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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K컬처 톺아보기(16)] '닥터 차정숙'이 보여준 기성 플랫폼 생존법 

익숙함으로 고정 시청층 잡고, 세련됨으로 OTT 사용자 홀렸다 

전업주부 인생 리셋 판타지, 공감 가는 캐릭터 앞세워 호감도 높여
가족 복수극에 로맨틱 코미디 더해 효과 극대화, 배우 열연도 한몫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 속 차정숙 역할의 배우 엄정화는 익숙한 연기의 옷을 입었지만, 배우가 가진 매력이 더해져 이 캐릭터에 시너지를 만들었다. / 사진:JTBC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높은 시청률로 대중성을 확보했지만, 완성도에서는 어딘가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읽히는 건 드라마 홍수시대에 중장년 시청층의 소비 변화다.

‘왜 이래? 나도 날리던 사람이야.’ 종영한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의 포스터는 그런 문구와 함께 차정숙(엄정화)이 남편 서인호(김병철)의 뺨을 올려붙이는 듯한 장면으로 연출됐다. 둘 다 의사가 운을 입었고 제목도 [닥터 차정숙]이니 이 드라마가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의학 드라마라는 건 누구나 알 법하다. 하지만 이들이 하는 건 수술이 아니라 그들 관계에 벌어진 어떤 갈등들을 표출하는 모습이다. 의학 드라마 장르의 외피를 입었지만, 알 수 없는 의학 용어보다는 부부간의 치고받는 갈등과 대결이 이 드라마의 정체라는 걸 이 포스터는 알려준다.

‘나도 날리던 사람’이라는 말은 뺨을 날리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차정숙 또한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는 걸 뜻한다. 하지만 20년간 전업주부의 삶을 산 그가 남편의 뺨을 날리게 된 건 그 헌신적인 삶을 송두리째 허무하게 만든 서인호의 불륜과 두 집 살림 때문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차정숙은 남편의 내연녀가 다름 아닌 대학 시절 과동기로 남편과 연인 사이였던 최승희(명세빈)라는 사실에 놀라고, 그 내연녀 사이에 태어나 벌써 고등학생이 된 딸이 있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남편의 불륜, 전업주부로 희생된 삶, 그래서 늦었지만, 자신의 꿈을 다시금 찾아가려는 주인공. [닥터 차정숙]의 상황 설정이나 스토리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것들이다. 누구나 첫 회만 봐도 드라마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가늠하게 되고 또 기대하게 된다.

이런 스토리는 사실 최근 일일 드라마에서 가족 드라마의 자리를 차지해버린 가족 복수극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일일 드라마는 상황을 과장되게 설정해 개연성을 노골적으로 무너뜨려 ‘막장’이라는 비판을 받곤 한다. 하지만 이 가족 복수극의 스토리는 익숙한 클리셰이긴 해도 드라마 작법에서는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코드들이다. 하지만 [닥터 차정숙]이 다른 건 이러한 가족 복수극의 정서를 밑그림으로 삼지만, 과하게 밀고 나가기보다는 코미디와 로맨스를 섞어 보다 부드럽게(?) 진행한다는 점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적인 장르 문법을 가져와, 불륜을 저지른 남편 서인호마저 뒷목을 잡게 만드는 캐릭터면서도 코믹한 인물로 그려낸다. 불륜을 들키지 않기 위해 쩔쩔매는 서인호의 모습이나, 혹은 그 사실을 들킨 후 차정숙과 시어머니 곽애심(박준금) 그리고 자식들에게조차 질타를 당하는 모습은 그래서 시원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로 연출된다. 제작진은 서인호 역할을 맡을 연기자를 캐스팅하는데 난항을 겪었다고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 배역을 맡은 김병철은 코미디 상황에서 일종의 ‘샌드백’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냈다. 시청자들은 제대로 된 타격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의 당하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최강 빌런에 가까운 악역이지만, 김병철이 어딘가 귀엽게까지 느껴진 이유다.


