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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화제] ‘칼을 품고 슬퍼하다’ 출간한 이상훈 작가 

“임진왜란 때 칼 빼든 사명대사의 고뇌 담았다”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자료수집만 7년… 사명의 족적 따라 국내·외 답사
사실과 창작의 경계를 춤추듯 넘나드는 역사소설


▎월간중앙은 신작 역사소설 [칼을 품고 슬퍼하다] 출간을 계기로 11월 6일 이상훈 작가와 인터뷰했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고뇌했다. 왜군에 의해 죄없는 백성이 죽어가는 현실과 살상을 금하는 불교의 불살생계(不殺生戒) 사이에서. 결국 칼을 빼든 사명대사는 이때의 심정을 포검비(抱劍悲)라고 했다. ‘칼을 품고 슬퍼하다’라는 뜻이다. 그게 책 제목이 됐다.”

이상훈(64) 작가는 최근 그가 출간한 신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방송국 PD 출신인 그가 써낸 소설은 [칼을 품고 슬퍼하다]가 벌써 다섯 번째다. 이번 소설에는 사명대사의 일대기가 담겼다. “역사적 사실을 소설의 뼈대로 삼는다. 그래야 이야기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작가의 철학처럼 자료 수집에만 7년이 걸렸다. 조선왕조실록과 사명집(四溟集), 석장비문(石藏碑文) 등을 살펴본 것은 물론 사명대사에 대한 고문헌을 해석하고자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몇 개월 체류했다. 사명대사가 머무른 국내 50여 군데의 절도 답사했다.

그는 왜 사명대사에 그토록 끌렸을까? 그는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살아 있는 부처’라고 칭송받은 인물이지만 국내에선 그리 조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재조명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번 소설은 역사소설의 대가 고(故) 최인호 선생의 작품을 전담한 ‘여백’에서 출판했다. “최인호 선생을 오래도록 존경한 저로서는 의미가 크다”고 그는 말한다. ‘신문에 연재하듯 쓴다’는 최인호 선생의 습관대로 그는 작가가 된 이래 9년 동안 쉬지 않고 소설을 써왔다.

책 제목이 인상적이다.

“‘칼을 품고 슬퍼하다’는 제가 창작한 게 아니다. 품을 포(抱), 검 검(劍), 슬플 비(悲), 즉 포검비는 사명대사의 시문 등이 수록된 [사명집]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살생을 범하면 안 되는 스님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켜야 할 선조는 의주로 달아나고 죄 없는 백성들만 무참히 살해됐다. 그런 현실에서 자신이 칼을 들 수밖에 없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사명대사의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진다.

“사명대사는 구국의 영웅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영웅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1부에는 청년 시절 임응규(사명대사의 출가 전 이름)가 믿고 따르던 형을 잃고, 부모를 잃고,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결국 속세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님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초상을 담아냈다.”

사명대사의 심정 압축한 포검비(抱劍悲)


▎사명대사의 초상화.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왜 사명대사에 주목했는가?

“우리 역사책은 사명대사를 일컬어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끈 승려라고 짧게 서술한다. 하지만 적국인 일본의 기록은 굉장히 구체적이다. 사명대사를 다룬 일본의 문헌과 자료가 굉장히 많다. 일본군의 선봉 가토 기요마사는 사명대사와 나눈 서간문을 일본 구마모토현에 있는 그의 개인 사찰 혼묘지에 보관했을 정도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과 담판 지으러 온 사명대사를 만난 뒤 ‘살아 있는 부처’라며 조선인 포로 1500여 명을 풀어줬다. 명나라의 이여송 장군은 ‘사명대사가 없었으면 전쟁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캐다 보니 사명대사가 왜 우리나라에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할까 아쉬웠다.”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를 좀 더 말해달라.

“임진왜란 후에도 일본은 조선인 포로를 잡아두고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데려올 생각을 안 했는데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선통신사도 아니고 선조의 직인도 없는 탐적사(探敵使) 신분이었다.”

적의 동태를 살핀다는 뜻 말인가?

“그렇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우리로 치면 왕이나 다름없다. 그가 조선 왕의 칙서도 안 가져온 사람을 만날 이유는 없다. 그때 후지와라 세이카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스승이 도쿠가와에게 사명대사를 만나보라고 간청한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이라는 조선 선비의 제자였다. 그런 연유로 사명대사를 만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후로 사명대사를 두 번 더 만났다. 이런 얘기가 우리 역사에는 기록돼 있지 않다.”

