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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7)] 노비 인권 보호에도 힘쓴 ‘성군’ 세종 

“특권의식 찌들어 발목 잡는 신하들 없었다면 위대한 개혁군주 세종의 나라는 달랐을 것 

백성이 수령 고소 못하게 만든 ‘부민고소금지법’ 무력화시켜
사대부 기득권에 일침 가했지만 혼자의 힘만으로는 역부족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상 앞에서 인도네시아 관광객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의 한글 사용을 계기로 세종대왕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 사진:이훈범
1427년 8월 형조 판서 노한은 길을 가다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다. 한 사람이 지게에 무엇인가를 지고 가는데, 그 모습이 사람과 비슷하나 가죽과 뼈가 서로 붙어 파리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숨은 쉬고 있지만 거의 미라 같은 형상이었다.

노한은 가마를 세우고 지게꾼을 불러 물었다. 그런데 그 살아있는 미라가 집현전 응교 권채의 여종이라는 게 아닌가. 덕금이라는 이름의 여종이 도망치자 붙잡아와 가둬놓고 그 지경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집현전 응교는 정4품 벼슬로 당시 영예로운 청화직(淸華職) 중 하나였다. 따라서 여염집 가정사로 모른 체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노한은 즉시 형조에 명을 내려 조사를 시키고 세종에게 보고했다. 세종도 경악한다. 권채는 개국공신 권근의 손자인 데다, 시문과 경학에 뛰어나 세종이 아끼는 인재였다. 세종은 지엄한 어명을 내렸다. “나는 권채를 말수가 적고 얌전한 성품으로 알았는데, 그토록 잔인했던가. 그것은 반드시 그 아내에게 제어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니 모름지기 끝까지 조사해 아뢰라.”

첩을 학대해 사망 지경에 이르게 한 ‘본처’

며칠 뒤 형조에서 조사 보고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가히 엽기적이다.

“권채는 일찍이 여종 덕금을 첩으로 삼았습니다. 덕금이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권채의 아내 정씨에게 다녀오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몰래 갔습니다. 이에 정씨가 권채에게 ‘덕금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갔다’고 고했습니다. 권채가 덕금을 붙잡아 와 매질을 한 뒤 머리카락을 자르고 왼쪽 발에 고랑을 채워 방에 가두었습니다. 정씨는 덕금에게 하루 걸러 음식을 주고 자신의 똥과 오줌을 먹게 했습니다. 똥과 오줌에 구더기가 생기고 덕금이 먹으려 하지 않자, 침으로 항문을 찔러 구더기까지 억지로 삼키게 했습니다. 그런 참혹한 학대가 수개월간 지속되어 그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권채의 직첩을 회수하고 아내와 함께 체포해 국문하여 징계할 것을 청합니다.”([세종실록] 1427년 8월 24일자 기사)

세종이 이를 허락하자 변계량과 윤회 등 신하들이 이의를 제기한다. 투기를 한 부인이 한 일이며 권채는 내막을 몰랐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세종은 이에 직첩을 회수하지는 말고 의금부에서 재조사하도록 명령했다. 다시 며칠 뒤 나온 의금부 조사 결과는 형조 조사와 사뭇 달랐다.

덕금이 학대받고 있는 사실을 권채는 알지 못했고, 그가 집현전 일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부인 정씨가 주도한 일이라고 남자종과 여자종이 각각 진술했다는 것이었다. 의금부는 그러면서 이런 의견을 낸다. “이 같은 진술이 형조의 조사 내용과 다르니 마땅히 형벌을 써서 신문해야 하나, 종과 주인 사이의 일을 그렇게까지 조사해야 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한마디로 그냥 덮어두고 가자는 얘기였다. 의금부의 이러한 의견은 이른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에 따른 것이었다. 부민고소금지법이란 문자 그대로 일반 백성이 수령을, 하급 서리가 상급 관리를 고소할 수 없게 금지한 법이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법이지만, 조선 초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강화하고 상하존비의 신분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령은 백성의 부모이고 백성은 수령의 자식인데, 자식이 어찌 부모를 고소할 수 있느냐는 논리였다. 윗사람의 행동이 사리에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얘기였다.

