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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12)] 중세 소빙기가 가져온 마녀사냥 

‘하늘에서 내린 벌’… 충격에 빠진 유럽, 마녀를 만들다 

유럽에서 농업 생산력 떨어져 민란 조짐, 책임 지울 대상 찾다 마녀사냥으로
소빙기 조선은 ‘열녀 만들기’에 열 올려, “사대부 남성의 욕망이 만든 허상”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북반구 전역에서 ‘소빙기’가 기승을 부렸고, 그 여파는 유럽에서 마녀사냥이라는 전무후무한 야만적 행위로 이어졌다. / 사진:위키백과 캡처
"험악한 날씨 때문에 계절이 변해서 붉은 장미의 봉우리가 터지면서 서리가 내리는가 하면, 긴 겨울 살얼음 위로 비웃기나 하듯이 향기로운 여름 들꽃이 피면서 봄, 여름, 오곡의 가을, 엄동설한의 특징들이 마구 바뀌고 있다니까. 과일이나 채소로는 계절을 알 수 없게 됐어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한여름밤의 꿈]에서 요정들의 왕비인 티타니아는 이렇게 말한다.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전문으로 하는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에서 최근 내놓은 해석에 따르면, 티타니아의 이 발언은 당시의 기후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시기는 정말 기후변화가 큰 문제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북반구 전역에서 ‘소빙기’가 기승을 부렸고, 유럽은 막대한 피해를 봤다. 그리고 그 여파는 마녀사냥이라는 전무후무한 야만적 행위로 이어졌다.

약 지어 팔던 노파나 부유한 과부를 타깃으로


▎2000년 개봉 영화 〈잔 다르크〉에서 마녀재판을 받는 잔 다르크의 모습. 마녀재판에 의한 화형은 중세뿐만 아니라 르네상스를 지나 근대로 접어들기 직전에도 유럽 사회에서 성행했다. / 사진:영화 [잔 다르크] 캡처
1562년 8월 독일의 작은 도시 비젠슈터이크에서는 종교재판이 진행됐다. 이유는 얼마 전 일어난 억수 같은 장대비와 우박 때문. 한낮인데도 하늘은 캄캄했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와 농토를 초토화시킨 굵은 우박, 그리고 쓰러진 말과 소들을 본 사람들은 필시 하늘이 내린 재앙이라고 여기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우기 위해 몇 명의 여자들이 체포돼 루터교 소속 목사이자 재판관인 울리히 폰헬펜슈타인 앞으로 끌려왔다. 참혹한 고문이 이어졌고 6명은 끝까지 마녀가 아니라고 항변하다가 처형됐다. 나머지는 마녀 혐의를 받아들이고 자비를 청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회개’를 증명하기 위해 이웃 도시인 에슬링겐에서도 여자들이 마녀 모임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당시 마녀재판은 인정할 때까지 고문했기 때문에, 부인하고 죽는 것보다야 차라리 빨리 인정하면 고통이라도 덜 수 있었다. 헬펜슈타인 목사는 가을까지 41명의 여성을 추가로 체포해 처형했고 겨울에는 20명을 추가로 화형대로 보냈다.

마녀사냥과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마녀재판으로 화형 된 잔 다르크의 이미지 때문인지 가톨릭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중세 시대에 기승을 부렸다고 알려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마녀사냥이 활발했던 것은 중세가 아니라 르네상스를 지나 근대로 접어들기 직전이다. 왜 그랬을까? 마녀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중대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기후변화였다.

영국과 노르웨이도 포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따뜻했던 중세 온난기가 끝난 건 1300년대 후반~1400년경. 이때부터 북반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평균 기온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전통 농업 사회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기후다. 날씨의 변화는 농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데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씨는 어디까지나 신의 영역이었다. 기후가 불순해졌을 때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린 벌’이 누구 때문인지 고민했다. 기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기상이변으로 인한 자연재해로 유럽의 농업은 엉망이 됐다.

