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People

Home>포브스>CEO&People

삼성 前 CEO 3인, ‘이건희 경영’을 말하다 

“당신의 일, 그 업의 본질을 꿰뚫어라” 

이건희식 경영은 한국 기업사에 어떤 족적을 남겼을까. 역사의 한 챕터가 끝난 순간, 다가올 미래에 이건희 경영이 던지는 새 화두는 무엇일까. 포브스코리아가 전직 삼성 CEO 세 명을 직접 만나 물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 10월 25일 향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창업주인 선대 이병철 회장에 이어 2대 회장으로 취임했던 1987년 이래 33년간의 치열한 경영 일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멀게는 헨리 포드나 앤드루 카네기, 가까이는 스티브 잡스와 이나모리 가즈오, 마쓰시타 고노스케 등이 시대를 이끈 ‘경영가’로 불리듯, 이 회장은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경영가로 자리매김했다. 1998년 20조원 수준이었던 삼성전자 매출은 2019년 기준 154조원을 넘어섰고, 반도체와 가전, 스마트폰, 바이오산업에 이르기까지 삼성이라는 이름은 곧 글로벌 일류 브랜드와 동의어가 된 지 오래다. 평생을 변화와 혁신에 천착했던 이 회장의 노력과 실천이 재계는 물론이고, 오늘날 대한민국 전반의 DNA를 몇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촉매재가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손욱 전 농심 회장, 원대연 전 제일모직 사장·한국패션협회장, 허택학 전 호텔신라·삼성에버랜드 사장이 이건희식 경영을 회고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이 회장의 최측근에서 ‘신경영’의 역사를 함께 써 내려간 주인공들이다.

신경영, 세계 기업사에 유례없는 혁명


▎원대연 전 사장은 “이건희 회장의 디자인 혁명이 오늘날 한국 산업과 사회의 디자인 발전에 초석이 됐다”고 평가했다.
“장장 68일 동안 그룹 주요 임원을 모두 불러다 일절 회사 일을 시키지 않았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이 지금도 회자되지만, 그런 말을 뱉어내기까지 켜켜이 쌓였던 회장의 고뇌를 아는 사람이 당시에는 거의 없었다. 신경영 자체가 세계 기업사에 유례가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신경영 선언 당시를 회상한 손 전 회장의 말이다. 1975년 삼성전자에 공채로 입사한 손 전 회장은 삼성SDI 사장, 삼성종합기술원장, 삼성인력개발원장을 역임한 정통 ‘삼성맨’이다. 특히 신경영 당시에는 비서실에서 근무하며 이 회장의 수행팀장을 맡았다.

원 전 사장은 1973년 삼성물산 봉제수출과에 입사해 제일모직 사장과 한국패션협회 회장에 이르기까지 45년간 섬유·패션의 외길을 걸어왔다. 1993년 당시에는 독일에서 구주본부장으로 근무하며 신경영 현장을 목도했다. 원 전 회장은 “신경영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대 혁명이었다”며 “월드베스트를 향한 이 회장의 집념이 오늘날의 삼성을 만들어낸 결정적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허 전 사장은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팜랜드(Farm Land) 수준이었던 ‘자연농원’을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테마파크인 에버랜드로 탈바꿈시킨 주인공이다. 허 전 사장은 “이 회장의 제2창업선언 이후 본격적인 변화와 혁신의 틀이 에버랜드에서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허 전 사장과 손 전 회장, 원 전 회장 모두 “자연농원에서 에버랜드로 변신한 것이 바로 이건희식 신경영의 테스트베드였다”고 입을 모았다.

손욱: 신경영 선언이 1993년, 에버랜드 사업이 1988년이니, 사실 이 회장이 말한 혁신의 출발이 에버랜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전 테스트 격이 아니었을까요?

