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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 우승 단장이 말하는 프로스포츠의 세계] 프로야구의 절대적 존재, 구단주(오너) 야구 

“구본무의 소탈, 최창원의 디테일, 정용진의 파격이 우승 잉태” 

외가에 선수단 초대한 故 구본무 회장의 무한 애정, 29년 만의 LG KS 통합 우승으로 꽃 피워
非야구인이지만 내공 갖춘 최창원 SK 부회장, SSG는 정용진 회장 덕분에 클럽하우스 혁신


▎고(故) 구본무 LG 회장의 비원은 후계자인 구광모(맨 앞) LG 회장에 이르러서야 실현됐다. 2023년 LG 트윈스 통합 우승 직후 구광모 회장은 격의 없이 선수들과 승자의 환희를 공유했다. / 사진:연합뉴스
플랫폼의 시대이지만 그 가치를 지탱하는 핵심 요인은 콘텐트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프로스포츠 콘텐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위력을 더하고 있다. 이렇게 비즈니스로서 스포츠 시장이 확장하는 배경에는 시스템이 자리한다. 프로야구 우승을 경험한 베테랑 단장의 인사이트를 빌려서 프로스포츠의 장막 뒤 세계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본다.

1997년부터 2022년까지 26년간 세 구단에서 프로야구 프런트로 근무했다. 프로야구 시즌을 기준으로 하면 LG 트윈스 5년, SK 와이번스 19년, SSG 랜더스 2년이었다. 이 기간 동안 5차례 우승(SK 네 번, SSG 한 번)을 경험했으니 ‘성공한 프로야구 프런트’라고 자평하고 싶다. 일부에서는 필자가 과거 PC통신에서 활동한 프로야구 마니아 출신이라는 점에서 ‘성공한 덕후’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맞는 말 같다.

프런트로 일하며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만나본 구단주는 총 네 분이 있었다.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 손길승 SK그룹 회장, 최창원 SK그룹 부회장 그리고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전문경영인 출신인 손길승 회장을 제외한 ‘오너 구단주’ 세 분에 대한 경험담을 떠올려본다.

LG 트윈스에서는 홍보팀 직원 시절, 담당기자들과 함께 구본무 회장을 만나봤다. 당시 LG그룹 회장이었던 구 구단주는 묵묵히 야구단을 응원해주신 것으로 기억된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무척이나 소탈한 동네 시골 아저씨 이미지였다. LG 트윈스가 일본 오키나와에서 선수단 전지훈련에 임할 때면 매년 구 구단주는 선수단 격려차 방문했다. 오키나와에서 제일 좋은 호텔을 잡고 뷔페식 만찬 회식을 열어줬다. 구 구단주가 선수단 테이블을 순회하면서 선수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이야 친근한 이미지의 오너 구단주가 낯설지 않지만, 1990년대 당시에는 대기업 오너가 격의 없이 선수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매우 특별한 현상이었다.

구본무·구본능·구본준, 야구로 대동단결한 LG 가문


▎2018년 SK 와이번스 우승을 야구장에서 함께 한 최창원(왼쪽부터) SK디스커버리 부회장,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 SK가(家)는 야구를 통해 우애를 과시했다. / 사진:SK그룹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에 구본무 구단주의 외가가 있다. 구 구단주는 시즌 들어가기 전 이곳에 LG 선수단을 초청해서 윷놀이도 하고 식사도 하는 등, 선수들에게 무척이나 가깝게 다가갔다. 심지어 외국인선수들도 이 자리에 참석했는데 이들은 이 광경을 무척 신기하게 여겼다.

구 회장의 야구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보니 LG그룹 임원들이 LG 트윈스의 홈구장인 잠실야구장을 방문하는 빈도는 여타 그룹 임직원과는 차원이 달랐다. 야구를 좋아하는 일부 임원들은 동호회를 결성하고 매달 선수단 시상을 하기도 했다. 구본무 회장의 친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전 KBO 총재), 구본준 LX그룹 회장(여자야구 후원) 삼 형제를 비롯한 오너 일가의 야구장 방문도 타 구단과 비교가 안 됐다. 이런 ‘가풍’은 구광모 LG그룹 회장까지 계승되고 있다. 구 회장은 2023년 29년 만의 LG 트윈스 한국시리즈 우승을 현장에서 직관했다.