이때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작은 농토에 삶을 걸어야 했던 소작인들이었다. 이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자 권력자들은 당황했고, 소작인들의 불만이 대대적인 반란으로 이어지기 전에 서둘러 손을 써야 했다. 결국 사람들과 교류가 적고 외딴곳에 살면서 민간요법으로 사람들에게 약을 지어 팔던 노파들이 집중 타깃이 됐고, 나중에는 부유한 과부들로 이어졌다. 마녀의 재산은 모두 몰수했기 때문에 부의 사회적 재분배라는 기능도 있었다. 남편이 없는 돈 많은 여성은 마녀사냥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처음에는 교회도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진 않았다. 하지만 1484년 교황 이노켄티우스 8세는 마녀가 날씨를 조종할 수도 있다며 마녀를 색출하고 근절하는 방법을 담은 <말레우스 말레피카룸(마녀의 망치)]을 편찬했다. 이 편찬 사업에는 독일 쾰른 대학의 요하네스 슈프렝거 학장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이자 오스트리아 티롤 지역 종교재판관인 하인리히 크레머가 참여했다. 마녀들의 특성과 심문 방식, 처벌 등에 대해 담은 이 책은 1600년까지 28쇄나 찍을 정도로 당대 유럽 사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날씨를 변화시켰다는 죄목으로 마녀들을 처형하는 마녀재판은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확산했다.

온도 1℃ 낮아진 17세기, 마녀사냥의 절정


▎1484년 교황 이노켄티우스 8세는 마녀가 날씨를 조종할 수도 있다며 마녀를 색출하고 근절하는 방법을 담은 [말레우스 말레피카룸(마녀의 망치)]을 편찬했다. / 사진:나무위키 캡처
마녀사냥이 정점에 달한 것은 1560~1650년대까지 약 100년 동안이다. 소빙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17세기 소빙기 당시 지구의 평균 기온이 약 1℃ 정도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작 1℃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국제적으로 막으려고 애쓰는 지구온난화의 경우 산업혁명 전보다 약 1℃ 정도가 올라간 결과라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소빙기의 상황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네덜란드나 영국의 화가들은 얼어붙은 템즈강이나 운하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들의 풍경을 그림의 소재로 삼곤 했다. 그만큼 추웠다는 이야기다. 그럴수록 마녀사냥은 더 확산했다. 농업 생산량이 줄어들면 결국 식량 부족으로 인해 영양 결핍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면역 기능의 저하로 전염병 창궐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사회적 동요는 커졌고 희생양 찾기는 더 규모가 커졌다.

당초 독일과 스위스 등지에서 시작된 마녀사냥은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남유럽은 물론 러시아 같은 동유럽 깊숙한 지역까지 파고들었다. 그래도 마녀사냥의 중심은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 중부 유럽이었다. 1580~1620년의 40년 동안 스위스 베른에서만 1000명가량의 여성이 마녀 혐의로 처형됐다. 프랑스 로렌과 트레브 지역에서도 1581~1595년에 2700명이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독일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메스펠브루니도 1616~1617년에 300명 넘게 화형 시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존 질서가 흔들리는 대형 사건들이 이어졌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천 년 가까이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받던 가톨릭 질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유럽 국가 대부분이 뛰어든 30년 전쟁(1618~1648)은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다. 종교적 권위를 놓고 경쟁하던 가톨릭과 개신교는 이단을 처벌한다며 서로 마녀사냥에 뛰어들었고, 정치 지도자들도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기에 이를 묵인했다.

그런데 소빙기로 곤란을 겪은 것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1600년대 닥친 강력한 소빙기의 영향으로 유례없는 기후 변화와 기근, 굶주림에 시달렸다. 소빙기가 절정에 달했던 경신대기근(1670~1671) 때는 약 100만명가량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유럽과 같은 대대적인 마녀 색출 작업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빙기를 겪던 조선은 마녀사냥 없이 어떻게 사회의 안정을 유지했을까? 그것은 성리학 질서의 강화였다.