우리는 왜 사명대사를 온전히 평가하지 못했을까?

“숭유억불(崇儒抑佛).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했다. 그게 심해지니 스님을 백정보다도 못하게 취급했고 그들을 전부 산으로 쫓아냈다. 산에 절간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굽이진 산의 길을 훤히 꿰뚫던 사명대사의 의승군(義僧軍)이 일본군의 육지 보급로를 차단했던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해상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 사명대사가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경남 밀양에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사(表忠寺)가 있지 않은가?

“원래는 사명대사의 충훈을 추모하기 위한 사원이라고 해서 절 사(寺)가 아닌, 유교에서 제사 지내는 사당 사(祠)를 썼다. 그걸 나중에 불교계에서 절로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전후에 선조가 사명대사에게 승복을 벗으면 권율보다 더 큰 군권인 삼군통제사를 주겠다고 말한다. 이에 사명대사는 자신은 속세를 벗은 몸이라며 초연히 거절하는데 이 역시 숭유억불의 한 사례가 아니겠는가.”

역사 고증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이게 실록에 다 나와 있으면 좋은데 애당초 실록은 유림 위주로 서술돼 있지 않나. 불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몇 가지 역사적인 사실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그래서 앞서 말한 사명집을 기본으로 삼고 사명대사의 행적을 담은 허균의 <석장비문(石藏碑文)>을 참고했다.”

소설에선 허균이 사명대사를 모티브로 삼아 [홍길동전]을 쓰겠다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역사적인 팩트는 아니다. 하지만 정황상 가능성이 있다. 왜냐면 허균은 자신의 형 허봉이 죽은 뒤 사명대사를 친형처럼 모시며 항상 따라다녔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래서 사명대사가 숨진 뒤 그 긴 [석장비문]을 허균이 쓴 거다. 거기에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사명대사라고 적어두기도 했고.”

그 밖에 참고한 문헌이 있다면?

“일단 그 두 가지를 기본으로 했고 조선 백성들이 쓴 [임진록]을 참고했다. 아울러 사명대사가 들렀다는 국내의 여러 절을 둘러봤다. 사명대사가 승군을 일으킨 데가 금강산 쪽에 꽤 많이 있는데 북한이어서 가질 못했다. 대신 강원도부터 해남 대흥사, 합천 해인사 등 사명대사가 지낸 50여 군데의 절을 찾아다녔다. 또 일본에도 사명대사의 흔적이 굉장히 많아 몇 달간 체류하면서 족적을 좇았다. 거기서 사명대사가 일본 고승 닛신(日眞)에게 써준 법어(法語)도 해석했다.”

영웅도 죽어서는 흙이 된다


▎[한복 입은 남자] [제명공주] [김의 나라] 등을 집필한 이상훈 작가. 스타 PD 출신인 이 작가는 영상과 소설의 본질은 결국 스토리텔링이라고 강조했다.
‘칼을 품고 슬퍼하다’의 특징이라면 이야기를 이끄는 힘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된다는 점이다. 비결이 뭔가?

“요즘 팩션(Faction) 다큐멘터리라고 있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친 이야기인데, 제 역사소설도 마찬가지다. 소설을 쓰는 과정을 건축에 빗대 말하자면 저는 건물의 토대가 되는 4개의 기둥은 역사적인 팩트로 세운다. 이 기둥이 흔들리면 건물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소설을 쓸 때 역사적 사실을 수집하는 데 노력하는 셈이다. 일단 기둥만 제대로 세우면 빌딩을 지을지, 한옥을 지을지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가공의 인물도 상당수 등장한다. 그런데 마치 실존 인물인 것처럼 느껴지는 생동감이 있다.

“가공의 인물은 역사적인 기록이나 야사에서 차용한다. 예컨대 사명대사가 조선인 포로 1500여 명을 이끌고 일본 항구를 출발하려고 할 때다. 돌연 한복을 입은 여자가 사명대사 앞에 나타나 통곡을 한다. 자신도 조선인 남편이 있어서 가고 싶은데 여기 끌려와 사무라이의 애를 배서 갈 수가 없다고. 이런 기록을 기반으로 조선에 남은 남편은 과연 누구이고 어떻게 지냈을까, 그 여성이 만난 사무라이는 누구일까, 상상을 확장하며 새로운 인물을 창작한다. 또 실제 사건 가운데 일본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오타 주리아라는 조선인 포로 여성을 입양한 사실이 있다.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랑한 여인이다.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도 이번 소설에 녹여냈다.”