▎[닥터 차정숙]에서 미워하기 힘든 ‘국민 밉상’ 서인호 교수 역을 맛깔나게 보여준 배우 김병철. / 사진:JTBC
즉 [닥터 차정숙]은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차정숙이라는 ‘전업주부’를 대변하는 공감 가는 캐릭터를 세워두고 불륜·불치·복수 같은 익숙한 소재의 서사를 그리되, 이를 로맨틱 코미디와 의학 드라마 같은 세련된 장르적 포장을 해냄으로써 눈살 찌푸리지 않고 빠져서 볼 수 있게 만든 드라마다. 대단한 명작은 아니지만, 잘 기획된 대중적인 작품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소재와 구성이지만…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의학 드라마 장르의 외피를 입었지만, 알 수 없는 의학 용어보다는 부부간의 치고받는 갈등과 대결을 그려냈다. / 사진:JTBC
2021년 JTBC가 내놓은 허진호 감독과 김지혜 작가의 [인간실격] 같은 드라마는 묵직한 메시지에 완성도도 높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청률은 1%대에 줄곧 머물면서 대중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그 해부터 약 2년간에 걸쳐 JTBC 드라마는 작품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시청률에서 고전했다. [구경이]나 [나의 해방일지] 같은 완성도 높은 작품도 나왔지만, 시청률은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게다가 [너를 닮은 사람], [한사람만], [그린마더스 클럽] 같은 존재감이 거의 없는 드라마들이 방영됐고, [설강화] 같은 불필요한 논란만 커졌던 드라마도 나오면서 JTBC 드라마의 위기설이 퍼졌다. 반면 타 방송사에서는 [펜트하우스] 같은 자극적인 드라마가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갯마을 차차차]나 [사내 맞선]처럼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만들었다. 한때 [밀회]부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물론이고 [SKY캐슬]이나 [부부의 세계] 같은 메가 히트작을 내놓으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아우른다고 평가받던 JTBC 드라마로서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결국 JTBC 드라마는 완성도보다는 우선 대중성에 충실한 작품들을 선택했고, 그 효과는 2022년 연말을 강타한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원작 웹소설을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회귀물’ 장르로 무려 26.9%(닐슨코리아)의 최고시청률을 기록했다. 단번에 JTBC 드라마 위기설을 잠재워버린 것. 죽을 위기에 몰린 주인공이 과거로 회귀해 다시 삶을 살아가는 ‘인생 리셋’의 판타지를 담은 회귀물은 최근 젊은 세대들의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 정서와 맞물린 트렌디한 장르다. 그런데 [재벌집 막내아들]을 보면 이 트렌디한 회귀물이 마치 판타지가 더해진 ‘시대극’처럼 보인다. 과거로 회귀해 재벌가 막내 손자로 다시 살아가게 된 진도준(송중기)이 주인공이지만, 그 시대의 재벌 총수 역할을 한 진양철(이성민) 회장이 더 주목받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1970~80년대 개발시대 성공신화를 이끈 이 인물은 기성세대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재벌집 막내아들]의 대중적 성공은 시대극 같은 향수를 끌어오면서도 이를 회귀물이라는 트렌디한 장르로 해석한 지점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이건 종편 채널이지만 여타의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종편들과는 달리 세련되고 트렌디한 작품들을 내놓았던 JTBC의 고정 시청층을 정확히 겨냥했다.

