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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이슈] 이스라엘-하마스 교전, 국제분쟁으로 확산하나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되지 않는 한 중동에는 평화 없다 

이스라엘·사우디 관계 급물살 시점에 하마스가 공격 나섰다는 점에 주목해야
‘수니파’ 하마스와 ‘시아파’ 이란·헤즈볼라 모두 이스라엘 멸망이 공동의 목표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대한 응징으로 이스라엘이 퍼부은 포탄에 파괴된 팔레스타인 도심 지역. 이번 교전을 두고 이란 배후설, 하마스 독자 행동설 등 여러 다양한 견해가 나온다. / 사진:로이터
영국은 1948년 5월 14일 밤 12시 팔레스타인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위임통치를 끝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기 직전인 5월 14일 오후 4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은 텔아비브 박물관에 은밀히 모였다. 이 자리에서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찬성 33표, 반대 13표, 기권 10표, 불참 1표로 통과한 팔레스타인 영토 분할안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건국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유엔 분할안을 거부했으나, 분할안이 유엔 총회에 상정돼 통과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기에 이집트를 중심으로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등 아랍 7개국은 1948년 5월 15일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랍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제1차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아랍인 70만명이 고향을 잃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난민이 발생했기에 이 전쟁을 아랍은 안나크바, 즉 재앙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이 귀향을 허용하지 않기에 전쟁 난민은 여전히 자기 집 열쇠를 가지고도 돌아가지 못한다.

제1차 전쟁은 ‘재앙’이지만, 제3차 전쟁은 ‘좌절’이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한 제3차 전쟁은 그 유명한 ‘6일 전쟁’이다. 아랍은 좌절했다. 오전 7시 45분 이스라엘 공군기의 공습으로 이집트 공군기는 채 떠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391대가 파괴됐다. 이스라엘의 완승으로 끝난 제3차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와 가자, 요르단의 요르단강 서안,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차지했다.

1973년 이집트의 기습 공격으로 제4차 전쟁을 치른 후,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했다. 하지만 가자는 이스라엘이 계속 점령했다. 1994년 요르단과도 평화를 이뤘지만 요르단강 서안은 돌려주지 않았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골란고원과 평화협정을 맞바꾸려 하지만 시리아는 조건 없는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팔레스타인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토는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빼앗은 가자지구와 요르단으로부터 빼앗은 요르단강 서안지구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팔레스타인 주민은 모두 535만명이다. 서안에 319만명, 가자에 217만명이 산다. 서안의 면적은 가자보다 15배 이상 크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1964년 제1차 아랍 정상회담에서 결성됐으나 이집트가 후견인 역할을 하면서 팔레스타인 독립운동가들의 자율성은 현저히 떨어졌다. 그러나 1967년 6일 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PLO는 아랍 형제들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 반경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비로소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이 자신의 손으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PLO의 ‘무능력’ 지적하며 등장한 하마스


▎이란의 하마스 배후설이 제기된 이유는 이번 전쟁이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가 화해의 길에 접어든 가운데 발생했기 때문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 사진:로이터
사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문제가 꼬인 이유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을 고향으로 여기며 내 나라로 만드는 민족주의보다 팔레스타인을 대시리아의 부분으로 보는 아랍민족주의 시각이 더 강했다. 일례로 1919년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한 팔레스타인 대표는 팔레스타인을 시리아의 일부라고 결의했다. 1937년 영국 왕립 위원회에서 아랍 지도자 아우니 압둘하디는 팔레스타인은 유대 시온주의자들이 만든 말일 뿐 팔레스타인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고, 시리아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1947년 5월 유엔 총회 성명서에서 아랍위원회 대표는 팔레스타인이 시리아의 일부이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독립적인 정치체제를 이룰 정도로 독립적이지는 못하다고 주장했다. PLO 초대 의장 아흐마드 슈카이리는 팔레스타인을 시리아 남부지방으로 보는 것이 통례라고 말했다.

PLO는 스스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으나 앞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난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요르단에서는 PLO를 왕정 전복 세력으로 낙인찍어 축출했으며, 레바논을 비롯해 그 어떤 아랍 형제국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1976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PLO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납치, 살해해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테러와 고립, 외면의 악순환이 계속됐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1987년 이스라엘 정부를 향해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 제1차 민중 봉기(인티파다)가 시작된 것이다. 해외를 떠돌며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PLO를 향한 강경파의 원성이 커졌다.

이때 하마스가 등장한다. 이슬람을 기치로 내건 저항운동 단체 하마스는 PLO의 무능력을 지적하며 등장했다. 1928년 이슬람의 영광을 되찾겠다며 이집트 수에즈 운하 인근 이스마일리야에서 20대 젊은이 7명이 시작한 이슬람주의 운동조직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로 시작한 하마스는 세속적인 PLO와 달리 이슬람을 강조하며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팔레스타인 주민의 거친 저항 속에서 이스라엘과 PLO는 1993년 서로 존재를 인정하며 오슬로에서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공존이라는 역사적 화해의 물꼬를 텄다. 이를 높게 사 1994년 노벨상 위원회는 전쟁과 증오를 평화와 협력으로 바꾼 PLO 의장 아라파트, 이스라엘 외교장관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에게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여했다. 그러나 1995년 11월 4일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면서 결국 평화공존은 물거품이 됐다.

