가장 애독했던 수신서다. ‘근사(近思)’는 [논어]의 ‘절문근사(切問近思)’에서 나온 말로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데서 생각하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즉 유학의 정신을 머리로만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실천할 것을 강조하는 책이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307호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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