허태학: 에버랜드 개발 책임을 맡고 자연농원을 처음 찾았을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농원이라는 이름과 달리 거칠고 황량하다는 인상이 강했어요. 이 회장이 취임한 후 제2창업을 선언했지만, 한쪽에선 여전히 구태의연한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의 현장이었죠. 대대적인 변화와 혁신 없이는 어렵겠다고 이 회장에게 솔직히 보고했습니다. 이 회장은 아랫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끝까지 믿고 일임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과감한 지원을 아까지 않았죠. 당시도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하셨어요. “길을 넓히고 놀이기구를 들여 놓으라”며 든든한 뒷배가 돼주셨습니다. “과감하게 해봐라. 도대체 그게 뭐가 어렵나? 아무도 내게 맞장구쳐주는 사람이 없어 지금까지 이 모양 이 꼴이다”는 말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리더의 인정과 용기, 격려가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에버랜드가 있었을까요? 에버랜드 입구 2차선을 4차선으로 넓히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회장을 찾아가 “에버랜드를 최소한 아시아 최고의 테마파크로 만들려면 길부터 넓혀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맘대로 해보라”고 하셨던 게 1988년 무렵입니다. 새 길이 시원하게 뚫리고 주변 경관이 바뀌자 이 회장은 가는 데마다 “에버랜드가 너무 달라지고 좋아졌다”며 직접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손욱: 1987년 12월에 2대 회장에 취임하고 이듬해 2월 제2창업을 선언했어요. 그때 내세운 경영이념이 ‘자율경영·기술중시·인간존중’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미 그때 이 회장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것 같아요. 실제로 1970년대 말까지는 삼성이 단연 재계 톱이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오면서 현대가 조선과 자동차를 무기로 떠올랐고, 대우가 세계경영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어요. 대학에서 입사선호도를 조사하면 현대와 대우가 1, 2등이고 삼성이 3등이었습니다. 그룹 매출 규모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죠. 그 즈음에 이 회장이 취임한 겁니다. 선대 회장 시절만 해도 이 회장은 홍진기 회장과 이병철 회장 옆에 앉아서도 웬만해선 입을 열지 않았어요. 그러나 내심 ‘삼성이 대한민국 최고인데 점점 내려간다. 이 문화와 체질로는 안된다. 바꿔야 한다’고 고심했던 것 같아요. 선대 회장은 ‘사업보국과 인재제일, 합리추구’를 내세웠습니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틀을 만든 거죠. 하지만 이 회장은 ‘이것만으로는 변화의 시대에 적응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해진 목표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선대 회장 시절 삼성의 힘이었지만, 눈앞에 다가온 창의의 시대와는 거리가 먼 게 사실이었죠.

허태학: 이 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그룹 내 사장단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시작이 자연농원이라는 틀을 싹 바꿔 에버랜드로 변신한 것이었죠. 그룹 입장에서도 큰 사업이었습니다. 일본 디즈니랜드를 넘어서자는 목표였으니까요. 이 회장이 취임 일성으로 내뱉은 변화와 자율경영은 그룹 내 전문경영인들이 능동적으로 변화를 선도하고 도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됐어요. 그러나 어떤 CEO도 이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능동적으로 나서지 못했죠.


▎허태학 전 사장은 “하루아침에 ‘질경영’으로 바꾸라는 말을 듣고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노라“고 회고했다.
원대연: 창업 후 50년간 몸에 밴 체질이 하루아침에 바뀌었겠습니까. 당시엔 사장이 1년에 한 번씩 바뀌는 경우가 태반이었어요. 이 회장은 장기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변화를 주도했죠. 삼성이 커가는 데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된 배경입니다. 정말 필요할 때 한 말씀 하시지, 일일이 나서서 간섭하고 따지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그전까지의 관행을 생각하면 대단한 변화였죠.

손욱: 삼성의 중요한 변화와 혁신은 디자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디자인경영은 원 전 회장의 몫이 아니었습니까?