1420년 예조판서 허조 등의 건의로 제정된 것인데, 지배계층의 입장에서는 “매우 아름다운 법”이었을 게 분명했다. 모든 경우에 고소를 금지한 것은 아니고 관리의 비리·불법·오판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서울의 경우 주장관, 지방은 관찰사에게 호소할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무고죄로 맞아 죽을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불가능에 가까운 예외 규정이었다.

의금부의 의견을 들은 세종은 그러나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권채의 일은 비록 종과 주인 사이의 일이라고는 하나, 노비가 스스로 고소한 것이 아니고 국가에서 알고 조사한 사건이니 종과 주인 사이의 일이라고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러 달을 포악하게 학대해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해 잔인하기가 이보다 심함이 없는데 어찌 국문을 하지 않고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다시 추궁하여 조사하고, 권채가 사실을 알았거든 다시 잡아들여 신문하라.”([세종실록] 1427년 8월 27일자 기사)

처의 가혹행위를 알면서도 방조한 사대부


▎조선 말 외국인이 촬영한 노비들. 원래 양반을 스케치할 목적이었지만 그들이 촬영을 거부해 그 종들을 필름에 담았다고 한다. / 사진:이훈범
고소 사건이 아니라 인지 사건인 만큼 부민고소금지법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명쾌한 해석이다. 이로 인해 비로소 사건의 시시비비가 낱낱이 밝혀진다.

권채는 정씨의 덕금 학대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권채는 여전히 자신은 몰랐다고 사법당국 탓만 했다. 의금부 제조 신상한테서 “글만 배웠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였다.

다시 세종이 추상같은 명을 내린다.

“미물이 자기 자리를 잃어도 원통할 일인데 하물며 사람이야 어떠하겠느냐. 만물을 다스리는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인을 구별해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권채가 기어코 죄를 자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형벌로 신문할 것이다.”([세종실록]1427년 8월 29일자 기사)

결국 권채는 파직되고 유배형을 받았으며, 부인 정씨는 곤장 90대에 해당하는 속전을 내고 풀려났다. 하지만 지배계층 일부에서는 여전히 백성에 대한 차별 없는 사랑을 근본으로 삼는 세종의 태도에 승복하지 못했다. 특히 당시 지배계층의 정점에 서 있던 이조 판서 허조가 그랬다.

권채에 대한 판결이 마무리된 다음날 허조는 이렇게 불평한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주인과 종의 사이는 모두 같은 관계입니다. 지금 계집종을 학대한 죄로 직첩을 회수당하고 외지로 유배가야 한다면, 신은 강상(綱常)의 문란함이 여기서부터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허조가 누구인가. 지난 호에서 보았듯 “법률을 백성에 널리 알려 글을 못 읽고 법을 몰라 중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세종에 반대하며 “백성이 율문을 알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무리가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하던 인물이다.

성리학적 사회 질서와 특권의식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그였다. 그런 그에게 그까짓 종 따위를 학대했다는 이유로 주인이 귀양을 가야 한다는 사실은 강상을 뿌리째 흔드는 일대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다.

강상이란 부자와 군신·부부·형제·친구 간의 윤리, 즉 삼강오륜을 일컫는 것으로, 조선의 경우 이를 어긴 패륜 범죄는 강상죄라 해 가중처벌을 받았다. 물론 아래에서 위로 치받는 경우만 해당됐다. 따라서 종이 주인을 폭행했다면 죽여 마땅하지만, 주인이 종을 폭행한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문제 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오히려 수고스럽지만 꾸짖어 예를 가르치는 아름다운 선행이었다.

인간답지 못한 처사에 ‘철퇴’ 내린 세종

보름을 끌었던 권채 사건의 종결 과정에서 볼 때 임금인 세종과 지배계층인 양반 사대부들과의 인식 차이의 간극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세종에게는 양반 상민할 것 없이 모두 보살펴야 할 백성이지만, 양반 사대부들은 무지렁이 백성의 삶이야 내 알 바가 아니었다. 하물며 천민들의 삶이야…. 성리학적 윤리 역시 무지렁이 백성의 접근을 막고 자신들만의 성을 더욱 공고히 하는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강상의 문란함을 걱정하는 허조에게 세종은 다시 한방을 먹인다. “비록 계집종이라고는 하나 이미 첩이 되었으면 마땅히 첩으로 대우해야 할 것이며 그 아내 역시 마땅히 가장의 첩으로 대우해야 할 것인데, 그 잔인 포학함이 이 정도니 어떻게 그를 용서하겠는가.”

