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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한국 경제의 근간인 과학에 투자하겠다” 

776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세 차례에 걸쳐 카이스트에 기부했다. 뉴스에 회자됐지만, 양반 가문의 딸, 서울대 법대 출신, 기자, 기업인, 그리고 황혼결혼까지 한국사와 궤를 같이한 듯한 격동의 인생사 때문에 그는 더 주목받았다. 포브스 글로벌 ‘2020 아시아 자선사업 영웅 15인’에 이름을 올린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다.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776억원 상당 부동산을 카이스트에 기부하며 포브스 ‘2020 아시아 자선사업 영웅 15인’에 이름을 올렸다. 사무실 벽면에 기자 시절 재계 총수들과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 “야, 얘들아 애들(기자들) 감 좀 쥐여줘야 하지 않냐?”

“거기 안 가봤어? 촌닭이구만하하”

거침없는 말투와 동네 할머니 같은 호탕함에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기억이 저렇게 또렷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숫자, 시간, 일화를 일지에 적어놓은 듯 정확히 짚어냈다. 80대답지 않은 낭랑한 목소리로 쏟아내는 이야기를 듣자니, 젊은 시절이었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였다.


“내가 무슨 영웅이 됐다며?”

집무실에 들어가며 인사하는 와중에 툭 던진 이수영(83) 광원산업 회장의 첫 질문이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채였다. 포브스 글로벌 아시아에서 해마다 전 세계 국가 자선사업가들을 선정하는 ‘2020 아시아자선활동 영웅(Heroes of Philanthropy) 15인’에 이름을 올린 이야기였다.

이수영 회장을 만나기 위해 11월 13일 금요일에 찾은 여의도 맨하탄빌딩은 광원산업 사무실이 자리한 곳이자, 그가 올해 7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카이스트)에 기부한 676억원 상당의 그 건물이다. 이곳에서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이 운영될 예정이다. 이 회장은 지난 2012년 80억원, 2016년 10억원 상당의 미국 LA 부동산을 유증기부(유언에 의한 유산 기부)한 뒤, 올해 7월 남은 재산마저 카이스트에 전부 쾌척했다. 총기부액이 766억원으로 카이스트 개교 이래 최대 규모다. 그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부동산 거물의 전 재산 기부금액 소식뿐만은 아니다. 한국의 격동기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인생사 때문이기도 하다. 2년 전 출간한 그의 자서전 『왜 KAIST에 기부했습니까?』는 기자 출신다운 필력 덕분인지, 한국 경제의 굴곡 때문인지 고 박완서 작가의 소설 풍경과도 닮아 있다.

이 회장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연안(延安) 이씨 양반 가문에서 선친인 이원승(李元承)씨의 4남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경기여중, 경기여고 졸업 후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그가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면 아마 이야기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사법고시 낙방 후 서울신문에 입사해 서울경제신문에서 재계 총수들을 만나며 잘나가던 그는 1980년 언론 통폐합 칼바람이 몰아치던 17년 차 기자 생활을 마쳤다. 해직기자가 된 그는 산업화가 한창인 시절 목축업에 뛰어들었다. 건설 붐이 불었을 때는 모래 채취 사업으로 말 그대로 돈을 좀 만졌다. 1990년대 22차 경매까지 나온 여의도백화점 한 층을 헐값에 인수하며 그는 부동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 미국 LA의 건물 소유주가 됐다. 두 차례 암 발병으로 치료받았다. 카이스트에 기부하며 카이스트발전재단 이사장이 됐다. 2018년엔 서울대 법대 동기생이자 고검 부장검사를 지낸 김창홍 변호사와 뒤늦은 혼례를 올렸다. 초혼이었다.

굴곡진 현대 경제사의 산증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이 회장은 이렇게 돌아봤다. “운명은 변화나 의지로 변하고 결정되는 게 아니다. 주변에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운명에 따라 내 인생도 바뀌기 시작하니까.”