“누가 죽었답니까?”

“이 댁 며느님이신 옹주께서 목을 매셨답디다. 역시 왕족은 뭐가 달라도 달라. 수절하기도 힘든 요즘 같은 세상에 서방님 따라서 목을 매다니. 열녀도 그런 열녀가 없어.”

“당연히 열녀문을 내리시겠지?”

MBN 주말 사극 [보쌈-운명을 훔치다]의 한 장면. 광해군 시대 세도가인 이이첨의 며느리 화인옹주가 요절한 남편을 따라 자결한 것을 두고 행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다.

소빙기에 대한 유럽의 반응이 마녀사냥이라면 조선은 열녀 만들기였다. 조선 후기 성해응이 쓴 [절부변부인전(節婦邊夫人傳)]에는 수군절도사 이유수가 병들자 그의 처 변씨가 자신의 다리를 가르고 그 피를 받아 남편에게 먹였고, 살아날 가망이 없자 스스로 독약을 마신 일이 나온다. 변씨는 자신을 살리려는 집안사람의 만류도 단호히 뿌리쳤다.

마녀 대신 열녀를 택한 조선


▎후기 조선은 흔들리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열녀 만들기에 열을 올렸다. 사진은 MBN 주말 사극 [보쌈-운명을 훔치다]의 한 장면. / 사진:MBN
실학자 안정복도 [열녀숙인조씨정문(烈女淑人趙氏呈文)]을 지어 병조좌랑을 역임한 정광운의 처 조씨의 일화를 전했는데, 그녀는 남편의 삼년상을 지킨 뒤 독약을 마셔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다시 주변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 외에도 조선 후기에 등장한 각종 ‘열녀전’에는 목을 스스로 그었다든가, 음식을 거부하고 방 안에서 굶어 죽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등장한다. 조선 후기가 열녀 만들기에 열광했던 것은 포상 때문이다. 열녀가 나온 집안은 나라에서 부역(국가나 공공 단체가 백성에게 부과하는 노역)과 세금을 면제해줬다. 소빙기로 인해 농업 생산이 어려워진 사회에서 이 같은 포상은 큰 유혹이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도 영향을 끼쳤다. 기존 질서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성리학적 정신무장을 더욱 단단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국가에서는 유교적 분위기를 고양한다며 정기적으로 이런 사업을 벌였다. 조선 전기에는 남편이 먼저 죽을 경우 재혼만 하지 않으면 열녀로 추앙했지만, 후기부터는 죽음을 통해 열녀로 인정받는 사회가 됐다.

이런 복합적 이유로 열녀 발굴에 대한 사회적 붐이 일면서 분위기가 과열돼 일부 가문에서는 단기간에 열녀가 대거 등장해 진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정약용은 이러한 풍조를 “명예를 낚아 부역을 피하게 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서 임금을 속이게 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홍식 성결대 파이데이아 학부 교수는 [조선시대 열녀전(列女傳)과 여성 유서(遺書)에 투영된 욕망의 간극과 그 의미]라는 논문에서 “사대부 남성들에 의해 정리된 열녀전은 열녀의 삶과 죽음을 전(傳)의 양식에 따라 입체적으로 그려내어 당대의 사회적 표상을 만들어내고 있다”며 “단지(斷指)와 할고(割股·허벅지 살을 베어냄) 등을 통해 남편을 지극히 간호하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몇 번이고 자결을 시도한 끝에 죽음을 성취하는 열녀상은 당대 사대부 남성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유럽과 아시아가 소빙기에 직면하는 바람에 큰 위기를 맞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당시엔 그것을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유례없는 기후 변화 속에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수든 써야 했다. 마녀사냥과 열녀 만들기는 궁지에 몰린 사회가 택한 극단적 생존책 중 하나였던 셈이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307호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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