권채는 여종 덕금을 자신의 성적 노리개로 삼았을 뿐 결코 첩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비는 주인의 성적 만족을 위해 언제든 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그렇지 않았다. 임금은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는 존재이며 노비 같은 천민(賤民) 역시 하늘이 내린 백성(天民)이었다. 모든 백성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임금의 소임이며 그 백성에는 노비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세종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세종이 궁궐 안에 논과 밭을 만들어 놓고 손수 농사를 지으며 백성들의 안부를 걱정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어느 날 밭에서 호미질을 하던 세종이 곁에 서 있던 내관에게 물었다. “너는 백성의 하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내관이 답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전하이옵니다.”

세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밥이니라.”

이 말은 지적소유권이 세종에게 있는 것은 아니고, [사기] ‘역이기 열전’에 나오는 것이다. 역이기는 한고조 유방의 모사였다. 진나라 멸망 후 유방이 항우와 천하의 패권을 다투고 있을 때, 유방은 곡창지역인 오창을 버리고 후퇴하려 했다. 이때 역이기가 “왕이 된 자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고 유방을 설득했다.

이에 유방이 전략을 수정, 초군을 공격해 오창을 확보함으로써 패권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된 것이다. 왕세자 시절 [사기]를 읽었을 게 분명한 세종은 그때부터 임금의 하늘이 백성이라는 생각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신념을 가진 세종에게 허조의 주장은 기가 찰 얘기였을 터다.

하지만 세종 또한 조선의 뿌리 깊은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결국 권채에 대한 유배형은 거둬들이고 관직만 파면하도록 물러선다. 그 일을 잊지 못했던지 세종은 17년 후 그 얘기를 다시 꺼낸다. “우리나라 노비법은 상하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강상이 이것에 의지하는 까닭에 주인이 죄 있는 노비를 죽인 경우 사람들은 주인을 치켜올리면서 진실로 좋은 법이고 아름다운 뜻이라고 한다. (…)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이다.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텐데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가해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세종실록] 1444년 윤7월 24일자 기사)

그러면서 세종은 “지금부터는 노비가 죄가 있건 없건 관에 알리지 않고 구타 살해한 자는 법에 따라 엄단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결과는? 결과는 우리가 잘 안다. 세종이 권채를 벌하고 17년이 지나 또 이런 말을 해야 할 만큼 달라진 게 없듯이 그 후로도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군주의 개혁 의지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지배계층인 양반 사대부들의 사고체계가 달라지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게다가 조선이란 양반 사대부들이 왕조차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던 나라 아닌가. 부민고소금지법의 제정을 둘러싼 세종과 허조의기 싸움을 살펴보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하들의 벽에 부딪힌 세종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지배계층의 저항에 기싸움 벌이며 해결 모색


▎김홍도 작 [벼타작]. 노비들이 벼이삭을 털고 있는 동안 주인인 양반은 한가로이 누워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지켜보고 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인 1420년 예조판서 허조가 발의한 부민고소금지법이 마땅치 않았다. 백성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자신의 정치 목표에서 크게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조는 당태종과 주문공의 언급과 고려 때의 풍속을 예로 들어 아랫사람이 상전을 고소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태종은 종이 주인의 반역을 고발할 경우 듣지도 말고 종의 목을 베라고 했으며, 주문공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면 비록 아랫사람이 옳더라도 돕지 말라고 효종에게 건의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조인 고려시대에는 상전을 능멸한 아랫사람을 엄격히 처벌하고 그의 집까지 부숴 물웅덩이를 만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허조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각 관청에 부쳐 신하들에게 논의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정현·박은·이원 등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 법을 만들 경우 수령들이 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하게 돼 백성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자 허조는 태상왕(태종)에게 달려가 읍소했다. “수령의 일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나 있는데, 향리나 백성의 고소를 막는다 하더라도 어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신은 늙었사오나 윤허를 얻게 된다면 죽어서 고이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허조는 태상왕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을 연출했고, 이에 감동한 태상왕의 허락을 얻어낸다. 태상왕이 승낙한 것을 뒤집을 수 없었던 세종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1년여 뒤인 1422년 2월 형조의 발의로 부민고소금지법이 만들어지게 됐다. 하지만 세종에게는 그것이 영 마뜩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드디어 세종은 9년 뒤 부민고소금지법을 재논의 해보라고 지시한다.