▎기자 시절 이수영 회장은(가운데) 전경련 모임에서 이병철(왼쪽에서 두 번째) 전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오른쪽) 등 재계 총수들과 막역하게 지냈다.
이번 기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줬다.

거창한 말이다. 합리적이고 실속 있는 게 좋다. 가치 있는 일을 통해 내가 살아 있다는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누구나 끝은 똑같은 거니까.

이번 여의도 건물(676억원) 기부로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이 들어서는 걸로 안다.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의 지원은 카이스트 싱귤래러티(Singularity) 교수 기금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이 건물에서 출연되는 재산의 일부를 카이스트 연구자들에게 10년간 성과에 대한 부담 없이 지급하는 방식이다.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었다.

왜 카이스트였나? 기부 채널도 다양할 텐데.

기부를 하게 되면 학교일 거라는 생각은 막연히 들었다. 내가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봤다. 정말 엄청난 한국 변화상을 겪었다. 해방, 한국전쟁, 산업화, 지금의 4차 산업혁명까지 겪으면서 과학기술이 국력과 직결된다는 생각을 했다. 우수한 기술은 과학의 힘에서 나온다는 걸 느꼈다. 마침 카이스트에서 서남표 총장이 각종 개혁 정책을 도입할 때였고. 우리나라에는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고 과학 인재가 필요하다는 데 크게 공감했다.

모교에서 서운해하지 않던가.

전화를 얼마나 받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모교에 기부하면 외상값을 갚는 기분 같았을지도 모른다. 모교에서 장학금을 모금해보고 남의 돈을 모아서 기부하는 것보다 내가 직접 기부하는 게 낫다는 걸 알았다. 고급 식당에서 술과 음식을 먹고 내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는데 장학금에는 인색한 게 현실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큰 회사를 운영하는 건 관계가 없다.

돼지 두 마리에서 시작해 부동산 거물이 되기까지


▎2020년 7월 카이스트에서 이수영 회장 발전기금 기부 약정식이 열렸다.
그는 자서전에 “해가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과연 후배들이 고귀한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들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게 공부한 지식을 우리 사회의 좋은 일에 썼느냐고 묻고 싶을 때가 많았다”고 적었다.

기업인으로 40년을 살았지만 이수영 회장은 경제 기자로 17년간 언론사에 몸담았다. 그 시절 재계 인사들을 많이 만났다. 당시 이병철 삼성 회장, 이양구 동양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박동규 전 재무부 장관, 홍재선 전경련 회장 등 책에서 만 봤던 현대 경제사의 거목들과 가까이할 수 있었다. 그의 언론사 생활은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당시 좀 오해가 있었다. 노조에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친재벌 기자로 분류돼서 살생부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았다. 억울했지만 뭐, 과거니까.”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퇴직금이 그때 500만원이었는데, 그마저 현찰이 아니고 어음이었다.”

펜을 잡던 기자가 돼지를 키우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

신문사 재직 중 1971년부터 주말농장을 갖고 있었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다들 농업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다. 버림받은 농촌을 살려야겠다는 사명감도 있었다. 나도 안양에 5000평가량 되는 땅을 사서 조카딸하고 집을 지었다. 마침 편집국장이 용인에 땅을 사서 돼지를 키우고 있었는데, 수컷 돼지 두 마리를 하얀색 소나타에 싣고 와서는 키워보라고 하더라. 그렇게 돼지 두 마리와 암소 세 마리로 시작했다. 광원목장(지금의 광원산업)은 그렇게 탄생했다.

수완이 남다른건가 재운이 따른 건가.