JTBC 드라마가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결과물


▎JTBC 드라마 [구경이](왼쪽), [나의 해방일지](오른쪽)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지만, 시청률은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 사진:JTBC
이 흐름은 [재벌집 막내아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대행사]로도 이어졌다. 전형적인 오피스 성장드라마지만, 여성 임원 캐릭터 고아인(이보영)이라는 인물을 세워 트렌디한 여성 서사를 그려내 최고시청률 16%를 기록했다. [신성한, 이혼] 역시 법정물의 익숙한 공식을 가져왔지만, 소주를 와인잔에 마시고 트로트를 부르는 신성한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이들의 브로맨스(남성 간의 뜨거운 우정과 유대를 일컫는 표현)를 그리며 9.4%라는 괜찮은 성적을 냈다. [닥터 차정숙]은 이처럼 JTBC 드라마가 그간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결과물의 성격이 강하다. 너무 거창하거나 무겁지 않으면서 익숙한 소재와 코드들을 활용하지만, 이를 현재에 맞게 세련되게 포장하고 연출하는 방식의 드라마. JTBC 드라마의 성공방정식을 찾아낸 [닥터 차정숙]은 어쩌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대가 열리면서 맞이한 지상파, 케이블, 종편 같은 기성 플랫폼의 위기를 넘을 수 있는 하나의 해법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OTT는 드라마 제작이나 소비에 있어서 큰 변화를 불러왔다. 영화에 가까운 세련된 장르물들이 OTT를 통해 소개됐고, 이를 경험한 시청자들의 눈높이도 그만큼 높아졌다. 장르물이나 판타지물이 만들어지고,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어 K드라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위상이 달라지면서 지상파, 케이블, 종편 같은 기성 플랫폼들의 드라마들도 이 변화의 흐름을 외면할 수는 없게 됐다. 지상파에서는 SBS가, 케이블에서는 tvN이 그리고 종편 채널에서는 JTBC가 그 대열에 앞장섰고 그만한 성과물들도 내놨다.

하지만 이 과도기에 기성 플랫폼들이 가진 고정 시청층을 놓치게 되는 일들도 생겨났다. 여전히 시청률을 척도로 한 광고가 드라마의 중요한 수입원인 현실에서 세련되고 완성도 높게 만든 작품이지만, 고정 시청층의 취향에 맞지 않아 낮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딜레마가 생겼다. 어떻게 하면 다소 구시대적일 수 있는 고정 시청층의 취향을 저격하면서도 보다 세련된 드라마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을까? 특히 종편 채널로서 보수적 시청층 역시 포기할 수 없는 JTBC 드라마로서는 이 문제가 중대한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

옛 드라마의 현재화라는 새로운 해법

[닥터 차정숙]은 이러한 기성 플랫폼의 고민이 찾아낸 해법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가족 복수극에 익숙한 로맨틱 코미디를 장르적으로 잘 풀어내 효과를 극대화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절대적인 건 차정숙 같이 시청자들이 응원하고픈 매력적인 인물이다. 익숙한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을 따라가도 시청자들의 불만이 없는 건, 이러한 인물에 대한 지지가 모든 걸 잠재워주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막장 같은 ‘강력한 욕망’을 건드리는 서사가 등장하면서도 시청자들이 유쾌하게 볼 수 있게 만든 건 바로 이 차정숙 같은 인물의 매력이 있어서다.

이를 실현해내는 데 있어서 배우들의 역할도 지대했다. 차정숙 역할의 엄정화는 익숙한 연기의 옷을 입었지만, 배우가 가진 매력이 더해져 이 캐릭터에 시너지를 만들었다. 앞서 말한 남편 역할의 김병철도 마찬가지다. 분노유발자이지만, 시청자들이 시원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낀 건 그의 리액션 좋은 연기가 큰 몫을 했다.

옛 드라마의 현재화라는 해법은 [닥터 차정숙]에서만 보이는 양상은 아니다. 최근 KBS가 내놓은 [어쩌다 마주친, 그대] 같은 작품도 마치 [재벌집 막내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타임리프라는 장르적 설정을 가져오지만, 1987년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적 요소가 느껴진다. 이처럼 이제 기성 플랫폼들은 OTT 시대의 과도기를 맞아 익숙하면서도 세련된, 어찌 보면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작업을 숙제로 마주하게 됐다.

※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MBC 시청자 평가원, JTBC 시청자 위원으로 활동했다. 백상 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며 SBS [열린TV 시청자 세상], KBS [연예가중계]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저서로 [숨은 마흔 찾기],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웃기는 레볼루션] 등이 있다.

202307호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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