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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 ‘양명좌파’ 거두 이탁오의 고향 취안저우(泉州)를 가다 - “공자의 도덕률로 내 사상을 시비하지 말라” 

주자학에 도전장 내민 양명학 최대의 이단적 사상가… 모두를 포용하면서도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자유인’의 초상 

신용철 경희대 사학과 명예교수
공자를 성인이 아닌 역사적 존재로 환원시키며 유불선의 통합적 지식을 추구한 이탁오. 그의 좌절은 동아시아의 자생적 근대화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2014년 가을 이탁오 학술대회 참석 차 그의 고향 취안저우(泉州)를 방문한 신용철 교수가 탁오사상의 뿌리를 취재했다.
많이 쇠약해진 한 노인이 널빤지 위에 누운 채 베이징 퉁저우의 감옥으로 잡혀 들어왔다. 탄핵을 받은 이 노인의 죄상은, “감히 어지러운 도를 주창하여 세상을 현혹하고 백성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못된 책을 많이 썼는가?”라는 심문에 대해, 노인은 “내가 많은 책을 썼지만, 모두 성인의 뜻에 합당하여 잘못된 것은 없다”고 역설적으로 대답했다.

옥중에서 몇 차례 혼절을 거듭하던 76세의 이 노인은 다소 안정을 얻어 시를 쓰며 지내다가, 1602년 3월 15일 옥리에게 머리를 깎아달라 했다가 그의 칼을 빼앗아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그가 썼던 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죽음으로서 나의 분노를 씻어낼 것”이라고 예언한 그대로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 노인이 바로 16세기 동아시아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탁오(卓吾) 이지(李贄, 1527∼1602)다. 조정은 그를 바로 처벌하지 않고 고향에 돌려보내 죄를 다스리게 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알아차린 노인은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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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호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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