운이 좋은 편인 것 같긴 하다. 1979년 돼지파동 때도 다들 3만원도 못 받는 돼지를 5만원에 80마리를 팔았으니까. 이후 우유파동이 터졌을 때도 농림부 장관에게 말해서 아이들에게 우유 무료급식을 하자고 했다. 아이들 평균 신장을 올리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웃음)

1992년 농장이 제2경인고속도로 나들목으로 수용되면서 접었다고 들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야 한다. 1만4000평 땅 중 1만 평이 고속도로로 귀속되면서 소와 돼지를 다 팔았다. 건설 붐이 일어나는 때라 목장을 접고 모래 채취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모래 한 트럭에 6만2000원씩 받았는데 현찰 거래였다. 재미 좀 봤다.(웃음)

다음 비즈니스는 부동산이었다. 용도 변경을 하지 못하는 여의도의 빌딩 한 층을 인수하게 됐다. 올해 카이스트에 기부한 여의도백화점 건물이다. 22차 경매까지 나왔던 허름한 여의도백화점(현 맨하탄 빌딩)을 계약금 1억5000만원으로 매수했다. 조건은 2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이었다. 1988년이었다.

임대소득으로 부를 축적하다 기부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혼자라는 걸 느끼면 사람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아프거나 죽음을 목도하는 거 말이다. 1991년 신장암으로 처음 수술을 받을 때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다. 죽기 전에 내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각오는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첫 카이스트 기부가 미국 LA에 있는 부동산이었나.

부동산을 살 때 계약서에 변호사가 언매리드 우먼(unmarried woman)이라고 표시했다. 그런데 ‘상속자를 누구로 적겠냐’고 묻더라. 재산을 물려줄 곳을 찾아야 했다. 기부든 기탁이든 현금이든, 뭐든 사회적 상속자를 정한 거다. 그렇게 카이스트 US 파운데이션을 설립했다.

미국 부동산으로 눈을 돌린 이유는? 거처가 없으셨던 걸로 아는데.

2000년대 초 부동산 해외투자 족쇄가 풀리고 상한액이 300만 달러까지 상향됐다. 부동산에서 번 돈을 묻어둔 사람들에게는 미개척의 영역이었다. 1년에 네 번 정도 미국에 가서 부동산 물건만 보러 다녔다. 나는 ‘정부 기관이 입주했거나 입주할 곳을

원한다’고 말했다. 기관만큼 안정적인 세입자는 없다. 부동산은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 소개받은 물건이 LA 미 연방정부 사회보장국(Social Security Administration)이 입주해 있는 건물이었다.

매입 조건이 잘 맞았나.

18년 장기 임대계약이었고, 매월 임대료로 3만2300달러 정도를 내고 있었다. 바로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인수 작업을 했다. 11개월 정도 걸리긴 했지만. 건물주는 450만 달러를 불렀는데 내가 300만 달러를 미국 은행에 입금해 놓은 데다 신용도와 부동산 담보로 90만 달러까지 은행에서 빌릴 수 있었다. 현찰 390만 달러를 주고 일시불로 계약이 성사됐다.

카이스트 기부 후 건물은 어떻게 관리되고 있나.

18년 임대계약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오바마 집권 1기 당시 부채가 16조 달러였다. 연방정부가 긴축에 들어가면서 임대계약 연장에 실패했다. 이후 관리도 소홀해져서 우여곡절을 겪다가 지금은 정상화됐다. 인근에 대형 쇼핑센터가 들어와서 건물의 가치가 올라갔다. 카이스트가 잘 관리해서 좋은 일에 잘 활용할 거다.

카이스트와 기부금 운영 방식을 함께 논의하나.

기부를 하고 나면 기부자 목적과 다르게 쓰이는 경우도 많다.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예정이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자유롭게 휴가도 못 가면서 번 돈이다. ‘이수영과 학교육재단’의 싱귤래러티 교수 선발 심사 과정에도 직접 참여할 생각이다.

후배나 다음 세대들에게 조언한다면.

경기여고 교장 선생님이 한 말이 있다. “검은 구름 뒤에 밝은 태양이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사진 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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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호 (202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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