세종의 말에는 틀림없이 튀어나올 허조의 반대에 대비해 준비를 많이 했음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경(허조)의 말이 매우 옳으나, 억울한 바를 호소하지 못하게 한다면, 예컨대 수령이 백성의 노비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줘도 그 백성은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할 게 아닌가. 백성이 하고자 함이 있는데 임금이 없으면 어지러워지므로 반드시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한 것인데, 억울함의 호소를 받지 않으면 어찌 임금의 다스림에 체통이 설 수 있겠는가.”

당시 의정부 찬성이던 허조는 예상대로 반론을 제기한다. “고려가 500년을 유지한 것은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습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부민과 수령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 신하와 임금의 관계와 같아 절대로 범할 수 없습니다. 그 허물과 악함을 고소하면 이는 신하와 아들이 임금과 아비의 허물을 들추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상의 ‘천민 고소 불가법’ 개정


▎조선 초 문신 허조의 초상화.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는 데 일조해 조선 최고 이조 판서라고도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의 엄격한 성리학적 윤리의식은 여러 번 개혁군주 세종의 발목을 잡았다. / 사진:이훈범
그러면서 허조는 수령의 불법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해 조사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허조의 실수였으며, 세종은 허조의 논리가 꼬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고소를 하지 못하게 금령을 반포하고,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해 백성들에게 소를 제기하게 하면 실로 모순되지 않는가. 또 조정 관리를 파견하는 것은 일시의 법이고 육전에 싣기는 적합하지 않다. 법을 세우는 데 근거가 없으면 그 폐단을 장차 어떻게 하겠느냐.”([세종실록] 1431년 6월 20일자 기사)

허조는 할 말이 없었다. 세종의 판정승이었다. 이조판서 권진 또한 “백성이 고소하는 것을 금하면 관리들이 두려워하고 꺼리는 마음이 없어져 고의로 잘못 판결하는 자가 생길 것”이라고 힘을 보탰다.

지신사 안숭선은 “필부필부가 말을 하지 못하면 하정이 상달되지 못해 임금의 다스림이 심히 어그러지고 임금이 백성과 더불어 공을 이룩할 수 없게 될 것”이라면서 법의 개정을 주장한다.

세종은 상정소에서 다시 논의하게 하고, 집현전에 과거에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는 법의 사례가 있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한다. 보름 후 집현전에서 보고한다.

“[지정조격]을 검토하온즉, ‘남의 죄를 고하는 자는 반드시 연월을 뚜렷하게 기록하고 사실을 적시하여 서술하되, 의심스러운 일은 일컫지 말 것이며 무고하는 자는 반좌죄(反坐罪)로 벌한다. 본관의 관사를 고발할 때는 곧바로 상사에 나아가서 고소하기를 허락하되, 그 외에는 모두 단계를 뛰어넘어 고소할 수 없다. 만일 억울하고 그릇됨이 있어 여러 번 고하여도 심리하지 않거나 판결이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면 역시 상사에 나아가서 고소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세종실록] 1431년 7월 4일자 기사)

[지정조격]은 앞서 설명했듯 원나라의 법전이다. 세종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터다. “옳거니, 예전에도 관리를 걸어 고소하는 법이 있었도다. 그러면 그렇지, 어찌 윗사람을 능멸함을 금하는 법령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억울함도 호소하지 못하겠느냐. 지난번에 허조가 말한 것은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지나치게 곧게 하는 것이어서 시행하기 적당하지 않다.”

‘반대파’ 설득해 결국 대의 이뤄내

세종은 그러나 곧바로 법을 개정하라는 하교를 내리지 않고, 일단 상정소의 심의 결과를 기다리는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상정소는 조선 때 국가의 법률이나 정책,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다. 사안에 따라 다양한 상정소를 설치하고 전문학자와 관료를 상정관으로 임명해 논의하도록 했다. 세종의 최종 결론은 1433년 10월에 나온다.

