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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의 클래식 개념에 어울리는 일본 고목영화 [천국과 지옥] 리메이크 얘기를 들으면서 주목한 키워드는 ‘고전(古典)’이란 한자어다. 서방 미디어 보도를 보면 일본 ‘고전’ 영화를 21세기 풍으로 바꾼다고 한다. 뉴스를 접하면서 1963년 영화가 고전 대열에 들어선다는 것이 놀라웠다. 고전이라고 하면 뭔가 오래되고, 과학과 무관한 근대 이전 작품으로 느껴진다. 춘원 이광수 작품이 걸작이긴 하지만, 고전으로 부르기는 어렵다. 20세기 후반까지 활약한 구로사와를 고전의 창조자로 대하는 것이 어색하다. 그러나 발 빠르게 돌아가는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태평양 전쟁 후 흑백 영화 전부가 고전에 포함되는 듯하다. 인간 본능이지만, 지금 당장 그리고 눈앞에 펼쳐질 세상에 주목한다. 어제는 어제일 뿐, 살고 살아가야 할 오늘과 내일이 핵심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동양인이 만든 61년 전 흑백 영화가 어떻게 서방에, 그것도 글로벌 IT 대명사인 애플의 리메이크 영화가 될 수 있었는지 신기할 뿐이다.여기저기 공부를 하다가 알게 됐지만, 결론은 필자의 무지였다. 구로사와 영화를 고전 영역 밖에 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스스로의 무식에 있다는 의미다. 고전이란 단어를 둘러싼 필자의 편견과 오해가 배경에 있다. 고전이란 단어 속의 한자 ‘고(古)’가 핵심이다. 오래된 것을 의미하는 한자 덕분에 ‘고전=수백 년 전 문학이나 작품’으로 대했다. 그 결과 1963년 영화도 고전 범주 밖으로 처리한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서방의 고전은 시간 흐름을 상수(常数)가 아닌 변수(變数)로 대한다. 소설 해리포터에서 보듯 최근 작품이라도 고전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다. 사전적 의미로서의 고전은 영어의 ‘클래식(Classics)’을 어원으로 한다. 클래식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번째는 인류 모두로부터 인정받은 영구불멸 가치를 가진 작품, 두번째는 고대 그리스나 라틴어에 기초한 문학·예술·철학·학문에 관한 영역이다.고전이란 한자어는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서삼경(四書三經)] 같은 오래된 책과 그 속에 담겨진 예법을 지칭하는 말이 고전이다. 세대가 전승되면서 반드시 오랜 시간이 축적돼야만 하고, 거기에 맞춰 이미 구축된 과거에 무조건 따라야만 한다는 의미가 고전이란 단어 속에 투영돼 있다. 따라서 61년 역사에 불과한 구로사와 영화는 고전 근처에도 들어갈 수 없다.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세계를 추앙하는 서방 클래식 세계관이 중국식 고전과 비슷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서방은 그리스 철학도 중시 여기지만, 인류 모두에게 인정받는 작품이라면 시간을 뛰어넘어 곧바로 수용한다. 중국에서는 일정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고 해도 고전이 될 수 없다. 그 같은 배경 하의 결론이지만, 동양의 고전은 장유유서 세계관에 따른 결과물이다. 반면 서방의 클래식은 장유유서와 무관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을 전제로 한 것이다. 동양의 세계가 ‘정(静)’, 서방의 삶이 ‘동(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해답을 고전이란 단어를 통해 재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서방은 구로사와 영화를 클래식, 즉 고전으로 대할 수 있다. 중국식 세계관에 따르면 ‘결코’ 고전이 될 수 없다.