SK 와이번스는 2000년 창단부터 2013년까지 손길승 회장이 구단주를 맡았다. 이후 2014년부터 2020년 구단 매각까지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이 구단주를 이어갔다. 손길승 구단주 시절에는 야구단의 모기업인 SK텔레콤 대표이사가 구단주대행을 겸임했다. 그래서 구단주보다는 구단주대행보고가 잦았다. 이에 반해 최창원 부회장이 구단주를 맡으면서는 구단주대행 직제가 사라지고 구단주보고로 일원화됐다.

필자는 2014년 최 부회장이 구단주에 부임하면서 야구단의 구단주 담당 팀장을 맡았다. 부임 초기 약 3년간은 매달 두 차례씩 구단주 보고를 했다. 한번 보고할 때마다 2시간의 시간이 소요됐다. 컨설팅 회사의 프레젠테이션 수준으로 치밀하게 준비해야 했다. 최 구단주는 인문학에 조예가 깊고 학구적이면서 디테일해서 구단주 보고가 있는 날이면, 그날은 진이 빠져서 기진맥진할 지경이었다. 매번 주제를 특정해서 보고를 했는데, 구단주의 질문이 야구 마니아수준이라 베테랑 야구단 프런트라 할지라도 긴장될 정도였다. 예를 들면 세계 최대 규모의 전광판을 자랑했던 ‘빅보드’(인천 랜더스필드의 메인 전광판) 운영을 기존 인력을 뛰어넘어 방송사 수준으로 격상시키라는 최 구단주 지시에 OBS 경인TV에서 야구 프로그램을 진행한 PD와 작가를 투입하기도 했다.

최 부회장은 구단주 소임을 맡았던 초기 3년의 시간 동안 야구단을 시스템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를 통해 야구단은 관계사와 공동으로 “SMART PLAY, PLAY SMART”라는 구단(팀)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했고 SK 와이번스만의 FA Policy(정책)를 수립했다. 내부 선수들을 우대해 주는 FA 정책은 이때 생겼다. 클린구단 이미지를 지키는 것도 성적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최창원 구단주 시기 팬들 사이에서 “SK 와이번스는 야구 빼고 다 잘한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은 2007년 SK가 ‘스포테인먼트’(스포츠+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한 혁신적 스포츠마케팅 개념)를 추진할 때와 비견될 정도로 야구단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직원들은 최창원 부회장의 이니셜에 빗대 “SK 와이번스가 아니라 CW 와이번스”라고 농담을 섞어 불렀다. 그만큼 최 부회장은 야구단에 진심이었다.

필자는 최창원 구단주를 모시면서 개인적으로 많이 성장했다고 자평한다. 당시에는 전무후무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참 힘들었지만 구단주 수준에 맞추다 보니 나도 모르게 디테일하게 트레이닝이 됐다. 처음 몇 차례 보고 때만 해도 가볍지 않은(?) 지적을 받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지만 구단주 보고가 끝나면 바로 회의록을 정리하고 복기하면서 어느새 ‘CW 와이번스 직원’으로 적응했다.

SK 와이번스 매각 때까지 구단주 유지한 최창원 부회장


▎정용진(가운데) SSG 랜더스 구단주는 2022년 정규리그 최종전 때 원정지인 대구를 찾아 원정 응원단석에 서는 파격을 보여줬다. 그해 SSG는 통합 우승을 달성했다. / 사진:SSG 랜더스
최창원 구단주는 2014년 1월 야구단 전 직원과 선수단 대상의 취임식 자리에서 “구단주는 바뀌지 않는다”는 일성을 남겼다. 당시에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는데 결국 이 한마디는 구단이 매각될 때까지 지켜졌다. 돌이켜보면, 최 구단주는 비선수 출신으로는 최고의 야구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2021년 1월 신세계그룹이 SK 야구단을 인수하면서 SK 와이번스 전 직원들은 SSG 랜더스 유니폼을 입게 됐다. 필자는 구단 매각 이전에 이미 야구단 단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매각과 함께 초대 신세계 야구단 단장이 됐다. 그러면서 정용진 구단주를 처음 만나게 됐다.

신세계그룹은 야구단을 인수하면서 “세상에 없던 프로야구단”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구단주부터 이전의 구단주들과는 판이했다. 정용진 구단주는 야구를 본업인 유통과 연결시키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고 청라 돔구장 건설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정 구단주만큼 야구장을 자주 찾는 구단주는 아마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언젠가 야구단에서 구단주 방문경기 승률을 계산했는데 전체 팀 승률보다 높았다.