원대연: 이 회장은 이미 1990년대 초부터 “21세기의 핵심 경쟁력이 디자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공유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1996년 들어 ‘디자인 혁명의 해’를 선포했는데, 이 회장이 한마디 하면 학계와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곤 했죠. 대한민국 전체가 ‘디자인, 디자인’ 하기 시작한 게 이 회장의 철학 덕분입니다. 이후 국회에서 디자인진흥법이 제정되고 디자인진흥원도 세웠어요. 이 회장이 ‘양’이 아닌 ‘질’경영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요즘 초일류상품인 휴대폰(스마트폰)도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손욱: 질경영을 말씀하시니 프랑크프루트 선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당시 원 전 회장이 독일에 계실 때 아닙니까?

원대연: 그야말로 결정적인 장면이었죠. 그때 손 전 회장이 비서실에서 근무했고, 저는 구주본부장으로 현장에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상상할 수 없는 혁명 중의 혁명이 바로 신경영입니다.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자마자 소니 녹음기를 앞에 놓고 이야기를 쏟아냈어요. “그동안 내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밑에까지 전파가 안 되더라”며 “무조건 내 말을 녹음해서 각 사업장 말단까지 들려줘라”고 지시했죠. 유럽에 있던 모든 주재원을 모아놓고 당시 천착했던 복합화에 대해 강의했어요. 본격적인 신경영 선언 직전이었는데, 강의를 마치고 기분이 좋아졌던 이 회장이 대노한 사건이 바로 뒤이어 터졌습니다.

허태학: 그 유명한 세탁기 사건이었죠.

손욱: 사내 방송 뉴스였습니다. 일종의 불량품 현장을 고발하는 르포였죠. 비서진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 회장과 함께 시청했는데, 불량 세탁기를 드라이버도 아닌 작업용 칼로 후비고 갈아내는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회장 취임 후 그런대로 변화를 이뤄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처참한 현장 모습을 보니 천불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결정적 계기였죠.

허태학: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이대로는 세계 초일류가 영원히 불가능하다”며 분노하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양경영이 최고의 가치였어요. 매출과 이익이 절대 기준이었죠. 은행 차입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절이었고, 실적을 위한 분식회계도 만연했습니다. 이걸 하루아침에 다 버리고 질경영으로 가라 하니 사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손욱 전 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단순한 경영가가 아닌 철학가와 사상가의 반열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대연: 세탁기 사건 하루 이틀 후에 주요 임원진을 전부 독일로 불러 모았어요. 거기서 그 유명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이 나왔죠. 그야말로 경천동지한 경험이었습니다.

허태학: 워낙 유명한 말씀이라 지금이야 평범하게 들리지만, 당시 현장에선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저 어른이 얼마나 고심한 끝에 저런 임팩트 있는 말을 던졌을까’ 모두가 아연실색했었죠. 가슴속에 얼마나 큰 응어리가 쌓이고 쌓였으면 저런 표현을 했을까를 느끼며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대연: 그룹 내 사장단은 물론이고 임원 수백 명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였으니, 호텔과 비행기표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3주간 교대로 임원들을 앉혀놓고 설파에 나섰죠. 평소 말씀도 없고, 말투도 어눌한 분이 폭포수 같은 말들을 격정적으로 쏟아내는 모습을 보며 ‘이분이 해탈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뱀이 허물을 벗었다고 할까요. 3주가 지나고 공항에서 배웅할 때 “너무 무리하시면 건강을 해친다”고 말씀드렸더니 “내가 하는 이야기의 반도 못 알아듣는데 어떻게 편하게 잠을 자겠느냐”며 한숨을 쉬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3주간 쏟아낸 이 회장의 말들이 모두 녹음돼 그룹 전체에 공유됐습니다. 수십 년 이어온 체질을 완전히 뜯어낸 어마어마한 임팩트였습니다.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질경영이 실제로 이뤄지기 시작한 거죠.