오래된 나무일수록 가까이 다가가 느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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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정원사가 나무를 관리하는 일본고목 선진국이라고 할까? 나무를 숭배하고 가꾸며 지키는 데 주목하는 글로벌 최대 선진국으로 일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일본은 나무 대국이다. 태평양 전쟁 기간 수많은 미군기의 공습으로 나라 전체가 불에 탄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2024년 현재 어디에 가든 고목이 넘친다. 나무는 필자가 도쿄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다. 수적으로 많고 오래된 것은 물론 나무의 크기나 종류도 엄청나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수십 미터 높이 나무가 도쿄 곳곳에 들어서 있다. 나무가 잘 자랄 토양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본인들의 특별한 정성과 보존 기술도 한몫을 했다. 가령 도쿄 주변 개인주택을 보자. 좁은 정원이지만, 어디 하나 예외 없이 잘 가꿔진 나무를 갖췄다. 한국에서도 가끔씩 볼 수 있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전혀 다르다. 그냥 막 자란 나무가 아니라 사람 손이 곳곳에 드리워진 잘 가꿔진 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지를 치는 정도가 아닌, 나뭇잎과 나무의 골격도 ‘철저히’ 인공적으로 관리한다. 전문 정원사가 계절별로 나무를 관리한다. 서울 청와대 주변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비교적 오래된 소나무가 많다. 사람 손때가 묻어 있지만, 일본과 비교하면 확연히 다르다. 가지치기 정도는 하지만, 소나무 잎과 나무 골격에 대한 관리가 거의 없다. 도쿄 황궁 주변 소나무를 보면 사람 손이 나무 구석구석 배어 있다. 바늘형 소나무 잎을 예로 들면, 한국의 경우 바깥쪽 소나무 잎의 높이를 하나로 통일하는 정도의 관리에 그친다. 일본은 소나무 잎 높이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잎의 양도 70% 정도 줄인다. 따라서 일본 소나무 잎은 뭔가 듬성듬성하고 틈이 많다. 중앙청 소나무 잎은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일본의 경우 미적 감각을 높이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소나무 잎으로 갈 영양분을 가지로 보내기 위해 잎의 수를 조절한다고 한다. 사람 손이 많이 갔다고 해서 나무에 좋고, 미적 감각이 높아지진 않을 것이다. 한국의 자연관은 그대로 두면서 지켜보는 데 있다. 반면 일본의 자연관은 철저히 사람 손으로 관리하는 인공적 세계에서 출발한다. 도쿄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일본식 정원은 사람 손이 극대화된 최적 본보기다. 나무뿐만 아니라 돌, 꽃, 시냇물, 호수, 심지어 이끼류와 물속 금붕어조차도 사람 손으로 조절하고 통제한다. 잔인하게 들릴 듯하지만, 금붕어의 등 윗부분 색깔을 조절하기 위해 불로 가볍게 지지는 식의 인공 장식법도 있다.모세 나무와의 만남 이후 알게 된 새로운 세계지만, 여행에 나서면 현지 고목 방문도 잊지 않는다. 2월 초 도쿄에 들러서도 고목 탐방에 나섰다. 도쿄 최고 고목으로 통하는, 미나토구(港區) 1200년 역사의 사찰 센푸쿠지(善福寺)의 은행나무가 주인공이다. 수령 750여 년으로, 도쿄 최고 고목으로 통한다. 1926년천연 기념물로 지정된 고목으로, 14세기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선조로 추앙된 스님인 신란(親鸞)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유산이자 유물이다. 모세가 그러했듯 신란이 센푸쿠지 방문 당시 땅에 꽂았던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 고목이 됐다고 한다. 센푸쿠지 은행나무는 1945년 도쿄 공습 당시 불에 타 거의 사라질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 꾸준히 가꾸는 과정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센푸쿠지는 도쿄 한국 대사관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필자가 들른 날은 이미 추위가 풀린 화창한 봄 날씨였다. 센푸쿠지 은행나무는 그동안 수차례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20여 년 전 처음 들렀을 때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주워 책장 사이 어딘가에 보관하기도 했다. 올해는 종전과 달리 좀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는 생각에 들렀다. 아자부주반(麻布十番)역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어가자 센푸쿠지가 나타났다. 사찰 왼쪽에 하늘로 치솟은 750년 고목이 보인다.