2008년 우리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가 창단해 8구단 체제가 가까스로 유지되면서 “프로야구계의 구원투수”로 불리기도 했는데, 정용진 구단주야말로 진정한 ‘프로야구계의 구원투수’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보수적인 프로야구판에서 연예인 같은 구단주가 등장하면서 야구장이 들썩거렸고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자극하면서 유통 라이벌 구도를 부각시켰다. 정 구단주가 타 구단 오너들의 관심을 유도한 점은 단연 돋보인다. 여기에 지자체가 아닌 사기업 차원에서 야구계의 염원인 돔구장 신축에 돌입했다.

필자는 SSG 랜더스에 2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을 몸담았다. 가장 보람된 일 중 하나가 메이저리그에 견줘도 손색없는 클럽하우스를 2022년 리뉴얼한 것이다. 야구단에서는 10억원 수준의 예산을 생각했는데 정 구단주의 강한 의지로 40억원 중반의 거액을 투자했다. 야구단에서 40억원 FA 선수 영입은 흔하지만 40억원 시설 투자는 극히 드문데 그걸 해낸 것이다. 우리 선수들에게 보다 나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조금씩 클럽하우스를 리뉴얼해 나가고 있었는데 구단주 의지로 한 방에 해결된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한 세 분의 오너 구단주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구본무 구단주는 ‘소탈함’, 최창원 구단주는 ‘디테일’, 정용진 구단주는 ‘파격’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공통점은 역시 ‘야구 사랑’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국내 프로스포츠는 자생력을 갖추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가 있다. 예전에 비해 많이 개선됐지만, 야구장 사용에 대한 지자체 지원은 메이저리그와 비교하면 턱없이 적다. 중계권료, 입장 수입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스타급 선수들의 고액 연봉은 이러한 구단 수입에 비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우승하면 선수단에 들어가는 비용이 크게 늘어나다 보니 구단 재정이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된다.

스포츠판 규모 커질수록 구단주 비중 커져

SK 야구단 시절에는 매년 약 200억원의 구단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모기업인 SK텔레콤에서 지원금 형태로 받았다. 그러면서 야구단에서 거의 해마다 5년 후에는 구단 적자 폭을 대폭 줄이겠다는 청사진을 모기업에 보고했지만 구단이 매각된 마지막까지 이루지 못했다.

프로야구가 이런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에 오너 구단주의 관심은 야구단으로서는 생명줄과 같다. 그리고 오너 구단주의 관심이 높아질수록 야구단은 구단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성적 지상주의로 흘러가게 된다.

그러니 당장 눈앞의 팀 성적이 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고 야구단의 핵심 역량이 선수단에 집중될 수밖에 없게 된다. 선수 출신, 비선수 출신 가리지 않고 구단 프런트의 우수 인력이 선수단 부서에 투입되는 데 비해 이들에 대한 자기계발은 소홀한 편이다. 입사 시점을 놓고 볼 때 비슷한 역량의 인재가 대기업에 취직할 경우와 야구단에 취직할 경우 이 둘은 5년, 10년의 세월이 지날수록 역량의 격차가 커지게 된다. 대기업에 다니면 회사에서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야구단에 있으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1년이 금방 지나간다. 물론 대기업 출신 대표이사가 야구단 사장을 맡으면 대기업만큼은 못하더라도 그 비슷한 시도를 한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대표이사가 바뀌면 흐지부지되기도 한다.

여러 사정 때문에 앞으로도 야구단이 자생력을 갖추기는 요원해 보인다. 생명줄인 오너 구단주의 관심이 멀어지거나 모기업이 재정적으로 흔들리면 야구단은 나락에 빠지는 것이다. 굴지의 대기업이었던 현대그룹이 해체되면서 강팀이었던 현대 유니콘스가 2007년 시즌을 끝으로 사라진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필자는 프로야구단의 자생력 강화의 출발점은 프로야구 프런트의 내부 역량 강화라고 생각하는데 이것 역시 구단주의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대표이사의 관심만으로는 지속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 류선규 - SK 와이번스의 마지막 단장이자 SSG 랜더스의 초대 단장을 역임했다. 26년간 프로야구단(LG 트윈스·SK 와이번스·SSG 랜더스) 프런트로 근무하며 홍보·마케팅·운영·육성·전략기획 등 거의 모든 부서를 경험했다. 단장으로서 우승 1회(2022년 SSG 와이어 투 와이어 통합 우승)를 포함해 총 다섯 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202404호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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