손욱: 신경영 선언 이후 패션 부문에는 어떤 혁신이 이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원대연: 양으로 승부 보는 건 사실 쉽습니다. 매장 100개 만들고, 옷 왕창 만들면 돼요. 대신 쌓인 재고를 50%씩 세일해서 파는 순간 브랜드 가치와 이미지는 고꾸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삼성을 대표하는 골프 브랜드 ‘아스트라’ 사례가 기억납니다. 1996년 어느 날 이 회장이 삼성물산 대표와 아스트라 임원들을 모두 불러들였어요. 비상이 걸렸죠. 가보니 “디자인은 차마 말할 것도 없고, 이게 옷이냐”며 호통을 치시더군요. 한마디로 “기본이 안 됐다”는 질책이 이어졌어요. 이후 아스트라 팀에 삼성에서 제일 잘한다는 디자이너를 앉혔습니다. 영국과 제휴해 최고의 원자재를 수입했고 바느질 하나하나까지 최고를 추구했어요. 이후 10년간 매년 봄가을에 홍라희 여사까지 모시고 아스트라 품평회를 열었습니다. 사실 아스트라가 그룹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5% 수준이었어요. 하지만 질과 브랜드라는 중요성을 꿰고 있었기에 세심한 경영 지침을 내리셨던 겁니다.

손욱: 생각해보면 경영가라기보다 철학가나 사상가에 가까운 분이었어요. 그분만의 독특한 경지가 있었죠. 예를 들어 1980년대 말에 이미 “지금은 하드웨어가 100이지만 앞으로는 소프트웨어 100의 시대가 온다”고 말했습니다. 임원들은 그저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었죠. “소프트웨어 인재 1만 명을 양성하라”는 지시를 받고선, 그룹 내 사장들에게 몇 명이 필요하냐 물으니 30명이면 된다는 겁니다. 인사팀에 강제로 명령해 소프트웨어 인력을 잔뜩 채용했는데, 몇 년 뒤에 추적해보니 다들 엉뚱한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거예요. 한마디로 회장의 의도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몰랐던 거죠. 4차 산업혁명을 이미 당시부터 준비했던 겁니다.

원대연: 사상가, 철학가라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1985년 신입사원 연수에 직접 강연을 하겠다며 오신 적이 있어요. 강의를 1시간 정도 하시다가 갑자기 말을 끊고선 5분간 아무 말씀이 없으신 겁니다. 그렇게 강의가 끝나고 점심식사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철학과 상상력이었어요. 당시 삼성전자가 256메가 반도체 생산에 성공하고 1기가 개발에 나선 때였는데 “1기가 반도체 개발을 위해선 하드웨어나 기술력만으로는 안 되고 소프트웨어적인 발상, 즉 창의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셨죠. 다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돼 당황하던 차에 인사담당이 “원대연 이사가 철학과 출신”이라고 하자 “엉터리 철학이겠지”라고 답하셔서 모두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프랑크푸르트 주재원으로 있던 모 부장이 업무 실수로 본사 복귀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이 회장이 독일에 와서 주재원들과 식사를 하면서 철학 이야기를 또 나눴는데, 그 친구가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라는 말을 듣더니 “이 사람은 그대로 둬라, 철학을 아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하시는 바람에 복귀가 무산된 일화도 있습니다.

허태학: 즉흥적이고 제왕적인 모습으로 비춰질지도 모르지만, 어떤 문제든 핵심, 즉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과감한 결정과 결심을 하기 어렵습니다. 이 회장은 항상 본질에 천착하는 경영가였어요.

원대연: 회장의 결단은 곧 그룹의 운명을 좌우할 수밖에 없습니다. 머릿속에 어떤 과제가 들어서면 몇 달이 걸리더라도 본질을 파악한 후에야 손을 대는 게 이 회장 스타일입니다. 전문경영인들이야 현장 경험이 있으니 그럴 수 있지만, 놀라운 게 이분은 앉아서 생각하는 분이잖아요. 수많은 책과 종합적인 정보를 통해 정확한 답을 얻을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결국 본질에 접근하게 됩니다. 그러니 10년, 20년을 예측하면서 화두를 던졌고, 결국 그게 다 맞아떨어졌어요. 깊은 고뇌와 사상적 깊이에서 나온 겁니다.