하마스를 물심양면 지원해온 이란


▎이란과 하마스, 헤즈볼라는 ‘반이스라엘’이라는 점에서 일심동체다. 하지만 이란과 하마스의 관계는 이란과 헤즈볼라의 관계와는 다르다. 이란 최고 지도자 모습. / 사진:로이터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과의 평화공존을 가장 강력히 거부하는 정치세력은 극우·보수파다. 네타냐후 정부와 연정을 이루는 이스라엘 정당 ‘유대인의 힘’이 대표적이다.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하마스가 이스라엘과의 공존을 거부한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1988년 헌장에서 하마스의 팔레스타인 국토는 현 이스라엘을 포함한다. 즉, 현 이스라엘을 멸망시켜 팔레스타인 고유의 영토를 회복한 국가가 바로 ‘독립 이슬람 국가 팔레스타인’이다.

1928년 무슬림형제단이 중동에서 이슬람을 대의로 한 수니파 무슬림의 반서구·반세속주의 운동의 시작이라면, 이러한 운동이 최초로 성공한 곳은 시아파 무슬림이 다수를 이루는 이란이다.

1979년 이란은 이슬람 혁명으로 친미 세속 왕정을 동쪽(소련 공산주의)도 아니고 서쪽(서구 자본주의)도 아닌, 오로지 이슬람식으로 사는 공화정으로 바꿨다. 이슬람을 정치체제로 승화한 최초의 이슬람주의 혁명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 석유파동으로 서구를 두렵게 하며 1798년 나폴레옹의 알렉산드리아 침공 이래 처음으로 서구 열강에 무슬림의 힘을 보여주며 중동 이슬람 문화권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이란 혁명은 이처럼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무슬림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모범이 됐다.

수니파 이슬람주의 사상가 마우두디가 극찬한 대로 이란은 시아파 국가지만,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시아파만의 혁명이 아니라 수니파 이슬람주의자들이 꿈꾸는 그대로 이슬람 혁명이었다. 억압 왕정을 무너뜨린 이란의 이슬람 혁명 지도부는 혁명의 눈길을 팔레스타인으로 돌렸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은 아랍민족주의자와 시온주의자의 결전장에서 이슬람과 시온주의의 대결로 변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이란은 1982년 레바논의 시아파 중심지인 남부에 반이스라엘 항쟁 조직인 알라의 당, 즉 헤즈볼라를 만들어 지금까지 꾸준히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 헤즈볼라는 이란에 왕관의 보석 같은 존재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다. 국제 스포츠 경기 결승에서 이란 선수가 이스라엘 선수를 만나면 이란은 기권한다. 시온주의자가 지배하는 이스라엘을 어떤 식으로라도 상대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란이 만든 헤즈볼라의 대이스라엘관 역시 이란과 마찬가지다.

하마스는 시아파인 이란이나 헤즈볼라와 달리 수니파이나, 시온주의 이스라엘 멸망이라는 대의 앞에 종파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란은 헤즈볼라와 마찬가지로 하마스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2011년 ‘아랍의 봄’ 민중 시위가 중동 전역을 휩쓸 때 하마스와 이란은 시리아 정부 지지를 두고 불화를 겪었다. 이란은 하마스가 시리아 정부를 지지해주길 바랐으나 하마스가 거부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이후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이 쿠데타로 정권을 잃고 시리아 내전에서 이란이 지지하는 시리아 정부가 승기를 잡으면서 고립된 하마스는 이란과 화해하여 2014년 말부터는 다시 이란의 하마스 지원이 시작됐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란과 하마스, 헤즈볼라는 대이스라엘 투쟁에서 일심동체다. 그러나 이란과 하마스의 관계는 이란과 헤즈볼라의 관계와는 다르다. 하마스와 이란은 주종관계가 아니다. 미국의 표현대로 하마스 공격 배후에 이란이 있다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는 자국이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과 무관함을 강조했다.

미국, 하마스의 공격 배후로 이란 의심

미국이 이란을 배후로 생각하는 것은 평소 이란과 하마스의 관계 때문만은 아니다. 공격이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시점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란은 최고지도자까지 나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과 수교하는 것을 재고하길 바랐다. 경주에서 질 말에 돈을 걸지 말라는 표현까지 하면서 말이다. 이스라엘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수교하며 전 아랍 세계가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할 뿐 아니라 자국의 멸망을 호시탐탐 노리는 이란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대사급 외교를 재개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최대 적성국은 이란이기에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협력하여 이란을 막겠다는 뜻이다. 미국도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을 막아주길 바란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좋아할 일을 이란이 가만히 둘리 없기에 하마스의 배후로 이란이 꼽힌다. 하마스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에 내건 수교 조건이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인데, 이 경우 하마스는 아예 대화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완전히 소외될 것이다. 따라서 하마스가 양국의 관계에 금을 가게 하고자 이번 공격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란 배후설, 하마스 독자 행동설 등 여러 다양한 견해가 많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중동에는 평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고귀한 생명을 사상자 숫자로 세는 비정한 악습을 되풀이하지 않을 순 없을까? 희생자의 넋을 기린다.

- 박현도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hyondo@sogang.ac.kr

202311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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