소설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대목은?

“최종화에서 사명대사가 자신을 끝까지 사랑한 여인 앞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이다. 그때 사명대사는 ‘너는 내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겠지만 나는 영원한 잠에 빠져들 것’이라고 힘없이 말한다. 사명대사는 구국의 영웅으로서 모든 걸 이뤄낸 인물이다. 또한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침묵을 지킬 만큼 초연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끝내 죽을 때는 인간으로 돌아간다. 똑같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설을 완성한 직후 소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밀양 무안면에 있는 사명대사가 태어나신 곳에 갔다. 거기서 혼자 멍하게 좀 앉아 있었다. 그때 문득 ‘사람을 많이 죽이고 땅을 차지하고 전쟁을 승리한 사람만이 영웅이 아니다. 없는 사람을 대변하고 없는 사람을 위해 평생을 희생한 사명대사가 진정한 영웅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준비 기간이 10년이었다. 그 기간 필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작가라면 누구나 글이 막히는 순간을 겪는다. 언제 마감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으면 스트레스 받아서 글이 더 안 써진다. 그런데 저는 전업작가가 아니어서 뚜렷한 마감기한은 없다. 보통 3년에 1권을 내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신문연재 소설의 대가 최인호 선생의 영향도 받았다. 그래서 저는 신문에 연재한다는 심정으로 하루에 일정한 루틴대로 글을 쓰는 편이다. 정 생각이 막힐 때도 몇 줄씩 써내는 습관이 작품을 완성하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최인호 선생은 [해신]이나 [상도] 등 역사소설로도 유명한 분이다. 그분의 작품 출간을 도맡은 ‘여백’에서 [칼을 품고 슬퍼하다]를 출판한 것은 역사소설가로서 의미가 클 것 같다.

“여백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최인호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역사소설의 맥을 잇고 싶은 작가를 찾고 있었는데 제 전작들을 다 읽어보고 이번에 함께하자고. 제 롤모델이 최인호 선생이었는데 그 뜻이 이렇게 이뤄지는구나 생각했다.”

“소설과 영상의 본질은 스토리텔링”

지금까지의 작품을 보면 국내의 역사적 인물을 미지의 세계인 타국(他國)에 등장시키는 플롯을 따르고 있다. 이런 구도를 착상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

“저는 항상 글로벌 콘텐트를 생각한다. 첫 작품인 [한복 입은 남자]도 그렇다. 소설을 시작할 때 장영실이 왜 실록에서 갑자기 사라졌을까 의문을 품었다. 1442년 세종의 가마를 잘못 설계했다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맞고 쫓겨나는 게 장영실의 마지막 기록이다. 세종은 노비 출신인 장영실을 정3품의 벼슬에 앉힐 만큼 신뢰했다. 그런 장영실이 언제 죽었으면 죽었다는 기록이 없을뿐더러 무덤조차 없다. 그래서 장영실은 역사 속에서 지워진 게 아니라 명나라의 위협이 되는 장영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세종이 빼돌린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장영실이 천만길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 피렌체로 가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승이 되는 얘기를 써냈다.”

직업으로서의 PD와 작가를 모두 경험하셨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영상과 소설 모두 중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이다. 하나의 원석을 찾았을 때 어떻게 이야기를 확장해서 풀어나갈 것이냐 고민하는 지점은 같다. 제가 방송국 PD와 영화 감독을 하다가 소설까지 쓰니까 신기하게 여기시는 분들이 있는데,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직업이란 점에서는 본질상 같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소설은 혼자 작업할 수 있지만 PD는 100여 명의 스태프를 총괄해야 하므로 보스 기질이 필요하다.”

다음 작품에선 어떤 소재를 구상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조선의 장영실, 백제의 제명공주, 신라의 마의태자, 신라 문무왕의 딸, 조선의 사명대사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번에는 근대사의 한 인물에 주목하고 있다. 자료는 작년부터 모으고 있다. 누군지는 출판되면 말씀드리겠다(웃음).”

- 글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ahn.deokkwan@joongang.co.kr / 사진 김상선 기자 kim.sangseon@joongang.co.kr

202312호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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