“백성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을 수리하지 않는다면 억울함을 풀 수 없어 정치하는 도리에 방해될 것이다. 또 고소를 통해 오판의 죄를 처단한다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무리하게 침범하는 악영향을 줄 수 있어 온당하지 않다. 지금부터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을 수리해 바른 대로 판결해 줄 뿐, 관리의 오판을 처벌하는 일은 없게 해 존비의 분수를 보전하게 하라.”([세종실록] 1433년 10월 24일자 기사]

임금의 이러한 전지에 도제조 황희·맹사성 등은 “교지(敎旨)의 취지가 진실로 타당하기 때문에 한 마디도 보탤 수 없다”고 화답한다.

전날까지도 반대를 거듭하던 허조도 결국 승복하고 만다. “신이 원한 바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을 수리하지 말아서 상하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 아뢰어도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 교지를 반포하신다면 중용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을 강요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토론으로 이끌어 결국 대의를 수용하게 만드는 세종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끝까지 가부장적 신분질서를 고집했던 허조는 꼬장꼬장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실록]을 보면 “허조만 홀로 아뢰기를(獨許稠曰)”이라는 대목이 유독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모두들 찬성하는 사안에 대해 혼자 반대하거나, 소수 의견을 내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가 태종 때는 좌천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세종 역시 자신의 개혁 의지를 가로막고 노상 “아니되옵니다”를 외치는 허조를 “고집불통”이라고 비난하고는 했다. 하지만 세종은 어쩌면 반개혁 수구세력이라 볼 수 있는 그런 신하를 결코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예조·이조 판서에 우의정, 좌의정으로 까지 중용했다. 허조가 자기 관리에 철저한 청백리의 표상이었던 까닭도 있지만, 그처럼 “노!”라고 외치는 신하도 임금 곁에 필요함을 세종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조도 세종의 그런 뜻을 모를 리 없었다. 허조는 죽기 전 유언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 나이 일흔이 넘었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며, 성상의 은총을 만나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위대한 군주의 발목을 움켜쥔 신하들


▎집현전 응교 권채 사건은 고소 사건이 아니라 인지 사건이므로 부민고소금지법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세종의 해석이 실린 [세종실록] 1427년 8월 27일자 기사.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허조는 그렇게 할 말 다하면서 여한 없이 죽었을지 모르나, 이 나라 이 땅에는 여한을 많이 남겨 놨다. 조선의, 나아가 한반도의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위대한 군주의 발목을 움켜쥠으로써 큰 뜻을 펼치는 것을 방해한 것이다.

물론 허조만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같은 신하들이 없었더라면 역사상 몇 명 안 되는 성군 중 하나인 세종이 훨씬 많은 일을 했을 테고 조선, 아니 한반도는 훨씬 일찍 중흥의 꽃을 피웠을 것이다. 그것 또한 이 나라의 운명이요, 이 나라 백성의 팔자일 것이다.

임금과 신하의 입장은 바뀌었지만,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후주 유선과 승상 제갈공명의 관계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231년 2월 제갈량은 다시 한 번 기산으로 진출해 농서지방을 노렸다. 이른바 4차 북벌이다. 위나라와 전투가 벌어져 노성에서 제갈량이 사마의를 대파했고, 기산에서는 촉의 왕평이 위의 장합을 물리쳤다. 촉군의 기세는 중원 정벌이 눈앞에 있는 듯 보였으나, 갑작스러운 유선의 부름을 받고 제갈량은 성도로 돌아가야 했다.

후주의 소환을 받고 공명은 하늘을 우러러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제 겨우 전황이 호전되어 장안으로 향할 날이 다가오는데 이런 변고가 생기다니…. 이것이 하늘의 뜻인가. 칙명을 따르지 않으면 간사한 무리들이 나를 더욱 무고할 테고, 지금 철수하면 다시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촉의 숙명이 여기까지인 것인가.”

제갈량의 추측대로 황제의 소환은 보급 책임자인 이엄의 거짓 보고 때문이었다. 보급에 실패하자 책임을 제갈량에게 떠넘기려고 제갈량이 반역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이를 믿은 유선이 공명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면서 막상 제갈량이 돌아오자 “군량이 충분한데 어째서 돌아왔느냐”고 놀라는 척했다.

상황을 수습한 제갈량은 234년 마지막 5차 북벌에 나서지만, 오장원에 진 별과 함께 생을 마쳐야 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지난해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307호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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