“이 회장은 사상가이자 철학가”


▎2003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선진제품 비교 전시회를 참관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 이 회장 뒤편 왼쪽이 손욱 전 회장이다.
허태학: 지금 나오는 일화들도 어찌 보면 이 회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극히 일부일겁니다. 그와 같은 경영가를 한국 사회에서 다시 만나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몰라요. 기업과 구성원, 나아가 국가 발전을 위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파고든 사람이 바로 이 회장이었어요.

원대연: 본질을 탐구하는 게 바로 사상가죠. 그런 면에서 이 회장은 분명 사상가였습니다. ‘업의 개념’이 대표적인 예죠. 그때까지 우린 그저 매출 목표나 이야기할 뿐이었습니다. 반면 이 회장은 전 사업 부문 책임자들에게 “당신의 업의 개념을 정립하라”고 명했어요. 그제야 저도 비로소 패션업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하기 시작했죠. 섬유봉제업은 제조가 중심인 사업이라 경쟁력을 잃으면 사라지기 딱 좋은 업종이에요. 제조야 중국이든 동남아든 제작단가가 싼 곳이면 어디든 오케이입니다. 결국 중요한 건 좋은 품질과 디자인이죠. 사실 패션이 IT 못지않은 고부가가치 산업이에요. ‘선진국형 고부가가치 문화창조산업’이 결국 제가 내린 패션업의 개념이자 본질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 업의 비전이 달라지더군요. 패션이 더는 사양산업이 아니라 문화산업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자신감까지 얻게 됐습니다.

허태학: 이 회장은 R&D, 특히 우수한 인재 확보와 이들을 위한 처우 개선에도 큰 힘을 쏟았습니다. 인재 육성이라는 경영 철학이 결국 오늘의 삼성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선대 회장 때도 그랬지만, 이 회장대에 접어들면서 삼성의 인재 확보 노력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획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손욱: 유능한 인재를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흡수했죠. 특히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고 신경영을 본격화하면서는 모든 계열사마다 S급 인재를 데려오라고 지시했습니다. CEO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바로 인재 확보였어요. “어디에 어떤 인재가 있다 하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 나(이 회장)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라도 데려오라”는 말씀을 자주 했습니다. 이런 문화는 외부에서 유입된 인력뿐 아니라, 기존 내부 직원들의 인식을 바꿔놓는 데도 엄청난 역할을 했어요. 우물 안 개구리들이 비로소 세상을 직시한 계기가 됐죠.

원대연: 삼성이라는 큰 기업이 한국에 있다는 게 자랑할 일이지 부끄러워할 건 아니에요. 20년 전만 해도 대만은 강소기업 토대가 강해 훌륭한 모델이라고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삼성이나 현대, LG 같은 기업들은 일본과 미국, 유럽 브랜드가 들어오면 다 무너진다며 걱정했죠. 지금 어떻습니까. 대기업이 막강한 자본력과 기술력, 유통망으로 이를 극복하고 있어요. 대만이 삼성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아십니까? 이런 점을 어느 학자나 언론도 평가하지 않아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손욱: 일본은 마쓰시타와 이나모리를 경영의 신으로 떠받들며 숭상합니다. 한국 기업들도 여전히 GE와 도요타를 공부하죠. 그런데 GE 따라 해서 잘된 기업 있습니까? 결국 한국에 맞는 경영을 삼성이, 이 회장이 제시했는데, 이를 깊이 있게 연구할 의무가 후대에 있습니다. 그런 노력이 없어 아쉬울 뿐이에요.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지미연 객원기자

/images/sph164x220.jpg
202012호 (2020.11.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