사찰 아사쿠사에는 700년 된 ‘신의 나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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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은 선조와 후대로 연결되는 발판조선 주자학 세계관의 반영이지만, ‘다신=잡신=혹세무민’으로 결론짓는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지만, 나무나 동물에 대한 숭배를 원시적이고 무지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인간이 고목에 머리를 숙이는 것을 반드시 종교적 차원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숭배라기보단 오랜 세월을 이겨낸 자연에 대한 예의로 보면 된다. 1000년 고목에 빌면 팔자를 고치고 복을 불러일으킨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고목을 눈앞에 두면서 자신의 마음과 정결한 자세를 다짐한다. 폭포 아래 물속에서 행하는 기도와 같다. 폭포 아래 기도가 물을 숭배하는 자세라고 비난하진 않을 것이다. 목욕재계(沐浴齋戒)는 허용하지만, 나무와 동물에 대한 기도를 무시하는 이중적 자세가 이상하다. 자연은 신이 만든 최고의 창조물이다. 자연에 대한 사랑은 신에 대한 존경과 찬미로 이어질 수 있다. 일본에 가면 2세, 3세, 4세로 이어진 고목 혈통을 잇는 나무가 많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기적의 소나무(奇跡の一本松)’가 최적 본보기다. 당시 쓰나미가 밀려들면서 7만여 그루 소나무 전부 휩쓸려갔지만, 유일하게 생존했다. 그러나 이후 염분에 의해 고사하면서 유전자 복제 소나무가 탄생한다. 현재 후쿠시마 전역에는 ‘기적의 소나무’ 2세들이 자라고 있다. 일본 전역에 드리워진 수많은 고목은 신이 가진 또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 실제로 인도 힌두교는 자연과 동물을 신의 또 다른 얼굴로 보면서 존경하고 찬미한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신과의 관계도 긴밀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기념식수는 특별한 날 이뤄지는 뜻깊은 의식이다. 보통 순국열사나 역사상 사건을 기념하면서 기념비와 함께 나무를 심는다. 나무를 인공적으로 심고 옮기는 것은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 시대에서도 볼 수 있다. 이를 국가·사회적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처음 시행한 곳이 일본이다. 진자나 절 설립과 함께 나무부터 심듯 국민들의 단결과 화합을 드높일 목적으로서의 기념식수 행사가 19세기 말 이래 곳곳에서 펼쳐진다. 일본은 지금도 특별한 행사 전후 기념식수를 ‘반드시’ 행한다. 한국에서도 한때 유행했지만, 최근에는 기념비만 세우고 기념식수는 생략하는 분위기다. 고목은 신의 얼굴인 동시에 나와 우리 선조와 후대로 연결되는 발판이자 결과물이다.수백만 년 인류 역사를 통해 지금처럼 인간의 고개가 땅에 떨어진 때도 없었을 듯하다. 하루 종일 머리를 땅 아래로 처박은 채 살아가고 있다. 21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모바일이 원인이다. 밝은 보름달, 대낮의 태양, 가을의 드높은 하늘, 초봄 들판 위로 올라가는 아지랑이를 느끼고 본 적이 언제였던가? 고목을 보려면 고개를 하늘로 올려야만 한다. 키다리 나무를 만난다는 것은 눈만이 아닌, 몸과 마음도 하늘로 향한다는 의미다. 사방으로 뻗은 고목의 생명력에 빠져들수록 하늘의 신과도 가까워질 수 있다. 도쿄 전역에 넘치는 기념식수가 일본, 아니 인간 재발견의 소재나 주제가 될 수 있다. 삶의 향기를 드높일 계기로 곳곳에 뿌리를 박은 고목보다 더 아름답고도 성스러운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